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호] 생명의 존재론과 민주주의의 절대성 / 이성혁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3-02 22:35
조회
1330
생명의 존재론과 민주주의의 절대성

조정환의 『절대민주주의』 (갈무리, 2017)


이성혁(문학평론가)


* 이 서평은 웹진 <문화다>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goo.gl/aujmiM


2016년 10월 29일, 촛불혁명의 장정이 시작된 첫 촛불봉기가 일어난 지 9개월이 지났다. 알다시피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통령 탄핵과 구속 수감, 촛불혁명을 받아 안을 것을 내세운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 그와 함께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다. 2016년 하반기에서 2017년 상반기에 걸쳐 일어난 이 거대한 변화는 촛불의 힘이 밀어붙여 이루어낸 것이었다. 촛불의 힘에 의해 세워진 문재인 정부가 얼마나 촛불의 정신을 실현하고 촛불이 요구한 개혁들을 이루어낼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많은 이들이 이 정부가 개혁을 실현시켜주기를 바라면서 정부의 활동을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 거대한 촛불의 파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그 촛불의 힘이 ‘헬조선’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내는 동력으로 계속 작동하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는 ‘걸어가면서 물어보는’ 국면과 마주하고 있다.

촛불혁명의 의미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양한 의견(과연 촛불의 봉기가 혁명이었는가를 포함하여)이 제시되겠는데, 조정환의 『절대민주주의』는 촛불혁명의 그 정치적 역사적 의미를 거의 실시간으로 제시한 책이다. 책 전체가 촛불혁명의 의미를 분석한 것은 아니고 마지막 장인 11장 「2016: 절대군주제의 ‘즉각 퇴진’과 절대민주주의」에서 분석이 행해지고 있지만, 그 분석은 분량이 70여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 논문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 막 진행되고 있는 어떤 사건에 대한 이러한 즉각적이면서도 두툼한 분석은 놀라운 일이지만, 그의 글이 현상에 대한 표피적인 사건의 나열이나 도식적 분석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이러한 혁명의 진행을 거의 실시간으로 깊이 있게 분석한 선례는 1848년 프랑스 혁명을 분석한 맑스의 브뤼메르 18일을 들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촛불혁명에 대해 그가 도달한 정치철학을 통해 깊이 있는 분석과 해석을 행하고 있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전망과 대안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 책은 촛불혁명의 동력을 어떻게 전화‧확장시켜나갈 것인가 생각하면서 촛불혁명의 의미를 따져보아야 할 현재의 국면에서, 요긴한 하나의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정환의 그간 작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그의 생산력이 놀랍기만은 하지 않을 것이다. 조정환은 1980년대 후반 급진적인 사회주의 문학평론가로 세상에 등장했지만, 그가 주도했던 잡지 <노동해방문학>이 탄압에 의해 정간되고 십여 년에 이르는 긴 수배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는 수배 기간 동안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대안적인 급진적 정치철학과 변혁이론을 주로 연구했다..(수배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서야 풀릴 수 있었다.) 그의 연구는 수배가 풀려 공개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왔다.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계에 있을 수 없었지만, 그는 매우 많은 논문과 저술을 정력적으로 발표했다. 특히 학계의 분과 학문 체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그가 연구하고 논의한 분야는 ‘인지자본주의’라는 경제-정치뿐만 아니라 다중의 정치이론, 그리고 철학과 문학예술론에까지 이른다. 사실 세상에 영향을 끼친 뭇 사상가들(혁명가를 포함하여) 역시 분과 학문에 머문 이는 거의 없다. 그들은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 논의하고 비판하며 이론화 했다. 혁명적 사상가로서 조정환은 선배들을 따라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역에 대해 지속적으로 사유하고 비판적으로 논의해왔다고 할 수 있다.

