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호] 중국혁명과 영웅본색(英雄本色) | 김익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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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6 10:09
조회
2470
중국혁명과 영웅본색(英雄本色)
『산촌』 서평


김익균(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 이 글은 2015년 7월 10일 웹진 「문화 다」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letters_en&ps_boid=37



예쥔젠은 우한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 중 7.7 사변(노구교 사건)으로 강제 귀국하면서 항전문예 시기 궈모뤄 지도하에 정치부 제3섹터의 국제 선전부에 가입했다. 항전민주문학운동 시기(1937~1949년)에 예쥔젠은 국민당통치구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1944년 홍콩에서 중국 항일 전선 선전 간사로 일하던 중 영국으로 초청되어 영국 정부가 주관하는 중국의 반파시스트 전쟁을 알리는 순회강연을 맡았다. 일본이 항복한 후에는 1949년 신중국이 건립될 때까지 영국에 머무르며 창작과 번역 그리고 유럽문학 연구를 진행한다. 『산촌』이 집필된 것은 이 시기일 텐데 예쥔젠의 아들 예녠센은 『산촌』에 대해 이렇게 진술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아버지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문학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중국 혁명의 배경과 상황을 보여 주는 장편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이 장편 소설을 통해 유럽 사람들에게 중국 사람들이 왜 혁명을 필요로 했는지 이해시키고 싶었다./당시 중국 혁명은 승리에 다가가 있었다./1947년에 아버지는 영어로 쓴 장편소설 『산촌』을 발표했다./그 소설은 유럽 문화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까 『산촌』은 예쥔젠이 1947년 영국에서, 유럽인들에게, 중국 혁명에 대해 알리기 위해, 영어로 쓴 작품이다. 본래 영국 정부는 예쥔젠을 “항일 저항 전쟁” 강연을 위해서 초청하였지만 『산촌』이 집필된 것은 항일 전쟁이 끝난 중국의 내전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끝난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에 남아서 장기간 활동하는 동안 영국정부와 예쥔젠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현재로서는 알지 못한다. 이 점은 괄호 친 채 『산촌』을 읽어 보자.

허베이성의 작은 산촌 마을이 중심이 되는 이 소설에서 중국의 ‘반제반군벌투쟁’은 후경화되어 있다. 지주 추민과 보안대 대장 왕사자, 마름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산촌 사람들처럼 살아 있는 인물로 생생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외국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산촌』의 ‘뒷표지’에 써진 ‘한 폭의 서정적 그림으로 그려낸 중국 혁명의 핵심!’이라는 문구는 이 소설의 내러티브가 사회적 갈등에 기반해 있지 않다는 점을 암시한다. 산촌에서 일어난 모든 일의 증언자인 ‘나’(춘성)의 도시행을 논외로 한다면, 1927년 중국 혁명의 실패 속에서 탄생한 ‘희망’인 설서인 라우리우가 출현할 수 있는 토양으로서 산촌이 전경화된다고 할 수 있다. 산촌에서 태어난 혁명가는 두 명이다. 민툰과 라우리우. 1차국공합작과 소비에트의 지원 하에서 쑨원 대학을 나온 민툰의 부정적 이미지와 이들의 부정성을 딛고 자생적으로 성장한 라우리우를 대비해서 보겠다.

