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호] 『까판의 문법』을 읽고ㅣ김성준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0-06-03 16:51
조회
93
 

『까판의 문법』을 읽고


김성준


1. 들어가면서


2018년,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장자연 사건’에 대한재조사에 착수한다. 그녀가 사망한 뒤 약 10년이 지난 상황이었다. 과거사위는 ‘장자연 리스트’와 관련해 이미 13차례나 증언을 제공했던 윤지오를 다시 참고인으로 불러들인다. 그녀는 장자연의 죽음 이면에 거대 권력의 카르텔이 있음을 증언하고, 여론은 그녀야말로 모든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믿게 된다. 한편 이러한 여론의 반대편에서는 그녀에 대한 정반대의 평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그녀가 얼마나 인격적으로 미숙하고 혐오스러운 태도를 보여왔는지 낱낱이 해부하면서 그녀의 증언 자체의 신뢰성에 의문을 부치기 시작한다. 이른바 ‘까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윤지오의 증언 내용은 무시되고, 누락되거나, 변조되는 과정을 거쳐 점차 힘을 잃어간다. 결국 검찰은 결정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조사를 중단하고, 윤지오는 여론의 뭇매를 맞은 채 자신이 거주하던 캐나다로 돌아가게 된다.


필자는 윤지오라는 개인과 관련해 상대적으로 정보가 없는 편이었다. 간간이 미디어에 노출된 사진을 통해 그녀의 얼굴을 접했을 뿐이다. 따라서 <까판의 문법>은 윤지오, 나아가 장자연 사건을 처음 접하게 해준일종의 입문서라고 볼 수 있다. 책을 보며 느꼈던 전반적인 느낌은 필자의 몰입이 양극적인 특성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어떤 부분에서는 무릎을 치며 확 몰입이 되다가도, 어떤 부분에서는 ‘글쎄...’ 같은 아리송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는 필자가 사태에 대해 가진 기본 지식자체가 미천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논의가 필요한 지점을 표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입문서란 본디 양날의 칼과도 같다. 독자는 미리 닦아놓은 길을 밟는다는 편의를 얻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길 주변에 사각지대를 낳는다. ‘관점‘에 대한 선점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변의 길이, 즉 대안적 관점들이 보일 때 이를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보는 것은 ‘입문서‘에 대한 하나의 좋은 비판 방식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서평은 <까판의 문법>에 대한 일종의 잔소리다.


 

2. <까판의 문법>의 전략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까판의 ’문법‘을 다룬다. 깐다는 것은 혐오의 다른 표현인데, 따라서 까는 것의 문법이라 함은 우리가 혐오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기술적 방식을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기술이 대안적 진실을 만들어냄으로써 진짜진실을 우리 눈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결국 폭력적인 권력관계를 은폐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본다. 윤지오의 증언을 혐오의 문법 속에 위치지음으로써 그 가치를 격하시키는 전략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밟는다.


먼저 증언이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원본과 관련해 그것의 무수한 복제물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진짜와 가짜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다음에는 이러한 복제물들, 즉 전언傳言의 주어를 생략하거나 그것이 위치한 맥락을 바꿔치기함으로써 메시지를 변조한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전언의 최초 발화자로 여겨지는 인물에 대한 인격적 가공이 진행된다. 해당 인물의 과거 부적절한 행실이 표면화되면서, 증언자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작업이 병행되는 것이다. 이후 전언과 가공된 발화자의 이미지를 결합함으로써 원본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과정이 이어지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해 이뤄짐으로써 결국 대안 진실이 진짜 진실의 자리를 바꿔치기 한다.


저자가 여기에 대항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 단계를 밟는다. 첫째는 원본들을 발굴하고 이들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함으로써 증언의 ’일관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고대문헌 번역자의 작업을 닮았다. 그는 전언들 사이의 연결관계를 분석하면서 누락되고 변조된 것들을 역으로 추적해가는 방식을 택한다. 까판이 쓰는 가장 흔한 전략은 주어를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가령 조사관의 질문에 대해 윤지오가 ‘(자신에 대한) 성접대 강요가 없었다’고 할 때, 이를 ‘장자연에 대한 성접대 강요가 없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실체의 ’불명확성‘을 ’부재‘와 동일시하는 방식이 있다. 가령 저자는 서민 교수가 ’장자연 리스트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 했다‘는 검찰의 조사 결과를 ’장자연 리스트의 실체가 없다‘로 슬쩍 바꿔치기한다고 지적한다.


