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호] ‘전율’을 일으키는 사람들ㅣ추유선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4-05-27 21:27
조회
72
 

‘전율’을 일으키는 사람들1)


추유선 (시각예술가)


봄비가 힘차게 내리던 날, 『육식, 노예제, 성별위계를 거부한 생태적 저항의 화신, 벤저민 레이』와 『죽음의 왕, 대서양의 해적들』이 도착했다. 두 권 모두 마커스 레디커와 데이비드 레스터가 공동 창작한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책들이다. 긴 제목을 가진 『육식, 노예제, 성별위계를 거부한 생태적 저항의 화신, 벤저민 레이』는 18세기 퀘이커교인으로 역사상 최초로 노예제와 동물 학대에 맞서 싸웠으며 여성을 동등한 동반자로 인식했던 저신장 장애인 운동가의 투쟁을 그린 책이었고, 또 다른 책 『죽음의 왕, 대서양의 해적들』은 17, 18세기 대서양에서 활동했던 해적에 대한 책으로 영화를 통해 뇌리에 새겨진 해적에 대한 이미지를 전복시켰다. 17, 18세기는 30년 전쟁, 영국내전, 명예혁명 등 전란과 시민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등장, 산업혁명 등 자본주의가 그 형태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는데,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발굴한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그 당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21세기의 전율


‘해적’.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커스 레디커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안대와 갈고리 손, 나무다리, 럼주에 취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다. 또한 보물을 찾아 대서양 여기저기를 항해하고 보물을 서로 갖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해적’의 이미지는 이처럼 복합 장애를 가진 외모와 늘 술에 취해 싸움을 일으키는, ‘모범 시민’에 속할 수 없는 부류였다. 그러나 마커스 레디커에 의하면 1660년부터 1730년까지 ‘황금시대’의 해적은 사회 최하층 출신의 가난한 사람들로 구성된 평범한 노동자 선원이다. 선상에서의 혹독한 노동은 실명과 신체 절단 등의 장애를 가져왔고, 질병과 잦은 해전은 죽음을 친구로 삼을 수밖에 없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통 속에서 억압받는 삶이 아닌, 평등하고 신나는 삶을 추구했기에 해적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졸리 로저(Jolly Roger), 즉 “죽음의 왕 깃발 아래” 다른 삶의 조건을 꿈꾸었다.


같은 18세기를 살았던 벤저민 레이는 퀘이커교도였다. 퀘이커교파는 기존의 영국 성공회가 대중 위에 군림하는 것에 회의를 느껴 일어났던 종교개혁으로 브라운파(Brownists), 아담파(Adamites), 수평파(levellers), 개간파(Diggers), 가족애파(Family of Love), 제5왕조파(Fofth Monarchists) 등 비국교회 중, 수평파(levellers)와 개간파(Diggers) 사람들이 모여 결성됐다. 퀘이커교파는 모든 사람에게는 ‘내면의 빛’이 있다고 보았으며 평등, 정의, 평화를 지향했고 부를 적대시 했다. 따라서 퀘이커교도들은 16-17세기 제1차 공유지 인클로저로 지주들이 부를 독점하는 것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초기 정신과 달리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면 퀘이커교 ‘친구들(friends)’은 부를 쌓고 노예를 부리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이에 벤저민 레이는 그의 전 생애 동안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기치 아래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했으며, 노예제 폐지와 동물 학대 등에 맞서 싸웠다.


이렇게 내용을 간략해 보면 데이비드 레스터와 마커스 레디커가 18세기의 ‘해적’과 ‘벤저민 레이’를 소환한 이유를 얼핏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인권은 높아졌고 비인간 생명체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비생명체에 대한 담론까지 활발하게 토론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여전히 뉴스에서는 아동과 동물 학대, 데이트 폭력으로 사망하는 여성들의 사건을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종교를 핑계 삼아, 혹은 대놓고 타민족이 살아가고 있는 지역을 침탈하는 전쟁이나 정의로 가장한 경제 침탈에 대한 뉴스 역시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17세기, 18세기에 퀘이커 교도들이 주장했던 평등과 정의, 평화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 의심케 한다. 데이비드 레스터와 마커스 레디커는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이와 같은 가시적인 현상뿐 아니라 거대한 포식자가 된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적 순응에 대해 ‘전율’을 일으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은 ‘전율’을 일으킬 수 있는 효과적 형식일까?


