[53호]『절대민주주의』 서평회 발표문 모음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3-01 19:20
조회
1615
『절대민주주의』 출간 기념 집단서평회

절대민주주의


일시 : 2017년 7월 29일 토요일 오후 2시
장소 : 다중지성의 정원 강의실
사회자 : 박해민 (연세대 문화학협동과정)
서평자
- 손보미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 전성욱 (문학평론가)
- 이성혁 (문학평론가)
- 김상철 (나라살림연구소 연구위원)

*

'노랑' 민주주의를 향한 빛깔


손보미 /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2014년 4월 16일. 우리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하나의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TV, 컴퓨터 모니터, 전광판, 스마트폰. 곳곳에 있는 모든 화면을 통해 목격한 그 장면은 마치 실시간으로 시간이 멈춘듯한 참으로 이상한 장면이었습니다.

'전원 구출'이라는 뉴스가 오보였다는 황당한 소식. 열심히 구조활동을 펴고 있지만, 실종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당황스러운 소식. 이러한 소식들과 함께 계속해서 속보로 방영되고 있는 기이한 영상 안에는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것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잔잔해 보이는 바다에 선수인지 선미인지도 알 수 없는 배의 끄트머리가 덩그러니 솟아있고 헬기와 구명정 몇 대가 비슷한 경로로 그 주변을 계속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고장 난 비디오 플레이어의 버퍼링 영상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표현되지 않는 의문.

많은 의문이 한꺼번에 쏟아졌습니다. "왜지? 저렇게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 구조대는? 경찰은? 군대는? 국가는? 기술은? 과학은???" 밑도 끝도 없는 물음표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제껏 알고 지내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이 기이한 장면 앞에서 우리는 (평상시에 화면 앞에 앉아있을 때처럼) 구경꾼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장면은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던(혹은 우리가 당장 알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화면은 무언가를 보여주는 대신, 마주 선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되려 어떤 말을 요구하며 우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앎

침몰하는 세월호를 보며 우리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어떤 것이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체험이 우리의 기억에 새겨졌습니다. 이후 이 기억은 각자의 삶 속에서 또 사회적인 이슈들 속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불쑥불쑥 떠오르며 우리를 더 큰 앎으로 나아가도록 촉구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익히 알고 있는 것, 혹은 이미 있는 것들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질문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질문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새롭게 알기 위해 '문제 제기'부터 새롭게 해야 했습니다. 즉, 직관으로 세계를 다시 이해해야 했습니다.

직관의 방법으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세가지 규칙

[절대 민주주의]의 1부는 2, 3, 4부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될 '절대 민주주의적 대안 연결망'에 대한 이론적 준비작업을 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1부는, '권력-자본-과학'이라는 독재 권력 동맹(신성동맹)의 울타리 안에 포획된 생명을 혁명의 동력으로 편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반가운 이론들을 만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1부를 시작하며 저자는 '생명을 자본의 생산력으로 대상화하는' 신성동맹의 생명 담론에 맞서기 위해 '생명의 자기 생성'을 사유하길 독자들에게 요청합니다. (32)

생명을 '생명의 자기 생성'으로 사유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는 이론은 베르그손의 '생명의 존재론'입니다. '생명의 존재론' 자체가 곧, 생명을 '생명의 자기 생성'으로 사유한 베르그손의 이론적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베르그손에게 생명은 '약동하는 지속'입니다. (33) 그리고 여기에서 '약동'이란 스스로 한계를 넘어서는 도약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베르그손의 '지속'이란 고정불변의 연속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계를 넘어 도약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생명'은 그러한 지속을 통해서만 존재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베르그손은 하나의 생명 형태인 인간이 가진 '약동'의 능력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그 능력은 바로 '직관'입니다.

베르그손은 '직관'을 '(인간의) 각성한 의식이 특정 대상에 고정된 본능을 일반화하고, 외부화의 습관에 사로잡힌 지성을 내재화하며 이것들을 유용성의 틀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사심 없고 자기 의식적이며 일반화된 의식 (36)'이라고 설명합니다. 음… 느낌이 잘 오지 않습니다. 저자는 독자의 이러한 마음을 알아챘는지, 곧이어 질 들뢰즈의 [베르그송 주의]에 나오는 <직관의 방법으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세 가지 규칙>(37, 38)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규칙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규칙 1) 문제들 그 자체를 참과 거짓의 시험에 맡기고 거짓 문제는 비판하고, 진리와 창조를 문제의 수준에서 조화시켜라
규칙 2) 환상과 싸우고, 진정한 본성상의 차이들 또는 실재의 마디들을 재발견하라.
규칙 3) 공간보다는 시간의 견지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풀어라

창조적 문제제기

모든 문제를 새롭게 제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들뢰즈가 이야기한 저 세 가지 규칙은, 그중에서도 특히 첫 번째 규칙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이 첫 번째 규칙은 '창조적 문제제기'라는 말로도 표현되는데 이는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점은, 참과 거짓이 (문제의 답이 아니라) 문제의 수준에서 판가름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적 문제제기'는 무엇보다 '거짓된 문제제기와 투쟁하는 (직관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리더: <가대위>정부

