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rss version="2.0">
	<channel>
		<title>다중지성의 정원</title>
		<link>https://daziwon.com</link>
		<description>즐거운 지식, 공통의 삶, 다중의 지성공간</description>
		
				<item>
			<title><![CDATA[9월 14일(월)에 다루어질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범위]]></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31]]></link>
			<description><![CDATA[9월 14일(월)에 다루어질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범위는 "5장 카밀 이야기: 퇴비의 아이들", 183-232쪽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dongs14]]></author>
			<pubDate>Thu, 10 Sep 2026 10:41: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87"><![CDATA[미디어 아트를 둘러싼 이슈들 세미나]]></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새책공지] 박태웅, 『박태웅의 AI강의 2026』 9월 28일 시작!]]></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30]]></link>
			<description><![CDATA[[새책공지] 박태웅, 『박태웅의 AI강의 2026』 9월 28일 시작!

동시대과학세미나 
박태웅, 『박태웅의 AI강의 2026』 첫 모임 _ 8월 28일 월요일  저녁 7시30분 (매주, zoom)

세미나 소개
우리 과학세미나는 그간 우주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 책을 읽었고, 이번에는 AI에 대한 책을 읽습니다. 미국, 이스라엘, 이란 전쟁을 경험하며 우리는 과학기술지식과 사물은 중립적이고 도구적 이성이라는 신화의 실체를 목격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AI와 신체 연장적인 친밀한 관계 속에서 세계를 인식하고 감각하며 우리 자신을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우선 AI의 특질적인 테크놀로지와 시장 퍼포먼스를 이해하고, 연산적 인지, 정보 치환적 존재론, 객체화, 자동화, 알고리즘 패러다임 등 이 분야의 언어들을 이해해 나가고자 합니다. 
학우들을 환영합니다.   

길잡이 _ 공동길잡이
이어서 읽을 책 _ 『주인의 눈』(파스퀴넬리, 동녘, 2026), 『차별하는 데이터』(웬디 휘경 전, 워크룸프레스, 2026), 『비인간 권력』(다이어-위데포드, 갈무리 2026) 등. 읽을 책 순서는 합의하여 정합니다.  

세미나 참가신청 방법 안내
● 월회비 2만원을 입금하신 분은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열리는 모든 세미나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회비 입금계좌 : 874101-01-252213 신은주(다지원) 국민은행
● 월회비를 위 계좌로 입금하시고 ‘세미나프로그램’ 게시판들에서 참가를 원하시는 세미나(들)를 선택하신 후, ‘세미나신청’ 게시판에 아래 항목에 따라 참가신청 글(제목: ‘세미나 참가 신청합니다’)을 작성해 주십시요.
1. 이름
2. 전화번호
3. 메일 주소
4. 참가를 원하는 세미나 이름: 둘 이상의 세미나에 참가를 원하시는 경우 슬래쉬(/)로 구분해 적어주세요
예)정동과 정서/삶과 예술
5. 자기소개와 세미나 신청 동기
● 개인정보 보호를 위하여 글쓰기 시에 비밀글+비밀번호 설정을 해주십시오.