일본만화에 익숙한 본인에게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이란 장르를 처음 알게 한 것은 아트 슈피겔만의 『MOUSE(쥐)』이다.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있던 동생이 권하기도 했고 이 작품이 ‘퓰리처상’을 탔다는 것 때문에 호기심으로 책장을 열었다. 그러나 일본만화(깔끔한 선으로 그려진 인물과 스크린톤으로 이루어진 배경이나 효과, 강렬하게 처리된 의성어와 의태어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와 달리 『MOUSE(쥐)』는 내레이션과 대사도 많고 펜 선을 이용하여 거칠게 그려져 있었다. 더구나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의 참상과 인간 심리에 집중함으로서 만화(comic)의 가벼움 보다는 소설(novel)의 무거움으로 다가왔다. 데이비드 레스터가 그린 『육식, 노예제, 성별위계를 거부한 생태적 저항의 화신, 벤저민 레이』와 『죽음의 왕, 대서양의 해적들』 역시 역사적 인물들을 소환하여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그것에 저항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함으로서 소설을 읽는 듯,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또한 거칠고 날카로운 펜 선과 붓을 이용한 두터운 선, 뿌려진 잉크의 날카로운 흔적과 물감이 가볍게 스며든 수채 기법 등 다양한 표현기법은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처하는 사람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했다.


데이비드 레스터가 그린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의 특징은 칸의 배치와 구도, ‘침묵’과 ‘대사’를 통해 독자가 페이지에 어느 정도 머무르게 할 것인가를 예상하며 제작한 것이다. 이는 데이비드 레스터가 ‘글이 없는’ 페이지 혹은 시각물로만 구성된 페이지가 독자의 생각을 집중시킨다는 그의 생각을 반영한 결과로 여겨진다. 즉, 그의 두 권의 책은 ‘글이 없는’ 페이지의 적절한 배치와 마치 영화 필름을 볼 때와 같이 하나의 행위를 컷 단위로 나누고 겹침으로써 독자의 읽는 속도와 머무르는 속도에 관여했다. 그러한 방식으로 그려진 페이지 중, 노예 쿠조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이나 벤저민 레이의 손동작 등은 연속 동작이 찍힌 필름을 하나하나 살피는 것 같이 동작을 나누어 그림으로서 독자가 페이지에 머물게 했다. 또 다른 멈춤은 ‘글이 없는’ 페이지를 부여한 벤저민 레이의 상심과 사유의 시간에, 더불어 내적 체험에 동참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죽음의 왕, 대서양의 해적들』에서는 노예였고 선원이었던 존이 선원들에게 ‘죽음의 깃발 아래에서’ 모두가 평등한 ‘거꾸로 뒤집힌 세상’을 만들자고 연설한 날, 함께 기쁨의 춤을 추는 장면 역시 데이비드 레스터는 ‘글 없는’ 페이지와 컷 단위로 구성했다. 해적들의 ‘자유’와 ‘희망’, ‘기대’에 동참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만든 것이다.


책의 이미지에 집중하다 보면 데이비드 레스터가 배와 손을 집중적으로 관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배는 마커스 레디커가 상관(商館 factory)이자 공장(factory)이었던 점에 주목한 장소이다. 이는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나오는 “광인들의 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푸코에게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세계(배)’는 자유롭고 가장 개방적인 길 한가운데 갇혀 있는 자신의 진실을 찾는 장소이자, 이야기를 전달하는 상상력의 보존 처였다. 배를 이러한 헤테로토피아 공간으로 바라본 푸코의 관점은 마커스 레디커에게로 연결됐고 데이비드 레스터가 해적선의 모형을 직접 만들어 작가적 상상력을 더했다. 수채화, 붓, 펜, 연필 등 다양한 도구를 이용한 표현 기법 연구와 치밀하게 탐구된 공간, 인물에 대한 연구는 『육식, 노예제, 성별위계를 거부한 생태적 저항의 화신, 벤저민 레이』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또한 데이비드 레스터는 분노하거나 침묵하는, 그리고 연대하는 손동작을 많이 삽입했다. 특히 손을 클로즈업시켜 그림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손의 양면성에 대해 사유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인간은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불을 피우고 요리를 할 수 있게 됐고 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추고 시를 쓰게 된 것이다. 예민하고 감각적인 손은 타자를 배척하고 능멸하는 데도 사용되었고 사랑과 연대를 위해 타자를 포용하는 데도 사용됐다. 이러한 손의 양면성을 극대화함으로써 데이비드 레스터는 우리가 어떤 손을 가졌는지 질문을 던진다.


