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1 『한국사와 농민』 '속편: 양반론' 후반부와 부록(pp.368~끝)

작성자
bomi
작성일
2021-12-09 22:50
조회
595
12월 11일 (토요일) 저녁 7시 30분에 『한국사와 농민』 '속편: 양반론' 후반부와 부록(pp.368~끝)을 공부합니다.

책을 읽으며 생각난 질문거리나 토론거리를 가져오시면 좋습니다.
질문, 토론거리를 세미나 시작 전에 게시판에 올려주셔도 좋습니다.
물론, 세미나 당일에 자유롭게 제기해 주셔도 좋습니다.
세미나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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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미나(11/27) 후기
속편: 양반론' 전반부(pp.279~367)


1. ::문벌, 벼슬, 지주, 노비소유, 양반의 관계는 무엇인가?

문벌이라는 것과 벼슬. 벼슬은 관직을 하는 거다. 권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지주라는 것은 정치권력보다는 땅을 가진 것. 경제 권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고. 노비 소유라는 것은 이 시대에 양반들이 가지고 있던 두 가지 자산 중의 하나인데, 땅을 갖는게 지주라면 노비 소유자로써 양반... 경제 권력도 있고, 인신에 대한 지배로서의 독특한 정치 권력적 성격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양반이라고 했을 때는 양자가 둘이라는 뜻, 문반, 무반이라는 두 개의 반열을 지칭하는 말로 되어 있으니까 문반, 부만 했을 때는 지주라거나 그런 것보다는 벼슬과 직접 상관있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양반을 규정함에 있어서 벼슬이냐, 노비냐, 땅이냐 무엇을 근거로 규정할 것이냐가 굉장히 어렵고, 또 문벌이라는 것은 그것과도 달라서 선조가 오랫동안 양반을 한 이력을 가지고 벼슬자리를 갖고 있지 못하거나 심지어 땅이나 노비가 없는 경우에도 양반으로 행사를 할 때도 있고 .... 어떤 근거도 없는데 전통이 가져다주는 권력으로 느껴진다. 이것도 양반으로 규정되는 중요한 근거로 작동하고 있어서 양반을 규정함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또 부차적이냐, ... 이 저자의 경우도 이것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함께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적어보았다.

결국 양반의 근거에 대해 구체적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 할 듯.

문벌에 대해서 본관 등 더 잘 나오긴 하는데, 성씨에 따라서 최고로 가질 수 있는 벼슬과 최저 벼슬이 다르다. 286쪽 보면 “양반들의 ‘문벌’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봉건국가의 벼슬, 즉 관직의 자리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소위 문벌이 좋은 양반이라 함은 그 현실성은 여하하든 간에 바로 그가 봉건국가의 소위 좋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렇게 표현을 해서 이 가능성은 또 무엇일까를 떠올리면 문벌을 읽었던 것 같다.

가능성이 있는 집과 가능성이 없는 집이 갈라져서 그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서술했던 것 같다.
기술직 갈래도 나오는데, 마지막 갈래를 양반으로 치겠다는 건지 아닌지, 그런 것도 좀 궁금했던 것 같다.

잡반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문반도 아니고 무반도 아닌 잡반이 있는데, 저자의 경우에는 양반을 1,2,3류로 해서 광의의 양반개념을 사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3류는 새도라거나 그런 것을 크게 가지고 있지 않지만, 양반을 조선시대, (소급해서 삼국이나 고려로 가져가긴 하지만) 지배계급의 범위는 잡반까지도 당연히 포함되는 걸로 평민의 상층부까지도 양반에 들어가서 문, 무, 잡반에 속한다 할지라도 양반에 될 수 있는 가능성. 양반에 포함되는 것으로 한다.

허생전에서 ... 관료가 될 가능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생은 가지고 있는 존재이고, 뒤에 가면 벼슬을 사는데, 비추어 보자면 양인 계층에 속한 자 중에서도 상층에 있는 존재가 그 중에서도 매관매직을 하거나 사고파는 것을 통틀어 설명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조선시대 지배계급을 양반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피지배계급은 누구였는가? 이러한 질문을 갖고 조선시대의 계급구성에 대해 좀 더 논의해 보자.