『산촌』에서 외국인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간접적인데 산촌 사람들의 실감에 충실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산촌』에 드러나는 외국이란 대체로 전쟁과 도시의 외국 자본으로 표상된다. 제1차국공합작 이후 쑨원 대총통이 죽고 1926년 7월 10만명의 국민혁명군은 국민혁명의 본거지 광저우를 출발, 북쪽으로 진군하여 각지의 지방군벌과 전투를 치르며 반 년 만에 우한 난징 상하이를 점령했다. 국민당 정부가 북쪽의 군벌들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1926년 가을에 ‘나’(춘성)의 아버지와 형이 산촌으로 피난을 오는데 ‘춘성’의 형이 판 삼촌 앞에서 “그건 내전이 아니라 국제전이죠.”, “왜냐하면 양측이 외국 사람들로부터 무기를 공급받고 있으니까요.” 하고 “지식인처럼” 말하자 판 삼촌은 “혼비백산한 눈으로 형을 바라”본다. 이때 ‘외국인’은 산촌 사람에게 ‘지식인의 언어’처럼 난해한 그 무엇이다. “우리는 외국 사람들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었다.”라는 ‘나’의 서술은 다소 의아한 것이다. “아버지는 상회에서 휴가 없이 육 년간 일하면, 그 몫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상당한 금액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국내 상인들과 외국 공장들 간의 거래에는 이윤이 아주 컸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배당금을 받기 위해 육 년간 쉼 없이 일할 작정이었고, 이렇게 되면 종국에는 생계 걱정 없이 노년에 은퇴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해박한 목소리와 잇대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서술자는 전쟁과 관련해서 유독 순진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정작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은 패전 군인들의 언어로 다시 제시된다. “패배한 원인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20년 전 동북에서 러시아인들로부터 노획한 녹슨 총과 오래된 총알을 우리에게 팔아먹었어요. 우리 사령관은 일본인들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신사였지요. 군수품이 도착한 날, 그는 시험도 해 보지 않았지요. 무기들이 완전히 고물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109~110쪽) ‘나’의 형이 “외국 사람들로부터 무기를 공급받”는다고 지적한 “양측”의 한 쪽이 일본과 관련한 것은 명백하지만 다른 쪽은 제시되지 않는다.

서술자인 ‘나’의 아버지는 형을 “외국인 면직물 공장”에 견습생으로 취업을 시켰고 도시의 상회에서 서기로 일한다. 상회에서 받기로 한 배당금은 온 가족의 희망이지만 끊임없이 유예되는 어떤 것이다. “우리 사장과 화물을 거래해 오던 그 외국 상인들이 본국의 자기네 공장들에 어려움이 생겨 나머지 원자재를 사 가기를 거부했소. 그래서 가격이 급락하여 사장은 상회를 잠시 닫아야만 했소. 배당금도 연기되었소.” 끝없이 유예되는 배당금은 ‘나’를 산촌에서 도시로 빨아들인다. “이젠 농사짓는 일을 직업으로 생각하긴 어려워요. 더욱이 지금 우리 고향이 무질서하다니. 당신이 여기 와서 잠시 머무는 것이 나을 것 같소.” 아버지의 제안에 ‘나’의 욕망은 “벌써 ‘대도시’로 가 있”다. 대도시의 욕망이야말로 끊임없이 유예되는 배당금의 정체일 것이다. 전쟁과 자본을 통해 언뜻언뜻 얼굴을 드러내는 외국의 정체는 서구 국가, 어느 정도는 영국으로 보인다.(소설에서 단 한 번 ‘미국’이 언급되는데 정치 지도원이 ‘미국보다 큰 나라’로서 소비에트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 그 분은 수천 리의 땅과 강을 건너왔고, 낯선 영국말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혀를 굴려 음악과 같은 소리를 내는, 영어 발음을 알고 있지요. 그 언어를 들어 본다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입니다. ‘잘 지냈습니까?’라는 문장의 문장을 하려면 3년이나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그가 고관대작입니까?”/누군가 물었다./“물론 아닙니다!”/라우리우가 대답했다./“지금이 어느 땐데 고관대작이 있습니까! 그런 고관은 봉건사회나 대표합니다. 우리는 벌써 혁명적 사회 체제를 갖고 있는데, 고관 따위는 이제 필요 없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는 노동자입니다.”/“그런데 어떻게 그가 수천 리를 여행할 수 있습니까? 그가 어떻게 낯선 영어를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사는 그 지역 바깥으로 나가 본 적도 없거니와, 우리 글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걸요!”/“저어, 그것은 혁명하고는 관련 없는, 다른 이야기입니다.”/(…)/“그 사람은 낯선 영어로 우리에게 말합니까?”/(…)/“아마 아닐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어쨌든 그런 일은 혁명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난 모릅니다. 저어, 나는 아주 바쁩니다./(…)/판 삼촌이 중얼거렸다./“라우리우가 저 사람이 낯선 영어로 말할지 모른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 같아.” (307~314쪽)