조정환의 이 책 『절대민주주의』는 저자가 근래 발표한 정치에 관련된 글들을 모았다. 그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최근 10여 년 동안 일어났던 전 세계적 격동은 신자유주의-인지자본주의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 중 가장 먼저 발표된 것은 2006년 FTA 비준이라는 정세에서 써진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대안세계화에 대한 글들이다. 저자가 10여 년 동안 현 자본주의에서의 ‘민주주의’ 운동과 관련한 글들을 모은 것이 이 책이라고 하겠는데, 저자의 문제의식과 비전, 사유의 방향은 2006년의 대안세계화를 제시한 글들과 2017년 촛불혁명을 다루면서 절대민주주의를 제시한 글 사이에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그러나 최근의 촛불혁명을 다룬 글은 직접민주주의의 일차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혁명의 제도적 현실화 방안에 대해 더 사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중의 직접적 정치적 힘을 강조했던 예전의 글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가 2017년 촛불혁명에 대해 거의 즉각적인 정치철학적인 의미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현 시대 민주주의 운동의 경향과 그 의미를 끊임없이 숙고해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조정환은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표현된 민주주의 운동을 계속 주목해 왔고 그 의미를 역사적으로, 정치철학적으로 도출해왔다. 현 세계의 정치체제를 ‘제국’으로 파악하는 네그리/하트의 분석을 따르고 있는 저자로서는 세계적 시야의 확보는 필수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한국의 촛불혁명은 세계적으로 일어나왔던 저항운동과 맥을 잇고 있으며, 좀 더 한정하자면 2011년 아랍혁명에서 시작된 점거운동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 된다. 2016년 겨울, 한국에서 광화문 텐트촌이 형성된 것도 그러한 점거운동을 잇는 행위였으리라.(비록 촛불혁명에 대한 글에서 이러한 세계적 연결성이 본격적으로 분석되고 있지는 않지만, 책을 처음부터 읽은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세계적 시야에서 촛불혁명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랍혁명, 특히 이집트에서 강고한 탄압을 견디며 사수한 광장 점거는 혁명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어 미국과 유럽에서도 점거 운동이 일어났다. 저자는 이 운동들 모두 ‘절대민주주의적 정동’(199쪽)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전 세계적인 ‘투쟁의 광대한 공통평면’(200쪽)을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공통평면이 한국을 비롯한 전지구적 투쟁의 보편성을 말해주고 있는 바, 이 보편성은 투쟁들의 공통분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창조적인 생성 속에서 형성되는 공통성을 의미한다. 이것이 여타 ‘전통 맑스주의’의 생각과 다른 점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독특성은 2011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진행되는 혁명의 움직임을, 1장 「생명과 혁명」에서 논구되는 ‘생명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제헌권력’(네그리)을 끊임없이 구성하는 민주주의의 동력은 생명의 절대성에 다름 아니다.(‘절대민주주의’라는 개념도 이로부터 도출된다) 저자는 베르그송의 생명 개념에 따라 “생명은 약동의 연속이며 그 약동이 진화의 분기하는 노선들로 나누어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일련의 창조가 연속적으로 부가되면서 생명은 성장하고 발전한다”(86쪽)고 말한다. 다중의 제헌권력, 그리고 차이와 창조의 생산은 이 생명의 약동하는 힘을 근거로 한다. 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명을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생명권력, “생명을 가치회로에 삽입하여 잉여가치를 축적하고 더 큰 축적으로 통제권력을 확장하려는” 자본과 다중의 삶-“생명의 주체화된 형태”(88쪽)-이 충돌한다. 생명의 주체화를 가로막고 그 생명의 힘을 갈취하는 것이 자본(특히 인지자본)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생명권력이다. 다시 말하면 결국 자본과 생명권력은 삶에서 생명력을 추출하여 가치회로에 넣으면서 삶을 고사시킨다.(그래서 생명권력은 죽음의 권력이기도 하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문제에 대한 글인 9장에서 저자는 재난자본주의와 인지자본주의가 대립하지 않으며 죽음의 정치가 삶의 정치에 대립하는 것도 아니라고 쓰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자본과 생명권력에 다중이 투쟁하면서 ‘삶-정치’의 장이 형성된다.