갑사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hides]]></author>
			<pubDate>Tue, 08 Sep 2026 22:07: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9"><![CDATA[동시대 과학 세미나]]></category>
		</item>
				<item>
			<title><![CDATA[[90호] 교수대에 오른 범죄자들, 그들은 왜 저항했나ㅣ박서현]]></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29]]></link>
			<description><![CDATA[ 
<p style="font-size:20px;text-align:left;"><b>교수대에 오른 범죄자들, 그들은 왜 저항했나</b></p>
<p style="font-size:18px;text-align:left;"><b>박서현 (제주대 학술연구교수)</b></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목매달린 자들의 런던』은 역사서이다. 이 역사서의 소재는 18세기 런던의 타이번 교수대에서 목매달린 자들의 죽음과 삶이다. 이들의 죽음과 삶, 이 역사를 저자인 역사학자 피터 라인보우는 왜 다룬 것일까. 이 역사에서 무엇이 문제라고 본 것일까. 혹은 이 역사에서 무엇을 읽어내려 한 것일까.</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책에서 다뤄진 이들은 범죄를 저질러서 목매달린 이들, 범죄자들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범죄자들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세력이었다고 말한다(22). 어째서 그러한지를 확인하기 전에 분명한 것은 저자가 이들을 이런 세력으로, 어떤 힘 있는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이들은 부자의 것을 취하는 사회적 범죄자이자 빈자의 것도 취하는 악질 범죄자였다. 그러나 이런 유형들로 이들을 성급히 분류한다면, 이들로부터 무언가를 읽어내야 하는 주의력이 흐려진다(24). 나아가, 이들로부터 무언가를 읽어내려 했던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한 우리의 주의력도 흐려질 것이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타이번에서 목매달린 이들은 분명 아주 가난한 이들이었다. 당시 유죄 판결을 받은 이의 아내가 이야기하듯이 “그가 유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그가 땜장이이고 가난한 사람이며, 그래서 멸시받고 정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113).’” 이들은 피억압 계급, 무산 계급에 속했다(115). 노동 빈민이었다(156).</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도둑질은 이들에게 생존의 문제였다. 이들은 예컨대 더 이상 길드 조직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산업 조직의 변화 속에서 노동 분업의 파괴적 충격에 노출된 직인들, 소규모 마스터들, 도제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런 변화 속에서 생존의 문제를 겪게 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의해야 하는 것은 이들이 그저 생존의 곤란을 겪은 사람들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들이 동시에 이러한 변화 속에서 착취의 새로운 조건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43).</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목매달린 자들의 런던』은 이들이 얼마나 착취받았는지를, 억압받았는지를 서술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이들이 단순히 억압 속에 살았던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거부하고 반항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책이 그리는 것은 억압받는, 비참한 삶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책은 착취의 새로운 조건에 맞서 싸우다 교수형에 처해진 이들의 반항과 싸움을 그린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약자·빈자 대 권력자와 유산자의 갈등</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 스스로 말하듯이 책의 배경이 런던이고 시대는 18세기이며 주제는 사형인데 책의 논제가 ‘계급투쟁’인 것은 이 때문이다(8). 타이번에서 목매달린 이들이 계급투쟁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저자에 따르면, 이 교수형은 도시의 계급 간 분쟁에서 중심적 사건이었다(17). 교수형은 분명 범죄자를 목매달 수 있는 주권 권력의 존재를 과시했다. 아울러 사유재산을 존중하라는 교훈 또한 과시했다. 타이번이 드러내는 것은 약자와 빈자 대 권력자와 유산자의 갈등이었다(21). 생산수단을 빼앗긴 빈자가 생활수단을 전유하는 도둑질, 이러한 도시범죄는 18세기 갈등으로서의 계급투쟁의 역사를 보여주었다(22).</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저자는 도둑질, 범죄가 자본주의의 변화를 유발했다고 말한다(22). 이는 소위 계급 관점의 역전으로 알려진 이탈리아 오빼라이스모(Operaismo, 노동자주의)의 투쟁의 우선성을 생각나게 한다. 충분히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발전은 계급투쟁으로부터 비롯한다. 노동계급의 투쟁이 자본의 위기를 가져온다. 자본은 기술의 발전 등을 통해 이러한 위기에 대응한다. 이는 노동계급의 분열을 가져오고 이로부터 결국 자본은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이는 충분히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변화의 주도성이 노동계급의 투쟁에 있다는 것이었다. 책에서 다뤄지는 사회는 이런 사회가 아니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아울러 책에서 다뤄지는 범죄자 역시 조직된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본을 위기로 몰아넣으며 그 변화를 추동한 노동계급의 투쟁과 유사하게, 목매달린 이들의 행위는 통치자들이 이를 방지하기 위한 나름의 선제적 조치를 행사하도록 자극했고 변화를 가져왔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이들의 역사를 18세기 노동계급 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22). 이들의 행위, 즉 범죄에 대한 처벌이었던 사형이 런던의 노동시장의 새로운 재생산을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198). 그러니 무슨 상처받은 삶이 아닌, 이들의 행위, 범죄가 사회 변화의 동력이 된 것이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죽음을 불사하며 반항하는 이들의 역사</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여기서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명확하다. 지배받고 억압받음에도, 범죄를 저지를지언정, 밟았을 때 죽은 척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니라 꿈틀하며 뛰어오르는, 비순종적인 이들의 반항, 살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저항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며, 이러한 역사를 그리니 말이다. 미셸 푸코가 말하는, 책에서도 언급되는, ‘대감금’ 시대에 사람들은 훈육되어 길들여진 존재로 생산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죽음을 불사하며 반항하는 이들이 있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저자는 감금을 강조하는 푸코의 논의가 흡사 정부와 사회의 지배자들을 전능한 존재로 보이게 한다고 말한다(30). 물론―푸코의 문제의식이 권력과 예속의 문제만이 아닌 자유의 실천을 향해 있을지언정―푸코의 저술 이면에 있는 문제의식을 읽기보다 표면을 읽어낸 저자의 독해가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명백히 푸코를 생각나게 하는 진술로 저자는 감금이 노역소·공장·학교·병원·배에서 펼쳐졌을 때, 그 대항점으로 탈출·도주·탈영·이주·거부 역시 있었다고 말한다(53).</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여기서 저자가 말하려는 것 혹은 오히려 저자가 그러하듯이 우리가 역사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속박과 훈육을 거부하고, 범죄로 나타났을지언정, 탈출·도주·탈영·이주·거부로 드러나는 자유를 구가하려 했던 빈자들의 삶과 그 활력이다. 대감금의 시대에 앞서서 존재했던 이들의 삶과 죽음이, 죽음을 불사하고 속박을 거부하는 이들의 자유로운 삶이, 이러한 삶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것이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이들에 대한 역사를 쓰는 것은 이들이 어떤 유형의 범죄자이기 이전에 속박을 거부하고 반항했던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것이 책이 ‘자유에 대한 이야기’(75)인 이유이다. 물론 낭만화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분명 범죄자였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있는 어떤 길들여지지 않는 품성, 이들의 삶이 보여주는 어떤 ‘다른’ 살아 있음, 활력이 있다. 노동을 당연시하는 것과는 무관한 어떤 다른 삶, “나는 아직 돈이 남아 있었고 돈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일하거나 고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182)라고 말하는 어떤 다른 삶이 말이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범죄자로 굴러떨어지는 불결한 환경에서 살았고, 폐기물을 주워다 파는 폐기물 경제로 살았으며, 주변부 혹은 쓰고 버리는 인구의 일부였음에도 이들은―다시금 명백히 푸코를 생각나게 하는―가부장적 가족이나 학교와 병원의 훈육 없이, 이러한 훈육에 길들여지지 않은 채 생활했다(198). 이들은 법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198), 법을 조롱하면서 흥겨워했다(199). 이 삶은 책에서 제시되는 ‘양말하기’(작업 중에 담배를 관습적으로 전유하는 행위), ‘토막’(작업 중에 목재를 관습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 권리) 같이, 살기 위해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관습적으로 전유하는, 관습적 전유의 삶이자 노상강도 같은 범죄자의 삶이었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합법적 상업 이면에 존재했던 밀수, 절도, 거래, 장물 수취, 노상강도를 통해 이들은 하인의 속박된 삶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동시에 지배계급으로서의 압제자의 그것이 아닌 어떤 독립성, 힘을 되찾으려 했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처럼 자본이나 국가의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법 바깥에 자신을 두는 이들의 대담한 행동은 런던 노동계급의 적대적 문화의 필수적 부분이 되었다. 다루기 쉽고 순종적인 노동력 형성에 큰 장애물이 된 것이다. 이 시기 이들은 계속해서 교수형을 당했지만 이들을 교수형에 처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죽음의 위협에 굴하지 않는 이들이 지지하거나 대변하는 가치에 도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272).</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새롭게 조직된 생산 방식과 임금 할당</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물론 책은 결국 이들의 삶, 즉 런던에서 증가하던 폭민 같은 인구의 삶이 결국 일련의 법에 의해 통제되었음을 보여준다(280). 이들, 즉 빈둥거리면서 일하던 노동계급과 이들이 슬쩍하는 관습적 전유를 새로운 절차와 양식으로 훈육하는 형사적 제재가 이루어졌고, 이들의 빈둥거림과 전유를 방지하는 기술적 방식이 도입되었다(281). 물론 이러한 도입은 결코 쉽지 않았다. 법을 집행하려는 이들에 대해서 예컨대 1769년의 돌팔매질과 같은 대항테러가 있었듯이 말이다. 책이 말해주듯이 대항테러는 제조업자·치안판사·성직자에 대한 것이었고, 매우 저항적이었다(352). 결국 타이번 교수형이 폐지되고 교수대에서 이루어진 주기적인 대학살 역시 중지됐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생산 방식이 새로이 조직되고 임금 할당도 새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409-410). 더 이상 관습적 전유가 가능하지 않도록 말이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면서 책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살기 위해 범죄를 저질렀고 법을 조롱하며 도망 다녔던, 길들여지지 않고서 저항했던, 훈육에 앞서 자유를 구가하다가 결국 목매달려 죽은 자들의 삶이다. 책은 이렇게 훈육되지 않은 삶과 죽음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저자가 말하듯이 역사가 일련의 집단적 투쟁, 현재의 패배, 현재의 승리에 의해 만들어진다면(201), 저 삶은 물론 패배한 삶, 결국 목매달려 죽은 삶이지만 그럼에도 저항적이었던 삶, 그렇게 이후의 역사를 만든 삶이었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이는 이후의 역사에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삶일 수 있지만 그러나 분명 역사의 어떤 시점에 존재했던 삶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삶에 존재했던 활력을, 아마도 우리에게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혹은 오히려 오늘날에는 아마도 다른 형태로 가능할지도 모를 이 활력을 책에 담아내어 보여주었다.</b></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b></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a href="https://daziwon.com/?page_id=2041&amp;uid=11424&amp;mod=document&amp;pageid=1" target="_blank"><img src="https://contents.sixshop.com/thumbnails/uploadedFiles/155630/product/image_1782868111356_1000.jpg" alt="목매달린 자들의 런던" width="500" class="size-medium wp-image-3153 alignnone" /></a></b></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6년 9월 5일 <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교수신문<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a href="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09873" target="_blank">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09873</a>)에 게재되었습니다.</b></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b></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a href="http://daziwon.com/?page_id=1434&amp;mod=document&amp;uid=9925" target="_blank">초월과 자기-초월 : 아우구스티누스부터 레비나스/키에르케고어까지</a><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메롤드 웨스트폴 지음, 김동규 옮김, 갈무리, 2023)</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신의 초월에 관한 물음은 전통적으로 범신론과 유신론 간의 차이로 정립되어 왔다. 범신론은 신이 전적으로 ‘세계’ 내부에 존재한다고 확언한다. 유신론은 신이 세계 ‘내부에’ 있으면서 ‘외부에’ 존재한다고, 내재적이면서 초월적으로 존재한다고 확언한다. 하이데거의 존재-신학 비판과 타자의 차이를 존중하고 보존하려는 일반적인 포스트모던적 관심에 대하여, 메롤드 웨스트폴은 인간의 자기-초월의 방식과 관련해서 신의 초월을 다시 생각하고자 한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a href="http://daziwon.com/?page_id=1434&amp;mod=document&amp;uid=7655" target="_blank">재신론</a><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리처드 카니 지음, 김동규 옮김, 갈무리, 2021)</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교조적 유신론과 전투적 무신론을 넘어서는 제3의 길을 제안한 책이다. 신의 죽음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가 신성하다고 부르는 것들을 추구하는 좀 더 책임감 있는 방식과 새로운 종류의 종교적 기획을 모색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는가? 저명한 철학자 리처드 카니에 따르면 우리는 가장 오래된 지혜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창조적 ‘무-지’(not knowing)의 순간에 와있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a href="http://daziwon.com/?page_id=1434&amp;mod=document&amp;uid=1329" target="_blank">예술로서의 삶 : 니체에서 푸코까지</a><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재커리 심슨 지음, 김동규‧윤동민 옮김, 갈무리, 2016)</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우리가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말하고, 즐기고, 고통을 받으며 숨을 쉬고 있는 한 자기의 삶에 대한 관심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lt;예술로서의 삶&gt;은 바로 이러한 철학의 물음에 충실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재커리 심슨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좋은 삶인지에 대한 물음에 예술로서의 삶이라는 철학자들의 통찰을 나름의 해법으로 제시한다. 니체,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마리옹, 카뮈, 푸코에 이르기까지 19~20세기를 수놓은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제시한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저자는 ‘예술’을 매개로 정돈한다. 삼육대학교 스미스학부대학에서 추천하는 삼육도서 100선 선정. </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a href="http://daziwon.com/?page_id=1434&amp;mod=document&amp;uid=1341" target="_blank">신정-정치 : 축적의 법과 국법의 이위일체 너머</a><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윤인로 지음, 갈무리, 2017)</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화폐의 힘을 ‘현실적인 신’이라고 표현한 맑스, 자본주의를 기독교의 형질을 띤 것으로 포착한 벤야민, 현대 국가의 주요 개념들이 환속화된 신학의 개념이라고 했던 슈미트, 국법의 진정한 실험실이 교회법이었다고 한 아감벤. 이 책은 그런 성찰들을 따르면서, 신, 신성, 신적인 힘이 경제적 이윤과 정치적 권력 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중심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비평한다.</b></p>]]></description>
			<author><![CDATA[자율평론]]></author>
			<pubDate>Mon, 07 Sep 2026 17:19:3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19"><![CDATA[자율평론 Now!]]></category>
		</item>
				<item>
			<title><![CDATA[[90호] 자본주의 태동기, 노동자·빈민에 대한 조직적 살인이 있었다ㅣ현우식]]></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28]]></link>
			<description><![CDATA[ 
<p style="font-size:20px;text-align:left;"><b>자본주의 태동기, 노동자·빈민에 대한 조직적 살인이 있었다</b></p>
<p style="font-size:18px;text-align:left;"><b>현우식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b></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여기 한 권의 묵직한 역사서가 도착했다. 피터 라인보우의 &lt;목매달린 자들의 런던&gt;(갈무리, 2026)은 에드워드 톰슨의 &lt;영국 노동계급의 형성&gt;을 이을 만한 역작으로 평가받는 역사학 연구이다. 이 책이 갈무리 출판사에서 출판되고 공통장(commons) 연구자인 권범철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 저작 이전에 이미 갈무리 출판사에서 라인보우의 저작 4종(&lt;히드라&gt;, &lt;마그나카르타 선언&gt;, &lt;메이데이&gt;, &lt;도둑이야!&gt;)이 번역됐다. 이는 2010년대 이후 도시와 자연자원 인클로저에 대항하는 다양한 운동을 커먼즈, 즉 공통장의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했던 연구자와 활동가들의 노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역자인 권범철 역시 그의 저작 &lt;예술과 공통장&gt;(갈무리, 2024)에서 드러나듯 '자본의 공통장'이 될 위험에 대항해 공통장을 새롭게 재구성하고자 했던 예술가 공동체의 연구자이자 활동가였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시계추를 좀 더 뒤로 돌려보면 이 책은 1990년대 초반 마르크스주의와 민중·민족 담론의 위기 이후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실비아 페데리치,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등의 사상의 수용을 경유해 이뤄진 한국 자율주의 혹은 포스트오페라이스모(post-operaismo) 운동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한때 몇몇 연구자 집단과 네그리·하트의 &lt;제국&gt;, &lt;다중&gt; 등의 저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이 운동은 2010년대를 거치며 커먼즈 담론과 만나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됐다. 따라서 이 저작의 번역은 한국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궤적이라는 지성사적 관점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하며, 한국 자율주의-포스트오페라이스모-공통장 운동의 지적 활력을 증명하는 괄목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550쪽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을 한정된 지면에서 소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이 저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듯, 산 노동에 대한 조직적인 살인인 사형(capital punishment)과 산 노동에 대한 죽은 노동의 억압인 자본의 처벌(punishment of capital)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더 쉽게 말하자면 이 책은 사형 제도와 자본주의 발전 사이의 관계를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탐구한다. 18세기 런던은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시공간이었다. 이 시기 지배계급은 이른바 '피의 법전(Bloody Code)'을 통해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의 종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라인보우는 타이번(Tyburn)의 교수대가 떠돌이 빈민과 장인들을 순종적인 임금 노동자로 주조하기 위한 폭력적 장치였음을 치밀하게 논증한다. 생존을 위한 하층 계급의 관습적 행위들이 폭력적으로 범죄화되면서, 산 노동은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자본의 질서에 편입되어야만 했던 것이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그렇다면 이런 해석은 공통장 논의와 어떻게 연결될까? 이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재산'의 의미가 변화하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과거 노동자와 빈민들에게는 작업장의 찌꺼기나 자투리 물자를 가져갈 수 있는 관습적 권리가 존재했으며, 이는 일종의 공통장이었다. 하지만 배타적 사적 소유권이 확립되면서 지배계급은 이런 관습적 전유를 '절도'로 재규정했다. 한때 공동체의 유지와 생존을 위한 정당한 권리였던 것들이 사유재산이라는 이름 아래 독점됐고, 이를 지키려던 노동계급의 실천은 사형이라는 극단적 폭력으로 억압당했다. 즉, 재산 개념의 재정의는 곧 공통장에 대한 인클로저이자, 공통장을 지키려는 이들에 대한 합법적 처형 과정이었던 셈이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따라서 이들이 처형당한 역사,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목이 만든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자본의 논리를 공식 역사로 은밀하게 승인해왔던 지배적 역사쓰기에 균열을 내기 위한 실천이다. 이 책은 톰슨의 &lt;영국 노동계급의 형성&gt;과 같이 '아래로부터'의 역사 쓰기를 지향하지만, 톰슨과는 달리 라인보우의 서사는 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대신 그는 역사적으로 상이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이 어떻게 '자유'를 실현해 나갔는지에 주목한다.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감금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탈감금(excarceration)의 의미를 노동 조건에 내재한 착취에 맞서서 비공식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스스로를 조직하는 방법이라는 관점에서 확장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탈감금은 사실상 공통장을 인클로저하고자 하는 자본의 논리에 맞선 노동계급의 투쟁이다. 역사적으로 이 과정이 노동계급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주지는 않았지만,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여전히 자본의 착취와 수탈이 산 노동의 물질적, 비물질적 노동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탈감금을 통해 자유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동계급의 역사는 지금 이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런던의 교수대 아래서 산 노동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 했던 공통장의 감각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착취와 수탈 속에서 삶의 기반을 위협받고 있는 노동계급의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은 자본의 폭력적 질서에 맞서 끊임없이 대안적 삶의 양식을 발명해 온 노동계급의 역사를 복원함으로써 오늘날 새로운 공통장의 정치를 상상하기 위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b></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b></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a href="https://daziwon.com/?page_id=2041&amp;uid=11424&amp;mod=document&amp;pageid=1" target="_blank"><img src="https://contents.sixshop.com/thumbnails/uploadedFiles/155630/product/image_1782868111356_1000.jpg" alt="목매달린 자들의 런던" width="500" class="size-medium wp-image-3153 alignnone" /></a></b></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6년 9월 5일 <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프레시안<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a href="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6090414174664863" target="_blank">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6090414174664863</a>)에 게재되었습니다.