조그만 산촌 마을의 설서인 라우리우는 혁명당 선전부 부간사가 되어 산촌 사람들에게 군중집회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뜬금없이 군중집회에 연설하러 오는 대표가 영어를 잘 할 거라고 말해 버린다. 돌아가는 정황으로 봐서는 ‘실언’이다. 이 소설에서 라우리우의 실언장면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에스페란티스토이자 영어에 능통한 작가 예쥔젠의 존재가 우선 연상된다. 당시 에스페란티스토들은 국제공통어의 필요성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요즘도 그렇지만 예쥔젠이 『산촌』을 집필하던 당시에도 영어의 위세는 대단했다. 예쥔젠 자신이 『산촌』을 영어로 썼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보다는 에스페란토가 국제공통어로 적합하다는 것이 에스페란티스토의 신념일 것이다. 무엇보다 에스페란토는 영어보다 쉬우니까.

영어는 어렵다! 이 간명한 사실로부터 계급적 판단이 나온다. “그가 어떻게 낯선 영어를 배울 수 있습니까?” 이러한 문제제기의 중요성을 라우리우는 이해하지 못한다. 라우리우는 연설을 하러 올 ‘그’가 ‘영어’를 구사할 거라는 무의식적인 편견을 드러내는데, 그 근거는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 있지 않겠는가! 라우리우의 무의식을 좇아서 산촌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가 고관대작입니까?” 산촌 사람들의 질문은 라우리우의 무의식에 공명하고 있다. 고관대작이 아니라면 그 어려운 영어를 어떻게 배울 수 있었겠는가? 그 어려운 영어를 구사하는 가난한 노동자란 형용모순이 아닌가? 이 질문은 혁명의 중핵을 구성한다. “저어, 그것은 혁명하고는 관련 없는, 다른 이야기입니다.”라고 황급히 대화를 끝내려 하는 라우리우는 혁명에 대한 그 자신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봉건사회”의 지성인으로 보인다.

혁명의 대표가 되어 돌아온 ‘그’가 산촌 마을 사람 민툰이라는 것을 알고 기뻐하는 라우리우와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보라.

추민은 그 바람에 깜짝 놀라, 대표를 바라보았다.(...)한 목소리가 웅성거리는 데서 불쑥 튀어나와 소동에 찬물을 끼얹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발끝까지 일으켜 세워 말하는 라우리우였다./“당신은 나의 이 다정한 눈을 속였군요! 민툰 만세! 마침내 우리 마을에도 큰 인물이 났구나. 우리 마을 만세!”/우리 마을 사람 모두는 목을 길게 빼어, 양팔을 위로 올리면서 동시에 소리쳤다./“민툰 만세! 우리 마을 만세!”/그것은 기적이었다. 아마 꿈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았다. 아무도 민툰이 새 왕조의 관리가 될 줄 예상하지 못했다./“조용히 하시오, 동무들!”

대표는 양손을 허공에다 휘저으면서 호소했다./“여러분의 만세 소리는 봉건주의 사고방식 냄새가 납니다! 난 큰 인물이 아니오! 나는 여러분과 같은 무산자요! 여러분들이 놀라리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어두운 색안경을 썼소…….”/“만세! 우리 민툰 만세! 큰 인물 났네!”

산촌 사람들이 외치는 만세에서 ‘시대착오적’인 것을 식별할 수 있는 민툰은 근대적인 정치 영역으로서 혁명을 이해하고 있다. 이에 비해 라우리우는 “봉건주의 사고방식 냄새”가 나는 인물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봉건적 인물인 라우리우가 이 소설에서 혁명의 대의에 신실하게 참여하는 유일한 산촌 사람이라는 점이다. 라우리우는 도시의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산촌에서 전근대적인 봉건적 역사 이야기를 전하는 설서인이다. 산촌의 설서인이 근대적 정치 운동에 나서게 되는 중국적인 상황은 ‘불균등 발전’의 예가 될 수도 있겠지만 더 나아가서 “식민주의의 현실적인 동시대인”( 『유럽을 지방화하기』, 63~64쪽)으로서 라우리우를 만날 수 있게 한다.