'거짓된 문제제기와 투쟁하는 능력'은 혁명의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준 <가대위> 정부의 핵심 능력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행동할 테니 당신들은 지켜보라'라고 말하는 스펙터클 정부(321)에 맞서 <가대위> 정부는 '창조적 문제제기'를 하며 (스펙터클 정부의) '거짓된 문제제기'와 투쟁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이전의 문법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던 그 문제들을 점차 구체화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2014년 5월 16일, <세월호 사고 희생자· 실종자· 생존자 및 가족 대책위원회>라는 명의로 제출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대한 가족대책위원회 성명서]를 통해 (사건의 진상규명에 있어서) 기존의 법치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윤리 정치학적 헌법 원리를 제안하였습니다. (341)

나의 죽음, 우리의 죽음

그날의 죽음을 그저 사망자의 수가 좀 더 많았을 뿐인, 일반적인 죽음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수많은 '거짓된 문제제기'들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그날의 죽음을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제 부모의 죽음과 동일시하면서 누구나 겪기 마련인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일반화하려 했고, 누군가는 그 죽음을 교통사고에 비유함으로써 늘 벌어지는 일상적인 사고로 일반화하려 했습니다. 누군가는 그 죽음에 '가난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국민으로부터 소외시키려 했는데, 이 모든 말들은 그날의 죽음을 '나의 죽음'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느끼게 하려는 동일한 목적하에 이루어진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죽음은 절대 일반화되지도 잊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날의 죽음은 나를 움직였기에 나의 죽음이었고, 같은 의미에서 우리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죽음이었기에 우리의 새로운 앎도, 우리의 생명과 혁명도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빛깔

창조적 문제제기와 함께 우리가 새로운 앎을 향할 수 있도록 했던 빛깔은 '노랑'이었습니다. 광장을 물들인 노랑 빛깔과 함께 공통적 배움의 공간이 창조되었고 우리는 이전엔 알 수 없던 것들을 더욱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앎이 곧 삶인 한에서 배움은 곧 공통적 배움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절대 민주주의]에는 많은 낱말이 등장합니다. 치유, 회복, 자유, 진리, 지성, 사랑, 생명 그리고 민주주의. 많은 낱말이 (베르그손이 이야기한) 지속의 두 경향 위에서 자유롭게 변주됩니다. 그런데, 이 낱말 중 몇몇은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많이 오용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너무 많이 오염된 단어들은 오해만 불러일으킬 뿐이니 그냥 버리자고 제안 합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것에 낙인을 찍고, 거기에 죄의 원인을 모조리 뒤집어씌운 뒤 제거해 버리는 것은 '스펙타클 정부'의 술수였습니다. 특정한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신성시하거나 당연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허울만 남은 민주주의 국가는 (민주적) 군주제보다 더한 독재 권력에 의해 통치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절대 민주주의]에는 이러한 과오들을 넘어설 수 있는 우리의 공통적 배움의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 기억들을 기록함으로써 또 하나의 새로운 배움터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노란빛이 총총한 이 배움터에서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또한 자유와 지성 그리고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상상하고 또 그려봅니다.

[콜드플레이(Coldplay) – Yellow]

Look at the stars
별들을 봐
Look how they shine for you
널 위해 얼마나 반짝이는지 봐
And everything you do
네 모든 행동이
Yeah they were all yellow
전부 노란 빛이었어

I came along
난 따라갔지
I wrote a song for you
널 위해 노래를 만들었어
And all the things you do
네가 하는 모든 것들
And it was called yellow
노랑 이라는 노래야

I swam across
난 헤엄쳐서 건넜어
I jumped across for you
난 너에게로 뛰었어
Oh what a thing to do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Cause you were all yellow
넌 전부 노란 빛인걸

Look at the stars
별들을 봐
Look how they shine for you
널 위해 얼마나 반짝이는지 봐
And all the things that you do
그리고 네가 한 모든 것들을

*

모든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는 ‘절대적인 역량’ 탐색


전성욱 / 문학평론가


나쓰메 소세키론으로 등단했던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와 칸트를 경유함으로써 세계공화국이라는 영구평화의 정치적 구상에 이르렀다. 왕후이는 절망과 희망, 개체와 군중, 전통과 근대 사이에 소재하지만 소속되지 않는 루쉰의 역설적 사상을 읽어낸 박사논문으로 시작해, 자유주의의 허위를 꼬집는 비판적 지식으로 나아갔고, 마침내 서구적 민주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정치철학에 이르렀다. 마르크스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노동해방문학론의 열혈 이론가이자 비평가로 활동했던 조정환은, 네그리를 ‘사숙’함으로써 제국에 대항하는 다중의 잠재적 역능에 주목하는 정치철학자로 거듭났다.