</b></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b></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a href="http://daziwon.com/?page_id=1434&amp;mod=document&amp;uid=9925" target="_blank">초월과 자기-초월 : 아우구스티누스부터 레비나스/키에르케고어까지</a><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메롤드 웨스트폴 지음, 김동규 옮김, 갈무리, 2023)</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신의 초월에 관한 물음은 전통적으로 범신론과 유신론 간의 차이로 정립되어 왔다. 범신론은 신이 전적으로 ‘세계’ 내부에 존재한다고 확언한다. 유신론은 신이 세계 ‘내부에’ 있으면서 ‘외부에’ 존재한다고, 내재적이면서 초월적으로 존재한다고 확언한다. 하이데거의 존재-신학 비판과 타자의 차이를 존중하고 보존하려는 일반적인 포스트모던적 관심에 대하여, 메롤드 웨스트폴은 인간의 자기-초월의 방식과 관련해서 신의 초월을 다시 생각하고자 한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a href="http://daziwon.com/?page_id=1434&amp;mod=document&amp;uid=7655" target="_blank">재신론</a><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리처드 카니 지음, 김동규 옮김, 갈무리, 2021)</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교조적 유신론과 전투적 무신론을 넘어서는 제3의 길을 제안한 책이다. 신의 죽음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가 신성하다고 부르는 것들을 추구하는 좀 더 책임감 있는 방식과 새로운 종류의 종교적 기획을 모색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는가? 저명한 철학자 리처드 카니에 따르면 우리는 가장 오래된 지혜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창조적 ‘무-지’(not knowing)의 순간에 와있다.</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a href="http://daziwon.com/?page_id=1434&amp;mod=document&amp;uid=1329" target="_blank">예술로서의 삶 : 니체에서 푸코까지</a><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재커리 심슨 지음, 김동규‧윤동민 옮김, 갈무리, 2016)</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우리가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말하고, 즐기고, 고통을 받으며 숨을 쉬고 있는 한 자기의 삶에 대한 관심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lt;예술로서의 삶&gt;은 바로 이러한 철학의 물음에 충실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재커리 심슨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좋은 삶인지에 대한 물음에 예술로서의 삶이라는 철학자들의 통찰을 나름의 해법으로 제시한다. 니체,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마리옹, 카뮈, 푸코에 이르기까지 19~20세기를 수놓은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제시한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저자는 ‘예술’을 매개로 정돈한다. 삼육대학교 스미스학부대학에서 추천하는 삼육도서 100선 선정. </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a href="http://daziwon.com/?page_id=1434&amp;mod=document&amp;uid=1341" target="_blank">신정-정치 : 축적의 법과 국법의 이위일체 너머</a><span style="font-family:'맑은 고딕', 'Malgun Gothic';">』</span>(윤인로 지음, 갈무리, 2017)</b></p><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bottom:1.5em;"><b>화폐의 힘을 ‘현실적인 신’이라고 표현한 맑스, 자본주의를 기독교의 형질을 띤 것으로 포착한 벤야민, 현대 국가의 주요 개념들이 환속화된 신학의 개념이라고 했던 슈미트, 국법의 진정한 실험실이 교회법이었다고 한 아감벤. 이 책은 그런 성찰들을 따르면서, 신, 신성, 신적인 힘이 경제적 이윤과 정치적 권력 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중심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비평한다.</b></p>]]></description>
			<author><![CDATA[자율평론]]></author>
			<pubDate>Mon, 07 Sep 2026 16:53:3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19"><![CDATA[자율평론 Now!]]></category>
		</item>
				<item>
			<title><![CDATA[[프레시안 2026.09.05] 자본주의 태동기, 노동자·빈민에 대한 조직적 살인이 있었다 / 현우식(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27]]></link>
			<description><![CDATA[<br /><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프레시안 2026.09.05] 자본주의 태동기, 노동자·빈민에 대한 조직적 살인이 있었다 / 현우식(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기사 원문 보기 : <a href="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6090414174664863" target="_blank" title="기사 페이지로 이동">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6090414174664863</a></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justify;"><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b>여기 한 권의 묵직한 역사서가 도착했다. 피터 라인보우의 &lt;목매달린 자들의 런던&gt;(갈무리, 2026)은 에드워드 톰슨의 &lt;영국 노동계급의 형성&gt;을 이을 만한 역작으로 평가받는 역사학 연구이다. 이 책이 갈무리 출판사에서 출판되고 공통장(commons) 연구자인 권범철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 저작 이전에 이미 갈무리 출판사에서 라인보우의 저작 4종(&lt;히드라&gt;, &lt;마그나카르타 선언&gt;, &lt;메이데이&gt;, &lt;도둑이야!&gt;)이 번역됐다. 이는 2010년대 이후 도시와 자연자원 인클로저에 대항하는 다양한 운동을 커먼즈, 즉 공통장의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했던 연구자와 활동가들의 노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역자인 권범철 역시 그의 저작 &lt;예술과 공통장&gt;(갈무리, 2024)에서 드러나듯 '자본의 공통장'이 될 위험에 대항해 공통장을 새롭게 재구성하고자 했던 예술가 공동체의 연구자이자 활동가였다. <br /><br />시계추를 좀 더 뒤로 돌려보면 이 책은 1990년대 초반 마르크스주의와 민중·민족 담론의 위기 이후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실비아 페데리치,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등의 사상의 수용을 경유해 이뤄진 한국 자율주의 혹은 포스트오페라이스모(post-operaismo) 운동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한때 몇몇 연구자 집단과 네그리·하트의 &lt;제국&gt;, &lt;다중&gt; 등의 저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이 운동은 2010년대를 거치며 커먼즈 담론과 만나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됐다. 따라서 이 저작의 번역은 한국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궤적이라는 지성사적 관점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하며, 한국 자율주의-포스트오페라이스모-공통장 운동의 지적 활력을 증명하는 괄목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br /><br />550쪽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을 한정된 지면에서 소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이 저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듯, 산 노동에 대한 조직적인 살인인 사형(capital punishment)과 산 노동에 대한 죽은 노동의 억압인 자본의 처벌(punishment of capital)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br /><br />더 쉽게 말하자면 이 책은 사형 제도와 자본주의 발전 사이의 관계를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탐구한다. 18세기 런던은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시공간이었다. 이 시기 지배계급은 이른바 '피의 법전(Bloody Code)'을 통해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의 종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라인보우는 타이번(Tyburn)의 교수대가 떠돌이 빈민과 장인들을 순종적인 임금 노동자로 주조하기 위한 폭력적 장치였음을 치밀하게 논증한다. 생존을 위한 하층 계급의 관습적 행위들이 폭력적으로 범죄화되면서, 산 노동은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자본의 질서에 편입되어야만 했던 것이다.<br /><br />그렇다면 이런 해석은 공통장 논의와 어떻게 연결될까? 이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재산'의 의미가 변화하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과거 노동자와 빈민들에게는 작업장의 찌꺼기나 자투리 물자를 가져갈 수 있는 관습적 권리가 존재했으며, 이는 일종의 공통장이었다. 하지만 배타적 사적 소유권이 확립되면서 지배계급은 이런 관습적 전유를 '절도'로 재규정했다. 한때 공동체의 유지와 생존을 위한 정당한 권리였던 것들이 사유재산이라는 이름 아래 독점됐고, 이를 지키려던 노동계급의 실천은 사형이라는 극단적 폭력으로 억압당했다. 즉, 재산 개념의 재정의는 곧 공통장에 대한 인클로저이자, 공통장을 지키려는 이들에 대한 합법적 처형 과정이었던 셈이다.<br /><br />따라서 이들이 처형당한 역사,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목이 만든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자본의 논리를 공식 역사로 은밀하게 승인해왔던 지배적 역사쓰기에 균열을 내기 위한 실천이다. 이 책은 톰슨의 &lt;영국 노동계급의 형성&gt;과 같이 '아래로부터'의 역사 쓰기를 지향하지만, 톰슨과는 달리 라인보우의 서사는 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대신 그는 역사적으로 상이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이 어떻게 '자유'를 실현해 나갔는지에 주목한다.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감금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탈감금(excarceration)의 의미를 노동 조건에 내재한 착취에 맞서서 비공식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스스로를 조직하는 방법이라는 관점에서 확장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br /><br />탈감금은 사실상 공통장을 인클로저하고자 하는 자본의 논리에 맞선 노동계급의 투쟁이다. 역사적으로 이 과정이 노동계급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주지는 않았지만,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여전히 자본의 착취와 수탈이 산 노동의 물질적, 비물질적 노동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탈감금을 통해 자유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동계급의 역사는 지금 이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런던의 교수대 아래서 산 노동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 했던 공통장의 감각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착취와 수탈 속에서 삶의 기반을 위협받고 있는 노동계급의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은 자본의 폭력적 질서에 맞서 끊임없이 대안적 삶의 양식을 발명해 온 노동계급의 역사를 복원함으로써 오늘날 새로운 공통장의 정치를 상상하기 위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b></font></p><br /><br /><blockquote class="q4" style="font-family:'맑은 고딕';"><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center;"><a href="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05792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05/79/cover500/8961954180_1.jpg" width="128" style="width:128px;" alt="" /></a><br /><br /><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font-style:normal;"><b>『목매달린 자들의 런던』 | 피터 라인보우 지음 | 권범철 옮김 | 갈무리 (2026)</b></font></p></blockquote>]]></description>
			<author><![CDATA[갈무리]]></author>
			<pubDate>Sun, 06 Sep 2026 11:13: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50"><![CDATA[서평과 인터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TAPic 104호] 『광장 비판』 서문, 1장 토론]]></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26]]></link>
			<description><![CDATA[<p style="color:#000000;font-size:24px;text-align:left;font-weight:bold;margin:0;">2026년 9월 5일 대담기록</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30:40 · 조정환
안녕하세요.</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30:46 · 신은주alma
안녕하세요!</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30:52 · 김정연
안녕하세요</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30:58 · BOM
안녕하세요</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33:15 · BOM
반갑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34:37 · BOM
오늘 열린세미나는 『광장 비판』 (조형근 외, 코라초 프레스, 2026)의 서문과 첫 번째 글에 관해 토론하도록 하겠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34:47 · BOM
본격적으로 세미나를 시작해도 좋을까요?</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34:53 · 조정환
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35:03 · 김정연
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35:56 · BOM
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36:05 · 신은주alma
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36:45 · BOM
그럼 우선 ‘서문’(저자들과 함께 천정환)을 다루고 휴식 후에 책의 첫 번째 글인 '광장의 열기, 시장의 열기'(조형근)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38:17 · BOM
먼저 책의 서문을 읽으면서 생각하신 바를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미리 생각하신 토론거리, 인상적인 구절 질문거리 등을 자유롭게 올려주세요.</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41:17 · 조정환
제목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민주주의를 위임해 버리지 않기"로 되어 있고 부제가 '광장 이후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로 되어 있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42:29 · 조정환
광장의 사건 이후로 민주주의가 이재명 대통령에게로 위임되고 있다는 느낌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입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47:52 · 조정환
지지율 계속 상승세여서 70%에 육박한 적도 있으니 이재명 정부의 행보가 광장 주체들에 의해 민주주의의 행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문제의식이 제목 속에 담겨 있는 것으로 읽히고 광장의 사회대개혁 요구가 사회대개혁위원회를 통한 조직적 요구로 표현되었지만 결국 이재명 정부의 행보로 환수되어 그 자체로는 무력화되고 있다는 평가가 담겨 있습니다. 사회대개혁위원회가 (대통령 직속이 아니라) 국무조정실 산하기구로 편성된 것에 대한 비판(?)과 함께입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48:50 · 김정연
서문의 필자는 탄핵광장을 비상행동이 주도했다고 보았고 이재명 대통령 집권 이후 비상행동의 주요 인사들이 “사회대개혁위원회”의 핵심이 된 것을 “탄핵광장이 국무총리 국무조정실 산하기구로 되었다”고 해석했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51:02 · 김정연
대통령 직속이 아니라는 점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낮은 수준에서 우리의 '광장'은 민주당 및 위성정당들과 손잡고 개혁 요구를 "정부의 공식 정책 논의 체계로 연결한다는 장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모르겠다. 국무조정실이 어떤 실질적 권한을 갖는지, 국회의원들이나 장관들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는지도 잘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대통령 직속'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11쪽)</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51:44 · 조정환
네, 필자는 "비상행동이 탄핵광장을 주도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랬을까요?</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53:42 · BOM
저자가 비상행동이 탄핵광장을 주도했다고 보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54:57 · 조정환
비상행동 자체가 몇몇 위원장들의 지도력으로 환원될 수 없는 1700여 개 이상 단체의 연합체입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55:03 · 김정연
저도 그 부분이 좀 의아했습니다. 탄핵광장은 물민다중이 함께 만든 것인데 비상행동이 주도했다고만 쓰면 지워지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55:23 · 김정연
필자가 비상행동의 역할을 확대 해석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58:05 · 조정환
게다가 탄핵광장에는 야5당연석회의가 결합했고 여기에 비상행동에 결합하지 않은 촛불행동의 독자적 집회가 탄핵광장의 일부였기 때문에 비상행동이 탄핵광장을 주도했다는 표현은 과도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9:58:52 · 조정환
무엇보다도 이 셋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시민다중들의 자발적 참여를 고려해야 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시</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01:12 · 김정연
“현재 한국의 '사회개혁'은 이재명 대통령의 관심사에 따라 진행 중(?)인 것처럼 보인다.”(15) 같은 문장도 시야를 좀 좁게 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한정된 화면(예를 들면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것, 청와대 대변인이 말하는 것, 이재명 대통령이 말하는 것)에 국한해서 현상을 서술하는 것 같았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고 국무회의의 의제가 아니더라도 여러 곳에서 사회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01:28 · 조정환
대의적 환원은 시민다중에서 비상행동.촛불행동.야5당연석회의를 거쳐 사회대개혁위원회로 이어지는데 비상행동 주도론은 이 환원의 한 고리에 해당한다고 생각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03:10 · 조정환
그 대의적 환원은 개혁의제의 분리를 포함합니다. 선택되어 추진되는 의제와 배제되어 억압되는 의제로의 양극 분리랄까요.</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05:34 · 김정연
그리고 11쪽에 ‘자신[윤석열]과 마누라를 향해’라는 구절이 있는데 ‘마누라’라는 말은 특히 타인의 배우자에 대해서 쓰면 비하하는 표현입니다. 여성 비하의 뉘앙스가 있어서 아쉽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08:03 · 조정환
12~3쪽에 사회대개혁위원회의 194개 개혁의제 중 긴급 실행과제 20개가 제시되어 있는데 이 중 정치민주분과의 "검찰 수사권 완전 폐지와 형사·사법 절차 민주화" 과제는 대논쟁을 거쳐 2026년 7월 31일 입법 완료되었고 10월 2일부터 시행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13:25 · BOM
서문에서 대한민국은 대통령과 청와대의 관심이 곧 국정 전체의 방향이자 구체적인 과제 자체가 된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표현도 등장했는데요, 해당 구절을 읽으며 그렇다면 제왕적이지 않은 대통령제도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일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15:55 · 조정환
선택된 개혁의제라고 볼 수 있겠지요. 사회개혁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민다중보다) 엘리트 특수 집단이 필요로 하는 개혁만을 추진한다는 점이 문제일 것입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18:57 · 조정환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표현은 대통령제 자체가 왕정제도의 잔재라는 입장을 피력하는 데 사용되기보다 내각제를 지지하는 데 더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각제 하에서의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지만 정부수반이 아니라서 실질 행정권한을 총리와 내각이 행사하기 때문에 그 권한이 제왕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24:01 · 조정환
이재명 정부는 광장 요구와 직결되지 않은 부동산 시장개혁, 상법개정을 통한 주식시장 개혁을 검찰개혁과 별도로 추진했는데 이 역시 실용주의적으로 선택된 개혁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면 기후정의개혁이나 시민주권강화를 위한 개혁은 거의 추진되지 않거나 오히려 역행하는 모습도 보입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24:17 · 김정연
찾아보니 사회대개혁위원회는 계속 활동 중입니다. 다른 기구/단체들과 토론회들을 개최했다는 뉴스들이 있습니다
<a href="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526775?sid=100" target="_blank">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526775?sid=100</a></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24:27 · BOM
설명 감사합니다. 검색해 보니 한국도 잠깐이지만 의원내각제를 시행한 적이 있었네요.</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24:31 · 김정연
<a href="https://m.newspim.com/news/view/20260821000619" target="_blank">https://m.newspim.com/news/view/20260821000619</a></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26:23 · 김정연
서문 필자가 인용한 사회대개혁위원회 1차 국민 보고 대회 긴급 과제 중에서 기후 관련 과제는 한 줄이었습니다
· 2026년 봄철 대형산불 예방과 피해 최소화를 위한 종합 대책</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27:25 · 조정환
동자동 쪽방촌 기사 아래에 반도체 수익 재분배도 개혁 과제 중의 하나로 다룬다는 기사가 보이네요. <a href="https://m.newspim.com/news/view/20260723001139" target="_blank">https://m.newspim.com/news/view/20260723001139</a></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28:11 · 조정환
"수익"을 "초과수익"으로 고쳐야 논란의 여지가 없겠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28:17 · 김정연
구성원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아래와 같습니다
국무조정실이 공개한 사개위 위원 이름과 소속은 다음과 같다(이름 가나다순). ▲강대중(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강새봄(전 진보대학생넷 대표) ▲곽수종(연합뉴스TV ‘곽수종 프리즘’ 진행) ▲권미경(전국공공연대노련 위원장) ▲김경민(부위원장·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김귀옥(한성대 교양학부 교수) ▲김동엽(북한대학원대 교수) ▲김성달(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 ▲김찬(전국시국회의 시민정치위원) ▲김태현(한겨레 일과사람연구소 이사장) ▲박석운(위원장·한국진보연대 대표) ▲박용석(전 민주노동연구원 원장) ▲박재만(참여자치21 공동대표) ▲박지원(부위원장·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박지우(광복8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 ▲박철웅(목원대 연극영화영상학부 교수)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봉건우(더불어민주당 전국대학생위원장) ▲선지혜(광주 송정역시장 갱소년 대표) ▲송애경(사회적협동조합플러스포항 이사장) ▲신지혜(기본소득당 최고위원) ▲안성용(한국사회과학연구회 이사) ▲안재훈(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엄기홍(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오광영(국무총리비서실 시민사회비서관·정부 위원) ▲오기출(푸른아시아 상임이사) ▲오인환(진보당 기획부총장) ▲오준호(기본소득정책연구소 소장) ▲이경민(민주노점상전국연합 기획실장) ▲이나영(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이수미(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소장) ▲이승석(기본소득당 최고위원) ▲이재정(불평등물어가는범청년행동 대표) ▲이진순(성공회대 겸임교수) ▲임수강(생산과포용금융연구회 부회장) ▲장재옥(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정세은(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정영이(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조영선(전 민변 회장) ▲주제준(한국진보연대 정책위원장) ▲차성환(광장연합정치 부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천현우(사회민주당 자문위원) ▲최병성(기후재난연구소 상임대표) ▲최은영(한국도시연구소 소장) ▲한동건(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사무총장) ▲황순식(전국시국회의 대외협력위원장) ▲황준환(장애인권대학생네트워크 고문</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35:28 · 김정연