벼슬을 보고, 토지소유도 보고 노비 소유도 보면서 양반을 규정하려고 하고 있는데 지금 2번 같은 경우는 양반이라고 하는 그 사회집단이 정말로 조선시대에 지배계급을 구성했는가를 물어보고자 하는 것이고, 그러면 피지배계급은 비양반일텐데 구체적으로는 누구였는가, 앞에서도 해 온 내용인데. 양인론과 노비론을 거쳐왔기 때문에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피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겠는가. 조선시대의 계급구성을 좀 더 정리하는 차원에서 쓴 내용이다.
이 글의 첫 부분, 머리말에서 보면 고려초 중엽 이전에는 양반이라는 말이 지배계급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한골이라는 표현이 지배계급을 지칭하는 말로 되어 있는데 성골, 진골 할 때의 그 골자를 써가지고 한골이라고 하는 표현이 신라 이래로 고려 초 중엽까지 사용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었는데 양반이라는 고려초, 중엽 이후부터 나온 이 말이 조선시대 지배계급의 이름으로 적절한지, 이야기 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저자에 따르면 세 종류의 양반이 전부 지배계급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과 연결될 수 있을 것 같고, 책에서는 삼류 양반이 제일 건전하다는 말도 있었고, 각각은 전부 지배계급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상층부의 양인을 같이 검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 보통의 양반의 기준보다는 확대시켜 버리니까. 더 그렇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말씀에 고려할 수 있는 지점이, 양반이 예를 들어 삼대가 벼슬을 가지지 못하면 그 신분이 취하될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고 알고 있다. (이 책 이야기는 아니고) 그래서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위키백과에 그런 얘기도 있다. 소위 문무의 가치를 좀 다르게 평가했던 당시의 상황들도 그 당시에 고려해야 할 사항이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든다.
양반이 되게 복잡했겠다. 고려해야 할 것도 많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304페이지에 보면 10대에 걸쳐 벼슬을 못 한 양반도 수두룩 했다라는 말이 나와서 위키에서 말한 양반이랑 저자가 말한 양반이랑 개념이 다르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문벌 양반 같은 경우는 실업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무업이라고 부르는데, 토지를 가지고 있다거나 노비를 갖고 있다거나 벼슬 없이 양반 행세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는 생각이 충분히 든다.

303,4페이지 사이에 양반을 계층 분류할 수 있었던 기준이 토지 소유와 노비소유가 많으냐 적으냐, 토지나 노비를 갖고 있으면 유업, 없으면 무업. 봉건 국가에서 벼슬하느냐 못하느냐 통칭을 하는 양반과 그렇지 않은 양반... 비관료 양반은 현직에만 없을 뿐 ... 토지나 노비를 갖고 있고, 그 가문에 예전에 벼슬한 경력이 있다면은 양반 행세를 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상류층에는 여러 대 벼슬 못하지만, 중소 지주로 생활 못하는 양반이랑 양반 농민. 우리가 알고 있는 사림들. 지식인층 대부분이 벼슬 하는 경우야 당연히 양반. 벼슬을 못하는 경우도 삼류 양반이라 표현하고 있다.