조정환의 근작 『절대민주주의』를 앞에 놓고 나는 가라타니 고진과 왕후이를 생각한다. 이들의 정치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에 ‘문학’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 그것이 이들의 사상에 내재하는 어떤 남다름의 이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들의 정치적 사유는 현행의 체제에 대한 분석보다는 도래할 세계에 대한 전망에 더욱 치밀하다. 다시 말해 ‘규제적 이념’에 대한 이들의 사상적 열정이란, 가능한 것에 대한 상상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의 특질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조정환이 정치철학적 사유의 고투 속에서 도달한 ‘절대민주주의’라는 것 역시 나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개념 속에는 이 세계의 악랄함에 대한 냉철한 원인 분석과 더불어, 마땅히 도래해야할 그 잠재적 세계의 현실화에 대한 전망이 간절하다.

예술미학을 거쳐 정치철학적 주제로

조정환은 『예술인간의 탄생』(2015)의 후기에서, 정치철학적 주제에 기울어 있는 동안에도 예술미학의 문제로부터 벗어난 적은 없었다고 밝혔다. 그에게 예술미학은 정치철학과 전혀 다른 무엇이 아니다. 전문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비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예술이 삶이고 삶 그 자체가 예술인 ‘예술인간’이란, 신자유주의 통치의 대상으로서의 대중을 지양하고 어떤 제한이나 제약으로부터도 구속되지 않으려고 하는 ‘절대적 다중’과 다르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정치철학적 사유가 그 자체로 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바라는 민주주의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절대’는 ‘무한’, ‘전체’, ‘유일’과 마찬가지로, 의심의 여지가 다분한 개념이다. 저 개념들을 현실의 구체적인 대상으로 실체화하려고 할 때 얼마나 위험한 일들이 벌어지는 가를 우리는 역사의 사례들을 통해 충분히 확인한 바가 있다. 현실의 삶에서 절대적인 것은 없다. 절대나 무한은 세속 너머의 신성한 무엇으로 상상하거나 가늠하거나 예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가능하거나 있어야 하는 잠재적인 것으로 존재할 때라야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절대민주주의’는 현실화되기 어렵고 도달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이룩해야만 하는 역설적인 정치의 이상이다. 조정환에게 그것은 삶과 예술의 일치와 마찬가지로 ‘지금 시간’으로 실현돼야 할 잠재적인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강력한 정치적 요청으로서의 절대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民의 정치적 의지를 농락하는 초월적 주권의 현행 질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민주적 잠재력이다. 현실적인 정치의 구도 속에서 민은 국민으로 환원돼, 대의되지 못하는 대의제로부터 제한당하고 배반당하고 있다. 대의제는 물론이고 직접민주제마저도 내재적 주권이자 절대적 구성력으로서의 민의 잠재력을 억압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는 현실에서, 절대민주주의의 구성력과 잠재력을 발굴하고 현실화하려는 노력은 긴급하고도 절실하다. 따라서 절대민주주의는 모든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는 절대적인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인 ‘신자유주의 이후의 생명과 혁명’은 절대민주주의의 구상이 어떠한 맥락에서 이뤄졌는가를 분명하게 예시한다. 조정환의 정치철학적 사유의 밑바탕에는 세계화의 양상으로 전개됐던 신자유주의의 탈근대적 전환이 가져온 악마적 결과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베르그손의 철학을 통해 ‘가능성’ 발굴 시도

이 책의 1장에서는 절대민주주의 존재론적 토대인 ‘생명’을 위협하고 절취하는 생명권력과 생명산업에 대한 비판과 함께, ‘지성’을 넘어서는 ‘직관’과 같은 새로운 인지적 역량의 발굴을 통해 삶의 혁명을 모색하는 저자의 입론이 선명하다. 조정환은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의 핵심을 생명정치의 차원에서 파고들었던 푸코나 아감벤을 참조하는 대신, 베르그손의 철학을 통해 시간을 이완시키는 물질에 시간을 수축시키는 생명을 대립시킴으로써 새로운 시간을 여는 절대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발굴하려고 한다. 오래전부터 사빠띠스따와 같은 반세계화운동의 정치적 함의를 적극적으로 독해해왔던 저자에게, 2008년의 촛불봉기와 2010년의 아랍의 봄은 생명을 축적의 도구로 삼는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다중의 혁명적 잠재력을 확인하는 극적인 순간으로 각인됐다. 2장과 3장이 바로 탈근대적 전환으로서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양상에 대한 정치한 분석이라면, 4∼7장은 금융자본의 착취적인 세계화에 맞서는 대안세계화론의 구체적인 전망을 세계 각지 혁명의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생명 착취의 세계화에 대한 분석과 전망에 대한 사유가 우리의 역사적 현실 위에서 대단히 밀도 있게 논의되는 것이 마지막 4부의 8∼11장에 이르는 글들이다. 이처럼 이 책은 각기 다른 정치적 상황에서 시차를 두고 각각의 장소에서 발표된 글들을 수합한 것이지만, 저자의 일관된 정치철학적 사상을 매우 적절하게 편성했다.

이 책의 압권은 역시 4부의 글들이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 본인의 구체적인 실감 속에서 마음의 미세한 격동을 절제하는 가운데 쓰인 글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3·11의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폭발, 용산의 투쟁과 참사,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옥쇄파업, 세월호 참극,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이르는 역사적 재난들 속에서, 그 파국의 참상을 절대적민주주의의 잠재성을 현실화하는 역량으로 역전시키려는 저자의 사상적 분투가 너무나 절절하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문학자로 출발한 저자의 정치철학적 사상에 내재한 감수성의 독특한 질감을 감각한다.