필자가 생각하는 광장정치와 제도정치의 바람직한 관계가 어떤 것인지도 궁금했습니다.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열망과 관심이 언제나 드높고, 광장 정치에서는 세계 최고의 노하우를 가져 못된 대통령을 쫓아내는 데 최고의 전통과 경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다른 차원에서는 무능하다. 한국의 제도적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는 1987년 이후 계속 답보 상태다.“(18)</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35:41 · 조정환
필자는 광장과 제도 정치 사이의 관계가 "뭐여야 하는지 모르겠다"(15)고 표현합니다. 이 '모름'에 대한 토로는 (1)광장 정치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안다 (2) 광장을 주도한 시민사회가 정부에 참여하고 또 실제 권력을 갖는다 해서 개혁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는 두 가지 경험적 앎을 거친 것인데 광장이 제도정치를 섭정하는 경로는 아예 고려에서 빠져 있어 아쉬웠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37:36 · BOM
"광장 너머, 양당 너머"라는 소장의 서두에, "한국인들은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열망과 관심이 언제나 드높고, 광장 정치에서는 세계 최고의 노하우를 가"졌지만, "'민주주의'의 다른 차원에서는 무능하다."라는 진단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광장 비판"이 된 이유를 이야기하는 구절 같았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38:42 · 조정환
다중섭정의 경로는 (1)국가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서 (2)다중광장의 힘으로 사회개혁을 스스로 추진할 뿐만 아니라 (3)대의제도 영역의 운동을 발동, 감시, 중단, 재구성하는 정치를 지칭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40:28 · 김정연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절대민주주의』 같은 책들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43:19 · BOM
광장이 제도정치를 섭정하는 아이디어가 차단된 상태에서는 '광장 비판'도 어느 수준에서는 한계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46:13 · 조정환
대의제도에 주권을 위임하지 않을 필요를 강조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문재인 정권은 촛불광장을 횡령했다")의 심층 취지에는 공감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47:57 · 조정환
그리고 대통령의 관심이나 개인기에 개혁과제를 맡기지 않는, 국무조정실에 의해 조정되는데 그치지 않는 광장이 필요하다는 데에도 공감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51:02 · 조정환
그런데 이로부터 "다른 광장 즉 새로운 민주주의의 공간과 제도가 절실하다. 광장의 주체도 제도의 주체도 바뀌어야 하겠다"는 방향을 도출하고 "번영과 민주주의로 충만한 듯한 착각을 주는 일상과 경제와 교육과 정치의 조건 자체에 대해 고민하고 바꿔야 한다"로 나가는 것은 기존 논의에서 논리적 순서를 건너뛰어 비약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52:09 · BOM
네, 동감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53:41 · 조정환
위임의 위기 앞에서 어떻게 광장의 자기조직화와 자기가치화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야 할 지점에서 "다른 광장"의 논의로 나아가고 "광장 주체 변경"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54:40 · 조정환
대의제도에 어떻게 한계와 방향을 부여할 것인가, 어떤 힘으로 그것을 수행할 것인가를 물어야 할 대목에서 "제도의 주체 변경"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56:15 · BOM
네, 앞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계속 주목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56:31 · BOM
이쯤에서 휴식시간을 가지면 어떨까요?</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56:37 · 조정환
좋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56:49 · 김정연
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57:23 · BOM
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57:36 · BOM
휴식 후 9시 7분에 다시 시작하겠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0:58:28 · 이명선
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시</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07:33 · BOM
세미나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08:01 · 조정환
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08:16 · 김정연
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08:21 · BOM
책의 첫 번째 글인 "광장의 열기, 시장의 열기"를 읽으며 생각하신 바를 올려주세요, 미리 생각하신 토론거리, 인상적인 구절, 관련 자료, 질문 등을 자유롭게 올려주세요.</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11:13 · 김정연
1장의 필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란으로 민주주의가 취약해진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취약해진 탓에 내란이 일어난 것이다. 취약한 민주주의의 한복판에 불평등이 있다.”(31~32)</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12:00 · 조정환
서문이 광장과 제도를 약간 외부자적 시선에서(달리 표현하면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1장 '광장의 열기, 시장의 열기'는 시장의 불평등 현실을 고발하면서 평등을 하나의 이상적/규범적 기준으로 제시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14:25 · 김정연
그러면서 내란 발발 1주일 뒤 민주당 국힘이 힘을 합쳐 금투세 폐지를 처리한 것을 상징적인 사건으로 들었습니다.
“두 당은 정국의 긴박함을 변명으로 들었다. 자본시장을 안정시키려면 투자자들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논리였다. 내란의 와중에도 투자자들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했다. 노동자들을 위하는 데 이렇게 진심 전력이었던 적이 있었을까?”(33)</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14:36 · 조정환
불평등에 대한 고찰은 주로 경제적 시각에서 이루어져 경제적 불평등이 초점에 놓이고 그래서 정치민주화보다 경제민주화에 주안점이 두어진 논의로 읽혔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18:16 · 김정연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두 방식이 있다고 보고 있었고요
1. 슘페터식 이해 : 자유경쟁을 통해 대표자를 선출할 수 있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2. 랑시에르식 이해 : 인민의 지배, 주권자들 사이의 실질적 평등의 확보
이렇게 대비시키고 후자를 지지하는 듯했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20:26 · 김정연
한국 사회의 불평등이 정말 심각하다는 필자의 서술은 공감이 되었습니다.
“자산 불평등 심화와 노동시장의 구조적 격차 확대, 미흡한 재분배 정책, 수도권 집중 등으로 인해 여성, 청년, 노인, 지방 거주민 등 사회적 약자의 고통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51~52)</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21:11 · 조정환
2024년 12월 10일 탄핵정국의 핵심기에 금투세 폐지안이 양당 합의하에 통과되었다는 것은 필자의 지적처럼 확실히 의미심장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23:00 · 조정환
윤석열 내란을 1차 진압한 시민다중의 섭정운동이 금투세에 대해서까지 섭정했다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섭정력의 당대적 한계를 보여줍니다) 어떤 결론이 나왔을까도 궁금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26:08 · 김정연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질문해 보고 싶었던 대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학 사태는 특권이 용납되지 않는 세상, 능력 있는 개인이 공정하게 경쟁하고 승리할 수 있는 기회 평등한 세상이라는 시장주의 개혁의 비전이 이제 차별의 언어와 결합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듬해 서울교통공사에서의 무기계약직 노동자 모욕 사태 역시 같은 맥락에 있었다. 이제 능력에 입각한 자유로운 경쟁은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하고 합리화하는 기득권 이데올로기의 언어로 전화했다. 이전까지 능력주의 공정성은 기득권 보수정당을 향한 칼날이었다. 하지만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를 거치며 이들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신봉한 시장과 자유경쟁의 이데올로기는 그들 자신을 겨누는 무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다.”(66~67)</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27:55 · 조정환
그런데 당시 시민다중이 금투세까지 의식적으로 섭정 범위에 포함시키지 못했겠지만 두 당이 시민다중의 강력한 섭정력을 수동적으로 흡수하여 그것을 법안 의결에 반영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가정은, 양당이 내란을 진압하는 시민다중을 '자산가격과 투자환경을 과세를 통해 훼손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투자자 대중으로 읽었을 때를 가정하는 것입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31:47 · 조정환
필자는 금투세 폐지에서 실익을 얻을 수 없는 개미투자자들이 금투세 폐지를 지지한 것에 대해 불편함을 표현하면서 양당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고통보다는 시세 차익을 좇는 자본투자자들의 이해관계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 없음."</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32:43 · 조정환
여기서 개미투자자들은 시세 차익을 좇는 자본투자자들과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사람들로 분류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34:06 · 조정환
그런데 현실에서는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노동자)이 "시세 차익을 좇는 투자자들"과 상당 부분 겹칩니다. 양자가 구분되는 개인이나 집단이 아닙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36:17 · 김정연
“상위 1%는 물론 '개미'로 불리는 개인투자자도 금투세 도입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세금 낼 일도 없는데 왜 그랬을까? 상위 1% 큰손이 시장을 떠나면 시장이 타격을 입을까 하는 우려에 더해 법체계상 외국인·기관투자자에 비해 개인이 차별받게 된다며 분노한 측면도 있다. 여기서 이들의 우려와 분노가 정확하고 옳은지 여부를 따질 일은 아니다. 생사를 가르는 내란과 진압의 와중에도 개인투자자들의 이해관계를 챙기는 것이 그토록 중요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고통보다는 시세 차익을 좇는 자본 투자자들의 이해관계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었다.”(33-34)</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38:24 · 조정환
질문하신 위의 인용문은 "시장주의 개혁=능력주의 공정이 예전에는 기득권 보수정당을 향한 칼날로 자유주의 엘리트들의 무기였는데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 이후에는 자유주의 엘리트 자신을 겨누는 무기로도 전화했다”로 해석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39:10 · 김정연
설명 감사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45:09 · 조정환
이렇게 노동자와 투자자가 중첩되는 현실에서 노동자(땀)의 입장을 선별하는 정책을 기대하는 논리가 어떻게 설명력을 얻을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개미투자자들의 상당 부분은 일확천금을 좇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노동소득으로 부족한 생존자금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투자행위에 나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46:12 · 조정환
시간이 없으니 좀 서둘러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47:19 · BOM
네, 부탁드립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47:34 · 조정환
일단 불평등의 현실을 지적한 것은 누구나가 공감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또 실제 사실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 그 중요성이 덜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48:53 · 조정환
소득불평등은 완화되는데 자산불평등은 심화되고 있다는 주장을 통해 불평등의 현재적 성격이 잘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50:13 · 조정환
그리고 자산 불평등이 민주주의의 큰 위협 요인이라는 생각에도 동의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52:15 · 조정환
그리고 이 위협을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지반으로서 '공통된 것the common이 주권자들 사이에서 부식되고 위협받고 있는 것"으로 읽는 것도 공감이 되었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53:27 · 조정환
그런데 공통적인 것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끝나고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한국 사회의 공리로 된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넘어갑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57:09 · 조정환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평등민주주의에 대한 주장(76)으로 나아가는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데 평등민주주의에서 '평등'은 사회경제적 평등에 집중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1:58:31 · 조정환
사회경제적 평등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는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방법으로 제안됩니다. "불평등의 축소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최우선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시</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1:23 · 조정환
이러한 논지전개 속에서 공통적인 것이 평등의 달성을 위해 어떤 역할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정치적으로 평등을 달성하는 공통적인 것은 어떻게 구축될 수 있는가, 평등과 공통의 달성에서 시민다중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등의 질문들이 누락된다고 느꼈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2:09 · BOM
네, 글의 진단에 따르면 복지 국가 혹은 케인스주의의 부활이 대안으로 제시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2:52 · 조정환
시간이 부족하니 여기서 '평등은 공통과 구성의 이념과 결합될 때 정의의 중요한 원칙으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단상만 제시하고 추후 시간 날 때 보충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3:33 · 조정환
평등을 강령으로 내건 다른 정당의 등장을 바라는 입장으로도 볼 수 있겠지요.</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3:44 · BOM
네 시간이 다 되어 오늘 세미나는 여기서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4:04 · BOM
다음 시간에는 이어지는 두 편의 글을 다루는 것이 어떨까요?</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4:15 · 조정환
좋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모임에서 뵙겠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4:48 · 김정연
감사합니다
9월 19일 토요일 저녁 7시 반에 뵙겠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4:49 · 장귀
감사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5:01 · BOM
네, 다음 세미나는 9월 19일(토요일)입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5:05 · 이명선
감사합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5:25 · BOM
"두 개의 자유, 퀴어한 연대의 불가능성" 두 편의 글로 만나겠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5:27 · 조정환
다음 세미나는 그다음 주가 아닌가요?</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5:49 · BOM
네, 19일이 맞습니다 ^^</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5:55 · 조정환
^^</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6:07 · 신은주alma
이모티콘</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6:21 · BOM
세미나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보내시고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2:06:34 · 신은주alma
이모티콘</p>
<p style="color:#000000;font-size:24px;text-align:left;font-weight:bold;margin:0;">정리</p>
<p style="color:#000000;font-size:24px;text-align:left;font-weight:bold;margin:0;">1. 대담의 요지</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 광장 이후의 핵심 문제는 민주주의의 위임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서문은 광장의 요구가 이재명 정부와 사회대개혁위원회의 제도적 경로로 흡수되는 현실을 문제 삼는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토론은 이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광장의 힘을 정부나 시민사회 자임지도부에 위임하지 않는 구체적 정치형식이 무엇인지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 탄핵광장은 단일 조직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시민다중이 함께 구성한 장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빛의 혁명에 참가한 비상행동은 1,700여 개 단체의 연합체였고, 야5당연석회의·촛불행동이 별도로 연합해서 움직였다. 어느 조직에도 속하지 않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도 함께 존재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따라서 ‘비상행동이 탄핵광장을 주도했다’는 표현은 광장의 복수성과 자발성을 과도하게 대표조직으로 환원할 위험이 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3. 광장과 제도의 관계는 참여나 편입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광장의 대표자들이 정부기구에 들어가거나 개혁 요구가 공식 정책과정에 연결되는 것만으로 광장의 정치가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필요한 것은 광장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서도 사회개혁을 스스로 추진하고, 대의제도의 작용을 발동·감시·중단·재구성하는 ‘다중섭정’의 경로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4. 불평등은 민주주의 외부의 경제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취약하게 만드는 내부 조건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제1장은 소득불평등의 부분적 완화에도 자산불평등과 노동시장 격차가 심화되고 있음을 지적한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토론은 자산불평등이 시민 사이의 공통 기반과 실질적 주권능력을 침식한다는 진단에 동의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5. 평등은 공통과 구성의 문제로 확장되어야 한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불평등 축소만을 목표로 삼으면 대안이 복지국가나 케인스주의의 복원, 또는 평등을 강령으로 내건 새로운 정당의 등장으로 제한될 수 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평등을 누가 어떤 힘으로 달성할 것인지, 공통적인 것을 어떻게 생산·관리할 것인지, 시민다중이 그 과정에서 어떤 구성적 역할을 맡을 것인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p>
<p style="color:#000000;font-size:24px;text-align:left;font-weight:bold;margin:0;">2. 핵심주장</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대의적 환원은 주체의 환원과 의제의 선별을 동시에 수반한다. 시민다중의 복수적 요구가 대표조직과 정부기구를 거치면서 일부 의제는 채택되고 다른 의제는 배제될 수 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광장의 제도화와 광장의 국가화는 구별되어야 한다. 광장의 구성력을 지속 가능한 권리와 제도로 만드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을 정부의 정책결정 체계에 흡수하는 것은 광장의 자율성을 약화할 수 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제왕적 대통령제 비판은 권력형태의 변경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로 옮기는 문제보다 시민다중이 대표권력을 어떻게 통제하고 방향을 부여할 것인지가 더 근본적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금투세 폐지 사례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투자자 이해가 우선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노동자와 투자자를 서로 분리된 집단으로 설정하면 노동소득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투자에 참여하는 현실에서 주체성의 복합성을 설명하기 어렵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능력주의적 공정은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하고 정당화할 수 있다. 그것이 과거에는 세습적 기득권을 비판하는 언어였지만, 이후에는 불안정노동자의 권리 확대와 사회적 재분배를 ‘무임승차’로 공격하는 언어로 전환될 수 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평등은 공통과 구성에 결합되어야 한다. 평등은 단순한 결과의 조정이 아니라 공통의 삶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그 생산·분배·통치의 규칙을 함께 결정할 수 있는 조건이어야 한다.</p>
<p style="color:#000000;font-size:24px;text-align:left;font-weight:bold;margin:0;">3. 특이점</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1. 책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책의 논리적 비약을 내부에서 비판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민주주의의 위임과 불평등의 심각성에는 공감했지만, 그 진단에서 ‘다른 광장’과 ‘주체 변경’으로 곧바로 나아가는 과정에 빠진 매개를 문제 삼았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2. 광장 대 제도라는 이분법을 다중섭정이라는 제3의 경로로 전환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광장이 국가를 장악하거나 국가에 흡수되는 두 선택지 대신, 광장이 대의제도를 지속적으로 감독하고 잠정화하는 관계를 제시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3. 노동자 대 투자자라는 이분법을 비판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오늘날 다수의 노동자는 임금소득만으로 생존하기 어려워 금융투자에도 참여한다. 이 중첩성을 통해 금융화가 계급구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질문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4. 평등론에서 잠시 언급된 ‘공통된 것’을 토론의 중심 문제로 다시 불러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불평등을 공통의 부식으로 진단한다면, 대안 역시 재분배에 그치지 않고 공통의 생산과 공통장의 섭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5. 내용뿐 아니라 표현과 관찰 위치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타인의 배우자를 지칭하는 비하적 표현을 지적했고, 텔레비전·대통령·국무회의 중심의 시야가 제도 밖에서 진행되는 사회개혁을 보이지 않게 할 수 있음을 문제 삼았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6. 텍스트와 현실 자료를 교차 검토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사회대개혁위원회의 활동·구성·과제와 관련 입법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책의 진단을 현재적 현실과 대조했다.</p>
<p style="color:#000000;font-size:24px;text-align:left;font-weight:bold;margin:0;">4. 대담의 성과</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공통의 합의점을 확인했다. 민주주의를 대통령과 정당에 위임해서는 안 되며, 자산불평등과 능력주의가 민주주의를 취약하게 만든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책의 설명에서 누락된 정치적 매개를 드러냈다. 광장의 힘이 어떻게 자기조직화되고 제도정치를 섭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명확히 제기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평등·공통·구성의 개념적 연결을 마련했다. 평등을 규범적 원칙으로, 공통을 사회적 관계와 물질적 기반으로, 구성을 그것을 생산·관리·수정하는 정치적 실천으로 연결할 수 있는 토대를 형성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변화한 계급주체를 포착했다. 노동자이면서 투자자인 복합적 주체를 통해 금융화된 현실에서는 전통적인 노동 대 자본의 대립을 더 정교하게 재구성해야 함을 확인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후속 토론의 핵심 질문을 도출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광장의 자기조직화와 자기가치화는 어떤 제도로 지속될 수 있는가?</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시민다중은 대의제도를 어떤 권리와 장치를 통해 발동·감시·중단·재구성할 수 있는가?</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경제적 평등을 달성하는 공통장은 누가 어떻게 구축하고 관리하는가?</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노동자와 투자자가 중첩되는 금융화 시대에 평등화의 주체와 대상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 평등을 복지국가적 재분배에 한정하지 않고 공통의 생산·소유·통치로 확장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이 대화의 가장 중요한 초점은 ‘광장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대표자의 교체나 새로운 제도의 도입만으로 답하지 않고, 시민다중이 공통을 생산하면서 대표권력을 지속적으로 섭정하는 구성적 민주주의의 문제로 전환하는 것에 놓여있다.</p>]]></description>