1,2번에서 생각해 볼 바는 조선시대를 봉건시대라 규정할 때,
서구의 봉건은 봉토와 상관있는 것. 벼슬보다는. 봉토를 가지고 인신적으로 농노를 지배하는, 예속이 되어 있는 그래서 농노가 그 외거 노비처럼 자기 땅을 몇십 년을 경작하고 또 며칠은 영주의 땅을 경작하고 외거 노비는 부역. 노역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고, 현물이나 화폐를 바치는 경우도 있고. 우리가 봉건시대라고 할 때는 노동을 통해서 봉건 영주의 땅에서 일정시간 일을 해 주는 사람을 농노라고 부르지 않는가. 거기에 벼슬 개념은 진지한 것으로 포함되지 않는다. 봉건영주라고 할 때는 농노에 대한 통제력 여기는 노비 소유라 불렀는데, 노비에 대한 지배권. 조선같은 경우는 문벌 이런 것도 들어오는 것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지배 계급이라는 것도 당연히 노비. 노비가 노예도 있고 농노도 있는데 노비가 피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겠지만, 양인의 상 층 말고 중 하층의 경우에는 피지배 계급 쪽으로 밀려내려오는 인간 집단으로 파악되고 있다. 양인이 동태적인 개념이 되는 것. 일부는 지배층으로 올라가고 일부는 노비로 떨어지고 있는 불안정한 중간층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며 궁금했던 게 284 세 번째 문단 보면 “우리나라의 과거 봉건사회는 대체로 중앙집권적 국가기구에 의하여 지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기에 따라 이 중앙집권적 봉건국가권력에는 소장이 있었지만, 그 어떤 시기에 있어서도 국가는 가장 큰 봉건영주였다.”라고 나오고 있어서 ... 봉건 사회인데 중앙집권적인 것이 나타나는 게 서구에도 나타나는지 궁금했고, 피지배 계급을 말할 때 관료 이런걸 염두해 두지 않는다면, 중앙집권젹 국가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제주도에 오름이라는 것이 있다. 대충 높이가 한 몇 십 미터에서 아주 높아야 3,40 미터. 그런데 한라산이라는 게 있어서 한라산은 오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데 한라산은 가장 큰 오름이라고 볼 수 있다. 용암이 굳어가며 오름이 생기는데, 한라산은 가장 강력했던 큰 오름이라 볼 수 있다. 그 아래 조그만 오름들을 기생오름이라 부르는데, 지금 봉건 국가와 양반하고의 관계를 봤을 때 봉건 국가라고하면 저자가 생각할 때는 조선의 왕실 아니겠는가. 그럼 조선 왕실이라는 것은 이씨라는 성을 가진 가문이 한 500년동안 계속해서 지배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씨가 힘이 좋아서 그 대대손손 지배성씨로 지배문벌로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씨를 내세워서 이득을 볼 수 있는, 그 사람들이 그 사회질서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해 나갔다고 보는 게 현실적이다. 철종같은 사람은 강화도에서 주워 온 이씨. 그래서 이씨의 대가 끊어질 때가 되면 어디서라도 조선사회의 귀족 층. 권세 가문들이 이씨의 혈통을 끌어와서 왕을 만들어내고 만들어내고 그래왔다. 당쟁. 붕당 정치도 그렇다. 붕당들의 경합 속에서 어느 이씨가 왕이 될거냐가 결정되어 왔고, 조선 이후 시기 대체로 노론이 지명하는 이씨가 지배권을 행사해 왔다. 그 이씨라고 하는 것은 김씨라거나 윤씨라거나 이런 다른 성씨와 경합을 해서 그 성씨들 중에서 사회 위에 우뚝 솟아오른 형태가 되고, 왕족 왕실 왕궁. 이런 것들을 구성해서 커다란 성을 구축한 세력이다. 그럼 그게 고려 때에는 왕씨이고. 왕건. 신라시대때는 김씨고 이런 식으로 특정한 성씨들이 일정한 시기 동안 지배적 성씨로 행실을 해왔기 때문에 최대의 봉건지주였다는 말은 그 이씨나 왕씨나 이런 성씨들도 봉건 지주, 영주 둘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 그런데 규모가 엄청 커지는 것. 그 성씨를 중심으로해서 여러 성씨들 가문들이 연합을 해서 국가를 구축해서 계속 재생산해가는 그런 구조의 사회였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때에 봉건국가로서의 조선이 중앙집권적이라 말할 수 있을텐데, .... 봉건지주들 사이의 끊임없는 경합이 있었다고 볼 수 있고, 그때 왕실의 이해관계와 귀족층 사이의 이해관계가 상당히 달랐다는 말을 지난 시간에도 했었는데, 귀족층들 같은 경우는 노비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왕실같은 경우는 사노비들이 늘어나면 오히려 손해를 본다. 노비는 세금이나 부역을 국가에 대해서 안 하기 때문에 군역도 안 하고. 그래서 왕권을 쥔 최대 봉건 지주는 어떡 식이든 노비를 양인으로 만들어서 군역이나 부역이나 이런 걸 걷으려하고 왕이 아닌 귀족들은 계속 저항하는 대항관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이 계속 지속했고, ... 어떤 붕당은 왕권강화 어떤 붕당은 왕권을 약화 그런 식으로 동학이 달랐는데, 세종 세조 영조... 등등 그런 왕들의 경우는 왕권강화를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했고 그 때문에 다치기도 하고 그런 것. 그런 시도들이 일정하게 성공하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중앙 집권 시도는 불안전했다는 것.

