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5/25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32-52

작성자
Namhee Kim
작성일
2018-05-25 17:00
조회
912
라스코인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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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코 벽화의 일부는 오리냐크기에 해당하며, 주요 부분은 페리고르기에 속한다. 이를 우리는 오리냐크기, 즉 중기와 후기 오리냐크기라고 지칭할 것이다.

우리는 이로써 하나의 새로운 기준 체계를 제공하게 됐고, '라스코인'이라는 이름으로 중기와 후기 오리냐크기를 살았던 인간을 지칭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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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마도, 라스코는 그 존재 자체로 그 시대의 인류가 도달할 수 있던 정점을 나타내고 있음에 틀림없다. 또한 베제르 계곡은, 더욱 강도 높던 인간이 삶이 그 삶 자체에 있어서나 그 영향력 안에 들어온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나 비로소 인간다워진 특권적 장소였다. 그리하여 라스코라는 이름은, 짐승과 다름없던 인류가 오늘날 우리들처럼 섬세한 존재로 이행하던 시대의 상징이 된다.

라스코인의 풍요로움

번개의 섬광과도 같은 부서진 빛줄기의 흔적 하나가 불확실한 역사의 흐름 속에 계속해서 마술을 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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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변화, 침체돼 있던 겨울에서 꽃들이 앞다퉈 피워나는 봄으로의 이행의 양상은, 술에 취해가는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이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이 새로운 삶이라고 해도 필수 여건으로서의 물질적 문제들은 여전히 급급하고, 삶이란 언제나 위험한 전투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삶이 가져온 새로운 가능성들은 마법 같은 환희를 맛보게 했다.

가엾은 사람들에게도 저마다 나름의 위대함이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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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저주와 같은 감정이 최초의 인간들에 대한 관념에 연결돼 있다. 우리의 사유 저 구석에서부터 기계적으로, 인간이지만 존엄성을 가지지 못한 존재들, 즉 인간답지 않은 계급의 사람들에게는 저주와 타락이라는 벌이 어울린다고 생각되곤 한다.

아무튼, 최초의 인류의 특성에 짐승 같은 잔인성이 섞여 있긴 했었다. 그런데 이때의 잔인성은 동물의 속성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존엄성을 모르거나 혹은 한 번도 존엄성을 인지해본 적 없는 인간의 속성이다. 둘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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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나, 미천함이 인간으로 변모 중인 짐승의 속성이었을 수는 없다. 오늘날 미천함이라 불리는 것은 어떤 태도를 가리킨다.

이 인간들과 짐승을 가르는 경계를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지만, 아무튼 호모 사피엔스는 처음부터 우리와 동류였음이 사실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가장 명확한 방식으로 짐승과 구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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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라스코 동굴을 포함해 최근 잇달아 발견된 선사시대 유물들은, 구석기인들에 대한 이런 악몽 같은 발상을 거둬들이게 했다. 큰 어려움을 해결해내는 천재적 재능과 행복감의 결과가 이렇게 뚜렷이 나타나기도 드문 일이다. 라스코 벽화보다 더 완벽하고 인간다운 발명품은 없다.

우리는 호모사피엔스라는 이 순박한 존재들이 웃는 법을 알았다는 사실 또한 잊고 있었다. 지금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입장에 있지만, 호모사피엔스는 분명 진정으로 웃는 법을 아는 최초의 존재들이었다.

선사학자들이 시작 중이던 이 인간들의 삶에 대해 "과도하게 거칠고 허술하다"고 평가하는 것도 물론 맞는 말이기는 하다. (평균수명 짧음~) 하지만 생활이 그다지 안전하지 않았다고 해서 꼭 불행했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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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유류들은 대체로 "성생활이 없어지거나 약해지는 때" 자기 수명을 마감하게 된다.

라스코인들에게 장수의 가능성은 없었다. 라스코인은 본디 자신들의 생존 조건이 내포하는 궁핍함을 느끼지 못했다. 궁핍이나 비참이라는 관념은 비교하는 행위의 산물이다.