			<author><![CDATA[자율평론]]></author>
			<pubDate>Sun, 06 Sep 2026 11:05:1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80"><![CDATA[뉴스테러 Tapic]]></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수신문 2026.09.05] 교수대에 오른 범죄자들, 그들은 왜 저항했나 / 박서현(제주대 학술연구교수)]]></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24]]></link>
			<description><![CDATA[<br /><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교수신문 2026.09.05] 교수대에 오른 범죄자들, 그들은 왜 저항했나 / 박서현(제주대 학술연구교수)</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기사 원문 보기 : <a href="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09873" target="_blank" title="기사 페이지로 이동">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09873</a></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justify;"><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b>『목매달린 자들의 런던』은 역사서이다. 이 역사서의 소재는 18세기 런던의 타이번 교수대에서 목매달린 자들의 죽음과 삶이다. 이들의 죽음과 삶, 이 역사를 저자인 역사학자 피터 라인보우는 왜 다룬 것일까. 이 역사에서 무엇이 문제라고 본 것일까. 혹은 이 역사에서 무엇을 읽어내려 한 것일까.<br /><br />책에서 다뤄진 이들은 범죄를 저질러서 목매달린 이들, 범죄자들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범죄자들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세력이었다고 말한다(22). 어째서 그러한지를 확인하기 전에 분명한 것은 저자가 이들을 이런 세력으로, 어떤 힘 있는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이들은 부자의 것을 취하는 사회적 범죄자이자 빈자의 것도 취하는 악질 범죄자였다. 그러나 이런 유형들로 이들을 성급히 분류한다면, 이들로부터 무언가를 읽어내야 하는 주의력이 흐려진다(24). 나아가, 이들로부터 무언가를 읽어내려 했던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한 우리의 주의력도 흐려질 것이다.<br /><br />타이번에서 목매달린 이들은 분명 아주 가난한 이들이었다. 당시 유죄 판결을 받은 이의 아내가 이야기하듯이 “그가 유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그가 땜장이이고 가난한 사람이며, 그래서 멸시받고 정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113).’” 이들은 피억압 계급, 무산 계급에 속했다(115). 노동 빈민이었다(156).<br /><br />도둑질은 이들에게 생존의 문제였다. 이들은 예컨대 더 이상 길드 조직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산업 조직의 변화 속에서 노동 분업의 파괴적 충격에 노출된 직인들, 소규모 마스터들, 도제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런 변화 속에서 생존의 문제를 겪게 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의해야 하는 것은 이들이 그저 생존의 곤란을 겪은 사람들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들이 동시에 이러한 변화 속에서 착취의 새로운 조건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43).<br /><br />『목매달린 자들의 런던』은 이들이 얼마나 착취받았는지를, 억압받았는지를 서술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이들이 단순히 억압 속에 살았던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거부하고 반항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책이 그리는 것은 억압받는, 비참한 삶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책은 착취의 새로운 조건에 맞서 싸우다 교수형에 처해진 이들의 반항과 싸움을 그린다.<br /><br />약자·빈자 대 권력자와 유산자의 갈등<br /><br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 스스로 말하듯이 책의 배경이 런던이고 시대는 18세기이며 주제는 사형인데 책의 논제가 ‘계급투쟁’인 것은 이 때문이다(8). 타이번에서 목매달린 이들이 계급투쟁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저자에 따르면, 이 교수형은 도시의 계급 간 분쟁에서 중심적 사건이었다(17). 교수형은 분명 범죄자를 목매달 수 있는 주권 권력의 존재를 과시했다. 아울러 사유재산을 존중하라는 교훈 또한 과시했다. 타이번이 드러내는 것은 약자와 빈자 대 권력자와 유산자의 갈등이었다(21). 생산수단을 빼앗긴 빈자가 생활수단을 전유하는 도둑질, 이러한 도시범죄는 18세기 갈등으로서의 계급투쟁의 역사를 보여주었다(22).<br /><br />저자는 도둑질, 범죄가 자본주의의 변화를 유발했다고 말한다(22). 이는 소위 계급 관점의 역전으로 알려진 이탈리아 오빼라이스모(Operaismo, 노동자주의)의 투쟁의 우선성을 생각나게 한다. 충분히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발전은 계급투쟁으로부터 비롯한다. 노동계급의 투쟁이 자본의 위기를 가져온다. 자본은 기술의 발전 등을 통해 이러한 위기에 대응한다. 이는 노동계급의 분열을 가져오고 이로부터 결국 자본은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이는 충분히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변화의 주도성이 노동계급의 투쟁에 있다는 것이었다. 책에서 다뤄지는 사회는 이런 사회가 아니다.<br /><br />아울러 책에서 다뤄지는 범죄자 역시 조직된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본을 위기로 몰아넣으며 그 변화를 추동한 노동계급의 투쟁과 유사하게, 목매달린 이들의 행위는 통치자들이 이를 방지하기 위한 나름의 선제적 조치를 행사하도록 자극했고 변화를 가져왔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이들의 역사를 18세기 노동계급 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22). 이들의 행위, 즉 범죄에 대한 처벌이었던 사형이 런던의 노동시장의 새로운 재생산을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198). 그러니 무슨 상처받은 삶이 아닌, 이들의 행위, 범죄가 사회 변화의 동력이 된 것이다.<br /><br />죽음을 불사하며 반항하는 이들의 역사<br /><br />여기서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명확하다. 지배받고 억압받음에도, 범죄를 저지를지언정, 밟았을 때 죽은 척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니라 꿈틀하며 뛰어오르는, 비순종적인 이들의 반항, 살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저항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며, 이러한 역사를 그리니 말이다. 미셸 푸코가 말하는, 책에서도 언급되는, ‘대감금’ 시대에 사람들은 훈육되어 길들여진 존재로 생산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죽음을 불사하며 반항하는 이들이 있다.<br /><br />저자는 감금을 강조하는 푸코의 논의가 흡사 정부와 사회의 지배자들을 전능한 존재로 보이게 한다고 말한다(30). 물론―푸코의 문제의식이 권력과 예속의 문제만이 아닌 자유의 실천을 향해 있을지언정―푸코의 저술 이면에 있는 문제의식을 읽기보다 표면을 읽어낸 저자의 독해가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명백히 푸코를 생각나게 하는 진술로 저자는 감금이 노역소·공장·학교·병원·배에서 펼쳐졌을 때, 그 대항점으로 탈출·도주·탈영·이주·거부 역시 있었다고 말한다(53).<br /><br />여기서 저자가 말하려는 것 혹은 오히려 저자가 그러하듯이 우리가 역사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속박과 훈육을 거부하고, 범죄로 나타났을지언정, 탈출·도주·탈영·이주·거부로 드러나는 자유를 구가하려 했던 빈자들의 삶과 그 활력이다. 대감금의 시대에 앞서서 존재했던 이들의 삶과 죽음이, 죽음을 불사하고 속박을 거부하는 이들의 자유로운 삶이, 이러한 삶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것이다.<br /><br />이들에 대한 역사를 쓰는 것은 이들이 어떤 유형의 범죄자이기 이전에 속박을 거부하고 반항했던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것이 책이 ‘자유에 대한 이야기’(75)인 이유이다. 물론 낭만화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분명 범죄자였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있는 어떤 길들여지지 않는 품성, 이들의 삶이 보여주는 어떤 ‘다른’ 살아 있음, 활력이 있다. 노동을 당연시하는 것과는 무관한 어떤 다른 삶, “나는 아직 돈이 남아 있었고 돈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일하거나 고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182)라고 말하는 어떤 다른 삶이 말이다.<br /><br />범죄자로 굴러떨어지는 불결한 환경에서 살았고, 폐기물을 주워다 파는 폐기물 경제로 살았으며, 주변부 혹은 쓰고 버리는 인구의 일부였음에도 이들은―다시금 명백히 푸코를 생각나게 하는―가부장적 가족이나 학교와 병원의 훈육 없이, 이러한 훈육에 길들여지지 않은 채 생활했다(198). 이들은 법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198), 법을 조롱하면서 흥겨워했다(199). 이 삶은 책에서 제시되는 ‘양말하기’(작업 중에 담배를 관습적으로 전유하는 행위), ‘토막’(작업 중에 목재를 관습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 권리) 같이, 살기 위해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관습적으로 전유하는, 관습적 전유의 삶이자 노상강도 같은 범죄자의 삶이었다.<br /><br />합법적 상업 이면에 존재했던 밀수, 절도, 거래, 장물 수취, 노상강도를 통해 이들은 하인의 속박된 삶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동시에 지배계급으로서의 압제자의 그것이 아닌 어떤 독립성, 힘을 되찾으려 했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처럼 자본이나 국가의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법 바깥에 자신을 두는 이들의 대담한 행동은 런던 노동계급의 적대적 문화의 필수적 부분이 되었다. 다루기 쉽고 순종적인 노동력 형성에 큰 장애물이 된 것이다. 이 시기 이들은 계속해서 교수형을 당했지만 이들을 교수형에 처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죽음의 위협에 굴하지 않는 이들이 지지하거나 대변하는 가치에 도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272).<br /><br />새롭게 조직된 생산 방식과 임금 할당<br /><br />물론 책은 결국 이들의 삶, 즉 런던에서 증가하던 폭민 같은 인구의 삶이 결국 일련의 법에 의해 통제되었음을 보여준다(280). 이들, 즉 빈둥거리면서 일하던 노동계급과 이들이 슬쩍하는 관습적 전유를 새로운 절차와 양식으로 훈육하는 형사적 제재가 이루어졌고, 이들의 빈둥거림과 전유를 방지하는 기술적 방식이 도입되었다(281). 물론 이러한 도입은 결코 쉽지 않았다. 법을 집행하려는 이들에 대해서 예컨대 1769년의 돌팔매질과 같은 대항테러가 있었듯이 말이다. 책이 말해주듯이 대항테러는 제조업자·치안판사·성직자에 대한 것이었고, 매우 저항적이었다(352). 결국 타이번 교수형이 폐지되고 교수대에서 이루어진 주기적인 대학살 역시 중지됐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생산 방식이 새로이 조직되고 임금 할당도 새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409-410). 더 이상 관습적 전유가 가능하지 않도록 말이다.<br /><br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면서 책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살기 위해 범죄를 저질렀고 법을 조롱하며 도망 다녔던, 길들여지지 않고서 저항했던, 훈육에 앞서 자유를 구가하다가 결국 목매달려 죽은 자들의 삶이다. 책은 이렇게 훈육되지 않은 삶과 죽음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저자가 말하듯이 역사가 일련의 집단적 투쟁, 현재의 패배, 현재의 승리에 의해 만들어진다면(201), 저 삶은 물론 패배한 삶, 결국 목매달려 죽은 삶이지만 그럼에도 저항적이었던 삶, 그렇게 이후의 역사를 만든 삶이었다.<br /><br />이는 이후의 역사에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삶일 수 있지만 그러나 분명 역사의 어떤 시점에 존재했던 삶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삶에 존재했던 활력을, 아마도 우리에게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혹은 오히려 오늘날에는 아마도 다른 형태로 가능할지도 모를 이 활력을 책에 담아내어 보여주었다.</b></font></p><br /><br /><blockquote class="q4" style="font-family:'맑은 고딕';"><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center;"><a href="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05792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05/79/cover500/8961954180_1.jpg" width="128" style="width:128px;" alt="" /></a><br /><br /><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font-style:normal;"><b>『목매달린 자들의 런던』 | 피터 라인보우 지음 | 권범철 옮김 | 갈무리 (2026)</b></font></p></blockquote>]]></description>
			<author><![CDATA[갈무리]]></author>
			<pubDate>Sun, 06 Sep 2026 10:57:2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50"><![CDATA[서평과 인터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수신문 2026.09.02] 새로 나온 책 / 유기체지향 존재론 / 현지용 기자]]></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23]]></link>
			<description><![CDATA[<br /><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교수신문 2026.09.02] 새로 나온 책 / 유기체지향 존재론 / 현지용 기자</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기사 원문 보기 : <a href="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09700" target="_blank" title="기사 페이지로 이동">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09700</a></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justify;"><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b>『유기체지향 존재론』은 유기체 개념을 현대 철학에 중추적인 것이자 인류세 너머의 미래 철학에 핵심적인 것으로서 재고찰한다.<br /><br />리투아니아 철학자 아우드로네 주카우스카이테는 유기체 개념을 자기생성 체계에 의거하여 논의하고 그 폐쇄성과 개방성 사이, 목적과 우연성 사이의 긴장을 검토한다.</b></font></p><br /><br /><blockquote class="q4" style="font-family:'맑은 고딕';"><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center;"><a href="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860409" target="_blank"><img src="https://daziwon.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42/202608/6a88509a550d39472464.jpg" width="128" style="width:128px;" alt="" /></a><br /><br /><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font-style:normal;"><b>『유기체지향 존재론』 | 아우드로네 주카우스카이테 지음 | 김효진 옮김 | 갈무리 (2026)</b></font></p></blockquote>]]></description>
			<author><![CDATA[갈무리]]></author>
			<pubDate>Thu, 03 Sep 2026 11:39:3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50"><![CDATA[서평과 인터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6.07.31]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읽고, 전쟁을 통해 미래를 묻다 / 방명수 에디터]]></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22]]></link>
			<description><![CDATA[<br /><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6.07.31]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읽고, 전쟁을 통해 미래를 묻다 / 방명수 에디터</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기사 원문 보기 : <a href="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0441" target="_blank" title="기사 페이지로 이동">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0441</a></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justify;"><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b>『목매달린 자들의 런던』에서 사회사의 거장 피터 라인보우는 18세기 런던의 교수형을 통해 자본주의의 탄생을 추적한다. 공개 처형은 범죄자를 처벌하는 의식이 아니라 노동을 길들이고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국가 권력의 연극이었다. 교수대와 항구, 시장과 감옥을 따라가다 보면 처벌의 역사가 곧 노동의 역사이며, 법의 역사가 계급의 역사였음을 깨닫게 된다.</b></font></p><br /><br /><blockquote class="q4" style="font-family:'맑은 고딕';"><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center;"><a href="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05792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05/79/cover500/8961954180_1.jpg" width="128" style="width:128px;" alt="" /></a><br /><br /><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font-style:normal;"><b>『목매달린 자들의 런던』 | 피터 라인보우 지음 | 권범철 옮김 | 갈무리 (2026)</b></font></p></blockquote>]]></description>
			<author><![CDATA[갈무리]]></author>
			<pubDate>Thu, 03 Sep 2026 11:38: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50"><![CDATA[서평과 인터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6.07.02] [서평] 목에 걸린 사람들은 어떻게 자본주의의 역사를 만들었는가 / 성일권 에디터]]></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21]]></link>
			<description><![CDATA[<br /><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6.07.02] [서평] 목에 걸린 사람들은 어떻게 자본주의의 역사를 만들었는가 / 성일권 에디터</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기사 원문 보기 : <a href="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87" target="_blank" title="기사 페이지로 이동">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87</a></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justify;"><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b>역사는 대개 승자의 이름으로 기록된다. 왕과 장군, 정치가와 기업가가 시대를 움직인 인물로 기억된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학자 피터 라인보우는 정반대의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가 바라본 곳은 18세기 런던의 타이번(Tyburn) 교수대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은 노동자와 빈민, 여성과 이주민, 선원과 노예들이 그의 역사책에서는 비로소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b></font></p><br /><br /><blockquote class="q4" style="font-family:'맑은 고딕';"><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center;"><a href="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05792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05/79/cover500/8961954180_1.jpg" width="128" style="width:128px;" alt="" /></a><br /><br /><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font-style:normal;"><b>『목매달린 자들의 런던』 | 피터 라인보우 지음 | 권범철 옮김 | 갈무리 (2026)</b></font></p></blockquote>]]></description>
			<author><![CDATA[갈무리]]></author>
			<pubDate>Thu, 03 Sep 2026 11:37:2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50"><![CDATA[서평과 인터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플랫 레터 2026.08.14] ‘왕의 친딸’ 놔두고 ‘36촌 양자’ 찾는 나라 / 김서영 기자]]></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20]]></link>
			<description><![CDATA[<br /><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플랫 레터 2026.08.14] ‘왕의 친딸’ 놔두고 ‘36촌 양자’ 찾는 나라 / 김서영 기자</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기사 원문 보기 : <a href="https://www.khan.co.kr/newsletter/flat/article/202608140700071" target="_blank" title="기사 페이지로 이동">https://www.khan.co.kr/newsletter/flat/article/202608140700071</a></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justify;"><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b>선구적 페미니스트이자 노동운동가, 반인종주의 활동가인 셀마 제임스(96)의 글이 처음으로 한국어로 정식 번역돼 나왔습니다. &lt;성, 인종, 그리고 계급&gt;(갈무리)은 ‘여성의 자리’부터 60년 가까이 써온 글 중 주요 저작 30여 편을 모은 선집이에요.</b></font></p><br /><br /><blockquote class="q4" style="font-family:'맑은 고딕';"><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center;"><a href="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491116" target="_blank"><img src="https://daziwon.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42/202607/6a69ad14d6b784991914.jpg" width="128" style="width:128px;" alt="" /></a><br /><br /><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font-style:normal;"><b>『성, 인종, 그리고 계급』 | 셀마 제임스 지음 | 서창현 옮김 | 갈무리 (2026)</b></font></p></blockquote>]]></description>
			<author><![CDATA[갈무리]]></author>
			<pubDate>Tue, 01 Sep 2026 15:18:3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50"><![CDATA[서평과 인터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새전북신문 2026.08.13] '성, 인종, 그리고 계급'의 또 다른 장점은 그 실용성 / 이종근 기자]]></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19]]></link>
			<description><![CDATA[<br /><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새전북신문 2026.08.13] '성, 인종, 그리고 계급'의 또 다른 장점은 그 실용성 / 이종근 기자</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기사 원문 보기 : <a href="https://sjbnews.com/news/news.php?number=885275" target="_blank" title="기사 페이지로 이동">https://sjbnews.com/news/news.php?number=885275</a></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justify;"><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b>'성, 인종, 그리고 계급(지은이 셀마 제임스 , 옮긴이 서창현ㅡ 펴낸 곳 갈무리)'은 사유와 행동의 관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능력 있는 조직가가 실제로 어떻게 일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전달한다. 우리는 이론을 찬양하는 데 급급하여 실천의 기예, 즉 사람들이 지닌 삶의 모든 모순 속에서도 그들과 함께 일하는 민주적 기량을 너무 자주 망각하곤 한다.</b></font></p><br /><br /><blockquote class="q4" style="font-family:'맑은 고딕';"><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center;"><a href="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491116" target="_blank"><img src="https://daziwon.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42/202607/6a69ad14d6b784991914.jpg" width="128" style="width:128px;" alt="" /></a><br /><br /><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font-style:normal;"><b>『성, 인종, 그리고 계급』 | 셀마 제임스 지음 | 서창현 옮김 | 갈무리 (2026)</b></font></p></blockquote>]]></description>
			<author><![CDATA[갈무리]]></author>
			<pubDate>Tue, 01 Sep 2026 15:16:0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50"><![CDATA[서평과 인터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90호] 이재명 정부의 진로 논쟁과 구성적 민주주의의 문제 (조정환)]]></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18]]></link>
			<description><![CDATA[<p style="font-size:24px;line-height:1.6em;text-align:left;margin:0;font-weight:bold;">이재명 정부의 진로 논쟁과 구성적 민주주의의 문제</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
조정환