앞선 질문 들으면서 문득, ... 저자가 이런 봉건적인 전 영역에서 성실하게 역할과 등등을 성실하게 수행하던 사례가 다른 봉건 국가에서는 없었을 거야. 라는 대목이 떠올랐는데, 실제로 생각해 보니까, 재벌이라는 게 한국에 있는데, 이건 저자의 이야기가 추측이 아니라 그냥 이렇게 이야기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식 시장 같은 게 생각나기도 했다. 가반수를 차지한 주주가 많이 가지고 있으면 영향력이 커지고 힘을 합치고 이런 것들.

그런데 귀족들이 양반 중에서 왕이 못된 가문들이라거나 이런 경우에는 생각이 복잡했을 것 같긴 하다. 왕을 자기네들이 섭정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게 가장 좋은 상태니까. 사실상 왕의 뜻대로 움직여지는 게 아니고, 자신들의 뜻대로 왕을 움직이는 것이 의미가 있으므로 왕권을 강화한다는 것인 사실상 억누를 필요가 있었고 실제로 신하들의 왕권을 강화한다는 것과 국가 권력을 강화하는 것은 좀 다르게 이해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국가 권력을 강화하는 것. 태종 같은 경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 경국대전의 편찬도 그런 사업의 일종. 세종도 그런 것. 광해군 같은 경우도 그런 경향이 있었고, ... 그런 식으로 왕 자신의 독자적인 권력. 신하들을 구성하는 하의 귀족층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권력을 강화시키는 것은 왕의 필요. 귀족 집단의 필요는 아니었다고 본다.
그런데 국가 권력이라고 하면 다르다. 왕과 귀족의 문제가 아니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가 일치하고 그럴 때는 왕과 귀족의 필요가 일치.
뒤에 불교사원의 이야기도 나온다. 불교의 반대... 불교는 내적과의 싸움을 벌인다고 하는데, 내적은 농민들이 산적이 되었을 때, 불교 사원이 다 산에 있는데, 산에 스님들이 무장을 하고 산적을 소탕하는데 앞장 섰다는 이야기. 그러면 가난한 농민들, 유민들하고, 적대관계에 있었다는 말. 그런데 왕권을 서술하면서도 내적과 싸우는데 심혈을 기울였다는 말... 그런면에서 사원 귀족과 왕권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지배개념을 저자가 폭넓게 잡았기 때문에 ... 문벌에 따라 벼슬에 따라 노비 소유에 따라 다 조금씩 위치나 이해관계나 지향성이나 그런 것들이 차이가 나는 양반 집단을 구상을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지배계급이 어쨌든 세계로 구분된다. 1류 2류 3류.

왕의 경연. 왕이 하루에 많을 때는 조석으로 두 번 공부하는데 신하들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 중에서 학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과외를 시키는 거다. 주자학 같은 것들을 통치하는 내내 하게 만들었다. 그때 광해군인가 누군가가 정확하진 않다. 경연을 폐지해 버리는 행위도 했었다. 다시 복권을 시켰다. 공부를 안 하려는 그런 게 있었고, 어떤 왕은 경연을 더 하려는 경우도 있었고,

경연 때 보면 늘 ‘백성’을 하늘과 같이 섬긴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데, 과연 그 ‘백성’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된다. 노비는 제외되었을 것 같다.

