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지성의 정원[다지원] 취지문

오늘날 지성의 영역에 두 개의 그림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대학의 부패와 붕괴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지성 주체들의 등장입니다.

대학은 지난 날 성장했던 다양한 지성기관들을 흡수하면서 엄청나게 비대해졌습니다. 과거의 저항적 지식기관들의 많은 부분도 대학 속에 흡수되거나 대학과 공조하며 움직일 정도입니다. 대학은 독점적 지성기관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것의 부패가 뚜렷해져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부패를 체제화합니다. 대학은 기업과 손잡는 수준을 넘어서 그 자체가 이윤을 추구하는 크고 작은 기업들로 탈바꿈했습니다. 대학 속에서 학생들과 교수들은 제자와 스승으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을 담당하는 수익원천으로서 만납니다. 수익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서열화가 나타나고 교수체제는 비정규직 강사를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대학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생활고에 허덕이면서 연구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강사들은 학문과 교육의 열정에 불타기는커녕 모자라는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입시학원과 과외에 눈을 돌려야 하는 실정입니다. 바로 이러한 토양 위에서 학진체제가 성장하고 있습니다. 학진은 대학의 서열화, 학생들의 서열화, 교수들의 서열화를 공고화하면서 그 서열화를 통해 지성을 통제하는 권력기관으로 기능합니다. 국가의 지적 필요가 대학들에 직접적으로 강요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대학은 신자유주의적 기업이나 국가를 위해 일하는 일종의 외주하청기업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지식인이야말로 우리시대가 필요로 하는 지식인이라는 이른바 ‘신지식인론’은 이러한 상황을 정당화하는 구호입니다. 학생들은 기업이나 국가가 소비할 노동력으로 자신을 키우기 위해 값비싼 등록금을 내고 있습니다. 한 학기에 약 4~500만원에 상당하는 거액의 등록금을 내면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대학생들은 수업노동 외의 과외노동(아르바이트)에 시달리고 대학원생들은 연구는커녕 학진 프로젝트의 실무노동자로 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과로노동과 부실한 영양섭취로 학생들의 건강상태는 점점 나빠져 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대학에서 충족되지 않는 지적 욕구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학원이나 비제도 교육기관에서 과외수업을 받아야 합니다. 요컨대 오늘날 대학은 지성의 성장과 소통 및 전파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지성 발전의 걸림돌로 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다른 그림이 있습니다. 평택에서는 이른바 ‘매춘부들’이 자신을 성노동자로 선언하며 당당하게 일어섰고 장애인들은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한강 다리를 건너는 시위를 벌였고 이주노동자들은 조합이나 단체를 결성하여 이주를 불법화하는 체제와 맞서 싸우고 있으며 여러 곳에서 주민들은 핵폐기물처리장 건설을 반대하며 싸우고 있습니다. KTX 여승무원들이나 이랜드 노동조합원들이 보여주듯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지속적이고 확산적입니다. 여성들이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생태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생태를 지키려는 움직임들 역시 거셉니다. 새로운 주체성들이 형성되고 있고 여기서 새로운 지적 힘들이 솟구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주체성들의 등장은 그 자체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감성, 새로운 생각, 새로운 태도를 갖도록 교육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회주체들의 투쟁과 운동이야말로 대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교육기관이고 교육제도입니다. 인터넷이 비록 상업적 흐름에 지배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이러한 주체들의 목소리 역시 점점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사회적 주체들을 다중이라고 부르면서 다중이 표현하는 정보적, 정동적, 행동적, 소통적 지성들을 다중지성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대학이 그 부패 속에서 수익성 척도에 따라 서열화 되고 협소하게 격자화된 관심을 논리화한 전문지성을 양산한다면 다중지성은 삶의 존재론적 가치를 강조하는 협력적이고 창조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다중지성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식, 다양한 목소리로 자신의 특이함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다중지성의 흐름은 분산적입니다. 다중지성의 발생적 분산성은 그것의 커다란 장점입니다. 집중과 대의라는 전통적 사회운동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광범한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이기도 합니다. 다중지성이 다양하지만 국지적인 것으로 머물 때 그것들은 서로 연결될 수 없고 서로 무관심하거나 심지어는 갈등적인 것으로 발전되곤 합니다. 갈등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새롭게 사유하고 행동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잠재적으로 생산적입니다. 하지만 갈등을 넘는 연결을 통해 더 큰 탈주와 생성을 현실화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의 잠재력은 줄어들고 각각의 목소리들, 투쟁들은 일과적이고 국지적인 것으로 되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국지적, 우발적, 특이적 투쟁들이 연결지점을 찾으면서 제3의 투쟁으로 변신해 나가는 생성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이 매순간 어떤 존재로 변화되고 있는지를 서로 확인하고 이 변화의 시간적 의미를 공동으로 생산하는 것이 지금 부족하며 그런 만큼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투쟁 속에서 드물게라도 만나고 그것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그 만남은 공통의 의미를 창조하기에는 짧고 단편적이며 임시적입니다. 우리 시대의 삶의 특징들, 양상들, 필요들을 역사적으로 새로운 공통적 의미생산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하고 상호교육하고 토론할 상설적 자기교육기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의 대학과는 달리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는 한 방향의 흐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가 가르치고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다방향의 흐름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세대와 세대가 합류하고 운동과 운동이 서로 가르치면서 전문가와 일반인, 전위와 대중의 구분이 사라지는 공간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대학이되 현재의 대학에 대항하는 대항대학이며 학교이되 현재의 학교와는 다른 대항학교이고 학원이되 현재의 학원과는 구분되는 대항학원이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교육기관이 수행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전혀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곳을 우리는 정원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지난 날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지식인은 물론이고 매춘부, 아이들, 거지들이 함께 대화하며 공통의 의미를 생산했습니다. 새로운 상황 속에서 이제 우리는 학생, 교사, 교수,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 가사 노동자, 성노동자, 실업자, 사무직 노동자, 서비스직 노동자, 연구원들, 아이들, 주민들 … 등이 함께 모여 현재의 질서를 넘어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꾸리고 그것을 새로운 의미평면 위에서 조직하기 위한 다중지성의 정원을 만드는 일에 나서고자 합니다. 뜻을 함께 하시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기대합니다.

2007년 10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