극단적인 경우를 상상해보자.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고 비참함 말고는 자신을 표현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낙담 속에서 존재들이 느끼는 궁핍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런 가능성은 예외적이다. 삶은 거의 언제나, 아무리 허약하다고 해도, 그 삶을 가능하게 할 조건들을 곁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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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오늘날에도 우리가 보기에 끔찍한 삶의 방식들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경우들이 존재한다. (티베트, 에스키모~)

동물적 삶의 움직임을 거려낸 풍요롭고 한량없는 라스코의 이 벽화들 앞에 서 있는 지금, 이 풍요로운 움직임을 그림으로 품었던 라스코인들이 어찌 가난 때문에 고통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들의 삶이 환희의 분출로 채워지지 않았었다면, 어찌 그 삶이 이토록 단단한 힣ㅁ이 서린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분명한 것은, 그 삶이 라스코인들을 인간다운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물성의 이미지 역시 인간답다.
동물성이 구현한 삶은 동물성 안에서 아름답게 그려진 것이고, 실제로 아름다웠으며, 그러므로 주권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비참함의 저편에 있다.

*주권적(souverain), 주권성(souverainete). 지고적 /지고성, 절대적/절대성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바타유 사유에 핵심을 이루는 용어 중 하나로, 봉건시대 군주와 같이,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은 상태, 자기 자신이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바타유는 특히 현대 인간이 모두 노동과 미래를 위한 기획에 예속돼 있기 때문에 주권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하며, 예술과 문학, 에로티슴 등 그가 '내적 경험' 혹은 '소통'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통해 주권성에 닿을 것을 역설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언제나 주체로서든 대상으로서든 그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한, 그 상태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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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성의 역할

라스코 벽화의 작가들에 대해서는 여느 작품의 작가들을 다룰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야 한다.

왜 우리의 몫인 심각한 태도를 그들에게 덮어씌우려는 걸까?

우리는 고통의 누그러짐에서 웃음이 탄생했으리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 사실을 잊기 위해 학문이라는 심각한 태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시대 인간을, 때로는 비참함 속에서 생존을 위해 필요에 의해 꽉 쥐어진 채 살았다고 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여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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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이런 이미지들에서 차례차례 빠져나와야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원시시대를 유년기로 표상하는 방식을 버려야 한다.

최초의 인간이 늑대 소년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그 인간은 세대를 거듭한 노력 끝에 자기만의 힘으로 인간다운 세계를 구축해냈다는 점이다.

오리냐크인과 오늘날 공유된 원시인에 대한 이미지를 비교하는 버릇에 대해서는 더욱 논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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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미개인들의 모습을 통해 라스코인의 모습을 표상할 수는 없다. 도리어 반대로, 라스코의 예술은 '야만의' 예술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라스코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품은 풍요로운 예술, 예컨대 중국 예술이나 중세 시대 예술에 오히려 가깝다.

라스코인은 가장 불확실하고 가장 복잡한 미래를 짊어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지금 폴리네시아인과는 언뜻 보아도 확연히 다르다.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인간인 라스코인에 대해 상상해보자면, 라스코인을 이끌고 또 그들을 정체 상태에 머무르도록 놔두지 않았던 움직임을 머릿곡에 떠올려야 한다. 최소한 이 부분에 있어서 라스코인은 우리와 닮아 있다. 무언가 규정되지 않은 것이 라스코인 내부에 생겨났다.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는 끝없는 탄생에 시대에 살고 있다. ... 우리가 사는 동안에도 세상은 변하고 바뀐다. 세상은 옛날에도 변하고 바뀌고 있었다. 최소한 순록 시대 초기부터 라스코 벽화가 만개하던 때까지 걸쳐 있는 그 시대에는 확실히 그러했다.

막 피어오르던 벽화에는 일그러진 여명의 빛줄기마저 깃들어 있었는데, 이 빛줄기는 그 뒤에 이어지는 시대에는 다시 나타나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라스코인들이 이 사실에 대해 명확하고 분석적인 인식-우리는 너무도 자주, 의식이란 늘 명확하고 분석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한다-을 갖고 있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라스코인들이 읶르었던 힘과 위대함의 느낌이, 라스코 벽화에 그려진 소들의 움직임에 불어넣어진 생동감을 통해 느껴진다는 점이다.
벽화를 그린 작가는, 아마도, 자신의 기를 꺾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는 못했던 어떤 전통을 거부해서는 안 됐을 것이다. 작가는 그럼에도, 창조함으로써, 그 관습으로부터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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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미광 속에서 성당에서 새어 나오는 것 같은 희미하고 실낱같은 빛에 매달려서, 그는 그 이전까지 존재하던 것을 넘어서버렸다. 그 이전 순간에는 없던 것을 창조해 냄으로써.

