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0] p.486-499

작성자
objectapple
작성일
2020-09-20 09:50
조회
38
# 리비도, 큰 집합들, 미시-다양체들
1. 욕망 기계들에 고유한 에너지 : 리비도
2. 이 에너지의 변형들(누멘과 볼룹타스)은 결코 탈성욕화도 아니요 승화도 아니다.
3. 욕망 기계들을 고찰하는 두 가지 방식
1) 욕망 기계들을 이것들 자신의 질서인 분자적 질서에 관련시키는 것
2) 욕망 기계들을 이것들이 그 속에서 유기체 기계들 또는 사회 기계들을 형성하고 유기체 환경들 또는 사회
환경들을 투자하는 그램분자적 질서에 관련시키는 것
4. 프로이트 주의를 처분하는 낡은 시도 / 라이히 - 그램분자적 극과 분자적 극이라는 두 극을 지닌 하나의 시퀀
스 속에서, 기계론적 기능들과 전기적 기능들이라는 두 기능들의 연합을 통해서, 리비도를 성욕으로 정의. 이
를 통해 라이히는 기계론과 생명론의 양자택일을 넘어섰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기계론적/전기적 기능들
은 물질 일반 속에 실존했지만, 생물 내부에서는 하나의 특수한 시퀀스 속에 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5. 분열증적인 동시에 편집증적인 라이히의 이론의 성격이 자신들의 이론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라고 털어놓겠다. 우리는 성욕을 <전기 폭풍>, <하늘의 파란색과 안개의 회청색>, 오르곤의 푸름, <성
엘모의 불과 태양흑점들>, 유체들과 흐름들, 물질들과 입자들 같은 유형의 우주적 현상들을 성욕에 철저히 인
접시키는 것이, 성욕을 가족주의의 형편없는 작은 비밀로 환원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더 적합해 보
인다고 털어놓겠다.

# 욕망의 거인다움과 난쟁이다움
비-인간적 성 — 하나의 성도 두 개의 성도 아닌 n개의 성
1. 사랑에 대해 냉소는 모든 것을 말했다, 또는 모든 것을 말했다고 우겼다. <자본주의> (...) 하지만 냉소의 고유
함은, 스캔들이 없는 곳에 스캔들이 있다고 우기고, 대담하지 않으면서도 대담하다고 알려진다는 점이다. 이
는 양식의 평범함이기보다는 양식의 망상이다.
2. 욕망은 인물들 내지 사물들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욕망이 편력하는 환경들 전체, 욕망이 받아들이는 갖가지
본성의 진동들과 흐름들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은 1차적으로 명백하니 말이다. 욕망은 거기에 절단들과 포
획을 도입한다. 항상 유목하며 이주하는 욕망의 성격은 무엇보다 <거인다움>이다.
3. 리비도가 큰 집합들을 투자하는 것은 탈성욕화하는 확장을 통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리비도가 자신의 흐름들
을 억압해 이 흐름들을 <부부>, <가족>, <인물들>, <대상들> 같은 유형의 좁은 세포들 속에 가두게끔 규정
되는 것은 탄압, 봉쇄, 복귀를 통해서이다. 분명 이런 봉쇄는 필연적으로 정초되어 있다. 즉 리비도는 자기가
대상으로 삼는 그러한 몸, 그러한 인물과 관계함으로써만 의식 속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4. 하지만 우리의 <대상 선택> 자체는, 생물장, 사회장, 역사장 속에서 언제나 이 몸, 이 인물이 가로채고 수용하
고 방출하는 / 삶과 사회의 흐름들의 결합과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도 이 장에 동등하게 담겨 있거나 통해 있
다. 부모를 포함해 우리가 사랑을 바치는 인물들은 흐름들의 연결, 분리, 결합의 점들로만 개입하며, 그들은
이 흐름들의 / 고유하게 무의식적인 투자의 / 리비도적 내용을 번역하고 있다.
5.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세계들과 사랑을 한다. (...) 우리의 사랑들 안에는 언제나 통계적인 어떤 것, 큰 수의 법
칙들이 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자연적/필연적 관계> (맑스) 말하자면, 두 성 (남
자와 여자)의 관계는 이 관계가 큰 집합들(인간과 인간)을 투자하는 한에서 / 성욕 일반의 관계의 척도일 따름
이지 않을까? 이로 인해 성욕은 두 성으로 특유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남근은 하나의 성이 아니라 성욕 전체,
말하자면 리비도에 의해 투자된 큰 집합의 기호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6. 하지만 맑스는 훨씬 더 신비한 것도 말한다. 즉 참된 차이는 인간의 두 성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의 성과 <비인간적 성> 간의 차이라는 것이다. (...) 성욕이 그램분자적 큰 집합들의 무의식적 투자라면, 이는 성욕이 다른
면에서는 규정된 조건들에서 이 집합들을 구성하는 분자적 요소들의 작동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욕망의 거인
다움의 상관물로서 욕망의 난쟁이다움이 있는 것이다. (...) 비-인간적 성이란 바로 욕망 기계들, 분자적/기계
적 요소들, 이것들의 배치체들, 이것들의 종합들로, 이것들이 없으면 큰 집합들 속에서 특유화된 인간의 성도
없을 것이요, 이 집합들을 투자할 수 있는 인간 성욕도 없으리라. <욕동/본능의 구별? 욕동은 대상을 향해 있
다, 심급의 문제? 같은 사랑 표현, 대상과의 일대일 대응관계>
7. 성욕이 문제일 때 맑스는 아주 말수가 적고 주저하긴 해도 몇 구절을 언급하는데, 이 구절들을 역으로 프로이
트와 정신분석 전체가 영원히 사로잡혀 있는 것, 즉 성의 의인적 재현을 뛰어넘게 해 주었다!
8. 하나의 성 : 천상의 대상으로서 남근의 발기로 나아가며, 그 발기는 중첩될 수 없는 두 측면으로 결핍을 분배
하고 두 성을 공통의 부재, 즉 거세 속에서 소통하게 한다.
9. 두 개의 성 (멜라니 클라인) : 남근 중심주의에서는 벗어나지만, 이번에는 두 성의 소통을 정초하기는커녕 오히
려 여전히 통계적인 두 동성애 계열을 정초하게 된다. 그리고 전혀 거세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 따라서
우리는, 거세는 의인적/그램분자적 재현의 토대라고 말한다. (...) 의인적/그램분자적 재현은 이 재현을 정초하
는 것, 즉 결핍의 이데올로기에서 정점에 이른다. (료타르의 비-인간적 열림 <거세를 통한 욕망 속으로의 주체
의 진입>, 욕망이 강해지기 위해, 거세여 만세? 이 무슨 변태적이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관념일까. 무
의식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한 이 무슨 관념인가.
10. 분자적 무의식은 거세를 모른다. 왜냐하면 부분대상들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으며 그 자체로서 자유로
운 다양체들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절단들은 흐름들을 고갈시킬 수 있는 / 같은 유일한 절단
속에서 / 흐름들을 억압하는 대신 끊임없이 생산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종합들은 국지적이고 비-특유한 연
결들, 포괄적 분리들, 유목적 결합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어디에나 현미경적 횡단-성욕이 있어서, 여자 속에
/ 남자만큼 남자들이 들어 있게 하고 또 남자 속에 / 여자만큼 여자들이 들어 있게 하되, 남자들이 다른 사람들
과, 또 여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두 성의 통계적 질서를 뒤집는 욕망적/생산적 관계들 속에 들어갈 수 있게 한
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하나만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둘을 하는 것도 아니며, 수천수만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욕망 기계들 또는 비-인간적 성이다. 즉 하나의 성이 아니요, 두 개의 성도 아니라 n개의 성이다.
(...) 곧, 각자에게 자신의 성들을. (도나 해러웨이, 순혈주의? 이미 길들여진 이들을 다시 정글로 돌려보내는
것? 책임?)