이론적 분석만으로 전달할 수 없는 잉여의 지대를 감성적인 호소로 채워나가는 그 글쓰기는 어떤 묵직한 울림을 준다. 특히 촛불과 탄핵 정국을 다룬 마지막 11장의 글은 지금까지 그 어떤 시사평론적 분석이나 제도 정치학의 장에서 논의되지 않았던 참신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 관점이란 다름 아닌 다중의 시점이며, 이른바 ‘썰전’과 같은 자유주의적 엘리트주의의 시각으로는 미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정치적 해석의 본보기를 제시한다. 광주항쟁의 제헌적 의미를 읽어낸 『공통도시』(2010)에서 분석의 틀로 제시했던 호헌, 개헌, 제헌의 논리를 여기에서는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라는 논리로 전유해 더 밀고 나갔다. 제정하는 권력(군주제, 귀족제)을 극복하는 제헌하는 권력(민주제)의 역능, 촛불의 다중 혁명을 ‘모든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는 절대민주주의의 가능한 방향성’으로 읽어내는 것으로써 저자는 자신의 정치철학적 입론을 그렇게 마무리했다.

나는 이 책이 대학이라는 제도권의 바깥에서 이뤄진 역작이라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이 책의 저자는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대학에 자리를 잡고 제도권의 지식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크스와 네그리가 추방과 망명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바와 같이, 조정환은 투쟁과 수배, 검거와 도주 사이의 고단한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절대민주주의라는 그의 정치적 구상이 상당한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는 이유 역시 그 선택, 그러니까 그의 타협 없는 탈주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대학의 바깥에서야말로 이런 저작이 가능한 현실은 참담하다. 국문학이라는 분과 학제의 틀을 넘어 예술철학과 정치철학적 사유를 분방하게 펼치고 있는 조정환의 길이 곧 우리의 학문과 대학의 길로 펼쳐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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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존재론과 민주주의의 절대성


이성혁(문학평론가)


2016년 10월 29일, 촛불혁명의 장정이 시작된 첫 촛불봉기가 일어난 지 9개월이 지나고 있다. 알다시피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통령 탄핵과 구속 수감, 촛불혁명을 받아 안을 것을 내세운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 그와 함께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다. 2016년 하반기에서 2017년 상반기에 걸쳐 일어난 이 거대한 변화는 촛불의 힘이 밀어붙여 이루어낸 것이었다. 촛불의 힘에 의해 세워진 문재인 정부가 얼마나 촛불의 정신을 실현하고 촛불이 요구한 개혁들을 이루어낼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많은 이들이 이 정부가 개혁을 실현시켜주기를 바라면서 정부의 활동을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 거대한 촛불의 파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그 촛불의 힘이 ‘헬조선’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내는 동력으로 계속 작동하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걸어가면서 물어보는’ 국면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촛불혁명의 의미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양한 의견(과연 촛불의 봉기가 혁명이었는가를 포함하여)이 제시되겠는데, 조정환의 『절대민주주의』는 촛불혁명의 그 정치적 역사적 의미를 거의 실시간으로 제시한 책이라고 하겠다. 책 전체가 촛불혁명의 의미를 분석한 것은 아니고 마지막 장인 11장에서 분석이 행해지고 있지만, 그 분석은 분량이 70여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 논문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 막 일어난 어떤 사건에 대한 이러한 즉각적이면서도 두툼한 분석은 놀라운 일이지만, 그의 글이 현상에 대한 표피적 분석이나 도식적 분석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촛불혁명에 대해 그가 도달한 정치철학을 통해 깊이 있는 분석과 해석을 행하고 있으며, 전망과 대안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 책은 촛불혁명의 동력을 어떻게 전화, 확장시켜나갈 것인가 생각하면서 촛불혁명의 의미를 따져보아야 할 현재의 국면에서, 요긴한 하나의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정환의 그간 작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조정환의 생산력이 놀랍기만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 중 가장 먼저 발표된 것은 2006년 FTA 비준이라는 정세에서 써진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대안세계화에 대한 글들이다. 즉 저자가 10여 년 동안 ‘민주주의’의 문제와 관련한 글들을 모은 것이 이 책이라고 하겠는데, 저자의 문제의식과 비전, 사유의 방향은 2006년의 대안세계화를 제시한 글들과 2017년 촛불혁명을 다루면서 절대민주주의를 제시한 글 사이에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저자가 2017년 촛불혁명에 대해 거의 즉각적인 정치철학적인 의미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현 시대 민주주의 운동의 경향과 그 의미를 끊임없이 숙고해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저자는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표현된 민주주의 운동을 계속 주목해 왔고 그 의미를 역사적으로, 정치철학적으로 도출해왔던 것이다.