둘째는 윤지오를 둘러싼 다양한 시각들의 맥락을 분석하고, 윤지오의개인적 속성을 증언 자체의 내용과 최대한 분리시키는 것이다. 저자는 윤지오를 둘러싼 논쟁의 초점이 증언 자체보다 증언자의 인격적 측면에로 겨냥되는 사태를 비판하고자 한다. 윤지오가 과거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나오거나 욕설을 했던 장면을 유포함으로써 그녀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키고, 그로써 증언 자체의 신빙성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모든것의 배경에 여성에 대한, 특히 여성 ’딴따라‘에 대한 혐오가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비단 그녀를 묘사하는 언론 및 대중의 시각에서뿐 아니라 사법적 절차 속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오덕식 판사의 판결 결과를 분석하여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문법을 발견하고, 검찰의 성폭행 여부에 대한 조사가 소극적인 차원에서 그치고 마는 과정을 낱낱이 해부한다.


셋째는 증언들의 일관성을 확보함으로써 ’증언자 윤지오‘의 진짜 정체성을 복구하는 한편, 대안진실을 재생산하는 배후의 세력을 가능한 한 깊숙이 조사해 들어가는 것이다. 먼저 저자는 언론에 자주 공개되지 않았던 2009년의 초기 진술 결과들을 참조함으로써, 실제로는 윤지오가 ’큰 흐름의 일관성‘을 갖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어서 그는 장자연으로 하여금 문건을 작성하게 만든 장본인인 유장호 및 이O숙의 이익관계를 철저히 분석하는 한편 윤지오를 공격했던 유튜버, 기자, 방송국 PD들과 가해자였던 김종승 및 홍O근 사이의 관계를 해부함으로써 그들이 윤지오를 폄하할 수밖에 없었을 동기들을 발견해낸다. 또한 저자는 아무런 정치적, 물질적 이득 없이 증언에 임했던 윤지오의 처지와 그녀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야 했던 집권세력의 상황을 비교하는 가운데, 심지어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조사 발표 자체를 의문시하는 데까지 이른다.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조작이 개입(조정환, 244p)“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검찰의 ”사익 동기와도 연관시킬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았다(조정환, 246p)“는 것이다.


 

3. 해석의 문제


필자의 몰입이 방해되었던 지점 중 하나는 바로 여기에서 생긴다. 저자는 원본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그 배후세력을 추정하고, 결국 사법적 절차 자체의 신뢰성을 의문에 부치기 때문이다. 1장의 주된 내용이 ’절차 중심주의‘에 대한 저자의 비판으로 점철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절차적ㆍ형식적 정의’와 ‘내용적ㆍ실질적 정의’를 비교하면서 우리가 전자에만 치중할 경우 실제적으로 권력적 폭력의 색깔을 띤 사태 자체가 동등한 법적 주체들 사이의 형식적 관계로 추상화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본다. 경찰의 조사 과정을 분석한 8장의 내용은 이러한 위험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가령 증언자가 용의자에 대해 구체적 이미지를 제시하면 경찰 측에서는 이를 나이, 체격, 키 등의 속성으로 추상하여 기술하고, 이후 이러한 기술된 사실에 의거해 용의자를 대조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철학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유의미한 문제제기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가장 객관적인 학문조차 언제나 추상화의 매개를 거치는 과정 중에 실재를 변조시킬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추상화의 문제는 정확히 ’해석‘이라는 것의 근본적 한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해석을 배제한 세계의 객관적 기술이란 가능한가? 저자는 윤지오를 험담하는 반대 세력들이 합리성을 상실한 채 정동에 기울어 왜곡된 해석을 제공하는 사태를 비판하는 가운데 참된 사실에 다가가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가 기존의 ’해석‘을 반박하기 위해 ’객관적 사실‘뿐 아니라 본인의 ‘해석‘을 대조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점이다. 가령 윤지오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근거로 가장 자주 사용하는 사례 중 하나인 ”이슈를 이용해서 영리하게(조정환, 225p)“라는 문장을 살펴보자. 서민을 비롯한 윤지오 반대론자들은 이를 ‘(관심을 끌기 위한) 이슈를 이용해서 영리하게 (이득을 취하겠다)’라는 문장으로 이해한다. 반면 저자는 그녀가 이 문장을 발화했던 당시 카톡 대화의 앞뒤 맥락을 파악해 이것이 ‘(고 장자연 사건과 관련하여) 이슈를 이용해서 영리하게 (그동안 계획했던 행동들을 실현해보겠다)’라는 문장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들 간의 싸움은 장자연과 윤지오 사이의 친분관계를 두고도 벌어진다. 윤지오 반대론자들은 그녀가 장자연과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 밖에 없다는 사실을 공개하는 한편, 그녀가 장자연과 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장자연의 남자친구 및 김수민의 의견을 반영하여 이 친분관계가 가공된 것임을 폭로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윤지오가 아무런 경제적 동기도 없는 상태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수차례의 증언에 임했던 점, 그녀가 장례식 장에서 문건을 보았던 유일한 연예인 동료였다는 점 등을 들어 친분관계가 존재했다고 반박한다.