놀이의 탄생

세계의 발전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결정적 사건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도구(혹은 노동)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혹은 놀이)의 탄생이다.

도구는 호모파베르에서 시작된 것으로, 호모파베르는 더 이상 동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현생인류와 동일하지도 않은 인간을 가리킨다.

예술은 현생인류를 가리키는 호모사피엔스에서부터 시작됐다.

예술의 탄생은 사실 도구가 출현하기 이전의 삶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생존에 유용한 활동과 비교해볼 때, 예술은 유용성과는 반대되는 가치를 지닌 활동이다. 말하자면 예술은, 생존에 목적을 둔 세계에 대한 항의다. 하지만 이런 항의 역시 생존을 위한 세계가 없다면 그 몸체를 갖출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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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것은 우선, 이른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놀이다.
반면 도구는 노동의 원칙이다.
라스코(라스코 벽화가 완결된 한 시대)의 의미를 규정한다는 말은, 노동의 세계에서 놀이의 세계로의 이행을, 물리적인 비유를 사용하자면 초안에서 완성품으로의 이행을 알아보겠다는 말이다.

호모파베르는 중기 구석기시대 동안 번성했으며 라스코인보다 먼저 출현했다. 그런데 나는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이행 과정을 설명하는 도중에 라스코인을 시대 순서상 먼저 배치시켜 버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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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시작된 것: 5천 년 전/호모사피엔스가 후기 구석기시대에 등장한 것: 5만 년 전/ 호모파베르가 등장한 것: 50만 년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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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정체돼 있었던 듯 보이는 인간의 삶 이전에, 그러니까 최소한 노동과 도구 제작으로 특징지어지던 미완의ㅣ 형태들 이전에, 이토록 오랜 여명의 시대, 즉 시작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겨울과 봄의 비유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 이 겨울은, 네 번의 긴 빙하기가 이 시기 전체에 걸쳐 이어졌다는 의미에서 쓴 말이다.
후기 구석기 시대가 시작된 이후 기후가 온화해졌다. (라스코, 벽화의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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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세계에서처럼 생존에만 급급해하지 않게 된 것이다. ... 바로 이때부터 예술 활동이 더해졌다. 생존에 유용한 활동만 있던 터에 놀이라는 활동이 더해진 것이다.

순록 시대의 초기 이전에는, 아무튼 원칙적으로 인간의 삶이 동물의 삶과 구별되는 지점은 오직 노동뿐이었다. ... 노동이라는 단어가 차분하게 앚아 실용성을 계산하는 행위를 전제한다는 의미에서 볼 때, 사냥은 노동이 아니라 차라리 동물적 활동의 연장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예술(이른바 형상화)이 나타나기 이전 시대에는, 사냥은 무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만 오직 인간의 활동에 속했다. ... 노동을 통해 인간다운 사유를 하게 됐다는 한에서, 인간은 동물과 구분됐다. 노동은, 미리 앞서서, 곧 다가올 시간 속에, 아직은 존재하지 않지만 곧 만들어질 어떤 사물[대상]*의 자리를 잡아 놓았고, 노동은 순전히 이런 목적에서 발생하였다.

*프랑스어의 'objet'는 주체'subjet'와 대비되는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우선 가지면서 사물, 물건, 미술이나 연극에서의 오브제 등의 의미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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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부터 인간의 머릿속에서 사물은 두 가지로 나뉘어 자리를 잡게 된다. 한쪽은 현재 있는 것들이고, 다른 한 쪽은 미래에 있을 것들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식으로 벌써 둘로 나뉜 국면에 과거의 사물들이 더해져 합을 맞추고, 그리하여 사물들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져서 존재하게 된다. 욕구를 표출하는 짐승의 울부짖음 차원을 넘어서 변별적 기능을 지닌 언어도 이때부터 가능해진다.

대상/사물을 지시하는 언어는, 암묵적으로 그 물건이 만들어진 방식, 즉 그 물건의 원래 상태를 제거하고 도구가 된 이후의 사용법을 보증하는 노동이라는 행위 방식에 연관된다. 그리함으로써 언어는 시의 흐름 속에 그 삼물을 지속적으로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사물은, 그것을 발화하는 자로부터 즉각적 감각성을 떼어내버린다.
인간은 이 감각적 부분을 되찾는다. 굳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해야 한다면, 유용한 작업적 산물을 만들어 냄으로써가 아니라 예술 작품을 창조해 냄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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