3. 정신분석과 자본주의
# 재현
1. 분열-분석의 테제는 단순하다. 즉 욕망은 기계이며, 기계들의 종합이며, 기계적 배치체, 즉 욕망 기계들이라는
것이다. 욕망은 생산의 질서에 속하며, 모든 생산은 욕망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분석이
이러한 생산의 질서를 으깼고, 또 그것을 재현 속으로 전복시켜 버렸다고 비난한다.
2. 무의식적 재현이라는 관념은, 정신분석의 대담성이기는커녕, 그 출발에서부터 자신의 파탄 내지 포기를 표시
해준다. 즉 더 이상 생산하지 않으며 [믿는 데] 그치는 무의식 말이다. (...) 믿는 것은 언제나 전의식의 일이다.
3. 실로 [사회적 생산이 자율적이라고 가정된 믿음들 속에서 소외되는 것]과 [욕망적 생산이 무의식적이라고 가
정된 재현들 속에서 우회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욕망적/사회적 생산을 변질시키고 일그러뜨리며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이 이중 작용을 수행하는 것은 바로 동일한 심급, 즉 가족이다. [믿음-재현]이 가족
과 맺는 연줄 또한 우발적이지 않으며, 재현이 가족적 재현이라는 점은 재현의 본질에 속한다. 하지만 이 때문
에 생산이 제압되지는 않으며, 생산은 생산을 질식시키지만 역으로 파열의 극한까지 울려 퍼지게 할 수 있는
재현적 심급 밑에서 계속 으르렁거리고 윙윙거린다.
4. 그러면 생산의 지대들에 실효적으로 침범하기 위해, 재현은 비극과 신화의 모든 권력으로 가득 차야 할 것이
며, 가족을 신화적이고 비극적으로 제시(또는 신화와 비극을 가족적으로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신화
와 비극도 생산들이요, 생산 형식들 아닐까? 확실히 그렇지 않다. 신화와 비극은 현실적인 사회적 생산과, 현
실적인 욕망적 생산과 연관해서만 생산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신화와 비극은 생산 단위들을 차지한 이데올
로기적 형식들이다.
5. 19세기의 희랍 연구가들(정신분석가) “그들은 신화를, 비극을 (...) 믿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엥엘스