이처럼 대안적인 경로를 따라 기존의 해석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그의 ’문법‘ 비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윤지오는 리스트에서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특이하게도 이름이 같(조정환, 236p)“은 정치인의 이름을 보았으며 술자리에서 국회의원을 본 적이 있다고 진술한다. 이후 재조사 과정에서 검찰은 국회의원 사진들을 보여주며 기억을 대조시켰고, 술자리에서 봤던 국회의원의 인상착의가 ‘구준표와 이름이 같은’ 정치인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진다. 이런 점 때문에 윤지오의 진술의 신빙성을 두고 맹공격이 가세됐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서 사태를 하나하나 재분류하는 작업을 거친다. 그에 따르면 윤지오가 리스트에서 해당 이름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술자리에서 만났던 국회의원의 인상착의와 일치하는지 여부만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전자까지모두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저자는 전자와 후자의 불일치가 결국 전자와 후자 모두를 부정하는 사태로 나아감으로써 사태가 무마되고, 소극적으로 처리되는 과정을 비판한다. ”합하면 2명(조정환, 241p)“의 국회의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철저하게 부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법 비판의 다른 사례는 윤지오의 ’검은 옷‘ 발언과 관련된다. 윤지오는 김어준과의 인터뷰에서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검은 옷만 입고 다니고 구석에 있고 이럴 필요가 없었는데 그 동안저는 집 밖에도 못 나가고 몇 년을 일 자체를 못 했거든요(조정환, 282p)“라고 말한다. 여기서 윤지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지난 10년 간 실제로는 사업도 하고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모델활동도 하는 가운데 인터넷 방송도 진행했던 사실을 거론한다. 그녀가 명백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onugi97이라는 한 유저의 발언을 언급하며 이를 비판하고자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유저는 ”집 밖에도 못나가고 “몇.년.을 일 자체를 못”한 바로 그 동안 많은 벗방 라이브를 하셨더군요(조정환, 276p)“라는 글을 올린다. 여기서 저자는 ’벗방‘의 개념 규정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녀가 ’벗방‘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밝히고, ’몇.년.을‘이라는 수식어가 ’벗방‘에 귀속되는 것을 비판하면서 이 수식어는 ’일을 못 했던‘ 것에 대한 것에 한정되어야 하며 ’검은 옷을 입은‘ 사실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발언을 오독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그녀가 몇 년 간 일을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간 동안 벗방을 하거나 검은 옷만 입고 돌아다닌 것은 아닐뿐더러, 그녀가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소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첫째로 서민의 자료(서민, 132p)를 보면 그녀가 실제로 YTN <스탠바이미>에서 검정옷을 입은 것을 인정하는 모습이나 <오늘밤 김제동>에서“검은색만 입고 다녀서”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둘째로 저자는 onugi97이 과거 지웠다가 다시 복원한 문장이 변조되었다고 여기면서, 과거 당시의 onugi97의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보이는(조정환, 276p)“ lamer297이라는 유저의 글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셋째로 그는onugi97이 ‘몇.년.을’이라는 수식어를 ‘벗방’과 ‘검은 옷’에 잘못 적용했음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onugi97의 비판 중 실제로 적절해보이는 일부분, 즉 실제로 그녀가 지속적으로 방송을 하고 사람들도 만나며 살았다는 것에 대한 비판은 무시하고 지나가버린다. 여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는데, 저자가 반대 진영의 의견 중 가장 과격한 것을 선택함으로써 그것을 반대 진영 의견의 전형으로 선택하고, 결국 그들의 논리의 문제를 모두 그 안으로 귀속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허수아비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4. 개념의 과잉


저자는 꽤 오랫동안 정치철학을 연구해온 사람으로 철학적 개념에 대한 내공이 만만치 않은데,이런 개념들이 사태에 잘못 적용되고 결국 논리에 비약이 따르는 경우들이 생긴다. 가령 윤지오가 2009년 당시 장자연이 마약을 했던 사실을 부정했다가 2019년 재조사때 이 말을 번복하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술이 아닌 무언가 있었던 거 같고…(조정환, 89p)”라고 말했던 것을 보자. 박준영 변호사는 이를 보고 사람의 기억은 흐려지기 마련인데 10년 뒤의 진술이 번복된다면 이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그런데 저자는 박준영이 “낡은 뇌국소론적(조정환, 91p)” 관점의 기억을 갖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러한 기억론은, 기억이 뇌의특정한 장소에 보존되었다가 상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조정환, 91p)”고 말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베르그송의 기억 이론을 끌어와 철학적 의미의 기억 개념을 설명한다. 그는기억이 뇌의국소적 장소에 저장되는 데이터 같은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과거에 있었던 상황이 당시에는 기억나지 않다가 이후에 갑자기 떠오르는 현상들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변호사가 정말 기억에 대해 이런 ‘국소론적’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을뿐더러, 저자의 기억이론은 오히려 실제 임상 관찰 결과에서 동떨어진 것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과거의 기억이 소거되는 것은 새로운 기억이 형성되는 것에 비례해 점차 지워진다(Higgins, 239p). 그렇기 때문에 정신의학이나 법학에서는 최면을 신뢰성이 높은 도구로 사용하지 않은지 이미 오래다. 물론 억압되었던 기억이 미래의 특정 시점에 되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 자신도 이런 것이 스크린 메모리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했다. 말하자면 저자는 ‘뇌국소론적 이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박준영이 이야기한 실재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게다가 저자는 10년 뒤의 윤지오가 당시의 사건을 “달리 인지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조정환, 446p)”이라고 하면서 윤지오의 주장이 해석에 가까울 수 있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그는 시간에 따른 기억의 신뢰도에 대해 이중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한다. 그는 유장호와 장OO의 기억이 믿기 어렵다고 비판하면서 “시간이 진술을 더 정확히 만드는(조정환, 130p)” 경우도 있지만 이들의 경우 “그런 경우에 속한다고 보기는 어렵다(조정환, 130p)”고 말한다. 윤지오가 22세 당시에는 마약이 뭔지몰랐기 때문에 사태에 대한 인지가 올바르지 않았을 수 있으며, 이것이 나중에야 의미화되었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부분도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추정’에 의거한다는 것이다.