복잡한 문제를 압축적으로 다루기 위해 명제 형식으로 정리한 아래 글은 자유주의와 민중민족주의 스펙트럼 속에서 전개되어 온 최근의 정치논쟁이 감정적이고 소모적인 대립으로 전개되면서 그 안에 담긴 합리적 핵심이 묻혀 가고 있고 불행하게도 분열만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나는 이 논쟁이 다루고 있는 역사적·정치적 대상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을 정리하고, 그 논쟁을 ‘빛의 혁명’의 발전 속에서 다중의 구성력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또 그것이 소모적으로 회전하게 되는 구조 혹은 그것의 한계를 살펴 논쟁이 나아갈 다른 출구를 열어 보고자 한다. 이 논쟁에서는 이재명 정부에 대한 태도 문제(비판인가 옹호인가)가 감정을 자극하는 정동적 촉발점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을 논리적 쟁점으로 전화시키기 위해서는 빛의 혁명으로 등장한 이재명 정권의 현재적 위상과 성격에 대한 규명이 불가피하게 요구된다.</p>
<p style="font-size:21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I. 민주당 당대표 경선 시기 논쟁에 관하여</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1. 2026년 민주당 당대표 경선(주로 김민석 대 정청래의 대결)은 이재명 정권의 2년 차 정치노선을 둘러싼 최초의 대규모 당내 투쟁으로 발생했다. 그것이 지금은 당의 담을 넘은 사회적 갈등으로 확산 중이다. 2026년 8월 17일 김민석은 최종 54.08%를 얻어 45.92%를 얻은 정청래를 누르고 당대표가 되었다. 그러나 권리당원·대의원·국민여론조사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고, 국민여론조사에서는 오히려 정청래가 근소하게 앞섰다. 선출직 최고위원 5명 가운데에는 언론이 친정청래계로 분류한 인물이 3명 당선되었다. 따라서 경선 결과를 “친이재명 세력이 반이재명 세력을 압도했다”는 식으로 읽는 것은 실제 표심의 다층성을 지운다. 내가 보기에 경선에서 표출된 실제 대립은 최소한 세 층위였다. 첫째, 당청 관계 안정 및 대통령 중심의 국정수행 대 당의 상대적 자율성. 둘째, 중도·보수 확장 대 확장을 위한 민주진보 기반구축. 셋째, 개혁의 속도와 강도, 특히 검찰개혁의 완결성(보완수사권 폐지)을 둘러싼 갈등.</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2. 김민석의 정치적 위치는 ‘친명’ 그 자체라기보다 이재명 정부의 통치역량을 중심으로 당을 재조직하려는 ‘정부중심형 대의정치’에 가깝다. 김민석 승리의 주요 배경은 윤석열의 내란 이후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관료제·검찰·수구정당·보수언론·기득권 세력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통치의 안정성과 집행력이 필요하며 이런 상황에서 당·정·청이 서로 소진적인 충돌을 벌이면 개혁정부 자체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노선이 강화되면 정치적 판단과 결정의 흐름이 아래로부터 위로(시민→ 당 → 정부)의 방향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정부 → 당 → 시민)의 방향으로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집권 2년 차 초기에 이미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결정 흐름이 더 확산되고 공고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민석 노선에는 개혁정부의 안정이라는 필요의 충족 외에 당과 시민을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정부의 지지기반으로 위계적으로 배치할 위험이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3. 정청래의 정치적 위치도 단순히 ‘반명’으로 규정될 수 없다. 당원주권과 1인1표, 강한 검찰개혁을 요구한 그의 정치는 다중의 주권활력을 정당 틀 내부로 끌어들여 대의정당인 민주당을 더 민주화하는 동력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청래 정치를 단순히 개인적 당권욕이나 이재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탈정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해석이다. 물론 그의 정치가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구성적 민주주의의 실행은 아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4. 유시민의 개입을 이재명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개입으로 보는 것 역시 부당하다. 개입의 정동적 분위기와 공격적 표현방식의 문제를 괄호치고 그 내용에 집중하면, 그것은 이재명 정부의 사회정치적 기반을 어떻게 더 강하게 구성할 것인가를 둘러싼 전략적 비판이었다. 유시민은 이재명의 외연확장 전략을 “증축”이 아닌 “재건축”에 비유하며 그것의 위험성을 격렬하게 비판했고, 검찰개혁이 지체되는 이유를 대통령의 태도에서 찾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논리를 단순히 “반이재명”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의 핵심 명제는 대략, 민주진보의 기존 사회적 기반을 해체하면서 중도·보수를 획득하려 하지 말고 이재명 정권을 탄생시킨 민주진보 연합을 강화한 뒤 그 힘을 바탕으로 외연을 확장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수사·기소의 완전 분리를 포함하는 검찰개혁은 민주진보연합의 필수과제로 제시된다. 즉 문제는 확장 자체가 아니라 확장의 기초와 실행순서였다. 이 점에서 이재명 정부의 실용 우선 행보에 대한 유시민의 비판은 이재명 정권의 정치적 기반을 더 단단하게 만들자는 취지를 벗어나지 않는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5. 그런데 왜 그 취지가 정반대의 것으로 받아들여졌을까? [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유시민의 개입이 갖는 한계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 틀 속에서 풀 수 없는 문제를 이재명 정권 대의민주주의의 노선이라는 제한된 틀 속에서 제기하고 또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유시민의 대안은 대체로 민주진보 정치세력의 재건 위에 중도보수로 확장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어떤 대표세력들을 어떻게 재결합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대의주의 관점에서 재결합할 세력은 정치지도자, 민주진보정당들, 시민사회 지도층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2024~25년 빛의 혁명은 “시민다중이 어떻게 스스로 정치적 판단과 결정의 주체로 작용할 것인가?” “어떻게 시민다중이 민주주의를 새롭게 구성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12월 3일 밤 국회의사당 앞에 모인 시민들의 자기결정(내란진압)과 대의제적 요구(탄핵)가 제기한 것이 이 문제다. 유시민도 ABC론에서 A를 가치집단으로 불러 이익집단인 B와 구분한다. 하지만 그는 그 A를 촛불다중, 응원봉다중과 연결짓지는 않는다. 그는 그것을 이재명 정권에 대한 지지세력으로, 그 내부의 특수한 성격의 집단으로 제한함으로써 대의제 틀 속에서만 다룬다. 백낙청이 유시민의 담론에는 촛불혁명에 대한 관심이 전혀(’1도’)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이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유시민은 빛의 혁명의 문제지평보다 훨씬 좁은 지평에서 (빛의 혁명이 세운 정권인) 이재명 정권이 직면한 문제들을 다룬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6. 검찰개혁 논쟁은 이번 갈등의 지평과 그 한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청와대는 이재명 대통령이 수사·기소 분리 원칙에서 흔들린 적이 없다고 반박했지만, 유시민은 완전분리 검찰개혁이 실질적으로 지체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기존 논쟁은 검찰의 수사권을 어디(경찰·중수청 등)로 옮길 것인가, 검찰에게 보완수사권을 얼마나 남길 것인가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즉 검찰개혁 논쟁은 국가형벌권 내부의 권력 배분 문제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빛의 혁명의 관점에서 보면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묻히고 있다. 수사와 기소의 문제가 시민의 민주적 통제 없이 검찰·경찰·중수청·공소청 같은 국가기관들 사이에서 완벽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가? ‘보완’이라는 문제는 이 국가기관들 사이에서 국가형벌의 문제가 충분하게 다루어질 수 없다는 것, 대의민주주의적 형벌체계의 한계를 벗어나는 잔여와 잉여의 이름이었다. 그 보완의 문제는 경찰이나 중수청에 수사를 맡긴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검찰에게 보완수사권을 부여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 가대위는 정부에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의 수사권을 요구한 바 있다. 수사기관이 수사(진실규명)를 방해하고 있음이 명백한 것으로 느껴지는 때에도 왜 시민다중은 관망할 수밖에 없는가? 이 질문을 회피함으로써, 즉 검찰과 경찰이 갖는 대의주의적 한계에 대한 성찰을 회피함으로써, 국가형벌 과정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통제의 경로를 회피함으로써 ‘보완’의 실제적 가능성은 봉쇄된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7. 검찰개혁은 ‘수사기관 대 기소기관’의 이원적 견제를 넘어 시민다중이라는 근본적 제3항을 도입할 기회였다. 이것은 시민에게 경찰의 강제수사권이나 검사의 기소권을 분배하자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수사발동, 기소심사, 권력형 사건 감독, 시민배심 등을 통해 국가형벌권 자체를 시민의 구성력에 개방하자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검찰개혁의 구조는 수사기관과 기소기관의 견제라는 이항구조에서 시민의 구성력이 수사기관과 기소기관의 견제를 통제하는 3항구조로 바뀐다. 이것은 단순한 권력분립을 넘어선 형사사법의 구성적 민주화의 경로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8. 이러한 경로에 대한 고려가 부재했기 때문에 ‘중도확장 대 진보연합’의 갈등은 출구를 찾지 못하는 폐쇄적 자기연소와 소진의 갈등으로 발전했다. 한편에서는 대통령의 실용주의적 정치성과에서 중도확장으로 나아가는 경로를 중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진보 기반강화를 통해 중도확장하는 경로를 강조했다. 이 두 노선은 대립하지만 공통점이 더 크다. 둘 다 대표세력들의 배열만을 문제 삼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 누락된 것은 시민 자신을 새로운 정치적 능력의 주체로 확대하는 전략이다. 중도확장과는 다른 시민확장, 다중적 확장이다. 시민이 정권의 ‘지지층’에 머물지 않고 정권과 함께 개혁을 구성하는 실질적 주권자로 배치되었다면 진보연합과 중도확장의 논쟁은 새로운 출구, 새로운 기반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p>
<p style="font-size:21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II. 경선 이후 경선논쟁에 대한 평가에 관하여</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9. 김민석의 승리는 ‘정청래 노선의 파멸’을 의미할 수 없다. 김민석이 승리한 것만은 분명하지만 정청래도 45.92%를 얻었고 국민여론조사에서는 앞섰으며 친정청래계 최고위원들도 상당수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선 결과는 한 노선의 파멸이 아니라 당청안정을 더 선호했지만 개혁 지속과 당원주권에 대한 요구 또한 상당하게 잔존한 복합적 선택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10. 김민석 선출 이후 이재명이 낙선자까지 청와대에 초청한 것, 그리고 8월 30일 개각 인선에서 기본소득당, 조국혁신당 인사를 기용하고 보완수사권 폐지를 추진한 인사를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한 것은 백낙청의 ‘반란 진압’ 서사보다 오히려 연합정치의 논리에 더 가깝다. 이 행보 자체는 패배자를 반란세력으로 규정하는 정치가 아니라 경쟁 → 승복 → 통합이라는 대의민주주의의 정상적 문법을 실천한 것으로 볼 수 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11. 백낙청의 ‘반란 진압’론은 이번 전당대회를 가장 강력하게 정치화했지만 동시에 가장 강하게 단순화했다. 백낙청은 전당대회를 2기 촛불정부에 대한 반대세력들의 총궐기로 규정하고, 이재명 대통령과 지지자들이 이를 “진압”했다고 평가했다. 호남 표심을 반란세력을 누르는 “집단지성”의 발현으로 보면서 경선 결과를 사실상 정권교체의 ‘완수’라고까지 평가했다. 이 해석의 강점은 경선을 피상적 언론보도와는 달리 단순한 인물경쟁이 아니라 2024년 촛불혁명 이후 이재명 정부의 향후 노선을 둘러싼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으로 본 것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12. 그러나 백낙청의 해석은 ‘촛불혁명의 성격과 방향’에 대한 주관적 판단에 기초한다. 그 논리는 암묵적으로 ‘이재명 정부는 2기 촛불정부다’, ‘정부의 국정주도권 강화는 촛불의 전진이다’, ‘정부의 주도권에 대한 도전은 반촛불적 반란이다’라는 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촛불이 이재명 정부를 만들었다는 명제와 이재명 정부가 촛불의 현재적 구성력을 온전히 대표한다는 명제는 논리적 인과관계에 있지 않다. 첫째가 역사적 사실판단이라면 둘째는 정치적 대표관계에 대한 주관적 주장이다. 시간 속에서 정권과 다중의 괴리는 언제나 가능하며 내가 보기에는 그 괴리가 지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13. 이 지점에서 백낙청의 변혁적 중도주의는 그것의 정치원리와 긴장한다. 변혁적 중도주의가 ‘변혁’을 추구하는 방법론은 서로 다른 입장에 처해 있고 다른 지향을 가진 광범한 세력의 연합으로서의 ‘중도’였다. 변혁적 중도의 관점에서는 입장을 달리하는 합리적 보수, 자유주의자, 진보세력, 시민사회 등의 연합단위들이 반드시 동일한 이론, 동일한 세계관에 동의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백낙청의 유시민 비판은 갑자기, 분단체제론에 동의하는가, 촛불혁명론에 동의하는가, 이재명 정부를 2기 촛불정부로 인정하는가를 묻고 그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변혁적 중도’ 연합에의 참가자격을 판단하겠다는 태도가 나타난다. 변혁적 중도가 역설적으로 정통주의적 패권주의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14. ‘반란’ ‘진압’ ‘역모’ 등의 언어는 변혁적 중도의 연합정치보다 주권권력의 언어에 더 가깝다. 그것들은 비유일지라도 유시민이 말한 ‘왕정’ 요소의 정신적 실재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언어다. 대의민주주의에서도 민주주의의 최소 문법은 이견과 경쟁, 투표와 승패 결정 이후의 공존이다. ‘반란’이라는 말은 합법적 정통적 중심권력을 설정하고 그에 대항하는 도전자를 부정적으로 규정하는 말이다. 이 어법에서는 민주당 내부의 노선경쟁이 정통주권 대 반역의 문제로 번역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촛불다중의 영구적 구성력(constituent power)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촛불에 의해 구성된 권력(constituted power)의 정당성과 정통성에 대한 변호론에 더 가깝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15. 그럼에도 백낙청은 이러한 진단과 해석이 변혁적 중도주의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변혁적 중도주의가 국가주의와 쉽게 결합될 수 있는 정치철학이며 지금 그것의 국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앞서 언급했듯 변혁적 중도론의 본래 정치기획은 광범한 촛불연합이 자본주의 세계체제 및 분단체제의 극복과 같은 변혁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그것을 수행할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시민에 대한 비판에서는, 그렇게 구성된 ‘2기 촛불정부의 성공’을 위해 시민들이 정부 중심으로 연합하는 것이 변혁과제를 달성하는 수단이라는 식으로, 요컨대 역의 에너지 흐름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정부는 변혁의 도구에서 변혁의 중심적 판정자로 부각되고 촛불시민은 구성자에서 지지자로 격하된다. 나는 이것이 변혁적 중도주의가 국가화하고 있는 양상이라고 본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16. 유시민의 강한 언사가 이 국가화 경향을 오히려 강화하는 효과를 냈다는 점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유시민은 “왕정” “필연적 실패”, “참혹한 결과” 같은 강한 표현으로 이재명 정치를 공격했다. 이 표현은 이론적 비판을 정동적 충돌로 변환시켰다. 이것은 이슈 부각 차원에서는 센세이셔널한 성공을 거두었을지 모르나 그 결과 어떤 개혁이 주장되는가보다 대통령을 왜 그런 식으로 공격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토론의 초점 상실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이 점에서 유시민의 개입은 자신이 주장한 진보연합론을 설득하기보다 오히려 정권방어적 정동(비판세력에 대한 위기감과 배제의 태도 확대)을 활성화하는 역설적 효과를 낳았다.</p>
<p style="font-size:21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III. 논쟁의 성격, 가능성과 한계에 관하여</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17. 이번 논쟁은 민주주의 에너지의 쇠퇴가 아니라 민주주의 에너지의 과잉을 보여준다. 시민들이 무관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원투표, 유튜브, 커뮤니티, SNS, 언론논쟁 등에서 큰 정치적 에너지가 분출했다. 문제는 그 에너지가 어디로 흐르는가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18. 이 논쟁은 ‘어떻게 시민을 더 잘 대표할 것인가’를 둘러싼 대의 경쟁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시민은 왜 계속 대표되어야 하며 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없는가?’라는 문제가 은폐된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19. 이 때문에 논쟁은 정치적으로 활성적이지만 구성적으로는 폐쇄적이다. 시민들은 계속 이재명이 맞는가 유시민이 맞는가, 김민석인가 정청래인가, 친명인가 친청인가, 실용인가 개혁인가라는 닫힌 회로 속에서 선택하도록 요구받았다. 이것은 시민이 수사의 발동, 절차, 결과를 통제하는 제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시민이 어떻게 입법발안권을 행사할 것인가, 시민의회는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AI·데이터에 대한 시민통제권은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등의 질문을 미루도록 만드는 토론 구조였다. 논쟁의 강도가 높은 만큼 선택지는 좁은 정치논쟁이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20. 이러한 논쟁 구도는 빛의 혁명의 정동을 대의적으로 포획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빛의 혁명에서 정동은 분노·불안에서 광장에서의 직접행동과 협력으로 나아갔고 그것이 윤석열의 탄핵과 파면을 가져왔다. 그런데 이번 경선과 전당대회에서 정치적 정동은 분노·불안이 유튜브·커뮤니티에서의 진영화를 거쳐 특정 후보와의 동일시 및 투표로 이동했다. 다중의 정동은 유튜브와 커뮤니티에서의 진영화 회로를 따라 흘렀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21. 이 회로는 정동을 활성화하지만 넘쳐흐름을 봉쇄하는 ‘봉쇄적 활성화’라고 부를 수 있다. 시민들은 정치적으로 활성화된다. 그러나 그 활력이 빛의 혁명의 광장에서와는 달리 대통령, 후보, 빅스피커, 선거라는 대의 회로 바깥으로 충분히 나아가지 못한다. 이것은 탈정치화의 과정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잉정치화를 통한 다중 구성력의 대의민주주의적 봉쇄다. 유시민은 이재명 정권이 오만한 권력자의 모습을 보이며 왕정으로 가려한다고 말했지만 조금 거시적으로 보면 다중 주권을 대표자에게 위임하는 것을 전제로 움직이는 대의민주주의 자체가 왕정의 근대적 변용태이다. 그러므로 그의 민주주의론 자체도 왕정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22. 오늘날 정치적 정동은 단순한 의견에 그치지 않는다. 분노, 지지, 클릭, 조회, 댓글, 구독, 공유는 모두 데이터가 된다. 시민의 정치적 정동은 플랫폼 데이터, 알고리즘, 정치미디어 영향력, 광고 등을 거쳐 다시 정치적 정동으로 순환된다. 시민은 정치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노동과 인지 노동을 플랫폼에 제공한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23. 오늘의 대의민주주의는 ‘정치적 대의제 + 인지적 대의제 + 알고리즘적 대의제’의 복합체로 변화하고 있다. 정치적 대의제는 시민에서 국회의원·대통령 등의 대표자에게로 집중되는 흐름이다. 인지적 대의제는 시민에서 평론가·빅스피커로 집중되는 흐름이다. 알고리즘적 대의제는 시민의 행동이 알고리즘을 거치면서 선별되고 구조화된 선택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결합하면서 시민은 형식적으로 주권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표되고 해석되고 계산되는 종속변수가 된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24. 이 과정은 ‘인지파시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다중 주권의 형해화를 수반한다. 극우 정치는 인지파시즘을 깊게 체화하고 있지만, 인지파시즘은 단순히 극우 정치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다중의 인지, 정동, 욕망, 경험, 데이터, 정치적 활력 등을 계산하고 가치화하여 다중을 통치하는 힘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구조의 이름이다. 그것은 대의적 갈등의 플랫폼화를 통해 시민의 구성력을 데이터로 수집하고 알고리즘을 통해 시민의 욕망을 조정하는 구조다. 인지파시즘은 비극우 대의민주주의 체제 속에서도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정치적 요소다.</p>
<p style="font-size:21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IV. 이재명 정권의 성격에 관하여</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25. 이재명 정권은 빛의 혁명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빛의 혁명을 국가화하는 정권이다. 이 두 성격은 배타적이지 않고 공존적이다. 이재명 정부는 시민다중의 제헌적 구성력에 의해 정당화되고 또 뒷받침된다. 이재명 정권은, 윤석열의 내란을 저지하고 탄핵과 파면함으로써 다중이 열어낸 조기대선에서 선출된 정권으로서의 역사적 정당성을 갖는다. (박진영은 백낙청과의 대담 과정에서 2016 촛불혁명은 아래로부터 시민이 주도한 혁명이었으나 2024 혁명은 시민 주도 없이 민주당이 주도한 혁명이라고 주장했으나 그것은 오판이거나 거짓말이다. 나는 『빛의 혁명 183』에서 시민다중의 주권을 위로부터 찬탈하기 위한 이런 인지적 시도의 부당성과 위험성에 대해 서술했다.) 그러나 정부가 출범하는 순간 혁명적 구성력은 정부정책, 행정, 법률 등으로 번역된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혁명적 구성력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정부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근본 질문은, 빛의 혁명에 의해 만들어진 ‘구성된 권력’과 그 기관들이 빛의 혁명의 ‘구성력’의 발현과 실현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26. 오늘날 이재명 정부를 정치적으로 개혁정부로, 지정학적으로는 평화공존 정부로 부르는 것은 상당한 타당성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정부는 새로운 발전주의 정부라는 경제적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경제정책에서 AI·첨단산업·자본시장·대규모 국가투자·대기업 협력을 통한 성장을 중요한 축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재명 정부는 정치적 민주개혁, 평화공존, 국가주도 기술발전주의를 결합하려는 복합 정부의 성격을 갖는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27. 이재명 정부가 직면한 모순은 ‘국민주권정부’ ‘평화공존’이라는 개혁적 지향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료 하는 ‘구성적 국민’과 AI 발전주의를 위해 필요로 하는 ‘투자자 국민’ 사이의 상충이다. AI, 주식시장, 국민성장펀드, 첨단산업 육성 등이 성장동력으로 설정되면서 국민은 점차 시민이라기보다 투자자, 소비자, 데이터 생산자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빛의 혁명에서 주권자로 등장했던 국민다중은 점차 자산가격 상승과 성장률에 결박된 투자자 대중으로 전화한다. 이 과정에서 다중의 구성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28. 그런데 이재명 정부의 기술발전주의는 단지 국내의 경제정책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작금의 행성제국의 중요한 고리로 배치되어 있다. 행성제국은 AI·반도체·데이터센터·전력망·금융·안보 등의 행성적 스택구조를 갖고 있고 이 구조에서 한국은 반도체 생산, AI 인프라, 전력, 데이터, 금융자본, 안보동맹을 통해 그것의 생산회로에 편입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민다중은 그 제국의 신민이자 행성적 인지자본주의의 그림자 노동자가 된다. 이것은 빛의 혁명의 표현과 확장을 제약하는 거대 환경으로 작용한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29. 백낙청의 변혁적 중도론이 이재명 정부가 직면한 이 문제를 이론적으로 다룰 수 있을까? 백낙청의 이중과제론을 따르면 시민들은 근대에 적응하면서 그 근대를 극복해야 한다. 이 논리 속에서 AI·반도체·첨단산업 육성 자체는 반변혁이라고 할 수 없다. 문제는 이재명 정부가 장기 메가프로젝트로 채택한 이 경로가 근대극복의 역량을 만들 수 있는가, 아니면 자본주의적 근대에 대한 과잉적응인가이다. AI에 대한 소유와 통제 문제, 데이터권, 플랫폼의 공공화, AI가 심화시키는 기후위기의 극복문제, 노동자의 통제권, 인공지능으로 물화된 공통지성의 재구성 등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면, ‘변혁적 중도’론은 ‘2기 촛불정부’라는 이름 하에서 기술발전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축소될 수 있다.</p>
<p style="font-size:21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V. 시민사회 반응에 관하여</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30. 이번 경선을 둘러싼 시민사회는 하나의 ‘촛불민심’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권리당원, 일반국민, 유튜브 시청자, 진보적 시민사회, 이재명 핵심 지지층 등등 사이에 감성, 판단 차이가 있었다. 당대표 선거에서 김민석이 승리했지만 국민여론조사에서는 정청래가 앞섰고 최고위원 선거도 혼합된 결과를 보였다. 따라서 “촛불시민이 김민석을 선택했다”거나 “촛불시민은 정청래를 지지했다”는 주장도 어느 것도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31. 이러한 분화는 다중의 약점이 아니라 본래적 성격이다. 다중은 하나의 국민의지로 환원되지 않는다. 노동자, 투자자, 청년, 여성, 지역주민, 평화운동가, 촛불시민, 당원, 비당원 등의 욕망과 이해는 서로 다르다. 문제는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이 공통장을 생산하는 데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32. 플랫폼 정치에서는 다중의 차이가 공통장을 만들기보다 팬덤적 진영으로 분절될 위험이 크다. 차이가, 토론을 통한 문제의 공통화를 거쳐 새로운 제도화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정동적 자극과 인물적 동일시, 적대감의 알고리즘적 증폭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후자가 강해지면 다중은 공통적 구성력을 생산하기보다 개별화된 정치정동의 군집으로 변한다.</p>
<p style="font-size:21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VI. 논쟁의 발생 근거에 관하여</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33. 이번 논쟁의 가장 깊은 원인은 빛의 혁명이 정권교체에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구성력을 제도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2024~25년 시민들은 국가비상권력보다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이 우위에 있을 수 있다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대선 이후 그 힘을 지속시킬 시민의회 시민발안 시민거부권 시민수사감독권 참여예산권 직접적 정책결정권 등의 제도는 충분히 구축하지 못했다. 구성력은 다시 기존 대의장치의 동원력으로 빠르게 회수되어 갔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34. 이런 의미에서는 민주당 경선의 중요성이 과도하게 부각된 것 자체가 구성적 민주주의의 미발달을 반영한다. 시민이 국가정책에 직접 개입할 다른 제도들이 충분하다면 당대표 선출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이 지금처럼 거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실천적 사건으로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당대표 경선에 혁명의 계승, 개혁의 운명, 정권의 성공, 진보진영의 미래가 과잉집중되는 것은 다른 유효한 정치통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35. 그러므로 이번 갈등은 단순한 계파갈등이 아니라 ‘미제도화된 구성력의 대의제적 환류’ 현상이었다. 빛의 혁명의 구성력이 시민의 직접적 섭정정치로 지속되지 못하면서 당원주권, 대통령 지지, 진보연합, 정치유튜브 등 서로 다른 수준의 대의형태로 분산되어 돌아왔기 때문이다. 김민석-정청래의 경선갈등은 그 표면적 표현형태였다.</p>
<p style="font-size:21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VII. 다중섭정과 구성적 민주주의에 관하여</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36. 빛의 혁명이 보여준 핵심적 교훈은 국민이 국가주권의 단순한 원천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감독하고 중단시킬 수 있는 ‘섭정적 다중’이라는 사실이다. 계엄을 저지한 시민들은 새로운 왕이나 대통령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권력의 작동을 중단시키고 국회를 압박하고 헌정질서를 복원시킨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세습적 성격의 영구적 주권권력과는 다른 힘, 필요한 순간 개입하는 주권활력에 가깝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37. ‘다중섭정’은 국가를 직접 영구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 권력을 끊임없이 잠정화하는 정치형식이다. 섭정적 다중은 국가를 폐지하지도 않고 국가에 완전히 주권을 양도하지도 않는다. 국가는 필요한 행정도구로 존재하지만, 시민이 필요할 때 발동하고 견제하고 중단하고 방향을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구성적 민주주의, 섭정의 민주주의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38. ‘국민주권정부’라는 이름을 주권권력의 강화가 아니라 주권활력의 제도화로 이해하고 그 방향으로 정책중심을 이동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핵심 질문은 ‘국민이 이 정부를 지지하는가?’가 아니라 ‘이 정부 아래에서 국민다중의 직접적인 정치능력이 실제로 커지는가?’이다. 검찰개혁은 이 전환의 첫 실험장이었다. 수사·기소를 철저히 분리하되, 그 형벌의 과정을 시민의 발동권, 심사권, 감독권, 거부권에 개방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검찰개혁을 권력기관 개혁을 넘어 국민주권의 구성적 전환의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39. 이재명 정부의 AI 정책은 쟁점으로 등장하고 있는 두 번째 실험장이다. 행성적 규모의 인지자본주의에서는 데이터, 알고리즘, 모델, 컴퓨팅 인프라가 새로운 생산수단이다. 행성규모의 인지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는 정부가 AI 강국을 만드는 것을 통해 달성될 수 없다. 민주주의의 문제는 누가 데이터를 전유하는가, 누가 모델을 통제하는가, 다중의 공통지성이 누구의 자본으로 전화되는가를 살피고 시민이 알고리즘을 중단시킬 권리를 갖고 있는가를 부단히 확인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40. 시민의 인지노동을 공통화하지 못하면 빛의 혁명의 구성력은 인지자본으로 흡수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이 생산한 정보, 경험, 정동, 네트워크, 집단지성은 플랫폼과 AI의 원천 데이터로 전유된다. 그것이 사적으로 축적되어 알고리즘을 통해 다시 시민을 통치하는 데 사용된다면 다중의 구성력은 변혁의 힘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통치력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인지민주화 대신 인지파시즘화가 전개된다. 이것이 전 지구적 AI 제국의 구축과정에서 이재명 정부가 AI화의 ‘대체 불가능한’ 첨단기지=대한민국을 자임하면서 내놓는 메가프로젝트에 내재된 위험성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41. 이 과정에 내재한 인지파시즘 경향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인간·비인간 집체지성의 제도적 공통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플랫폼의 민주적 통제, 알고리즘 감시, 데이터 공동권, 공공 AI, 시민의 알고리즘 중단권, AI 인프라에 대한 사회적 통제 등이 민주주의 개혁의 당면 과제로 제기되어야 한다. 이것은 대의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완수될 수 없는 문제로서 대의민주주의를 넘은 구성적 민주주의의 과제이다.</p>
<p style="font-size:21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VIII. 정리</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42. 2026년 민주당 당대표 경선의 표면적 대립은 ‘김민석 대 정청래’였지만 실제 대립은 ‘이재명 정부의 안정적 통치 대 계속 개혁에 대한 요구’였다. 이 양자는 필연적으로 대립적일 수밖에 없는 이슈는 아니다. 그럼에도 김민석은 전자를 더 강하게 대표했고 정청래는 후자를 부분적으로 대표했다. 빛의 혁명의 구성력을 다중의 섭정력에 기초한 구성적 민주주의로 제도화하는 방향의 노력은 양쪽 모두에 누락되어 있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43. 유시민의 비판적 개입은 이재명 정부의 중도확장 실용주의가 갖는 위태로움과 검찰개혁의 불철저성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생산적이었다. 하지만, 비판은 양측의 공통 기반을 불필요하게 깨뜨릴 만큼 언어적으로 과도했고 또 비판이 대의주의 지평 속에 머무른 나머지 실질적 대안으로 작용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이것이 논쟁의 공회전한 이유다. 그것은 주권 권력인 이재명 정권이 직면한 궁지를 다루면서 정부가 다중의 주권활력에 기초하여 실질적 출구를 찾도록 돕지 못했다. 그 결과가 정동적 대립의 격화다. 격렬한 언어는 오히려 정부방어적 정동을 증폭시켰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44. 김어준을 비롯한 정치미디어는 민주진보 시민의 정보권을 확장했지만 동시에 시민의 집단지성을 ‘인지적으로 대표하는’ 새로운 권력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대안언론의 성과인 동시에 인지자본주의 하에서 구성적 민주주의가 넘어야 할 새로운 문제이기도 하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45. 백낙청의 변혁적 중도주의는 촛불혁명과의 관계 속에서 이번 경선의 역사적 실천적 중요성을 사유했다는 점에서 깊은 통찰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경선 갈등을 ‘2기 촛불정부 대 반란세력’으로 규정함으로써 촛불 구성력의 내적 복수성을 국가적 정통성으로 환원했다. 그 결과 변혁적 중도의 광범한 연합논리는 축소되고, 정부중심적인 위계적 연합논리가 강화되었다. 여기에서 변혁적 중도론의 국가화 경향이 드러났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46. 이재명 정권은 ‘빛의 혁명에 의해 구성된 정부’이면서 동시에 ‘빛의 혁명의 구성력을 흡수·국가화할 위험을 가진 정부’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이재명 정부의 성공을 단순히 대통령 지지율 상승, 선거 승리, 경제성장, 코스피 지수 상승, AI 경쟁력 증가 등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보다 근본적인 기준은 현 정부가 자신을 만들어낸 빛의 다중의 구성력을 얼마나 확대했는가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47. 이 기준에서 ‘중도확장’의 의미도 재정의되어야 한다. 합리적 보수까지 포괄하는 것은 통치상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확장은 기존 대표세력의 좌우 외연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대표됨으로써 주권을 잃거나 아예 대표조차 되지 못했던 다중에게 진정한 정치적 능력과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대의 평면에서의 중도확장보다 근본적인 것이 다중의 주권 보장과 보강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48. 검찰을 공소청과 중수청으로 나누는 것은 개혁이다. 하지만 그 권력은 여전히 국가기관의 수중에 독점되어 있다. 대의적 개혁을 넘어서는 구성적 개혁이 필요하다. 그것은 누가 국가권력을 행사할 것인가를 질문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시민다중이 그 권력의 생성과 작동 및 그것에 대한 통제 및 중단에 직접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49. 2026년 민주당 당대표 경선에서 드러난 ‘실용 대 개혁’의 대립보다 더 깊은 대립이 있다. 그것은 ‘누가 국민/당원을 대표할 것인가’와 ‘국민다중이 어떻게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계속 재구성할 것인가?’ 사이의 대립이다. 앞의 질문은 대의민주주의의 질문이다. 뒤의 질문은 구성적 민주주의의 질문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50. 대의민주주의 지평에서의 갈등이 격렬할수록 오히려 구성적 민주주의의 질문이 은폐될 수 있다. 대표자들의 경쟁이 격렬하면 시민들도 더욱 정치화되는데, 그 시민의 에너지가 후보 선택, 지지와 배신, 유튜브에서의 감정적 비난, 계파갈등에 계속 환류된다면 대의체제가 더욱 단단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이번 논쟁이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 대의민주주의의 탈구성적 과잉활성화의 담론장치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51. 현재의 정치적·정동적 갈등은 다중의 ‘구성력의 봉쇄적 활성화’의 성격을 갖는다. 시민은 침묵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말하고 판단하고 참여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에너지는 대통령, 정당, 미디어, 플랫폼 등 정치적 인지적 대의기관들의 힘으로 축적된다. 이것은 억압보다 더 복잡한 통치형식이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52. 인지자본주의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활성화를 필요로 한다. 시민이 침묵하면 데이터도 가치도 생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의 체제는 시민에게 말하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노하라, 말하라, 논쟁하라, 댓글을 달아라, ‘좋아요’와 ‘구독’을 클릭하라, 지지하라고 요구한다. 인지자본주의는 그 정치적 활력이 플랫폼과 대표제의 회로를 벗어나 독립적인 구성력으로 조직되지 않도록 관리한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53. 이 지점에서 대의민주주의와 인지자본주의는 서로 결합한다. 대의민주주의는 정치적 결정을 대표자에게 집중시키고, 인지자본주의는 집단지성을 플랫폼과 자본에 집중시켜 인공지능으로 발전시킨다. 두 체계가 결합하면 정치적 주권의 대의, 인지적 능력의 대의라는 이중적 수탈이 가능해진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54. 이 양자가 다중의 욕망·정동·인지·구성력을 유도하고 활성화하고 계산하여 다시 다중을 통치하는 기술적 힘으로 변환할 때 인지파시즘의 문제가 등장한다. 인지파시즘은 대의민주주의의 폐기 이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거와 정당, 여론조사와 시민참여가 활발히 존재하는 과정 내부에서 진행될 수 있다.</p>
<p style="font-size:18px;line-height:1.6em;margin:0;font-weight:bold;">55. 구성적 섭정민주주의는 다중의 구성력이 다중에 대한 통치력으로 되돌아오는 이 악순환의 단절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것의 핵심은 정당을 없애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을 없애는 것도 아니며 대의제를 폐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대의권력을 언제든지 중단 가능한 잠정적인 권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즉 구성력의 대의적 제도화와 더불어 그 제도들에 대한 시민의 심사, 거부와 중단, 그리고 새로운 구성의 순환을 상설화하는 것이다.</p>]]></description>
			<author><![CDATA[자율평론]]></author>
			<pubDate>Tue, 01 Sep 2026 11:14:1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19"><![CDATA[자율평론 Now!]]></category>
		</item>
				<item>
			<title><![CDATA[9월 7일(월)에 다루어질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범위]]></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16]]></link>
			<description><![CDATA[9월 7일(월)에 다루어질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범위는 "3장 공—산Sympoiesis: 공생발생symbiogenesis과 트러블과 함께하기라는 활기찬 예술"의 후반부와 "4장 친척 만들기: '인류세, 자본세, 플랜테이션세, 쑬루세", 141-179쪽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dongs14]]></author>
			<pubDate>Tue, 01 Sep 2026 09:40: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87"><![CDATA[미디어 아트를 둘러싼 이슈들 세미나]]></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청소년 온라인 인문학 강좌] 초등 과학, 중등 철학 강좌 개강 안내 (9/6 개강!)]]></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15]]></link>
			<description><![CDATA[개설 강좌