노비 정도는 백성 개념에 포함시키지 않으면서 말했을 가능성이 컸을 것. 양인을 염두에 두고 백성 이야기를 했을 것. ... 노비량이 거의 인구의 과반을 차지할 때 조차 그들이 백성이라는 말 속에 포함이 될 것인가. 아닐 가능성이 많겠다.
지금 국민이라는 말을 쓸 때도. 이주민들 같은 경우는 국민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난민은 더더군다나 배제되는 경우 많다. 여성들을 백성이라는 말속에 포함시켰겠느냐는 질문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6. ::337 346 348쪽에 서술되는 저자의 동심원적 계급구성론이 고려, 조선의 사회구성을 설명하는 유효한 설명방식일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해 보자.

동심원이 두 차례 나왔던 것 같은데, 유효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337쪽에 두 개의 동심원이라는 말이 나오고. 요거는 조선 이야기일 테고 세 개의 동심원은 346페이지에 나온다.

고려시대의 것이 이해가 잘 안 되었다. 346페이지 보면. 밑에서 다섯 번째 줄~
가부장적 경리 테두리는 솔거노비를 부려서 집안을 운영하는 과정이므로 이것은 노예제로 파악을 한다. 그다음 중간 꺼는 ... 양인에게는 소작료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외거노비는 사노비와 비슷하게 공납을 바쳤을 것이고 이 경우는 어느 정도 독립성을 가진 것. 이 경우는 봉건적 농노로 보고.... 바깥 그가 지배하는 중소지주 농장주에의 예속관계가 그리 짙지는 아니한 양인 농민의 땅을 포함하는 바깥 테두리로 될 것이다. 농장주의 예속관계가 짙지 않기 때문에 양인하고는 다른데, 그래도 일정한 지배 피지배 관계가 있는 그런 동심원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바깥 원의 범위 안은 국가의 몫을 먹어들어간 것인데, 그러니까. 국가에 귀속되어야 하는 것을 침식했다는 의미. 이것을 겸병이라 불렀다. 양반이 은근히 원래 국가의 것으로 되어야 할 것을 자기 것으로 가져온 것. 이런 겸병행위들이 있었다. 이런 겸병행위가 조선조 시대에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고려 이전으로 소급하면 많았다.

조선같은 경우는 중간이 솔거 바깥은 외거, 예속농민, 공노비 이렇게 새 종류가 있겠다. 예속 농민은 신분쪽으로 노비는 아닌데, 부채를 지거나 해서 바깥 동그라미를 가지고 있는 것.