현 세계의 정치체제를 ‘제국’으로 파악하는 네그리/하트의 분석을 따르고 있는 저자로서는 세계적 시야의 확보는 필수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한국의 촛불혁명은 세계적으로 일어나왔던 저항운동과 맥을 잇고 있으며, 좀 더 한정하자면 2011년 아랍혁명에서 시작된 점거운동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 된다. 2016년 겨울, 한국에서 광화문 텐트촌이 형성된 것도 그러한 점거운동을 잇는 행위였으리라.(비록 촛불혁명에 대한 글에서 이러한 세계적 연결성이 본격적으로 분석되고 있지는 않지만, 책을 처음부터 읽은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세계적 시야에서 촛불혁명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랍혁명, 특히 이집트에서 강고한 탄압을 견디며 사수한 광장 점거는 혁명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어 미국과 유럽에서도 점거 운동이 일어났다.(아랍혁명의 의미는 주로 5장에서, 점거운동의 의미에 대해서는 6장에서 분석되고 있다) 저자는 이 운동들 모두 ‘절대민주주의적 정동’(199)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전 세계적인 ‘투쟁의 광대한 공통평면’(200)을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공통평면이 한국을 비롯한 전지구적 투쟁의 보편성을 말해주고 있는 바, 이 보편성은 투쟁들의 공통분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창조적인 생성 속에서 형성되는 공통성을 의미한다. 이것이 여타 전통 맑스주의의 생각과 다른 점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독특성은 2011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진행되는 혁명의 움직임을 ‘생명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제헌권력’(네그리)을 끊임없이 구성하는 민주주의의 동력은 생명의 절대성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베르그송의 생명 개념을 따르면서, “생명은 약동의 연속이며 그 약동이 진화의 분기하는 노선들로 나누어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일련의 창조가 연속적으로 부가되면서 생명은 성장하고 발전한다”(86)고 말한다. 다중의 제헌권력, 그리고 차이와 창조의 생산은 이 생명의 약동하는 힘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명을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생명권력, “생명을 가치회로에 삽입하여 잉여가치를 축적하고 더 큰 축적으로 통제권력을 확장하려는” 자본과 다중의 삶-“생명의 주체화된 형태”-이 충돌한다. 생명의 주체화를 가로막고 그 생명의 힘을 갈취하는 것이 자본(특히 인지자본)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생명권력이다. 다시 말하면 결국 자본과 생명권력은 삶에서 생명력을 추출하여 가치회로에 넣으면서 삶을 고사시킨다.(그래서 생명권력은 죽음의 권력이기도 하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문제에 대한 글인 9장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재난자본주의와 인지자본주의가 대립하지 않으며 죽음의 정치가 삶의 정치에 대립하는 것도 아니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자본과 생명권력에 다중이 투쟁하면서 삶-정치의 장이 형성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아마 세월호 참사에서 유가족 대책위가 ‘또 다른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권력을 쥐고 있는 정부가 생명을 유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각종 억압적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유형무형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유가족 대책위가 그토록 끈질기게 투쟁을 전개하고 정부에 맞선 또 다른 지도력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문제가 생명을 둘러싸고 전개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의식의 저변에(개체 이전에) 흐르는 생명(정동으로 표현되는)을 생리적으로 감지하고 있기에 유가족의 호소에서 진실을 느낄 수 있었다. 유가족 대책위의 투쟁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의 힘을 우리는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촛불혁명의 힘은, 그렇게 유가족 대책위가 박근혜 정권의 통치 아래 무기력의 정동에 포획되어 가던 대중에게 생명력을 다시 불어넣어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조정환의 책에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역시 그의 책을 따라 읽다보면 능히 이러한 추론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시 촛불혁명에 대한 글로 돌아가 보자. 그의 촛불혁명 분석은 독특한 면이 있다.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라는 개념(스피노자로부터 가져온 개념이라고 한다.)을 분석의 틀로 삼고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자유민주주의’ 근대 사회에서 ‘군주’가 어디 있고 ‘귀족’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저 개념을 현대 정치에 사용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생각할 수 있다.(하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느니 상층 계급을 이룬 사람들을 ‘귀족’이라느니 하는 말을 실제로 사용한다.) 그런데 조정환은 이 개념들을 비유적인 측면이 아니라 현대 대의민주주의정치의 구조를 가시화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국 헌법의 분석을 통해, 한국의 정치 체제, 제정권력이 권력의 근원을 다중에 두면서도 그 권력이 다중으로부터 분리하여 현대의 군주(대통령)와 귀족(국회의원 및 행정 사법 경제 권력층)에 접합하도록 구조화되어 있음을 논증한다. 그리하여 정작 권력의 원천인 다중-제헌권력의 주체-은 그 제정된 권력에 복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전도된 상황을 역전하기 위하여 제헌권력의 회복을 위한 헌법 개정을 다중의 단기적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촛불시민혁명대헌장’에도 명시되어 있는, 그리고 유신 이전 한국의 헌법에 적시되어 있었던 국민발안권, 국민소환권 그리고 국민투표 조항을 헌법에 삽입하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내세워 대통령을 파면 구속에까지 이르게 한 촛불혁명을 지속해가는 하나의 길일 터, 이는 촛불봉기 이후의 활동 방향에 대한 주목할 만한 구체적 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정환이 이러한 ‘거시적인’ 안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 개정 역시 절대민주주의의 구성과 확산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의 매듭일 것이다. “절대민주주의적 역량인 주권자 국민-다중의 입장에서 국가와 정치를 사유하는 것은 다양한 형태와 수단을 취하는 권력의 구성, 권력의 행사를 국민-다중 전체의 자기통치의 과정으로서 파악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된다.”(447) 그리니까 절대민주주의의 구성 과정은 열려 있는 것이다. 이 열린 과정은 매듭으로서의 제도(석화되지 않는, 진화하고 변화하는 제도)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가 제시하는 온-오프라인 ‘다중정치플랫폼’의 구성도 이 자기통치 과정의 하나의 제도라고 할 것이다. 이 역시 촛불봉기 이후에 다중이 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제안이라고 하겠다.