아마 세월호 참사에서 유가족 대책위가 ‘또 다른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에 대해서는 10장 「2014: 세월호의 ‘진실’과 ‘생명정부’의 제헌」에서 분석되고 있다)은, 국가권력을 쥐고 있는 정부가 생명을 유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각종 억압적‧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유형‧무형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유가족 대책위가 그토록 끈질기게 투쟁을 전개하고 정부에 맞서서 대중에 대한 또 다른 지도력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세월호’를 둘러싼 모든 문제가 생명을 둘러싸고 전개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의식의 저변에 흐르는 생명(정동으로 표현되는)을 생리적으로 감지하고 있기에, 우리는 유가족의 호소에서 진실을 ‘직관’할 수 있었다. 나아가 유가족 대책위의 투쟁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의 힘을 우리는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촛불혁명의 힘은, 박근혜 정권의 통치에 무기력하게 포획되어 갔던 대중에게 유가족 대책위가 생명력을 다시 불어넣어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조정환의 책에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역시 그의 책을 따라 읽다보면 능히 이러한 추론을 하게 된다.

다시 촛불혁명에 대한 글로 돌아가 보자. 조정환의 촛불혁명 분석은 독특한 면이 있다.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라는 개념(스피노자의 정치학 논고로부터 가져온 개념. 네그리/하트 역시 『제국』에서 현 세계 질서를 이 개념으로 분석하고 있기도 하다)을 현 정국에 대한 분석틀로 삼고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저 개념을 신분사회를 탈피한 현대 정치사회에 적용하여 사용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느니 상층 계급을 이룬 사람들을 ‘귀족’이라느니 하는 말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주로 비유적인 의미였다. 그러나 조정환은 이 개념들을 비유적인 측면이 아니라 현대 대의민주주의정치의 구조를 가시화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조정환은 한국 헌법의 분석을 통해, 한국의 정치 체제, ‘제정권력’이 권력의 근원을 다중에 두면서도 그 권력이 다중으로부터 분리하여 현대의 군주(대통령)와 귀족(국회의원 및 행정‧사법‧경제의 권력층)에 접합하도록 구조화되어 있음을 논증한다. 그리하여 정작 권력의 원천인 다중-제헌권력의 주체-은 그 제정된 권력에 복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전도된 상황을 역전하기 위하여 제헌권력의 회복을 위한 헌법 개정을 다중의 단기적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 책 맨 뒤에 실려 있는 ‘촛불시민혁명대헌장’에도 명시되어 있으며 유신 이전 한국의 헌법에 적시되어 있었던 국민발안권, 국민소환권 그리고 국민투표 조항을 헌법에 삽입하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내세워 대통령을 파면 구속에까지 이르게 한 촛불혁명을 지속해가는 하나의 길일 터, 이는 촛불봉기 이후 다중의 활동 방향에 대한 주목할 만한 구체적 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정환이 이러한 ‘거시적인’ 안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 개정 역시 절대민주주의의 구성과 확산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의 매듭일 것이다. “절대민주주의적 역량인 주권자 국민-다중의 입장에서 국가와 정치를 사유하는 것은 다양한 형태와 수단을 취하는 권력의 구성, 권력의 행사를 국민-다중 전체의 자기통치의 과정으로서 파악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447) 즉 절대민주주의의 구성 과정은 열려 있다. 이 열린 과정은 매듭으로서의 제도(석화되지 않는, 진화하고 변화하는 제도)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가 제시하는 온-오프라인 ‘다중정치플랫폼’의 구성도 이 자기통치 과정을 위한 하나의 제도라고 할 것이다. 이 역시 촛불봉기 이후에 다중이 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제안이다. 촛불혁명이 다중의 힘이 응집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면, 앞으로 촛불혁명의 진행에서 절대민주주의의 실천 방향과 방법, 방식은 다양하게 또는 예기치 않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저자가 말하듯이 절대민주주의가 “일상의 행동으로서 일상의 시간 속에서 긍정적 방식으로 기능하게 할 수”(448쪽) 있는 제도를 다양하게 발명하는 것이 촛불봉기의 힘을 사회 전반에 스며들게 만들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조정환의 책이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현대 자본주의의 역사와 혁명, 그리고 반혁명을 긴밀한 관련 속에서 살펴보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이 책에서(그리고 다른 그의 책에서도) 68혁명의 반혁명으로서의 신자유주의와 인지자본주의의 도래, 그리고 이를 통한 통치 방식과 계급구성의 변화,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분석하면서 신자유주의 이후 저항운동의 정치적 주체의 새로운 성격을 일관성 있게 도출한다. 그런데 촛불혁명에 대한 글에서는 이러한 경제-정치의 분석이 좀 미진하다는 생각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정치적 행동만이 제헌권력의 유일 양태가 아니라면서 자본과 노동의 문제가 언급되고 있기는 하다. “임금노동을 뜻하는 협의의 노동이 아닌” “삶과 동의어로 된 노동이 다중의 제헌권력의 가장 직접적인 무대이다.”(457) 이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아마 후속 논문에서 좀 더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되긴 한다. 아무튼 여기서 촛불혁명 이후에도 노동의 장은 여전히 자본의 권력에 통제되고 있으며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인지노동을 포함하여)은 여전히 고통스럽다는 것을 강조해두고 싶다.