윤지오에 대한 세간의 비난을 ‘증여혐오’나 ‘증언혐오’라는 개념과 연관시키는 부분에서도 다소개념적 무리가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페미니스트 김수민이 초반에 윤지오에 대해 호의적인 접근을 했다가, 결국 그녀를 사기꾼으로 몰아간 것의 배경에 ‘증여’에 대한 혐오가 놓여있다고 진단한다. ‘증여’란 ‘교환’과 다른것인데, 후자와 달리 등가교환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계약 당사자 간의 교환이 아니며, 갚아야 한다는 책무를 부과함 없이 주는 행위이다. 쉽게 말해 테이크를 전제하지 않고 기브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저자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모든 ‘주는 행위’를 교환 행위로 규정지으려는 무의식적 충동을 갖고있다고 본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 체제의 유지를 위해 필연적으로 증여에 대한 혐오를 수반해야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김수민이 과거 이수역 사건 당시에 금전적 원조를 요청했던 피해자들을 맹비난했던 사례를 언급하며, 윤지오와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증여에 대한 혐오가 관찰된다고 진단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었던 ‘증여’로서의 도움을 ‘교환’으로 변질시키며 상대를 비난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줄때는 아무 말 안 하더니 왜 나중에 대가를 요구하냐는 것이다.


윤지오의 후원금 반환 소송 사태에 대해서도 그는 유사한 시각을 견지한다. 저자에 따르면 기부 같은것은 기본적으로 증여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는 이들의 고발 논리 배경에 “윤지오의 증언은 1억 원 이상 화폐 후원금과 교환될 수 없고 또 교환되어서도 안 된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조정환, 374p)”고 비판한다. 그는 애초에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의로 증여되었던 기부금이 사기로 변질되는 사태를 지적하면서, 그 배경에는 “후원자의 증여를 출발점으로 삼은 증여-수증의 과정을 놓고 그것이 ‘사기였던가 아니었던가?’라는 프레임 속에 우리를 가두는, 철저히 시장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박훈-최나리의) 소송행렬(조정환, 403p)”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기부금을 제공했던 후원자들이나, 도움을 제공한 김수민의 의도가 진정 ‘증여’로 출발했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증여 개념 자체가 철저히 ‘이득이 없음’을 전제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가 증여사회의 사례로 제시하는 포틀래치 경쟁의 경우에도, 추장들은 ‘명예 및 권력상의 우위’를 위해증여를 행한다. 자본주의적 이익은 아니지만, 어떤 심리적 혹은 무의식적 이익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김수민이나 후원자들이 경험했을 정동적 경험, 즉 억울함이나 분노 같은 것들은 ‘증여’같은 추상적 개념을 경유하기보다는 오히려 경험적으로 이해할 때 더 납득하기 쉽다. 우리는 누구나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돕고 싶어한다. 그런데 도와준 사람이 자신을 이용했다는 ‘느낌’이 들면 분노에 빠지는 것은당연하다. 이것은 내가 교환을 통해 합당한 이득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감정이 아니다. 게다가 저자는 소송을 제기한 후원자가 전체 후원자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대다수가 소송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의 배경에는 ‘선의의 증여에 대한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인지부조화의 측면 때문에 이미 저지른 행위를 바꾸기보다는 행위에 따르는 의도를 수정하는 것을 더 잘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자신이 선으로 행한 행동이 사실은 악 혹은 사기였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면에서 자기 부정을 필요로 하는데, 이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는 그가 ‘증언혐오’라고 부르는 사태를 살펴보자. 그는 윤지오의 증언을 거짓된 것으로 만들려는 것의 배후에 가해권력자들의 공작이 놓여있으며, 이로 인해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증언에 대한혐오가 팽배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정말 대중들이 윤지오에 대해 보이는 혐오의 주 대상이 ‘증언’으로 국한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저자는 윤지오의 증언 내용 자체의 사실관계를 되묻는 박준영을 보며 그가 증언을 폄하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본다. 이미 과거사진상조사단 구성원들이 사실관계를 대조해 검증한 자료들을 왜 신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앞서 위에서 논했던 부분과 비교해봤을때, 저자는 이처럼 과거사위의 발표 결과에 대해서도 신뢰와 불신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보인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까판의 문법은 분명 증언의 내용을 증언자와 혼동시킴으로써 마치증언자체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증언 자체에 대한 신뢰와 수긍이 증언자의 혐오를 배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까판의 문법>은 계속해서 이 지점에서 비일관된 모습을 보여준다. 즉 증언 자체와 증언자의 속성은 전혀 별개라고 주장하면서도, 증언자의 속성 자체를 변호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5. 무시되는 정동적 차원들


