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호] 삐라의 추억ㅣ김명환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3-02 22:30
조회
1781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7


삐라의 추억


철도를 그만두기 전에 후배들에게 선물 하나 하고 싶었다.


10년을 지지고 볶아 펴낸 철도노동운동사 『만화로 보는 철도이야기』다. 숙제를 끝낸 것처럼 후련했는데, 철도노조 선전국장 백남희 동지가, 챙겨야 할 후배들이 또 있다고 한다. 후배 선전활동가들에게도 선물 하나 하란다.


운동진영에서 선전은 3D업종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한다. 물건이 나오고부터는 감정노동이다. 이놈저놈 빨간펜을 들고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그럼 니가 해, 임마!”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삭이는 것도 하루이틀이다. 3년 넘게 선전을 했다면, 그는 득도를 했거나 바보가 된 거다.


노동운동진영의 활동가들은 선전을 기능이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그 오해 때문에 많은 활동가들이 선전을 오래 하지 못한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PC를 저장이 가능한 타자기로 쓴다. 타자도 독수리타법이다. 작은 선전지 하나 디자인할 능력도 없다. 그런데 30년 넘게 선전을 했다. 선전은 기능이나 기술이 아니다. 선전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사람을 만나려면 내 마음을 먼저 열어야 한다. 상대를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이 닫혀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열려면 먼저 귀를 열어야 한다. 듣고 생각하고 말한다. 이게 바로, 내가 배운 선전이다. 선전은 소식을 전하는 보도나 행동을 강제하는 지침이 아니다.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선전은 투쟁의 조직이다.


후배 선전활동가들에게 줄 제대로 된 선물이라면 ‘선전운동사’다. 하지만 ‘철도노동운동사’에 데인 터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 바보짓을 두 번 하고 싶지는 않다. 월간 『노동해방문학』을 만들 때, 종이를 빨치산 선배가 댔다. 사선을 넘어온 늙은 동지와 전선에서 마시는 소주의 짜릿함이라니! 후배들에게 그 짜릿함을 전하고 싶다.


이제 내가 그 선배의 나이가 됐다. 후배 선전활동가들을 만나면 가슴이 뛴다. 그들의 모습에서 젊은 날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종이를 대던 옛 선배처럼, 후배들의 추억 속에 멋진 동지로 남고 싶다. 내가 후배들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삐라의 추억’이다. 나의 추억이 아니라, 후배들의 추억이다. 후배들의 추억 속에 멋진 동지로 남는 것이다.


* 김명환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사화집 『시여 무기여』에 시 「봄」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월간 『노동해방문학』 문예창작부장, 2000년 ‘철도노조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기관지 『바꿔야 산다』 편집장, 2007년 철도노조 기관지 『철도노동자』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같은 제목의 시집과 산문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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