‘부록’에 포함된 예쥔젠의 아들 예녠센의 작품 해설에서 “마우마우는 ‘지주의 포악성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알리라’는 소집통지를 당에서 받자,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저수지에 뛰어들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고 설명하며 “농민의 어리석음”의 예로 들고 있다. 하지만 소설에서 마우마우는 혁명당 정치 지도원의 죽음에 연루되어 끌려가다가 고문과 공개처형에 대한 두려움을 못이겨 자살하였다. 예녠센의 해설은 사실관계와 다르다. 마우마우의 자살에 관한 한 ‘농민의 어리석음’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될 것인데 이러한 오해에서부터 “농민적이지-만-근대적인Peasant-but-modern 정치 영역”(유럽을 지방화하기』, 63쪽)이 마우마우와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녠센은 1947년 “당시 중국 혁명은 승리에 다가가 있었다.”고 하였지만 이러한 시각은 『산촌』을 하나의 회고담으로 만든다. 하지만 『산촌』의 집필 당시에 “승리”는 사실이기보다는 희망에 가까웠을 것이다. 1947년은 중국공산당의 반격이 힘을 얻기 시작하는 시기인 동시에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승리를 낙관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집필이 종전 즈음부터 1946년에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추정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1927년’은 ‘1947년’의 반복으로 소환된다고 할 수 있다. 『산촌』이 집필되던 현실-항일 전쟁에 승리하고 2차국공합작이 내전으로 바뀌어 장제스 정부가 승기를 잡고 있는-과 『산촌』의 역사적 배경-1차국공합작 이후 북벌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장제스의 4.12쿠데타로 중국공산당이 산촌에서 쫓겨났던-은 기묘하게 겹쳐진다. 그렇다면 『산촌』의 마지막 12장 “우리는 돌아온다” 편은 1927년 패배 속에서 승리를 예감(희망)했던 (“난 그 점이 의심스럽구나!”라는 어머니의 비관까지도 포함하는) 역사적 경험을 1947년의 내전 상황으로 소환하려는 실천으로 읽는 일이 가능해진다.

국화 아줌마를 둘러싼, 1927년 이전과 이후의 혁명을 대표하는, 산촌이 낳은 두 남자가 있다. 국화 아줌마의 (전)남편 민툰은 오래 전에 산촌을 떠나 1927년 혁명의 대표자로 귀환한 인물이다. 국화 아줌마를 짝사랑하는 라우리우는 1927년 혁명을 통해서 탄생한 산촌의 새로운 혁명가이다.

아래의 인용은 혁명이 산촌으로 들이닥치기 직전 정치 지도원과 판 삼촌의 대화이다. 라우리우가 정체를 모르고 있던 ‘그’가 국화 아줌마의 집 나간 남편 민툰이라는 것은 독자에게 이미 드러나 있었다.

