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호] 정치-미학적, 윤리적 패러다임으로서 가상과 사건 / 박해민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8 22:09
조회
2166
정치-미학적, 윤리적 패러다임으로서 가상과 사건


박해민 (연세대학교 문화학협동과정)


* 이 글은 인터넷언론 『대자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jabo.co.kr/sub_read.html?uid=36167&section=sc4&section2=


“모든 사건은 특이하다(15)”라는 브라이언 마수미의 선언은 어떻게 가능해지는 것일까. 얼핏 평범해 보이는 저 문구는 사실 복잡한 궤적을 갖고 있다. 인지주의 패러다임, 이성이 사용되어 온 방식, 서구철학의 전통적인 이분법, 주체의 확고한 위상 등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위의 선언은 기능한다.

관계적 차원, 질적 차원을 거치면서 경험은 특이한 사건이 된다. 잠재적인 것은 관계맺음을 통해 질적인 특이성을 획득한다. 이때 잠재적인 것들이 맺는 관계는 ‘비관계의 관계’이다. 비관계의 관계란 개체들 사이의 차이가 보존되는 관계인데, 그 차이가 역동적 통일을 이루면서 창조성이 발생한다. 때문에 그 창조성을 구성하는 “각자는 작은 절대자이다(46).” 한편 존재의 퍼텐셜(potential)은 변화의 동의어이다. 즉 존재의 퍼텐셜은 비관계의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

물론 그 사건이 발생하는 데는 장(field)이 필요하다. 번개가 치기 위해서는 대기의 일정한 조건이 마련되어야 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번개는 반짝이는 섬광으로 그 장에서 자기만의 창조성을 획득한다. 번개는 장의 개체들이 비관계의 관계로 엮여 과거를 미래로 생성함으로써 발생한다. 즉 각각의 능동적 활동의 결과로서 대기라는 장에서의 번개가 가능해진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놀라움’은 세계를 구성하는 보편적인 힘이다. 현실화(퍼텐셜을 존재화하는 것)가 사건이라면 놀라움은 보편의 지위를 획득할 수밖에 없다. 비관계의 관계 속에서 원인과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지주의 패러다임, 서구의 전통적 이분법, 안정적인 주체 개념, 이성 등은 이 지점에서 작동을 멈춘다. 퍼텐셜들의 관계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은 누군가가 초월적 위치에서 바라볼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 그 ‘관찰자’ 역시 퍼텐셜로서 사건에 열려 있고, 초월체는 이미 경험 포물선의 최고점에서 특성화 결과로서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수미는 과정의 관계적/참여적 측면은 정치적인 것으로, 질적인/창조적 자기향유의 측면은 미적인 것으로 의미화한다. 그리고 여기에 윤리적인 것이 더해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애초에 비관계의 관계라는 관계맺음의 형식에 윤리성은 기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마수미의 정치-미학적인 기획이 동시에 윤리적일 수 있는 이유는 존재의 퍼텐셜, 즉 차이가 통합과 포섭의 대상이 아닌 사건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혹은 차이가 명석하게 판별되어 그 차이를 인간 이성에 따라 깔끔하게 배치할 수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면 차이는 결국 ‘극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이를 원천으로 하는, 나아가 차이-생성적인 패러다임에서 차이는 역동성과 놀라움의 원천이다. 차이가 정치-미학적 가능성을 암시한다면, 그 차이를 아름답게 여기는 것을 통해 우리는 동시에 윤리적 태도마저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존재가 지닌 퍼텐셜은 사람에게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윤리적 가능성은 확장된다. 보통 비인간은 인지하고 느끼지 못할 것, 즉 ‘침묵하는 물질’로 간주된다. 하지만 “강변의 나무들은 주변의 산들을 고려한다(53).” 따라서 마수미가 그려내는 세계의 범위는 광범위하다. 혹은 존재하는 세계 그 자체이다. 이 세계에서 개체들은 놀라움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예측하거나 깔끔하게 정돈할 수 없는 양상으로 비관계의 관계를 맺으며 사건이 된다.

‘합리적’ 예측이 불가능한 이 세계에서 확실한 것은 신체가 이 과정에 가담한다는 점이다. 이 신체의 경계는 모호하다. 화이트헤드가 말했듯 하나의 분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에 참여하고 빠져나간다. 그 관계의 방식, 강도의 차이에 따라 수없이 다양한 사건이 발생하며, 각각의 사건은 절대적 개별성·특이성을 갖는다. 때문에 ‘모든 사건은 특이하다’는 명제는 정치-미학적인 동시에 윤리적이다. 마수미의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절대적 개별성을 부인할 자격을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이고, 각각의 절대성과 개별성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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