<까판의 문법>을 통해 처음으로 윤지오 사건을 접하면서, 필자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도대체 왜 이토록 동시다발적으로 각계에서 윤지오에 대한 의심과 비난들이 나타나는가?’라는 것이다. 저자는 조선일보에 적대적인 박훈 변호사와 우파보수 유튜버 김용호가 그들의 정치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윤지오에 대한 입장에서는 같은 스탠스를 보이는 것을 지적하며 이렇게 동일한 의견이 양쪽에서 “약간 변조되어 …… 나타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여기에 대해 정확히 동의하는 바이며 이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이러한 비난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메커니즘을 무의식적 차원과 의식적 차원 모두에서 다룬다. 무의식적 차원이라 앞서말한 세 가지 혐오, 즉 여성혐오, 증여혐오, 증언혐오다. 의식적 차원이라 함은 이러한 혐오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 가해권력자들, 즉 조선일보와 여타 언론 및 검찰을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 두 가지 차원을 모두 기술하면서도, 공격의 대상을 설정할 때는 주로의식적 차원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 그는 자신이 논박하고자 하는 주 공격 대상을 ‘진실을 조작하고 누락하는’ 가해권력자들 쪽으로 맞춘다. 저자는 “『조선일보』나 SBS도 국민 몰래 윤지오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조정환, 457p)”으며, 김수민의 경우 자신이 고발한 사람들이 “사기꾼이 아님을, 혹은 적어도 아닐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체하는 것으로 보인다(조정환, 375p)”고 본다. 그는 윤지오를 비방하는 대중들도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꾸며내고 있다고 본다. 심지어 ‘윤지오 이모부(그가 진짜 이모부인지 아닌지는 필자도 잘 모르겠다)’가 윤지오를 비방하는 것의 동기에 대해서도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낸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저자의 주 공격 대상이 ‘나쁜 의도를 가진 가해권력’으로 수렴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워보인다.


저자가 세 가지 형태의 혐오를 기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충분히 분석되었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즉 의식과 의도의 너머에서 윤지오에 대해 가해지고 있는 무의식적 혐오에 대해 충분한 분석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윤지오를 둘러싼 증언혐오를 비판하면서 ”그가 평소에 착한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돈을 밝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기적인 사람인가 이타적인 사람인가 등은 이 문제와 아무런 본질적 연관도 갖지 않는다(조정환, 116p)“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는 혐오가 문제를 흐려서는 안 된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이런 혐오가 단지 나쁜 것이라고만 할 뿐, 왜 그런 혐오가 대중들 사이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었는지 사유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우리 중 일부는, 마치 박훈 변호사가 그랬던 것처럼, 조선일보나 검찰에 대해 반대하면서도 여전히 윤지오에 대한 무의식적 혐오를 버리지 못한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수민과 윤지오의 싸움도 사실은 정확히 이런 정동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김수민의 주장이 가해자에 의해 이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김수민의 공격 동기는 가해자의 편을 들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단 종교지도자가 성경을 왜곡했다고 해서 성경 자체가 이러한 왜곡을 전제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윤지오에 대한 비난과 공격은 정신역동적으로 보았을 때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접근될 수 있다. 하나는 나르시시즘적 손상과 죄의식의 개념을 경유하는 것이며, 둘째는 무의식적 ‘나쁜 대상’의 개념을 경유하는 것이다.


‘딴따라 여성’이라는 윤지오에 대한 평가는 정확히 처음의 두 가지(나르시시즘적 손상과 죄의식)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저자의 말마따나 박훈과 같은 전통 좌파는 연예인에 의한 노동운동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꼭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구축된 노조 운동의 남성 본위적이고 남성 우월적인 관점(조정환, 492p)”의 차원으로만 해석되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정치계나 운동권에서는 흔히 자신의 이념이나 노선의 방어를 위해 다른 의견을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관찰되곤 한다. 이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폄하와는 전혀 별개의 역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장애인의 노동운동이나, 청소부들의 노동운동에 대한 일부 좌파 지식인들의 무시와 평가 절하 속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윤지오가 우리를 속였다’라는 대중의 인식 속에도 비슷한 나르시시즘적 차원이 깔려 있다. 여기에는 ‘감히 너 따위가 나를 속여?’라는 정동이 전제돼 있다. 그래서 대중들의 윤지오에 대한 비난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에 대한 비난보다 더 가혹한 양상을 띤다.


