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지성 In&Out 2026.07.19] 신자유주의 시대에 예술적 윤리는 어떻게 요청되는가 / 이수영(미술작가)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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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
Date
2026-08-1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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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지성 In&Out 2026.07.19] 신자유주의 시대에 예술적 윤리는 어떻게 요청되는가 / 이수영(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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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 넓은 꽃밭과 연못이 있는 공원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혁신파크’이다. 마을 사람들이 산책하고 운동하는 공원 이름치곤 묘한데, 대한민국 곳곳에 혁신센터, 창의도시, 스마트밸리, 문화공장, 도시커먼즈, 크리에이티브센터, 복합문화공간과 같은 이름 하나쯤 없는 동네는 없을 듯도 싶다. 이 무겁고 피곤한 이름들은 우리가 충분히 창의적이지 않다고 압박하며 우리를 감시하는 듯하다.

혁신과 창의, 크리에이티브로 대표되는 ‘예술인간의 탄생’은 이 책의 지은이 파스칼 길렌이 지적하고 있듯이 냉전 이후의 세계화, 그리고 포스트포드주의에서 탄생한 비물질 노동의 상품 가치이며 그런 노동을 위해 조직된 삶의 양식이다. 독창성, 도발적인 아이디어, 과감한 혁신, 발칙한 엉뚱함, 자유로운 영혼, 치고 빠지는 프로젝트 프리랜서의 노마디즘, 전 세계로 뻗어 있는 네트워크 촉수, 힙한 패션 감각을 장착한 멋진 노동력은 실리콘밸리 개발자들처럼 신자유주의 시장 최고의 상품이다. 그러나 길렌이 또한 지적하고 있듯, 신자유주의 시장은 어디까지나 이윤과 교환가치를 위한 효율성, 합리성의 무한 경쟁의 획일적인 자본주의이다. 단지 무한 경쟁의 공포를 자유와 창의 뒤에 숨기고 있을 뿐이다.

예술 사회학자인 길렌은 포스트포디즘에서 탄생한 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이 자폐적이고 고립된 중얼거림으로 소외될지 아니면 언젠가 함성으로 터질 수도 있는 생명력 있는 관계들의 웅성거림으로 갈지 그 양면성을 분석하고 가늠한다.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빠올로 비르노의 다중 개념에서 시작하여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상태와 펠릭스 과타리의 생태학적 관점으로 이어지는 큰 그림 사이에 나탈리 하이니히, 피에르 브르디외 등의 예술사회학자들을 경유하는 뼈대로, 길렌은 예술 사회학과 비판적 사회이론을 합금하는 연금술 실험으로 비판이론을 예술 사회학으로 복귀시킨다.

길렌은 비엔날레 등의 예술 제도들, 다양한 예술 현장들, 공동체 예술의 지형들을 분석하는데, 이는 이러한 예술 특성들이 비물질 노동의 시대에 어떤 실험실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다. 즉 예술적인 것, 예술적 특성과 예술적 윤리로 보이는 것들이 히스테릭한 신자유주의의 실험실이자 동시에 신자유주의 증후를 탈코드화 할 아방가르드가 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검토한다.

네그리와 하트 그리고 비르노에 기댄 길렌의 다중 개념은 “단수적인 아이디어, 사물, 행위, 혹은 태도들이 이질적으로 뒤섞인 집합체이며, 회색빛의 획일화된 대중 혹은 영토적 국민과 다른 능동적인 사회적 주체로 공동의 삶과 노동을 특징으로 한다.”(23) 길렌의 다중 개념은 사물, 행위와 같은 비인간 객체들을 합한 개념으로써 정치철학자 조정환의 ‘물민다중物民多衆’ 개념에 더 가까워 보인다. 물론 포스트포디즘과 비물질 노동의 무대 뒤에는 여전히 포디즘과 산업 노동이 마치 사라져 버린 듯 감춰져 있다. 배달 앱을 누르면 피와 살로 이루어진 배달 노동자가 직접 음식을 들고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길렌이 강조하는 다중은 ‘단수성’들의 집합체로서 수많은 목소리로 웅성거리는, 즉 서로 다른 개인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대중과 다르다. 그리고 나탈리 하이니히가 증명하듯 이 ‘단수성’은 예술계에서 탄생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오늘날 예술가의 상징이 된 데에는 두 가지 이 배경이 있다. 첫째, 세기의 천재, 미친 듯한 열정, 소름 돋는 창의성, 전무후무한 유일성과 같은 창작자 개인의 ‘단수성’. 둘째, 평론가, 수집가, 시장, 언론, 미술관과 같은 제도로서의 예술계. 이 두 가지 특성이 예술 자격을 수여한다.