왕권, 귀족권에 관해 이야기를 했는데, 고려시대는 조선에 비하면 왕권이 더 약한 시기. 그렇기 때문에 아까 겸병이라고 불렀지만, 해당 지역에 중소 지주, 소지주들을 압박해서 그 사람들 조차도 복속되게 만드는 구조가 있었다. 대지주인 존재하고 관계를 맺게 되는 그런 구조들이 생겨서 국가 권력을 계속 약화시키는 거다. 솔거노비도 아니고 외거노비나 공노비도 아닌 그러면서 상당한 정도로 독립된 양인. ... 그만큼 국가가 약하다. 그런데 조선이 들어서면서 혁명을 통해서 국가권력을 약화시키는 방향. 이성계가 정도전의 제안을 받아들여 행했던 게 원래 정도전은 정전제를 요구했다. 정전제는 우물정자를 써서 그러면 땅이 9개로 나눠짐. 가운데는 공동경작. 나머지는 골고루 나누는 정전제. 공산주의적 토지 소유와 비슷한 걸 제안 했다. 정전제 실시가 어려워지면서 정전제를 하려면 땅을 모조리 뺏어야 한다. 그래서 다 나눠줘야 하는데, 너무나 저항이 세니까 하지 못하고 과전법이라고해서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생원이나 진사라거나 하급직이라 할지라도 땅을 나눠주는 식으로 하는, 농민적 토지소유는 아니고 일종의 양반적 토지소유를 민주화. 그런 식으로 하기 위해서 땅을 몰수 했다. 제일 많이 뺐긴 게 절이다. 사원전들을 대부분 압류하고, 대 농장주 중에서 고려시대때에 공을 새운 사람이나 충효를 해서 소문이 난 사람에게 왕이 선물하듯이 땅을 줌. 그것은 살아 있을 동안만 소유하는 것인데, 대대손손이 몰래 상속하는 경향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불법적으로 대농장주가 생겼다. 그런 땅도 몰수했다. 이 몰수권은 국가 권력에서 나온 것 그래서 강한 국가 권력을 사용한 것이고 그래서 조선시대에 국가 권력이 강화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동심원을 둘 혹은 셋으로 규정을 하고 이게 ... 노예제적인 것이 점점점점 좁아져가는 그런 역사적 경향 그래서 결국 노예제적인 게 소멸해 들어가고 바깥 원들이 점점 중요해져가는 역사적 시대 구분의 논리적 근거로 삼고 있다.
고려, 삼국, 조선 이렇게 봤을 때 삼국시대 때 노예제가 제일 강하고 고려시대로 갈수록 농노제가 강화되어 간다. 그런 정도로 설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될 때는 노예제적 요소라는 게 조선시대, 또 일제 때도 있었다고 보는 것. 다만 그것의 비중은 계속 약화되어 오는 방식으로 전속되었었다.
그런 차원에서 역사적 경향에 대한 설명력은 있다고 보인다.

이 책이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위치는 나와 있지 않은 듯. 솔거 노비하고 가부장적 가정에서의 여성들의 위치하고 어떻게 같고 달랐을까의 이야기는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부장적 노예라고 했을 때 솔거노비 그 자체만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어떤 페미니스트 같은 경우는 가사 노동을 하는 여성들을 노예제로 파악하고 했다. 이게 단순한 비유인지 실제 노예인지...
오늘날은 임금 노예란 표현을 써서 노동자의 위치가 노예와 다를 바 없다는 본질 규정을 할 수 있겠는데 생사여탈권. 목숨을 빼앗을 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점. 그래서 완전히 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인신적 차원의 예속과 거의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는 장소 관계 이런 것들이 오늘날에도 찾아보려면 찾아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양 어선을 타는 사람들이라거나. 흔한 사례로 난민이었다가 불법 체류하는 사람이나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와서 몸을 파는 여성들 같은 경우는 신문에도 노예와 다른 삶을 산다고 고발되고.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채무관계 때문에 ... 염전 노예도 그런 케이스. 불구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거나. 사회의 어두운 곳에 (노예제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동심원의 가운데에 있다기보다는 벌레 먹은 것처럼 산재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릴 때도 머슴이 있었다. 농사짓고 마당 쓸고 온갖 허드렛일을 담당. 머슴한테는 쇠경이 월급. 쇠경을 쌀로 주면 돈을 모으기도 하고.

대통령이 머슴이다. 공적인 봉사자. 국민이라는 집단이 주인이 되고. 집단 국민의 머슴살이. 세금이라는 것을 통해서 녹봉을 받는다고 하는 것.

공무원이 되는 것은 머슴살이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공무원은 국민의 머슴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상급자의 머슴이 되는 것 같다.


7. ::저자는 삼국시대, 고려, 조선을 모두 봉건사회로 규정한다. 이러한 사회구성체관을 삼국 시대를 노예제 사회로 보는 관점과 비교해 보자.