“(…)민툰은 세계 노동자 대중의 조국에 가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지금 연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뭐라고? 그가 학자가 되었나?”/“예, 그는 학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박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나는 자네 말이 이해가 안 되는구먼.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학자가 될 수 있어? 그런 사람들은 시간도, 돈도 없는데. 하루 종일 일만 해야 될 판인데.”/“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조국’의 도움으로 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청년이 설명했다./“그리고 가난한 사람만이 훌륭한 학자가 됩니다. 민툰이 아주 참기 힘든 체험을 했다는 것도 나는 압니다. 그는 자기 밥벌이를 위해, 그 ‘대도시’에서 처음엔 인력거꾼으로, 나중엔 신문팔이로, 마지막엔 철도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열심히 일한 덕분에 그는 결국 계급을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노동조합에서 가난한 사람의 조국의 수도에서 무산자 이론을 연구하는 고급 연구원 후보로 발탁되었습니다.”/(…)“가난한 사람의 조국은 힘이 센 나라로, 미국보다도 훨씬 큰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우리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 나라입니다. 그곳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새 나라를, 가난한 사람들의 선을 위해서 일하는 무산계급을 위한 나라를 건설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 노동자들을 위해 대학을 세웠습니다. 우리 공화국 창건자를 기념하기 위해 쑨원대학이라고 이름을 지었답니다.(…)판 삼촌은 뜻밖에 열심히 듣고 있었다. /“전혀 딴 사람이 되어 그가 마을에 돌아오겠구나. 내가 국화 아줌마에게 알려 주어야지! 이제 남편이 유능한 사람이 되길 기원한 그 불쌍한 아줌마의 꿈이 실현되는군. 내가 이 사실을 아줌마에게 알려주어야지!” (173~175쪽)

정체를 숨기고 있는 정치 지도원은 도시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학생 출신인데 국화 아줌마의 집 나간 남편이 노동자 계급의 학자가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이때 판 삼촌은 가난한 노동자가 어떻게 학자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물론 노동자 계급의 일원으로서 “열심히 일한 덕분에” 그리고 “가난한 사람의 조국”의 지원을 통해서 학자 혹은 “노동자 계급의 거짓 없는 지성인”(171쪽)이 될 수 있었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철저한 무산자” 판 삼촌처럼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학자가 될 수 있어? 그런 사람들은 시간도, 돈도 없는데. 하루 종일 일만 해야 될 판인데.”라고 질문할 수 있는 계급의식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가난한 사람만이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향으로부터 유리되어 도시 노동자-인력거꾼-가 되려 했던 판 삼촌과 도시 노동자의 삶을 겪어낸 민툰은 무산자의 형상을 드러내는 이중체(double)로 보인다. 판 삼촌이 유사-부인으로서 ‘형수’와 산촌을 지켜내는 삶의 투쟁 속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물이 되었다면 민툰은 국화 아줌마를 버리고 도시로 가서 소비에트식 혁명가가 된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노동계급의 학자, 혁명의 대표 등으로 불리는 민툰이 군중집회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라.

“귀하신 지주님, 네놈이 나의 전처를 뺏아 갔다는 말을 방금 들었다. 그 말이 사실인가, 아닌가?”(...)/“무슨 말이지? 당신이 추민의 첩이 된 게 아니고? 내가 최근 확인한 바로는, 추민이 당신을 첩으로 삼았다던데…….”/대표가 흥분했다.(...)/“그럼 내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대표가 용서를 구하는 듯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나는 그걸 몰랐소. 나의 실수를 용서해 주시오.”(...)/국화 아줌마는 두 눈을 감고 행복에 취해 외쳤다./“오 결국 내꿈이 이루어졌어. 나는 그처럼 아름다운 꿈을 지니고 있었고, 여기서 이루어졌구나!”/그 소리를 듣고 난 대표는 한 발 물러서며 황급히 말했다./“안 돼! 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나는 이미 이 마을 사람이 아니오! 난 이미 혁명에 투신한 몸이오! 안 돼, 난 성으로 돌아가야 해.(...) 더욱이 그 사람이 아기를 낳을…….(...) 나는 그 사람 곁에 있어야 해. 그 사람은 이 나라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아. 그 사람과 내가 헤어질 수도 없어…….”(...) 지금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 대표는 라우리우에게 말을 건네 침묵을 깼다./“라우리우 동무, 오늘 아침 당신이 봉건 역사를 이야기하는 직업을 그만 두었다고 정치 지도원 동무로부터 들었소. 나도 반갑소. 자, 보시오, 가련한 저 국화에게 봉건 사상이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를! 저 여자가 저렇게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라고 누가 말했던가요? 저 여자를 집으로 데려다주시오, 라우리우 동무. 당신의 지위를 활용해서 저 여자에게 새 사상을 가르쳐 주시오. 우린 자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

