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호] 시공간에 대한 변증법적 분석ㅣ유충현(대안연구공동체 연구위원)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3 11:28
조회
1236
시공간에 대한 변증법적 분석

유충현 (대안연구공동체 연구위원)


* 이 글은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60호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370


시공간에 대한 변증법적 분석

최근 우리 사회에 공간에 대한 담론이 부쩍 늘었다. 이는 무리한 대규모 토건 사업에 기인하는 병적인 징후가 아닐까? 이제 공간 전유의 문제는 정치, 경제, 생태, 역사의 이해관계들이 맞물리면서 인문학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앙리 르페브르는 발터 벤야민, 미셸 드 세르토, 데이비드 하비와 함께 공간 담론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는 『공간의 생산』과 『일상생활 비판』 연작을 통해 공간에서의 일상적 실천이 권력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작 『리듬분석』에서도 공간에 대한 통찰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새로운 관점이 등장한다. 바로 시간이다. 이미 『일상생활 비판』 연작에서 시간에 대한 분석이 있었고, 구체적 삶이 영위되는 시공간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에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리듬분석이라고? 생소한 제목이 주는 호기심에 달아올라 해제를 건너뛰고 바로 본문 읽기에 돌입한다. 이 책의 구성은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따라서 개념들로 시작해서 실천적 적용이 뒤를 잇는다. 일곱 개의 장들과 두 편의 논문들이 부록으로 실린 이 책은 분량은 적지만 도입부가 다소 어렵다. 초입에 가파른 오르막이 부담스럽다면 인문학 초심자는 에둘러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다. 각 장들의 연결이 느슨한 편인데다 라벨의 볼레로처럼 동일한 주제가 장마다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장들은 상대적으로 쾌적하게 읽을 수 있다. 어쩌면 독자는 각 장들이 무리지어 내는 웅성거림에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일생을 바쳐 탐색해온 일상생활의 시공간을 리듬분석이라는 새로운 과학으로 종합하려 했던 듯하다. 리듬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반복을 의미하는데,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가 발생하는 반복을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을 통해 신체 기관의 개별적 리듬들(심장 박동, 호흡)을 듣는 것이 리듬분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의 순환적 리듬에 맞춰 생활해왔다. 우리 문화에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철들었다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철은 계절을 의미한다. 따라서 철이 들었다는 것은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농사 주기를 숙지했다는 뜻이다. 유목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별자리를 보며 이동하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환주기를 갖는다. 한 사람의 운명이 태어난 시간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주 논리는 순환적 시간이 질적으로 차별화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자연적 주기에 순응하던 인간은 사회 환경의 변화들로 인해 공허하고 동질적인 시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제 측정과 배치가 일상을 규정하는 원리가 되었다. 시계는 시간을 공간적으로 측정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시간의 공간화’에 대한 훌륭한 예일 것이다. 이처럼 측정되고 분할된 시간은 선형적 시간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역사적 시간이다. 최고 권력자는 무엇보다 시간의 지배자임을 자처하고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그는 순환적 시간을 배제했는데 순환은 원래의 위치 즉 무로 되돌아오는 것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순환적 리듬 위에 선형적 리듬이 겹쳐지는 장소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현대의 리듬은 비바체로 특징지어진다. 