고려 조선 연속성으로서 봉건사회라고 하는 게 쭉 이어져 왔다. 그 내부의 구성은 조금씩 달라져 왔지만, 북한 같은 경우도 삼국시대는 노예제가 아니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 런 관점하고 비교했을 때 어떤 것이 더 지금 우리 시대에 실천적 문제를 푸는 대에 도움을 줄 것인가를 보는 게 필요할 것 같다.... 노예제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특정한 사회가 이렇게 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찾기가 힘들어져 버린다. 고조선이 남는데 고조선을 어떻게 보느냐는 미지수인데 그때를 노예사회로 볼 거냐는 굉장히 논쟁적.
서구사회와 발전 경로가 일정하게 달라지고, 시기적으로 서구에서의 농노사회라고 하는 것은 고려시대에 시작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김석형씨처럼 삼국시대때로 잡으면 ... 서구와는 상당히 다른 경로로 아주 빠르게 농노사회로 봉건사회가 시작된 걸로 설명하는 관점이다.

저자가 중국이나 일본은 어떻게 볼지도 궁금하다. 유럽 같은 경우도 지금의 국가 형태로 딱 나뉘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국가 구분이 맞지 않은 경우도 많고) 근처에 붙어 있는 여러 나라들이 함께 변한 것 같아서 한국도 한국만 떼어서 볼 것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함께 보아야 더 맞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중국이 굉장히 변화무쌍해서 조선은 오백년을 가지만 중국은 그 세기에만도 명나라하고 청나라라는 두 개의 나라가 교체되기 때문에 주원장의 명나라는 이삼백년 밖에 존속하지 못했고. 같은 때이니까. ... 중국이라는 말은 명청시대에 그 자체가 나라로 정립되었던 것은 아니고 중화인민민주주의라는 게 생기면서 중국이 자리 잡은 것이기 때문에 ... 중국과 우리의 관계는 청과 명과 조선의 관계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가 문제였던 것처럼.

이 책의 관심사는 아니지만, 일본은 오히려 임진왜란 같은 경우는 하위 귀족 계급을 구성하고 성주들을 구성하고 영주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고. 우리의 경우는 일본에 비해서 중국과 좀 더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주자학적 질서를 명나라 때 국가 질서의 구성원리이자 운영원리로 가져왔고, 조선의 경우에는 명과의 관계 친명 관계를 통해서 명나라의 기본적 사회조직 원리를 그대로 밴치마킹 해 왔기 때문에 조선의 구조와 명나라의 구조는 굉장히 비슷했다고 볼 수 있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그 무렵, 청나라가 명나라를 누르고 대체해서 이제 청이 통일 국가를 구성하게 되었을 때는 주자학적 질서가 상대적으로 중국같은 경우에는 눌리고 ... 조선 같은 경우에는 명나라와의 연대를 통해서 명을 복권 시켜야 한다는 흐름과 그렇지 않고 새로운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실학이라거나 서학이라거나 그런 거를 통해서 다른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흐름. 친명 사대주의를 유지하려는 세력이 보수파, 아닌 게 개혁파. 그게 조선 후기에는 크게 나타나는 거다. 그러니까. 조선이라는 나라가 명나라보다 오래 살아남았기 때문에 밴치마킹을 한 나라가 오히려 몇백 년을 더 살아남았던 것이다. 병자호란 같은 경우는 임진왜란 끝나고 30년 뒤. 요 시기에는 죽은 명나라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조선의 지배계급 내부에서 논쟁이 불붙어온 상황이었고, 광해군 같은 경우는 임진왜란 직후에 실용주의적 채택, 명나라하고도 등거리를 취하고 이런 식의 등거리 왜교를 하다가 청이 지배적으로 되었는데도 일부 당파는 반청주의를 밀고 나갔으므로 청나라가 조선을 가만히 두면 안되겠다며 처들어온 것. 중국과의 관계에서 명이 청으로 교체해 갈 때에 청에 대한 태도가 심각하게 대두 되고, 명처럼 중앙 집권적이고 체계적인 질서를 유지해 온 세력은 아니었으므로 좀 더 현대화 되어가는 역사적 과정에서 보면 열린 질서에 대한 가능성이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명나라가 계속 존속해왔다면 기술 발전이나 실학 이라거나 이런 것도 덜 발전되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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