촛불혁명이 다중의 힘이 응집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면, 앞으로 촛불혁명의 진행에서 절대민주주의의 실천의 방향과 방법, 방식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정환이 말하듯이 절대민주주의가 “일상의 행동으로서 일상의 시간 속에서 긍정적 방식으로 기능하게 할 수” 있는 제도를 다양하게 발명하는 것이 촛불봉기의 힘을 사회 전반에 스며들게 만들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조정환의 책이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자본주의의 역사와 혁명, 그리고 반혁명을 긴밀한 관련 속에서 살펴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책에서(그리고 다른 그의 책에서도) 68혁명의 반혁명으로서의 신자유주의와 인지자본주의의 도래, 그리고 이를 통한 통치 방식과 계급구성의 변화,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분석하면서 신자유주의 이후 저항운동의 정치적 주체의 새로운 성격을 일관성 있게 도출한다. 그런데 촛불혁명에 대한 글에서는 이러한 경제-정치의 분석이 좀 미진하다는 생각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정치적 행동만이 제헌권력의 유일 양태가 아니라면서 자본과 노동의 문제가 언급되고 있기는 하다. “임금노동을 뜻하는 협의의 노동이 아닌” “삶과 동의어로 된 노동이 다중의 제헌권력의 가장 직접적인 무대이다.”(457) 이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마 후속 논문에서 좀 더 자세히 논해질 것으로 생각되긴 한다.

아무튼 여기서 촛불혁명 이후 노동의 장은 여전히 자본의 권력에 통제되고 있으며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 특히 인지노동은 여전히 고통스럽다는 것을 강조해두고 싶다. 노동의 장에서 정동은 조작되어야 할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것은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명력 자체, 삶 자체를 스스로 조작하면서 노동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일터에서의 고통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 대안은 어떻게 마련될 수 있을까. 그러나 현재 조정환도 비판하는 대안인, 정규직화와 복지의 확충이 촛불혁명을 받아 안고 있는 이들-정부와 시민단체, 노동단체-이 추구하는 바인 것 같다. 삶을 재료로 가공해야 하는 노동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노동은 생명력으로, “차이를 가로지르는 구성의 능력으로” 충만해질 수 없을 것이다. 이 역시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토론하면서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할 문제인 듯하다.

또 한 가지 말해보고 싶은 바가 있다. 대의민주제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였던 2008년 촛불붕기가 한국 사회에 내재해온 다양한 문제를 의제로 내놓았다면, 2016년 촛불혁명은 오히려 그러한 의제의 다양성이 축소된 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촛불혁명의 1차 완성이라고 말해지곤 하는 문재인 정부의 출범 직후, 네팔 노동자들이 돼지 똥을 치우다가 돼지 똥에서 나온 가스에 중독되어 죽음을 당했다.( 『한겨레 21』 6월 7일자 제1165호의 「개돼지만도 못한 죽음」 참조) 이번 촛불혁명 과정에서, 그리고 그 봉기 이후에도 가시화되지 못한 이들이 있지 않는가. 이에 대해서 논할 시간이 온 것 아닐까 한다. 촛불혁명 과정에서 보이지 않았던 이들, 말해지지 않았던 이들에 대한 조명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혁명이 더욱 근본적인 민주주의, 절대민주주의로서 진행되어가야 한다면 말이다.

*

갈등하는 절대성의 시간들
조정환의 <절대민주주의>


김상철 /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X26번째 자치구, 나라살림연구소


정리

대통령에 대한 퇴진 요구, 그리고 탄핵가결, 헌법재판소의 공방들 그리고 탄핵 인용결정, 때 이른 대통령 선거와 새로운 정부의 구성까지 2017년의 절반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경험의 시간’이었다. 대중의 요구에 따른 대통령의 망명, 이너서클에 의한 암살, 헌법 개정을 통한 임기의 종료 등 그간 겪었던 의외성을 넘어서는 경험이 있었고 이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관점 혹은 기대를 가질 만한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절대민주주의>는 그동안 자율주의를 경유해서 인지자본주의, 생명정치로 이어지는 관심사를 가진 정치철학자가 당대의 질문에 대해 답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사건들을 불러들이면서 그것들을 둘러싼 질문들을 하나씩 답하면서 결국 도달하는 결론은,

