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호] 무엇이 먼저인가? / 이정섭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8 21:23
조회
2761
무엇이 먼저인가?


이정섭 (수의사)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다니! 이 속담이 실소를 머금게 하는 것은 어떤 아이러니를 품고 있어서다. 외연과 내포의 어떤 비대칭이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이 경우, 외연은 ‘무엇을 맡긴다’는 것일테고, 내포는 ‘고양이와 생선이라는 두 대상’이다. 이 외연과 내포의 비대칭이 우리에게 실소를 드리운다. 한데 외포와 내연이 어떤 극단으로 치달을 때 과연 실소만 할 수 있을까?

대테러 주식회사가 그렇다. 외연은 테러에 대한 처방을 주식회사가 맡기는 형식이다. 내포의 두 요소 살펴보면, 테러는 우선 공포이고 '대상 = x'처럼 시공간을 초월해 심층적으로 우리를 위협한다. 이때 주식회사가 등장하는 외연은 이 공포의 해결사의 역할이다. 주식회사는 이윤추구를 문제틀로 삼고, 생래적으로 우리 삶의 모든 측면들을 그 요소들로 다룬다. 윤리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문제 등은 이윤추구에서 이차적이다. 이 무차별적이고 심층적인 공포와 이윤추구 이외에는 모든 것이 이차적인 주식회사가 서로 외연과 내포를 형성하고 있다. 이 비대칭에서 우리는 어떤 실소보다 경악하게 된다.

누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지? 이 속담에서 숨겨진 주인공은 바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어떤 주체이다. 물론 이 주체는 어떤 핑계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 아이러니가 실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핑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유비적으로 대테러주식회사를 생각해보자. 이 아이러니도 어떤 구실을 품고 있다. 그리고 어떤 주체가 이 조합을 그 구실로 생산해 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 주체가 생산한 구실, 공포와 체념 같은 그 구실의 효과뿐이다. 이 구실과 그 효과는 이 주체를 우리 의식의 ‘타자’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우리는 아이러니에서 경악했다가 다시 수긍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타자를 침묵시킬 것인가? 이 질문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타자를 침묵시키기 위해 우리는 타자가 제시하는 우선 순위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 테러와 대테러, 국가와 기업(주식회사) 그리고 대테러주식회사와 우리 삶에서 ‘무엇이 우선하는가?’라는 질문은 대테러주식회사라는 실재하는 권력의 해답을 뒤집는 출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질문은 무기력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변화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1. 테러와 대테러 무엇이 먼저인가?

“대테러전쟁은 9월 11일의 살인적인 항공기 납치사건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을 그 끔찍한 사건들에 대응이라고 설명해서는 부족하다.1)” 당신 미국 국방부 장관인 럼스펠드의 메모가 인상적이다. “단기 목표 필요 - 대규모로 간다- 관련이 있건 없건 다 쓸어버린다.” 럼스펠드의 그 결과가 사담 후세인을 알 카에다와 연계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9.11의 교훈을 억지로 연관시키는 정치적 군사적 대응은 테러범을 검거하는 수준이 아니라 거기에서부터 아주 멀리 나아갔다. 우리는 수 천명의 미국 시민들의 부당하게 공격받고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서 이라크 전쟁 이후 총 사망자수가 2만6천690∼3만51명에 달하며 이라크 침공 이후 30개월 동안 매달 1천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2) 주지하듯이 이라크 전에서 승리한 미군과 다국적 군은 어디서도 대량살상무기를 발견할 수 없었고 알 카이다와 사담 후세인을 연결시킬 수 없었다. 람스펠드의 말대로 관련이 있건 없건 다 쓸어버린 것이다. 이라크 전쟁 이후 대테러전쟁은 수그러들지 않고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테러’에 대한 ‘대테러’라는 도식은 상식(Common sence)적인게 되었다. 9.11테러의 귀결이 대테러라는 새로운 연관성은 의심받지 않았다.


여기서 이 테러와 대테러의 틈새를 넓게 벌려보자! 우리는 어떤 새로운 사실을 접할 수 있다. 테러와 대테러 ‘사이’에는 람스펠드와 제임스 울스3)와 같은 이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는 ‘안보산업복합체’라는 영국과 미국의 산업, 정치 엘리트들의 연결 고리가 있다. 이 산업체는 대테러전쟁 이전부터 현재까지 냉전이나 테러와 같은 안보 산업에서 천문학적인 수익을 챙기고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 즉 수용시설의 사영화, 군사기지의 사영화, 미래 전략 급유기 사업, 냉전시대 국제적인 군사 개입을 통한 국가 건설, 전쟁에서의 민간 용병 투입, 언론을 통한 선전 활동, 사설 첩보 요원을 통한 정치적 공작, 민간 안보 업체가 불법적으로 자행한 감금, 고문, 범죄를 비롯해 최첨단 디지털 장비를 이용한 정보 수집활동 및 감시 등은 이들 산업체의 부의 기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준다.