하이니히에 따르면 규칙과 전통, 도제를 미덕으로 삼는 아카데미즘의 귀족주의에 반기를 들었던 낭만주의의 비정상성, 과잉, 예외성에서 ‘단수성’은 탄생했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낭만주의적 가치를 핵심으로 이어받아 예술가들이 구축한 개인주의적 체제를 급진화하였다.

신시아 화이트와 해리슨 화이트가 밝히듯, 옥션, 미술관, 평단과 같은 예술 제도는 이제 작품이 아닌 작가를 주목한다. 예술은 작품이 아닌 작가의 잠재력을 객체화한다. 우리는 〈알제의 여인들〉이 아닌 〈피카소〉를 보고, 〈피카소〉를 산다. 우리는 김환기, 박수근, 이우환은 알아도 그들의 작품 이름은 잘 모른다. 즉 산업자본주의에서는 사물(작품)이 상품이지만 비물질 노동의 시대에는 잠재력(작가)이 상품이 된다. 미래에 거둘 약속으로서 유의미한 것은 캔버스(작품) 자체가 아니라 예술가의 서명이다.

이렇게 예술계에서 예술가 개인의 신체 자체가 생산물이 된 것을 길렌은 비르노가 포스트포드주의의 특징으로 꼽은 ‘생산물의 개인화’가 이미 예술계에서 초기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한다.

이 예술적 ‘단수성’은 신자유주의 비물질 노동을 위한 노동 상품의 가치로 착취되지만, 동시에 이 ‘단수성’은 자본주의의 억압적 획일화를 뚫을 수 있는 무기이기도 하다. 비르노의 전술인, 미리 주어진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냉소주의’,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돌파하는 ‘기회주의’는 단수성, 특이성 즉 예술적 ‘똘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철의 군대 프롤레타리아트가 산업자본주의의 부산물인 동시에 탈주자이듯, 예술적 다중은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인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삶권력을 탈주하여 새로운 삶과 힘을 창조하는 사회적·정치적 전쟁기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길렌은 펠릭스 과타리의 생태학적 윤리를 빌려 ‘단수성의 윤리’를 예술적 윤리의 힘으로 삼는다. 신자유주의는 이윤을 위한 무한 경쟁이라는 동일화의 폭력을 창조적 능력과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환상 속에 감춘다. 자본주의는 노동시간만이 아닌 존재 방식 자체를 요구한다. 예술적 윤리는 무엇보다도 일탈과 전치, 삐딱함과 전복을 자신의 권리와 의무로 삼고 있다. 그리고 예술적 창조력은 타자와의 관계, 공통적인 것들의 풍요로움과 연결될 때만 가능하며 다시 공통적인 것으로 되돌려진다. 과타리는 새로운 감각, 시간성, 존재 방식을 실험하는 예술을 생태학적 실천으로 보았다. 길렌은 아직 오지 않은 ‘상황’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윤리적-미학적 힘을 예술 실천에서 찾는다.

게이 페스티벌마저 브랜드화하여 도시 관광으로 흡수하는 이 놀랍게 탄력적인 신자유주의의 탈영토화를 어찌할 것인가. “탈영토화는 오직 또 다른 탈영토화로 대응할 수 있다.”(373)





『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 | 파스칼 길렌 지음 | 서창현 옮김 | 갈무리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