※ 더 자세한 소개는 첨부된 PDF파일을 다운받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초등 과학
지구에서 살아남기 (10강)
★ 2026년 지구별을 사는 어린이들의 과학 뜯어보기
△참가자 12~13세 △기간 26년 9월 6일~11월 29일
△시간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오후 12시 30분

1강_ 인류를 멈추러 온 시간여행자
2강_ 기후위기의 지구를 구하라
3강_ 2126 미래직업보고서
4강_ 우리 담임쌤은 AI
5강_ 챗봇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6강_ 유전자 조작 어린이 제조공장
7강_ 워게임 : 게임 속 전쟁, 현실이 되다
8강_ 멸종한 공룡과 생존한 바퀴벌레
9강_ 이기적인 유전자의 비밀
10강_ 멸망하지 않은 지구를 찾아서


중등 철학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10강)
★ 멀어져 버린 나와 너, 우리의 관계를 돌아보기 위한 인문학의 목소리
△참가자 14~16세 △기간 26년 9월 6일~11월 29일
△시간 온라인 매주 일요일 오후 1시~3시

1강_ 토닥토닥 고민상담소 : 당신을 괴롭히는 관계는 무엇입니까
2강_ 외계인이어도 괜찮아 :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힘
3강_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만들어진’ 주체
4강_ 너 지금 제정신이니 : 괴물이 탄생하는 이유
5강_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 학습된 복종 사회
6강_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 : 약육강식의 진실
7강_ 내가 너보다 더 세거든 : 무한경쟁에서 살아남는 기똥찬 방법
8강_ 내 곁에 있어 줄 건가요 : 사랑과 애착이라는 DNA
9강_ 마음속 디펜스 게임 : 방어의 심리학
10강_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 우리가 같은 편이 될 수 있다면