빠른 템포와 밤낮 구분 없는 노동이 순환적 리듬을 압도할 때, 신체는 병들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병적인 상태를 부정리듬성 혹은 규제완화라고 말한다. 이제 모든 시간은 질적인 차이를 상실하고, 공허하고 동질적인 일과표를 통해 포획된다. 심지어 휴식도 강제로 주어진다. 리듬분석의 목적은 이러한 부정리듬성으로 병든 사회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리듬은 질적으로 구별되는 차별적 시간, 즉 강박과 약박의 조화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듬분석은 공간을 도외시하지는 않되, 시간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된다. 우리는 말미에 부록으로 실린 지중해 도시들 분석에 와서야 공간에 대한 성찰을 볼 수 있다. 지중해는 거대한 국가권력에 이르지 못하고 폴리스라는 도시 공동체에 머물렀다. 필요에 따라 동맹과 통합을 강요했지만 그 관계는 언제나 느슨했고 배반당하기 일쑤였다. 이는 자발적 협조가 아니라 폭력에 의한 강제였기 때문이다. 폭력은 결코 내밀한 사적 관계에까지 침투하지 못했다. 폴리스들은 헤게모니와 동질성을 거부하며 다양성과 이질성을 존중했다. 바로 동서양의 이행과 이주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쇄도하는 관광객으로 인한 정체성 훼손에도 버틸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의 도시는 어떠한가? 청계천 복원사업은 대화를 지우고 독단을 강요했다. 볼거리를 위해 이야기와 역사를 지웠고 도시 미관을 위해 인공수로가 세워졌다. 애초에 청계천을 덮었던 것도 이후에 복원하자는 것도 모두 위생에 대한 강박증에 기인하는 것 같다. 추악한 권력의 냄새를 씻어내려는 맥베드가 겹쳐 보이는 것은 비약인가? 어린 시절 청계천 주변 세운상가는 필자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해주던 공간이었다. 과학기술과 문화예술 간의 이질적 접합이었던 그 곳은 핵잠수함까지 건조할 수 있다던 전설이 있었다. 그 곳은 일상을 벗어나 금기와 신비를 만끽할 수 있던 축제의 장소였다. 이제 그곳에는 시민들의 공간 전유 권리는 무시된 채 전문가들에 의한 권력의 치적만이 존재한다. 이 경우 리듬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조로운 삽질, 망치질의 소음만 반복된다. 이것은 시뮬라크르(모조품)이다. 이러한 공간은 얄팍한 외양만을 추구할 뿐 삶이 누적된 깊이가 없다. 4대강 사업은 이런 선형적 리듬을 가속화 했고, 이제 국토는 곳곳이 병들었다. 그러나 르페브르는 아파봐야만 몸의 리듬들을 분석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것이 부쩍 늘어난 공간 담론이 증상인 이유다. 한편 국가적 리듬을 벗어나 시민들의 적극적인 공간 전유가 일어나고 있는 곳들도 있다. 성미산 마을과 문래동 예술 공단이 그렇다.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 문래동 철공소에 모여든 예술인들은 그 공간을 훼손하지 않고 스며들었다. 그들은 공장노동자와 영감을 주고받으며, 쇳가루와 커피향, 기계 소음과 트랜스 음악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특이한 공간을 창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본을 투자해서 이 공간을 홍대처럼 만들어보자는 계획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그러나 권력과 자본이 개입하면 이 공간의 운명은 뻔하다. 권력은 권력의지를 표상하기 위해서 표백된 공간을 생산하거나 소통불가의 명박산성을 쌓았을 뿐이다.

미완성의 유작인 탓에 『리듬분석』은 완전한 이론화에 이르지 못했고, 논의가 치밀하지는 못하지만 군데군데 번뜩이는 통찰들을 남겨놓았다. 르페브르는 리듬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포착되어야 하고 따라서 안이면서 동시에 바깥인 공간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발코니와 계단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들은 이행과 전환을 사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중요하다. 그는 또한 분석에서 변증법적 방법을 강조하는데, 시간-공간-에너지, 멜로디-화음-리듬, 말-노래-음악 등의 도식이 그렇다. 각 도식에서 대립 속 통일을 의미하는 에너지, 리듬, 음악(춤)이 교차하는 곳은 신체다. 그는 텍스트에서 부단히 살아있는 몸을 강조한다. 신체는 문맥에 따라 현전, 제스처, 실재, 직접성과 등치되면서 현재, 커뮤니케이션, 물신(사물), 미디어와 대립한다. 이러한 설명은 정신분석과 닮아있다. 가령 전자의 항목들은 무의식-주체, 후자의 항목들은 의식-자아와 연결해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까? 아무튼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독자들은 창밖의 풍경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도시가 내는 소음들은 힙합일까 교향곡일까? 필자도 이제 자판에서 손을 거두고 거리를 들으러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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