여혐은 죄의식의 차원도 포함한다. 이는 과도한 초자아로 인해 억압된 성적 욕망이 왜곡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성적 욕망의 인정과 수용이 안전하게 이뤄지지 않는 경우, 개인은 자신이 과도하게 억압해버린 수치스럽고 더러운 성적 욕망이 자극될 때마다 이에 대해 가혹한 비난과 멸시를 드러내게 된다. 최근 N번방 사태를 두고 나타난 “내 딸이 지금 그 피해자라면, 내 딸의 행동과 내 교육을 반성하겠다”는 보수주의자의 발언이나, (아이러니하게도) 여자 청소년들에게서 나타나는 동년배 피해자들에 대한 가혹한 비난은 모두 비슷한 역동을 배경에 두고 있다. 창녀에 대한 멸시가 성녀에 대한 흠모와 항상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도, 성에 대한 과도한 혐오가 종종 기독교 공동체에서 드러나는 것도 절대 우연은 아니다. 딴따라 여성에 대한 혐오 안에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적 사회의 폐해도, 그런 것을 이용하는 가해권력도 있지만, 그와 별개로 건강하지 못한 나르시시즘과 부적절하게 억압된 성의 문제 또한 놓여 있다.


한편 우리의 무의식은 우리 안의 ‘나쁜 것’을 외부로 투사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타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으면 이것을 나에게서 발원하는 것으로 여기기보다는 외부로 투사하여 ‘상대가 나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들은 이러한 투사를 자주 사용하고, 상대방에 대한 극단적인 이상화와 평가절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경향을 보인다. 정상적인 사람들도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종종 이런 경향을 보인다. 필자는 윤지오를 직접 본 적이 없고, 그녀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도 몰라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그녀가 김수민을 비롯해 타인들과 논쟁하는 모습은 일면 ‘나쁜 대상’에 대한 공격을 함축하는 측면이 있다. 그녀가 자신의 경호를 위해 거액을 요구하는 것이나, “두 번의 교통사고, 스마트워치 오작동, 숙소에서 난 냄새, 잠금장치 파손, 숙소에서 들리는 기계음 등을 호소”하며 두려움을 표현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보인다. 김수민과 윤지오의 관계가 갑작스럽게 파국으로 치닫는 양상은 윤지오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무수하게 반복되고 있다. 기자회견은 논쟁적인 구도로 흘러가고, 숙소에서의 경찰과의 통화, 인스타그램에서의 유저들과의 대화 모두 극렬한 싸움의 장으로 변질되고 만다. 사람들은 단순히 시시비비를 따지다가 쉽사리 서로에 대한 모욕적 언사로 쉽사리 넘어가버린다.


그녀가 『머니투데이』의 기자가 배달한 꽃을 해당 언론사의 회장인 홍O근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이는 저자의 말마따나 “하급 직원이 자신의 상사가 맞아야 할 매를 대신 맞는 경우는 한국 사회에서 허다하(조정환, 100p)”기 때문이 아니라, 윤지오의 성격적 특성과 그녀가 처한 스트레스 상황의 맥락 상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이처럼 교통사고나 꽃배달 사건, 또는 호텔 사건에서 그녀가 보였던 반응들이 결코 ‘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느꼈던 공포감은 분명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윤지오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역동적 측면들을 ‘이해할 만하다’고 이야기함과 동시에 그녀에게 어떠한 ‘의식적 이득’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녀가 ‘옳다’는 결론으로 비약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는 앞뒤 정황을 참작해 윤지오가 증언에 임한 것에 어떠한 경제적 동기도 없으며 그녀가 장자연 사건에 임한 것 또한 선한 의도에서 발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여기에 대해 정확히 동의하는 바다. 그녀는 절대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나 악한 의도를 가지고 출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무의식적 의도나 욕구에 대해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남는다. 저자는 그녀가 “이슈를 이용해서 영리하게”라고 말했던 내용을 사기프레임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그것이 이득을 착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설파한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가졌을 어떤 욕구의 차원은 다뤄지지 않는다. 저자는 그녀의 방송이 전적으로 ‘생존방송’이었다고 이야기하며 방송이 그녀에게 제공했을 다른 차원의 만족은 사상시켜버린다. 그녀는 분명 끊임없이 외부의 관심을 갈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관심을 받기 위한 이슈를 위해 책을 내고 인터뷰에 응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누군가는 이런 그녀의 측면에 대해 혐오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녀가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한 그녀를 비난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증언자 윤지오와 개인 윤지오를 구별해야 한다는 저자의 논리는 여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윤지오의 증언을 구출하기 위해 굳이 윤지오를 어떤 선하고 영리한 투사로 만들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녀가 책을 내고 방송 인터뷰에 응한 진짜 이유는 “진실을 증언해도 진실이 국민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10년 내내 경험했기 때문(조정환, 452p)”이라고 하거나 “국민들이 조작된 무지 상태에 방치되고 허구가 진실을 대체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보았기 때문(조정환, 452p)”이라고 결론짓는다.