민툰은 추민이 국화 아줌마를 첩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당당하게 처신하던 것과 대조적으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당황한다. 민툰은 자신을 기다린 국화 아줌마가 “봉건 사상”에 빠져 있었던 것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저 여자에게 새 사상을 가르쳐 주시오.”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화 아줌마가 민툰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낸 데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민툰에게 있다는 점은 ‘나’의 어머니의 목소리로 제시되고 있다. 민툰은 “사치스럽게 살아가고 싶어 하던 그런 젊은이”로서 “결혼식 연회”를 위해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 돈을 꾸”었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아무도 몰래 마을을 빠져 나갔”다. “그가 남긴 편지는, 아줌마가 한시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간결하고 감동적인 내용”이어서 “그는 언젠가 고리대금업자뿐 아니라 추민 지주보다도 더 훌륭한 유명 인사가 되어 꼭 돌아오리라고 했”다. 산촌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대하는 민툰의 태도는 산촌 사람들의 신망을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산촌에서 전통적인 미덕을 간직한 국화 아줌마를 혁명의 이름으로 배신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중국 혁명은 “근대적인 정치관이 내재된 세속적-합리적 계산 논리”로만 완수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민툰의 소식을 처음 전한 정치 지도원과 판 삼촌의 대화는 민툰의 국화 아줌마에 대한 배신이 혁명당 그 자신의 논리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판 삼촌이 “자기 남편에게 충실한 아내에게도 이 소식을 전해 줄 수 없단 말인가?”라고 말하자 정치 지도원은 “아내이든, 아내가 아니든, 상관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자네는 엄동설한에도 자네를 믿고 기다리는 안사람이 있어도, 자네와 상관없단 말인가?”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 문제입니다. 우리에겐 그런 일에 관여할 시간과 정력이 부족합니다. 더 급한 일이 많습니다.” (176쪽)

민툰과 정치 지도원이 수행하는 서구적(?) 사회주의 혁명은 세속적이고 합리적이다. 하지만 중국 혁명은 ‘봉건주의 사고방식 냄새’로부터 분리된 순수한 결정체일 수 없다는 관점에서 볼 때 정치 지도원에게서 긍정되는 민툰이 산촌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조금 옆길로 새자면 텍스트의 외연을 고려할 때 민툰의 부정적 이미지는 그가 쑨원 대학과 맺는 관계와 관련지을 수 있다. 정치 지도원이 판 삼촌에게 ‘민툰이 쑨원 대학에 있다’는 소식을 전한 시점은 1927년 초였다. 중국 혁명이 활성화되면서 1차국공합작의 성과로서 1925년에 쑨원 대학이 세워지는데 쑨원 대학의 학장은 폴란드의 노혁명가이자 유명한 트로츠키주의자인 라데크였다. 소련공산당내 파벌 투쟁에서 트로츠키파가 패배하면서 1927년에 라데크는 해임되고 쑨원 대학의 트로츠키파 학생들의 상당수는 당에서 제명되고 처형당하였다고 한다. 민툰의 부정적 이미지와 트로츠키주의자의 중국에서의 소수파적 위상이 관련 있는지는 좀 더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단순화한다면 중국 혁명과 분리할 수 없는 소비에트의 영향(민툰의 소비에트 ‘여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반영된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다.



국화 아줌마의 (전)남편 민툰은 1927년 혁명의 대표자로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민툰은 무산자 계급으로서 노동자 계급의 학자가 되어 혁명의 대표가 된 인물인바 정치 지도원의 투명한 시선에 의해 긍정되는 혁명의 대표이다. 민툰-정치 지도원에게서 산촌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은 봉건적 잔재로서 식별된다. 선형적인 시간에 따라 발전하는 역사에 대한 관념을 벗어날 때 산촌 사람의 따가운 시선에서 우리는 ‘유럽을 지방화’ 하는 에너지를 읽어낼 수 있다. 산촌 사람들의 에너지의 총아로서 민툰의 ‘동시대인’ 라우리우는 한 편의 영웅본색을 펼쳐놓을 수 있는 것이다.