“절대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를 민주화하고, 직접민주주의를 민주화하며, 집회민주주의와 일상민주주의를 민주화하는 힘으로 기능할 것이다. 모든 사람의 절대적 구성역량과 헌법의지에 의한 모든 민주주의의 민주화, 이것이 촛불다중혁명이 가리키는 이정표다.”(458쪽)

라는 선언에 압축되어 있다. 민주주의의 정태적 정의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민주주의의 원천으로 파고드는 민주주의 운동으로서 절대민주주의는 이 책 내내 명징한 정의로 내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의 다양한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들을 짚어내며 그것들을 극복하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들의 가능태’로서 다중의 원초적 권력을 말하고 헌법 제정적인 힘에 대해 말하며 세월호의 가족들이 보여주었던 절대적 자기 주권의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앞선 그의 책이 주석처럼 제공되지 않으면 읽기가 녹녹치 않다.

그럼에도 당대의 주문을 ‘절대민주주의의 요청’으로 해석하는데 저자가 참조했던 논의를 씨줄과 날줄 삼아 살펴본다. 우선 베르그손-라투르로 이어지는 생명에 대한 논의는 과학으로 분해되지 않는 원초성으로서의 생명을 환기시킨다. 이럴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현재의 과학기술적 사고 이면에 있는 ‘어떤 합리성’을 기각할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통해서 “생명의 약동력을, 자본 권력 축적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창조 자율 혁명의 운동 속에 자리잡게”(89)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생력-력은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는 절대민주주의적 역량’에 토대가 된다. 이와 같은 생명의 원형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것은 구체적인 민주주의의 계기들을 능동적으로 재전유 하는 것이다. 4부에서 다루는 4가지 계기는 그래서, 단순히 당대 중요한 사건들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생명에 기반한 절대민주주의의 요소들을 끄집어 내기 위한 사례다. 우선 2009년 촛불의 경험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투쟁을 통해서 소위 새로운 헌법적 계기를 끄집어 낸다. 그것은 단순히 호헌으로 극복되지 않는 한계 때문이다. 저자가 보기에 2009년의 경험은 ‘새로운 헌법’에 대한 새로운 합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평가한다. 이후,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생명’ 자체를 문제시했다. 현대과학기술을 통한 ‘안전하다’는 주장은 이미 현대과학기술이 예기치 못한 결과들을 만드는데 원인이 있다. 특히 후쿠시마의 사례는 ‘어쩔 수 없는 죽음의 공포’가 일반화되는 생명정치의 흐름을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는 삶의 정치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다.

이런 살아야 한다의 생명정치는 416을 거치면서 산 자들의 ‘생명정부’로 나아간다. 2008년 촛불이 제헌적 가능성이었다면, 후쿠시마의 사고가 ‘살아야 한다’라는 생명정치의 원형을 공통감각으로 내세웠다면 416은 바로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정치가 기존의 정치를 대체할 수 있고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다. 그리고 2016년 박근혜의 퇴진요구는 법률적으로는 탄핵으로 우회했을지 모르지만 비-법적 요구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다른 정치의 전면화, 다중의 초헌법적 권력과 뒤이은 법제정적 권력의 창출이 가능하다는 구체적인 실례로서 다루어진다. 21세기의 복합적이고 압축적인 시대경험을 통해서 가파르게 다른 다중주권정치로 건너가는 저자의 논지는, 이 책이 다양한 과정에서 발표된 글들을 묶어놓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오랫동안 저자의 머리 속에 ‘절대민주주의’라는 정치철학의 조감도가 그려져 있었고, 그것이 현실 사회의 주요한 사건들을 만나면서 구체적인 논증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일관성을 엿볼 수 있다(사실 5장의 아랍혁명과 제7장의 동아시아 사례는 전체 논지에서 어떤 정합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호하다. 특히 저자가 말하는 공통감각으로서의 시대경험에 있어 두 가지의 사례는 직접적으로 유효한 경험의 재료가 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질문