 

6. 윤지오를 변호해야 하는가?


저자가 윤지오 사건을 드레퓌스 사건에 비유한 것이 무리도 아니다. 그는 윤지오의 증언을 복구하는 것을 넘어, 증언자 윤지오를, 나아가 개인 윤지오를 변호하는 것만이 장자연 사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본다. 그래서 <까판의 문법>은 결국 사회 비판을 넘어서서 종국적으로는 ‘윤지오 변호하기’로 나아간다. ‘이해할 만한 것’이 ‘옳은 것’으로 전환되는 것의 필연적인 귀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바로 이 도약 속에서 팔이 안으로 굽는 것과 같은 정동적 편향이 생겨난다. 가령 저자는 (윤지오가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말들에는 전적인 신뢰를 표현하면서도 김수민의 말은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윤지오가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윤지오의 말에 근거한 일방적 주장(조정환, 368p)”이라며 그 신빙성을 의심한다. 또한 그는 김수민이 보인 ‘속은 자의 분노’라는 정동에 대중이 쉽게 매료되는 것에는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윤지오의 정동적 차원에 심하게 동일시되는 모습을 보인다.


저자는 윤지오 증언의 일관성을 확보하는데는 주력하면서도, 그녀가 발언을 하는 여타의 내용들의 일관성과 신뢰도는 고려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윤지오의 미술작품 ‘호랑이의 눈’이 표절작품이 아닌 파생작품이라고 정정하거나, 그녀가 나온 대학교가 실제로 4년제가 아닌 1년제 학교였다는 사실을 정정해주는 데에는 힘을 쏟지만, 정작 그녀가 왜 고등학교 4년 과정을 1년만에 졸업했다고 말했는지(서민, 95p), 하필이면 독창적인 자기만의 작품이 아닌 파생작품에 의지했는지, 엄마를 엄마가 아닌 ‘심리치료사’라고 소개했는지(서민, 209p), 승무원이 된 적이 있었다는 거짓말을 했는지(서민, 176p), 미용잡화점을 그룹사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그곳의 부대표라고 칭하는지(서민, 168p), 6개국어를 한다고 하는지(서민, 102p), 로클럭(Law clerk)에 합격했다고 거짓말하는지(서민, 106p) 등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않는다.


저자는 윤지오를 비방했던 서준혁이 사칭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면서도 “대의를 위해 작은 거짓말은 해도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조정환, 447p)”라는 취지의 의견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큰 흐름의 일관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야기하는 ‘큰 흐름의 일관성’이라는 것이 과연 적합한 것인지 의문이 따른다. 저자는 윤지오의 10년전 증언 내용과 현재의 증언 내용을 샅샅이 분석하며 이들 사이에서 “리스트가 있었다”고 말한 사실이 ‘일관되게’ 유지되어왔음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이것은 발화자로부터 발언의 내용을 분리시키고 전적으로 내재적인 분석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내재적 텍스트를 발화한 주체가 다른 텍스트의 맥락에서 비일관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이런 문제는 가령 정신의학자가 망상을 가진 환자를 대할 때의 문제와 유사하다. 망상은 그것이 개연적이든 개연적이지 않든 간에 얼마든지 내재적으로 ‘일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의학자는 그것의 일관성을 근거로 그 텍스트 내용을 ‘신뢰’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정신분석학의 대가 맥윌리엄스는 편집적인 사람들이 정치, 언론매체 등에서 설사 특정 사실과 관련해 옳은 관점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가 “덜 편집적이 되는 것은 아니(McWilliams, 171p)”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런 이유로 정신의학자는 환자가 보고하는 내용의 신뢰도를 파악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주변 인물들의 의견을 참조하는 가운데 사실관계를 해명하는 작업을 거친다. 물론 환자가 가진 망상에 대한 믿음은 저자의 말마따나 ‘실재하는’ 것이며, 거기에서 환자가 느끼는 정동 또한 솔직하고 진정한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정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해주어야만 한다. 경호원을 부르며 두려움에 떨던 윤지오를 보며 ‘실제로는 가해자가 없지 않았느냐’라고 비난하는 것이 잘못된 이유는, 그것이 그녀의 정동적 경험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실제 사태를 부정하기 때문은 아니다.