이 두 권의 그래픽 노블에는 평등과 정의, 평화에 대한 꿈을 가진 사람들의 외침과 침묵이 있다. 꿈을 꾸는 사람들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 대중이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의 배치와 격정과 고요에 대한 표현은 18세기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고 현재에 질문을 던진다.

어떤 꿈을 꾸고 있냐고.


따뜻하게 맞잡은 손으로.




1) 그래픽 노블 『육식, 노예제, 성별위계를 거부한 생태적 저항의 화신, 벤저민 레이』의 주인공 벤저민 레이는 퀘이커교도이다. 퀘이커라는 말은 직역하면 '전율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런 명칭은 1650년 영국의 치안판사 베네트가 조지 폭스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조롱한 것에서 비롯됐으나 공식 명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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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노예제, 성별위계를 거부한 생태적 저항의 화신, 벤저민 레이 죽음의 왕, 대서양의 해적들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4년 5월 25일 <대자보>( https://bit.ly/3VfRLmb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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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벤저민 레이 : 노예제 즉시 폐지를 최초로 주창한, 12년간 선원이었던 작은 거인의 파레시아』(마커스 레디커 지음, 박지순 옮김, 갈무리, 2024)


『벤저민 레이』는 대서양 노예무역상들의 해상 대학살을 고발한 최초의 인물로서, 계급의식, 인종의식, 성별의식, 환경의식을 통합한 혁명적인 세계관을 가진 ‘벤저민 레이’의 일대기이다. 벤저민 레이는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인간을 속박하는 일이 하늘에 태양과 별 그리고 달이 뜨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영원하다고 생각했던 시대에, 노예제가 없는 세상을 상상했다.


대서양의 무법자』(마커스 레디커 지음, 박지순 옮김, 갈무리, 2021)


이 책은 해양의 역사를 거꾸로 뒤집는다. 레디커는 해군 대장, 상인, 국민국가의 관점이 아니라 선원, 노예, 계약하인, 해적, 그리고 다른 여러 무법자의 시점에서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의 역동적인 해상 모험의 세계를 탐험한다. 이들의 항해 경험을 처음으로 한데 모은 책 『대서양의 무법자』는 놀랍고도 설득력 있는 “항해의 시대”의 민중사이다. 레디커는 특유의 “아래로부터”의 접근과 통찰로써 “잡색” 즉 다민족 부대가 미국 혁명의 원동력이었음을, 해적, 노예화된 아프리카인, 그리고 다른 무법자들이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해 힘을 모았음을, 대형 범선의 시대에는 하갑판의 무법자들이 권위에 도전했음을 드러낸다.


노예선 : 인간의 역사』(마커스 레디커 지음, 박지순 옮김, 갈무리, 2018)


노예선은 아프리카 해안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을 싣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그들을 신세계로 데려갔다. 노예무역과 미국 농장체제에 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졌지만, 이를 가능하게 한 노예선에 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뛰어난 수상 경력의 역사학자인 마커스 레디커는 『노예선』에서 해양기록에 관한 30년간의 연구를 정리하여 이 전례 없는 함선에 관한 역사를 만들어 냈으며 함선의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격동하는 인간의 드라마를 그려냈다. 그는 상어를 꼬리처럼 끌고 다니는 떠다니는 지하 감옥에 타고 있는 선장, 선원, 노예의 삶과 죽음 그리고 공포를 냉혹하게 재구성했다.


히드라』(마커스 레디커, 피터 라인보우 지음, 정남영, 손지태 옮김, 갈무리, 2008)


제국주의 초기 식민지 건설과 노예제 상황을 역사적 사료를 통해 밝혀낸 역사서이다. 공식적인 역사서에서는 만날 수 없는 장작 패고 물 긷는 사람들, 흑인 하녀들, 혁명적인 해적 선장, 아프리카 노예들, 진정한 아메리카 혁명의 주역인 잡색 부대 등을 만날 수 있다. 히드라는 헤라클레스 신봉자들에게 맞서 싸운 선원들, 노예들, 평민들 즉 다중(multitude)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17세기 초 영국 식민지 확장의 시작부터 19세기 초 도시중심의 산업화에 이르기까지, 지배자들은 점점 세계화·지구화되는 노동체계에 질서를 부과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남성이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된 것 만큼 여성이 가사노동자이자 노동력 재생산기계로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페미니즘 역사서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았던 이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는 공식적인 역사서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책에서도 다뤄지지 않는 산파 여성들·점쟁이 여성들·식민지의 원주민 여성 노예들·여성 마술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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