테러와 대테러는 실재적으로는 서로 독립된 부분들이다. 안보산업복합체가 이 두 부문을 연결시키지 않는 한 테러는 결코 대테러 전쟁이라는 생산 메카니즘에 포함될 수 없다. 즉 안보산업복합체는 대테러전쟁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윤만을 전제한다. 대테러전쟁은 명칭과 무관하게 그것은 안보산업복합체의 이윤을 생산하는 하나의 모델이다. 이 모델이 관심가지는 것은 우리 세상의 불행이 아니다. 이윤을 생산할 수 있는 불행이다. 테러가 인류의 불행인 한 이들은 관심사항이 아니다. 이윤을 가져다주는 불행, 그것이 테러라면 이들은 그것을 하나의 생산 요소로 대테러전쟁이라는 안보 모델을 생산한다. “서구의 총알을 피해 달아나는 이라크 자동차의 영상에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르는 <미스테리 트레인>4)이 흐르고 있었다.” 서구의 총알을 피해 달아나는 이라크 자동차는 테러를 당한게 아니다. 대테러전쟁의 메카니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2. 국가와 기업(주식회사) 무엇이 먼저인가?

“회전문5)” 이 있다. 정치인과 안보 업계 간에 존재하는 이 문을 통해 서로는 은밀하게 들어가고 들어 왔다. “백악관과 웨스트민스터의 지도자들은 테러리스트라는 새 위협을 새로운 종류의 야만인으로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겠다는 점에 착안하여, ‘대테러전쟁’이라는 틀 속으로 대외정책과 국내 정책을 구체화 시켰다.6)” 이렇게 정치인은 테러리스트라는 새로운 위협의 유형을 창출하기도 하고 대테러전쟁이라는 새로운 국내외 정책을 구체화시켰다. 이 모든 매개에는 그들의 분신이라 할 안보 기업들이 개입했다. 때로는 이 회전문은 직접적으로 사기업 직원을 정부 각료로 만들기하고 각료를 사기업 직원으로 만들기도 했다. 결국 국영 부분과 사영 부문 사이의 장벽은 허울뿐이었다. 국가는 대테러 기업의 주 수입원인 테러리스트라는 새로운 위협을 생산하고 그 폐해는 국가의 공공성에 힘입어 조용하고 신속히 덮어버린다.7) 더 놀라운 것은 그 기업들의 주요 임직원들이 바로 이들 국가의 각료들이다.

과연 이것이 우연일까? 천개의 고원에서 들뢰즈는 “ (자본을 위해) 국가는 자원, 인구, 부, 산업 설비 등에 따라 여러 생산 부문을 조합하고 결합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폐지될 수 없으며 다만 형태를 바꿔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국가를 초월하는 세계적 공리계의 실현 모델이 되는 것이다.8)” 국가를 초월하는 세계적 공리계는 자본이라는 생산관계를 전 세계에 배분하고 다양한 세계 구성체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국가조차 이 공리계의 하나의 실현 모델이다.

국가와 기업 즉 이 책에 등장하는 미국과 영국의 각료들과 그들이 운영하는 시스템은 ‘회전문’처럼 내밀하다. 문이 열고 나간다고 한다면, 회전문은 돌아서 다시 들어간다. 그들은 나간 것 같지만 실상은 돌아가는 것이다. 자본의 공리계는 이렇게 모든 것을 내 보내고 다시 수렴한다.

3. 대테러주식회사와 우리 삶, 무엇이 우선인가?