이처럼 일관된 문제의식으로 저자가 관심을 두고 있는 사례들을 논증해가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국면이 보이지만 다른 한편에선 추상에서 구체로의 국면이 눈에 띈다. 전자는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는 이해가 되지만 다소 후자의 측면에선 ‘그렇게 볼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들이 있다. 뒤의 부분들에 주목하여 몇 가지 질문을 뽑는다. 우선 저자는 ‘생명활동에 대한 착취와 수탈은 소유권 주장을 통해서 관철되고 이는 더 많은 정치적 강제력을 수반한다’(57)고 말한다. 또한 ‘생명권이나 신체권과 같은 권리주장의 논리는 자본주의 체계가 만들어놓은 교환가치체계를 답습하는 것으로 자연의 권리은 대안일 수 없다’(60~62)고 제안한다. 즉 자본주의의 교환가치체계는 정치적 강제력을 통해서 발휘된다. 그리고 이런 흐름이 발현되는 세계화 등이 현상은 ‘사회적 인류’를 실질적으로 구축하는 것을 통해서 극복해야 하지 “다시 국가에 의지하고, 그것을 핵심수단을 삼으려는 시도들은 보수적이고 패배주의적인 노력이다.”(146) 정말 그런가. 하지만 여전히 현재의 정치질서는 국가가 만들어낸다. 국가를 넘어서는 공통체의 요구를 만들어내는 것이 원칙적인 해답일 수 있겠으나 그와 같은 해법과 현재 국가가 만들어내는 정치질서의 영향 사이에는 너무 많은 ‘시차’가 존재한다. 또한 브렉시트 등의 문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국가의 공통성은 이를 가상의 어떤 것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강력하다. 이를테면, 아프리카 이민자 2세인 영국 시민이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모순이 생기는 것은, 브렉시트 문제 혹은 이민자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국가를 좀 더 복합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는 자연스럽게 구체적인 대안에 대한 부분과 동시에 현존하는 대안들에 대한 태도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으로 나간다. 이를테면 후쿠시마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저자는 좀 더 근본적인 태도 속에서 재난의 문제를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원자력 중심의 발전정책 대신에 대안 에너지 개발을 통한 경로를 재난자본주의의 유형’(297)으로 분류한다. 물론 이에 앞서 ‘자본주의적 발전 경로’라는 단서가 달려 있긴 하나, 현실체제가 자본주의인 이상 작동하는 모든 것은 자본주의적 요소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마치 ios에서 작동하는 모든 어플리케이션들이 애플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저자는 3가지의 물음표로 후쿠시마에 관한 장을 끝내고 있지만 솔직한 감상으로는 너무 기각한 것들이 많아서 선택지가 없어진 상황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3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구체성 보다는 희망으로 혹은 논증보다는 설교로 이어질 개연성이 더 크다.

그리고 이런 곤란함은 결국 저자의 정치철학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다중-메시아론’에 대한 고민으로 넘어간다. 다중은 집단도 개체도 아니다. 그래서 공동의 이해관계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개별로 ‘고립’하지도 않는다. 이런 과정에서의 경로는 불가피하게 SNS 등의 소셜미디어가 가진 힘을 과도하게 옹호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집회민주주의적 인원수와 직접적 목소리 외의 다른 장치가 필요하고 절대민주주의가 다중의 비상 행동으로서 예외적 순간에 예외적 방식으로 대의민주주의의 일탈을 멈추게 하는 비상 브레이크 이상일 수 있기 위해서는 국민-다중이 직접행동의 주체로 움직이는 것이 필요’(448)하다. 그리고 ‘대의 정치가들이 전유하고 향유해 온 정치지대는 다중의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재전유되고 사회화되어야 한다“(458). 저자는 존재론을 말해왔지만 사실 이런 구분은 유형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즉 저자는 순수한 다중-존재론을 추구하면서 현실에서의 다차원적인 혹은 중층적인 경험을 구분해낸다. 국민으로서의, 가부장으로서의, 시민으로서의, 사장으로서의, 노동자로서의, 인정을 바라는 인간으로서의, 자본주의적 욕망에 괴로워하는 자본주의적 인간으로서의 복합성을 구분해내고 이를 넘어설 수 있는 ’다중의 원형‘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다중은 어느 순간 메시아적 순수성으로 무장한 ’천사‘가 되어 나타난다.

이를 좀더 정치적 표현으로 옮기면, 저자의 정치철학에서 부재한 것은 국가론이다. 소위 사회계약 이전의 모습을 가상으로 그려놓음으로서 자유주의적 시민을 만들어 낸 것이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아이디어였다면 이를 실질적인 힘으로 만들어낸 것은 그런 사회계약을 법률로 만들어낸 국가와 사회계약 이후의 노예적 관계를 만들어낸 자유시장의 자본주의 경제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정치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는 인지자본주의론과 저자의 정치절학을 담고 있는 절대민주주의는 구체적인 국가론을 통해서 매개될 때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겠으나, 솔직히 감상으론 저자가 의도적으로 국가론을 배재한다는 뉘앙스를 확인한다. 왜 그런지 궁금하다.

공통

동시대의 경험을 공통감각으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끊임없이 배타적이고 당파적으로 해석하고 전유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글쓰기 방법은 추리소설의 탐정이 사용하는 ‘소거법’을 닮았다. 홈즈는 ‘아무리 말이 되지 않는 것이라 해도 남은 가능성이 하나 밖에 없다면 그것이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추리의 논리이지 범인을 잡는 방법은 몸을 써야 한다. 때때로 함정을 파기도 하고 육탄전도 벌이고 잠복도 하면서 추리를 증명한다. 함께 살아온 시간은 다양한 감각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다중에 대한 낙관론은 현실에서 발견하는 극우의 사람들과 다중이 어떻게 다른지, 왜 그들은 그런 한계로 구속되는지를 밝혀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동시대의 경험은 배타적 감각으로 채득될 것이고 이는 길고 긴 ‘내전 상황’으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이것과 유사하게 좋은 군주제로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태도들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것이야 말로 저자가 말하는 ‘공위기’의 특징 아닌가 싶다. 그래서 공위기는 구체적인 역관계의 결과이지 선언은 아니며 구체적인 정치행위를 통해서 벌어지는 각축의 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투적이지만 실천을 통한 공통성의 생산을 위한 저자의 다음 행보를 기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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