# 재현과 생산
1. 슈레버의 아버지가 사용한 금속 막대 머리띠와 허리띠 (사드적-편집증적인 놀라운 작은 기계) 문제 전체는 이
런 것이기 때문이다. 즉 물론 아버지는 아이의 무의식에 작용하지만, 그는 가족적/표현적 전달에서 가부장으
로서 작용하는 걸까? 법원장의 욕망 기계들은 자기 아버지의 욕망 기계들과 소통한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이 욕망 기계들은 어린 시절부터 사회장의 리비도 투자이다. 거기서 아버지는 생산과 반생산의 담당자 역할만
맡고 있다.
2. 프로이트는, 즉 아버지가 기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계들이 아버지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하
여 욕망 기계로건 사회 기계로건, 도대체 기계들을 고려할 여지가 이제는 없다. 반면에 아버지는 온갖 <신화
와 종교의 권력> 및 사랑 발생 권력을 지닌 존재로 팽창해서 <실물보다 큰>, 작은 가족적 재현은 외연이 망상
의 장과 같다는 분위기를 띠게 되리라. [욕망 기계들과 사회장이라는 생산의 쌍]은 [신화와 가족이라는 전혀 다
른 본성을 지닌 재현의 쌍]에 자리를 내준다.
3. 아버지나 어머니는 배경에 있는데, 아이는 부모에게 /필요에 따라/ 부품들과 톱니바퀴들을 빌리며, 부모는 발
신하고 수신하고 차단하는 담당자로서, [생산의 호의적인 담당자] 또는 [반생산의 의심 많은 담당자]로서 거기
에 있다.

# 신화와 비극에 반대하여
1. 왜 이런 기이한 특권을 비극적/신화적 재현에 부여했을까? 왜 생산의 장들, 작업장들, 공장들, 단위들이 있던
바로 그곳에 [표현적 형식들, 하나의 극장 전체]를 설치했을까?
2. 밀러, 왜 신화로 회귀할까? (...) 비판적 반어법을 써서 말하자면, 우리 세계가 그 문화 체계를 세우기 위해 이
용해 온 이 관념적 쓰레기(ideational rubbish)는, 새로운 상부구조들을 위해 바닥을 청소하는 일종의 글쓰기
를 통해 (왜냐하면 이 글쓰기는 병에 대한 것이고, 따라서 병을 넘어서기 때문에) 이제 그 시적 제물을, 그 뮈토
스를 부여받고 있다. <이성과 진리의 언어인 로고스와 달리, 아득한 과거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전해주는 신
화의 언어, 시를 비롯한 문학과 예술의 언어> (‘새로운 상부구조들’이란 생각은 나에게는 역겹다. 이 생각은
과정에 대한 자각에 불과하지 과정 자체는 아니다.) 실제로, 과정 속에서, 내가 쓰고 있는 글의 줄마다, 나는 자
궁을 박박 닦아 내어, 말하자면 자궁에 소파(긁어냄)를 들이댄다고 믿고 있다. 이 과정 뒤에는 [문화요, 따라서
거짓에 불과한 ‘체계’와 ‘상부구조’라는 관념]이 아니라 [끊임없는 탄생, 갱신, 삶 등의 관념]이 있다.
3. 밀러, 신화에는 우리를 위한 삶이 없다. 신화만이 신화 속에 산다. (...) 신화를 생산하는 이 능력은 자각으로부
터, 점증하는 의식으로부터 태어난다. “과정이 종결될 때까지, 세계의 배(배 복-배, 마음, 속마음, 가운데 중심
부분, 앞, 전면, (품에) 안다, 껴안다) 가 제 3의 눈이 되게 하리라.” (...) 우리가 헤엄치고 있는 이 지성적 세계
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몸을 입어야 한다는 것 말고 다른 무슨 뜻이 있을 수 있으랴? 하지만 이 새로운
세계는 착상되어야만 몸을 입을 수 있다. 그리고 착상하려면, 먼저 욕망이 있어야 한다. (...) 욕망은 본능적이
고 신성하다. 우리는 오직 욕망을 통해서만 순결한 착상을 야기할 수 있다.
4. 오이디푸스(또는 햄릿)를 자기 비판의 지점까지 몰아가기, 표현적 형식들인 신화와 비극을 의식의 믿음들 내
지 가상들, 즉 단지 관념들에 불과한 것이라고 고발하기, 무의식을 청소할 필요성, 무의식의 소파로서의 분열분석, 자궁의 틈새를 거세의 선과 대립시키기, 고아이자 생산자인 무의식에 대한 기막힌 긍정, 새로운 토지를
생산해야 할 [탈영토화의 분열증적 과정]으로서의 과정에 대한 찬양, 그리고 극한에서 비극에 맞서고, <인물
의 불길한 드라마>에 맞서고, <가면과 배우의 불가피한 혼동>에 맞서는 욕망 기계들의 기능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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