 

7. 올바른 연대를 향하여


<까판의 문법>은 대한민국 사회에 팽배한 여성혐오 문화와 가부장적 지배구조, 지배계급의 착취 행태 등을 경유하는 가운데 이들에게 통용되는 문법 구조들을 탐구함으로써 어떻게 거짓 진실이 재생산되는지 그 메커니즘을 효과적으로 분석해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은 하나의 관점을 따라 해석된 ‘사태’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대안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가해자 중심이 아닌 피해자 중심적 시각으로 사건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관점에서 기술된 자본주의의 역사를 거꾸로 세워 노동자의 관점에서 재구성했던 맑스의 방법론을 상당 부분 닮아 있다. 필자가 글의 초반에 ‘해석’에 대해 다룬 바 있듯이, 세계에는 관점을 넘어선 객관적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무수한 해석들의 층위로 이루어졌으며 이것들이 상호 중첩하고 투쟁하며 관계짓는 장들로서 구성된다. 그렇다면 계급투쟁은 결국 해석하는 힘들 사이의 싸움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싸움의 힘은 결국 연대에서 나온다.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그의 무기인 공통장 이론과 연대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필자도 동의하는 바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변호’와 ‘연대’를 동의어로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초기에 윤지오를 변호했다가 이후 등을 돌렸던 안민석 의원이나 고발뉴스의 이상호 기자, 뉴스공장의 김어준 등을 비판하며 이들이 “정파 투쟁과 정권 투쟁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조정환, 455p)”가버렸다고 본다. 그들은 “윤지오가 …… 큰 정치적 플로스 효과를 갖다 주지 못(조정환, 455p)”했기 때문에 정치적 목적에서 버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문재인 정권의 경우 남성 20대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장자연-윤지오 사건에서 물러나는 전략을 택했다고 본다. 저자는 약자가 도움을 요청할 때 손을 잡아주지 않는 것이 진정 국회의원들의 윤리학에 해당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공통장에서의 다중의 힘이라는 것은 무차별적인 연대에서 기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연대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행위임과 동시에 상호 신뢰를 기반에 둔 것이기 때문에, 항상 개인의 ‘신뢰성’이 문제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피해자와 연대하되, 피해자의 정동적 세계에 동화되거나 휩쓸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공감은 결코 편들어주기의 동의어가 아니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묻는다. ”혹시 우리가 증언자 윤지오와는 연대할 수 있지만 사기꾼이나 접대부로 비난받고 있는 윤지오와 연대하여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조정환, 492p)“라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접대부로 비난받는 사람과 연대를 거부하는 것은 ‘혐오’에 의거해 차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지만, 상대가 신뢰를 주지 못할때 연대를 거부하는 것은 정당해보인다. 저자는 대중이 윤지오의 가짜 정체성에 속았으며, 그러한 기만을 행한 자들이 가해 권력자들의카르텔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들 스스로의 평가능력을 폄하하는 것이다. 대중들은 저마다의 논리에 따라 윤지오 사건을 해석하고, 그것을 자신의 관점에 담는다. 정치적 행위와 연대는 필시 ‘영리함’을 필요로 한다. 이 영리함이란 타인을 효과적으로 설득함으로써 자신을 신뢰할 수 있게만드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어느 정도 선까지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일관성을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영리하지 않았던’ 윤지오를 계속해서 변호하는 것이 올바른 연대의 방향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필자는 윤지오의 의견에서 출발해 추가적으로 엄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점, 장자연에 대한 성폭행 여부를 둘러싸고 소극적인 조사가 진행되었던 점, 여론이 장자연 사건보다는 윤지오 사건에로 초점을 옮겨간 점에 대해서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비판적이다. 우리는 분명 조금 더 노력할 수 있었다. 우리의 연대가 필요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분명 사실 관계에 의거해야 하며, 추정이 아닌 확실한 근거에 의거해 진행되어야만 한다고, 그래야만 연대하는 자들의 ‘해석’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절차와 형식주의는 우리를 피곤하게 하지만, 우리는 결코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REFERENCES
(1) Higgins E. The Neuroscience of Clinical Psychiatry. Wolters Kluwer Health;2018.
(2) McWilliams N.Psychoanalytic Diagnosis, Second Edition: Understanding Personality Structure in the Clinical Process. New York: Guilford Publications;2011.
(3) 서민. 윤지오 사기극과 그 공범들. 뿌리와이파리;2019.
(4) 조정환. 까판의 문법. 갈무리;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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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권명아 지음, 갈무리, 2019)


정동과 페미니즘, 페미니즘과 젠더 정치의 정동 효과들에 대한 이론적 연구이자, 온 힘을 다해 무언가 '다른 삶'을 만들어보기 위해 부대낀 날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페미니즘과 젠더 어펙트에 대한 이론적 탐색과 실천적 개입은 하나의 몸과 다른 하나의 몸이 부대껴 만들어내는 힘.마찰.갈등에서부터, 개별 존재의 몸과 사회, 정치의 몸들이 만나 부대끼는 여러 지점들까지, 그리고 이런 현존하는 갈등 너머를 지향하는 '대안 공동체'에서도 발생하는 '꼬뮌의 질병'을 관통하면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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