노동의 장에서 인지와 정동은 노동자 스스로 조작해야 할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것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명력 자체, 삶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 노동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삶 자체를 조작의 틀에 변조시켜 맞추어야 하는 일터에서의 고통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일터에서 자본의 권력을 어떻게 제어하고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 대안은 어떻게 마련될 수 있을까. 실제적인 삶(노동)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문제들 역시 삶의 불안정성 문제와 더불어 노동자의 생명력을 고사시키고 있다. 그러나 현재 조정환도 비판하는 대안인, 정규직화와 복지의 확충이 촛불혁명을 받아 안고 있는 이들-정부와 시민단체, 노동단체-이 추구하는 바인 것 같다. 이 의제 역시 현 상황에서 경제적 불안정성으로 인해 생존의 불안으로 고통 받고 있는 다중의 열망을 받아 안은 것이지만, 이러한 제도의 확충이 생명을 더욱 약동하게 하는 삶을 사는 데는 충분하지 않다. 조정환이 말하듯이 노동이 생명력으로 충만해지면서 “차이를 가로지르는 구성의 능력으로”(457쪽) 되기 위해서는 ‘노동-삶’이 행해지고 있는 현실의 ‘장치’들은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역시 앞으로 우리 자신이 토론하면서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할 문제인 듯하다.

조정환은 작금의 현실에서 노동이 얼마나 고통과 슬픔의 정동을 생산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그의 책 인지자본주의(갈무리, 2011)에서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절대민주주의』의 마지막 부분에서 노동의 긍정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공통의 지평을” 만드는 “삶으로서의 노동은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며 “그러므로 삶-정치-노동은 차이를 횡단하면서, 그리고 새로운 차이를 생성하면서 부단히 완전하게 되어가는 내재적 공통되기의 과정이고 더 큰 공통적인 것의 생산활동”(457~458쪽)임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절대민주주의의 구축 과정인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공통되기를 생산한다는 노동의 정치철학적인 의미를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함으로써, 다음에 내놓을 책의 주제를 암시하려는 듯하다. 네그리/하트는 그들의 3부작인 『제국』, 『다중』, 『공통체』의 주제를 각각 ‘새로운 세계질서와 자본주의’, ‘다중의 민주주의’, ‘공통적인 것의 구축’으로 삼은 바 있다. 이와 유사하게, 조정환 역시 현대자본주의의 변화와 특성을 논증한 인지자본주의, 전 세계 다중의 투쟁과 한국의 ‘삶-정치’를 분석한 이 『절대민주주의』를 거쳐 다음 책은 제3부로서 ‘내재적 공통되기 과정’의 다양한 경로와 전망을 제시하는 책을 내놓을 것 같다고 추측해볼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말해두고 싶은 바가 있다. 대의민주제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였던 2008년 촛불봉기는, 비록 현실화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한국 사회에 내재해온 다양한 문제를 의제로 내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2016년 촛불혁명은 오히려 그러한 의제의 다양성이 축소된 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촛불혁명의 1차 완성이라고 말해지곤 하는 문재인 정부의 출범 직후, 네팔 노동자들이 돼지 똥을 치우다가 돼지 똥에서 나온 가스에 중독되어 죽음을 당했다.(자세한 내용은 《한겨레 21》 6월 7일자 제1165호의 「개돼지만도 못한 죽음」 참조. 이에 대해 필자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녹색평론》 2017년 7-8월호에 실린 김해자의 시 「몰랐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번 촛불혁명 과정에서, 그리고 그 봉기 이후에도 가시화되지 못한 이들이 있지 않았던가. 이에 대해서도 논할 시간이 온 것 아닐까. 촛불혁명 과정에서 보이지 않았던 이들, 말해지지 않았던 이들에 대한 조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촛불혁명이 더욱 근본적인 민주주의, 절대민주주의로서 진행되어가야 한다면 말이다.