판 삼촌과 산촌 사람들이 사랑하는 라우리우는 설서인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자. 설서인은 “북과 꽹과리, 삼발이와 작은 북채”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거닐면서 이야기하고 앉아서 시를 노래하는 예술가이다. 라우리우는 도시에서 노동자 계급으로서 단련된 사람이 아닐뿐더러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당시(1920년대)의 신문화운동가도 아니다. 하지만 혁명당이 산촌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라우리우는 설서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아줌마는 풀이 죽어 중얼거렸다.

“라우리우는 언제나 연극인일 뿐 그 이상은 아니야. 그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공적이 많고 감동적인 영웅들과도 전혀 달라. 그 영웅들을 난 존경한단다…….”(76쪽)

“이따위 직업은, 이 설서인이라는 직업은 결코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해. 이 직업으로는 내가 흠모하는 여인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니, 이젠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이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이제 더는 전설 이야기 따위는 만들지 않을 테다. 국화 아줌마가 나의 의욕을 완전히 꺾어 버렸다구…….”(209쪽)

“내가 지주가 되기만 한다면!”(215쪽)

“판 삼촌, 군인이 되는 일이 어렵습니까?”/(…)/“난 토지 제도와 지주를 파멸시키고 싶습니다. 나는 이 모든 악을 없애고 싶어요.”/(…)/“하, 나는 이제 다시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의욕도 잃었어요. 영원히 잃어버렸다구요!”(216~218쪽)

라우리우는 지주가 되고 싶고 동시에 지주를 없애는 군인이 되고 싶다. 라우리우를 혁명가로 만드는 것은 혁명당을 매개로 하는 설서인의 정체성이다. “그 여인은 살아 있는 전설의 영웅이야! 그녀가 바로 나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내가 창조한 그런 여자라구. 그런데. 허! 나는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나는 미인인 여자들에게 영웅을 숭배하도록 했지만, 나 자신은 영웅이 아니니……. 아니, 난 영웅이 될 수 없어!”(209쪽) 라우리우는 자신의 이야기 속 주인공인 진정한 영웅을 기다리는 여인을 위해 그 스스로 영웅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 그리고 곧 완수해야 되는 다른 일이 우리 여성 동무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여성을 억압해 왔으며, 여성 자신들은 우리 역사의 시작부터 인간이라는 것을 잊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부자들은 아가씨들을 마치 상품인양 첩으로 사기도 했고, 고약한 남자들은 자기 아내에게 싫증이 나면 필요치 않은 헌신짝마냥 차 버립니다. 우리는 이제 남성도, 여성도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은 평등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원하지 않습니까? 여성 동무 여러분.”(…)/처음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몇 분 뒤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확실히 여자들은 평등을 원합니다!”/우리 귀에 익은 설서인 라우리우의 목소리였다. 라우리우는 똑바로 자리에 서서 두 눈을 반짝이고, 한 손을 허공으로 높이 들었다. (…)우리 설서인은 조용하고, 무심하게, 마치 아름다운 성을 지키는 동상처럼 자세를 취했다./“동무는 누구시오?”/여성에 대한 라우리우의 침착함과 확고한 태도는 그의 움직이지 않는 자세와 함께 정치 지도원을 놀라게 하여, 정치 지도원이 그의 이름을 물었다./“동무는 이 마을 여성의 이름으로 말합니까? 아니면 동무 부인의 이름으로 말합니까?”/(…)/“나는 아내가 없습…….”/(…)/“난 아내가 없다구요! 나는 한 번도 아내를 얻지 못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여인은 추민 지주의 첩이 된 가련하고 불쌍한 열다섯 살의 아가씨를 위한 하인으로 들어갔습니다. 내 죄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가난한 이야기꾼일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법도를 모르는 부자가 아름다운 여자들을 모욕감을 주어 파멸시키고, 반면에 못생긴 여자들을 헝겊 조각처럼 여기고는 짓밟아버립니다. 우리 마을에도 그런 전형적인 슬픈 사례가 있습니다. 아주 착하고 활발한 아가씨지만, 얼굴은 마마 자국으로 일그러져 있답니다.…….”/(…)/“동무를 이해합니다. 동무는 힘없고 억압받고 짓밟힌 사람들의 지지자라는 것을 압니다.(…)