"(이라크에서의 갈등을 서방에 왜곡해 보도하는)민간 정보전은 계속해서, 대테러전쟁의 적들에게 무장 해제를 설득하기보다는 서방의 유권자들만을 기만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9)" 모든 사실은 대테러전쟁의 기업들에게 재해석되어야 했다. 사기업의 심문관들이 이라크인들을 폭행하고 개를 사용하여 협박해도 대테러주식회사를 통해 여과된 정보는 서방의 유권자들이 차기 정치인들의 선거에서 대테러주식회사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도록 왜곡되어 퍼진다. 이들 정보를 통해 왜곡되는 것은 이 주식회사들이 저지르는 만행들만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풍족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 삶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이 주식회사들을 통해 전해지는 실상과는 다른 왜곡된 정보 덕분에 이들의 만행을 못 보거나 우리가 이들의 유권자로 전락할 수 있다. 세상을 대테러전쟁이라는 시각에 우리 삶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테러방지법과 관련해서 살펴 본 다면 이 점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대테러전쟁을 위해 개발된 새로운 무기체계10)” 즉 잠재적으로 위험한 사람들을 추적하기 위해 고안된, 규모가 크며 상업적으로 제공되는 데이터베이스는 SF의 주제가 아니다. 대테러주식회사의 이분법을 빌리자면 잠재적으로 위험한 사람들은 이들 기업들의 잠재적인 유권자가 아닌 사람들일 수도 있다.

대테러 전쟁은 전자를 통해 언표 주체와 언표 행위의 주체라는 두 주체간의 매개자가 된다. 왜곡된 정보와 의도된 해석을 통해 우리는 대테러 주식회사의 시각을 내면화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그 대테러전의 지지자가 된다. 우리에게 펼쳐진 세상은 테러와 대테러의 이분법의 시각으로 양분되어 어떤 혼란도 없이 그 이데올로기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다. 테러와 대테러 그리고 우리라는 순환 구조는 자발적 예속의 극으로 치달린다. 그리고 후자는 우리 삶의 새로운 생성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위협한다. 이분법의 도식으로는 도저히 함몰될 수 없는 우리 삶의 생명력은 이들 강력하고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겁박 앞에 벌거벗겨 던져질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대테러주식회사는 상징이나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현실의 실재 속에서 어디서나 우리를 그들 공리계의 실현 모델로 재생산하려한다.

무엇이 우선하는가? 이 질문에 천착하며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저자가 말한 ‘안보산업복합체’에 혐의를 둘 수밖에 없다. 이 복합체는 마치 근본주의 신앙인들처럼 이윤이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간다. 이윤이 없다면 이윤을 낳을 수 있는 장치들을 생산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사후적으로 이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국가와 언론 그리고 각종 대중매체의 왜곡된 사실 뿐이다. 결국 우리 삶 조차 이들에 의해 재창조되기를 이들은 고대하고 있다. 어디서 새로운 의문이 싹튼다면 그 싹은 너무나 불순한 것이다.

무엇이 우선하는가? 이 질문이 우리에게 향할 때, 환원될 수 없는 우리 삶의 긍정적 가치들에 방점을 찍게 한다. 우리 삶을 둘러싼 모든 생명들의 공존을 희망하는 삶에 우선적 가치를 두는 것은 이분법으로 갈라진 우리 삶을 치유하는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선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렇게 갈라설 수밖에 없다. 그 갈라서는 것은 어떤 분열증이다. 대테러와 주식회사를 접목하는 폭력 앞에서 우리는 어떤 분열증을 앓는 것이다. “모두가 아프지만 아무도 아파하지 않았다”는 이성복 시인의 외로운 통증은 우리에게도 이어져야 한다.


1) 대테러주식회사 p 9
2) 2005-10-27 연합뉴스. 영국의 민간단체 `이라크보디카운트(IBC)' 보도. 미국 국방대학원의 주디스 야페 연구원은 사망자수가 2만∼3만명이라는데 동의했으며,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앤서니 코데스먼은 지난 4월28일 이후 숨진 이라크 민간인과 군인이 5천600명에 달한다는 이라크 정부 통계를 인용, IBC의 수치가 불확실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추정치중 가장 정확해 보인다고 말했다
3) 미국 정보부 국장 출신, <팔라딘 캐피털>의 경영이사 p 7
4) 대테러주식회사 p 189
5) 같은 책 p 325
6) 같은 책 p 317
7) 민간 업체들은 이라크 전쟁을 발생시킨 허위 정보에서 핵심적이었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같은 방식으로 대테러전쟁에서 수감자 학대에 관한 조사와 재판에서 때때로 성공적인 기소가 이어졌지만, 관여했던 민간업체들은 어떠한 책임도 추궁당하지 않았다. 처벌받기는커녕, 이들에게 새로운 계약이라는 상을 줬다. 사영화가 이루어진 영역에서는 아무도 책임을지지 않는다. 이런 방식이 국가와 그들의 상업적 고용인에게 매력적이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같은 책 p 286
8) 천개의 고원 김재인 역 p 872
9) 같은 책 p187
10) 같은 책 p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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