* 이 글은 「문학의 오늘」 2017년 가을호에 실린 『절대민주주의』에 대한 필자의 서평 「생명의 존재론과 민주주의의 절대성」을 다듬은 것입니다. 이 서평의 초고는 2017년 7월 29일 갈무리 출판사에서 열린 『절대민주주의』 집단 서평회에서 발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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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책


『미네르바의 촛불』(조정환 지음, 갈무리, 2008)

2008년 촛불 현장에 참가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의 기록이자 그것에 대한 성찰의 결과물을 담은 책으로, 2008년 5월 2일부터 지난 1년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이 참여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촛불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한다. 이 책은 촛불봉기의 새로움이 무엇이었던가를 맑스의 노동이론, 푸코의 삶권력론, 들뢰즈의 잠재력론, 네그리의 다중론을 통해 조명한다. 또한 전 세계적 금융위기를 촛불의 관점에서 조명하면서 촛불을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낼 주체성으로 정의한다.

『예술인간의 탄생』(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5)

예술성이 협의의 예술사회는 물론이고 생산사회와 소비사회 모두를 횡단하면서, 예술의 일반화, ‘누구나’의 예술가화, 모든 것의 예술 작품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예술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센세이셔널한 예술종말론들이 유행하고 있다. 어째서인가? 종말로 파악할 만큼 급격한 예술의 위치와 양태변화는 항상 새로운 주체성의 대두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단토, 가라타니 고진, 벤야민 등의 예술종말론들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나타난 예술적 변화를 예술종말로 파악한 과거의 관점들(헤겔, 맑스)을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다른 맥락에서 되풀이하는 것이다.

『공통도시』(조정환 지음, 갈무리, 2009)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이후 30년 역사를 신자유주의 30년 역사이자 그에 대한 대항운동 30년의 역사로 읽고자 한다. 또한 오늘날 80년 광주를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미래사회를 상상하고 구축하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으고 있는 전지구적 다중의 세계사적 과제라고 힘주어 말한다. 광주의 민중들은 군부독재와 싸운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세계사적 투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1987년, 해방도시의 잠재력이 전국화되어 더 이상 지역적 봉쇄가 불가능하게 되자 자본은 전국적 해방운동들을 신자유주의적 혁신도시 건설, 다시 말해 메트로폴리스의 지역클러스터 구축의 동력으로 전용하였다.

『신정-정치』(윤인로 지음, 갈무리, 2017)

“자본정치는 신정이다”라는 일관된 관점에 따라 박정희, 박근혜, 세월호, 촛불, 김진숙, 노동해방문학, 월스트리트점거, 사마라구의 소설, 바틀비, 조정환, 보르헤스 등 다양한 현상과 인물, 텍스트에 대한 분석 속에서 이 관점을 변주하며 표현한다. 화폐의 힘을 ‘현실적인 신’이라고 표현한 맑스, 자본주의를 기독교의 형질을 띤 것으로 포착한 벤야민, 현대 국가의 주요 개념들이 환속화된 신학의 개념이라고 했던 슈미트, 국법의 진정한 실험실이 교회법이었다고 한 아감벤. 이 책은 그런 성찰들을 따르면서, 신, 신성, 신적인 힘이 경제적 이윤과 정치적 권력 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중심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비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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