어느 날 정치 지도원(과 서기 뻬이후 삼촌)은 산촌으로 찾아온다. 산촌 사람들을 마을 사당에 모아놓고 새 혁명 정부의 이름으로 토지를 분배하고, 농민조합을 결성할 것을 “명령”한 후 정치 지도원은 임시 대표로 판 삼촌을 임명한다. 이 일을 마친 후에 정치 지도원은 여성 평등의 문제를 꺼낸다. 라우리우는 나아간다. 산촌에서 발생한 최초의 자발적 혁명당원은 라우리우이며 라우리우의 부름에 공명하는 “마마 자국으로 일그러”진 알란이다.

위의 인용에서 흥미로운 점은 정치 지도원이 라우리우에게 당신이 누구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느냐고 묻는 대목이다. 정치 지도원이 “여성 동무 여러분”을 호명할 때 설서인 라우리우는 “확실히 여자들은 평등을 원합니다!”라고 대답하는데 “여성에 대한 라우리우의 침착함과 확고한 태도는 그의 움직이지 않는 자세와 함께 정치 지도원을 놀라게” 한다. “동무는 이 마을 여성의 이름으로 말합니까? 아니면 동무 부인의 이름으로 말합니까?”라고 정치 지도원이 묻자 라우리우는 자신이 결혼한 적이 없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라우리우는 여성의 이름으로 대답하는 것일까? 적어도 라우리우는 언제나 명예 여성으로서 발언해 왔다. 라우리우의 호명은 산촌의 최초의 여성 당원으로 알란을 일으켜 세운다.

정치 지도원에게 라우리우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첫째 “내가 사랑했던 여인은, 추민 지주의 첩이 된 가련하고 불쌍한 열다섯 살의 아가씨를 위한 하인으로 들어갔습니다.” 둘째 “부자가 아름다운 여자들을 모욕감을 주어 파멸시키고, 반면에 못생긴 여자들을 헝겊 조각처럼 여기고는 짓밟아 버립니다.” 여기서 라우리우의 첫 번째 이야기는 국화 아줌마를 두 번째 이야기는 알란을 호명하고 있다.

라우리우는 부정적인 남성성으로 표상되는 민툰이라는 혁명가의 이미지를 대체하는 긍정적인 여성성이다. 예쥔젠이 1947년에 상상한 중국 혁명은 도시 노동자나 혁명 이론만으로 채우지 못하는 ‘한 폭의 서정적 그림’이 아닌가? 민툰이 라우리우의 이야기 속 ‘영웅’의 윤리를 배반했을 때 라우리우는 스스로 영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라우리우의 “살아온 내력”은 산촌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다. “한 평의 땅도 없는 농민인 그의 아버지가 자식을 더 이상 키울 수 없게 되자, 중으로 살게 절에 보”내고 그는 절에서 글을 배워 “설서인의 대가”가 되었다. 라우리우를 혁명에 뛰어들게 한 것은 여성에 대한 사랑이었다.

『산촌』은 라우리우가 들려주던 봉건적인 이야기의 세계에서 중국 혁명의 한복판으로 걸어 나오는 영웅의 이야기, 영웅본색인 것이다.

알란은 선전부 부간사의 진지한 얼굴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하녀입니다. 나는…….”
알란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넌 아름다워! 너는 푸른 하늘만큼이나 아름다워!”
라우리우는 시를 낭송하듯이 매끈하게 리듬을 살려 말했다.(…)
“선생님은 내 얼굴에 대한 평을 안 하는군요?”
알란이 다시 물었다.
우리 부간사는 대답하기를 주저하면서, 커다란 마마 자국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결심한 듯이 말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다워. 그것이 너의 아름다운 영혼을 반영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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