참가신청 안내

1. 신청링크를 클릭해 신청자 정보를 입력해주세요.
▶ https://forms.gle/WihBR4jfWF5zqNC38

2. 후원회원 가입 선택
후원회원은? 가입신청서를 작성하고 월회비 1만원 이상을 납부하는 후원자입니다.
● 주말강좌(휴머니잼)와 방학특강 강좌후원금 20% 할인
가입 방법 홈페이지 상단 “후원하기” http://nada.jinbo.net/membership 에서 양식 작성.
※ 홈페이지에 글쓰기를 하기 위한 로그인 회원과는 별개입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3. 강좌후원금 납부
▶ 강좌후원금 : 초·중등부 20만원 (후원회원 20% 할인)
※ 강좌후원금 납부 예외를 원하시면 상의해 주세요.
▶ 계좌 : 농협은행 317-0029-3819-51 교육공동체나다

4. 그 밖에 참고하실 사항
강의 시간 주 1회, 2시간
진행 방법 Zoom 온라인
문의 063-352-0148, nada_letter@hanmail.net <img src="/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36/202608/6a956814d7d079883814.jpg" alt="" /> <img src="/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36/202608/6a9568149fd855672919.jpg" alt="" />]]></description>
			<author><![CDATA[nada]]></author>
			<pubDate>Mon, 31 Aug 2026 20:40: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36"><![CDATA[자유게시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8월 31일(월)에 다루어질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범위]]></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13]]></link>
			<description><![CDATA[8월 31일(월)에 다루어질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범위는 "3장 공—산Sympoiesis: 공생발생symbiogenesis과 트러블과 함께하기라는 활기찬 예술"의 전반부, 107-140쪽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dongs14]]></author>
			<pubDate>Mon, 31 Aug 2026 18:51: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87"><![CDATA[미디어 아트를 둘러싼 이슈들 세미나]]></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6.08.04] 사회를 읽고, 인간을 이해하는 책들 / 성일권 에디터]]></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12]]></link>
			<description><![CDATA[<br /><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6.08.04] 사회를 읽고, 인간을 이해하는 책들 / 성일권 에디터</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기사 원문 보기 : <a href="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0453" target="_blank" title="기사 페이지로 이동">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0453</a></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justify;"><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b>『성, 인종 그리고 계급』(셀마 제임스 지음 | 서창현 옮김 | 갈무리)는 여성, 노동, 식민주의, 인종차별을 하나의 구조 속에서 읽어낸 고전이다. 성별과 인종, 계급이 서로 교차하며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날카롭게 분석하며, 오늘날 교차성 담론의 중요한 사상적 토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b></font></p><br /><br /><blockquote class="q4" style="font-family:'맑은 고딕';"><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center;"><a href="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491116" target="_blank"><img src="https://daziwon.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42/202607/6a69ad14d6b784991914.jpg" width="128" style="width:128px;" alt="" /></a><br /><br /><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font-style:normal;"><b>『성, 인종, 그리고 계급』 | 셀마 제임스 지음 | 서창현 옮김 | 갈무리 (2026)</b></font></p></blockquote>]]></description>
			<author><![CDATA[갈무리]]></author>
			<pubDate>Wed, 26 Aug 2026 14:13:5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50"><![CDATA[서평과 인터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한국사회복지저널 2026.08.24] [신간] 유기체지향 존재론…인류세 너머의 생명을 다시 묻다 / 정세연 기자]]></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11]]></link>
			<description><![CDATA[<br /><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한국사회복지저널 2026.08.24] [신간] 유기체지향 존재론…인류세 너머의 생명을 다시 묻다 / 정세연 기자</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기사 원문 보기 : <a href="https://www.ksw-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6400" target="_blank" title="기사 페이지로 이동">https://www.ksw-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6400</a></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justify;"><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b>『유기체지향 존재론 : 인류세 너머의 생명』이 2026년 8월 18일 갈무리에서 출간됐다. 리투아니아 철학자 아우드로네 주카우스카이테가 쓰고 김효진이 옮긴 이 책은 유기체와 생명이라는 개념을 자기생성 체계에 근거해 다시 살피며, 그 폐쇄성과 개방성 사이, 목적과 우연성 사이의 긴장을 검토하는 인문학 서적이다.</b></font></p><br /><br /><blockquote class="q4" style="font-family:'맑은 고딕';"><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center;"><a href="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860409" target="_blank"><img src="https://daziwon.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42/202608/6a88509a550d39472464.jpg" width="128" style="width:128px;" alt="" /></a><br /><br /><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font-style:normal;"><b>『유기체지향 존재론』 | 아우드로네 주카우스카이테 지음 | 김효진 옮김 | 갈무리 (2026)</b></font></p></blockquote>]]></description>
			<author><![CDATA[갈무리]]></author>
			<pubDate>Tue, 25 Aug 2026 11:15:3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50"><![CDATA[서평과 인터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더리포트 2026.08.24] 자원이 된 생명, 통제를 거부하다 / 신동립 기자]]></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10]]></link>
			<description><![CDATA[<br /><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더리포트 2026.08.24] 자원이 된 생명, 통제를 거부하다 / 신동립 기자</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기사 원문 보기 : <a href="https://www.therepo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682" target="_blank" title="기사 페이지로 이동">https://www.therepo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682</a></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justify;"><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b>생태·경제·정치 위기가 중첩된 ‘삼중 위기’의 시대, 인간과 비인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생명이 수량화된 자원이나 관리 대상으로 전략한 현실에 맞서 철학적 대안을 모색하는 책이 나왔다. 도서출판 갈무리가 리투아니아 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 아우드로네 주카우스카이테(58)의 ‘유기체지향 존재론: 인류세 너머의 생명’(Organism-Oriented Ontology, 2023 에든버러대학교 출판사)을 카이로스 총서 125권으로 펴냈다.</b></font></p><br /><br /><blockquote class="q4" style="font-family:'맑은 고딕';"><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center;"><a href="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860409" target="_blank"><img src="https://daziwon.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42/202608/6a88509a550d39472464.jpg" width="128" style="width:128px;" alt="" /></a><br /><br /><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font-style:normal;"><b>『유기체지향 존재론』 | 아우드로네 주카우스카이테 지음 | 김효진 옮김 | 갈무리 (2026)</b></font></p></blockquote>]]></description>
			<author><![CDATA[갈무리]]></author>
			<pubDate>Tue, 25 Aug 2026 11:07:2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50"><![CDATA[서평과 인터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대학지성 In&amp;Out 2026.08.03] 교수형은 계급전쟁의 무기였다 / 이현건 기자]]></title>
			<link><![CDATA[https://daziwon.com/?kboard_content_redirect=11509]]></link>
			<description><![CDATA[<br /><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대학지성 In&amp;Out 2026.08.03] 교수형은 계급전쟁의 무기였다 / 이현건 기자</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b>기사 원문 보기 : <a href="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031" target="_blank" title="기사 페이지로 이동">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031</a></b></p><br /><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justify;"><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b>이 책은 18세기 런던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발흥기에 일어난 계급투쟁과 그것의 함의를 면밀하게 살핀다. 18세기 런던에서 교수형이라는 스펙터클은 단순히 범법자를 처벌하는 형식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분명 특권을 누리는 지배계급을 위해 런던의 빈민 인구로 하여금 관습적 권리의 범죄화와 새로운 형태의 사유재산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하는 더욱 음흉한 목적에 복무했다.</b></font></p><br /><br /><blockquote class="q4" style="font-family:'맑은 고딕';"><p style="font-family:malgungothic;text-align:center;"><a href="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05792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05/79/cover500/8961954180_1.jpg" width="128" style="width:128px;" alt="" /></a><br /><br /><font style="font-family:malgungothic;font-style:normal;"><b>『목매달린 자들의 런던』 | 피터 라인보우 지음 | 권범철 옮김 | 갈무리 (2026)</b></font></p></blockquote>]]></description>
			<author><![CDATA[갈무리]]></author>
			<pubDate>Tue, 25 Aug 2026 11:01:0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daziwon.com/?kboard_redirect=50"><![CDATA[서평과 인터뷰]]></category>
		</item>
			</channel>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