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호] 자본주의는 무엇으로 사는가 | 최재인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4 09:35
조회
2046
자본주의는 무엇으로 사는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서평

최재인(『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옮긴이)


* 이 글은 2014년 4월 웹진 민연 통권 036호에 실린 글입니다.
http://rikszine.korea.ac.kr/front/article/discourseList.minyeon?selectArticle_id=467&selectCategory_id=60


얼마 전 한국의 아프리카 박물관에서 아프리카 노동자를 한 달 60만원 내외로 주면서 가혹하게 부린 일이 기사화되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아프리카인 노동자들이 박물관 이사장에게 어려움을 호소하자 ‘아프리카 사람이니까 1달러면 하루를 살 수 있지 않냐’고 하면서 무시했다고 한다. 아프리카 사람은 상식 이하의 저임금으로 일을 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한국에서 일하는 아프리카 노동자를 그렇게 학대한 배경이 되었다. 아프리카인 노동자들은 박물관 관계자에게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그 관계자는 ‘이사장이 아주 강력한 정치인이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하든 뭘 하든 너희들은 별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며 비웃었다고 한다. 박물관 직원들은 이사장이 여당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경찰이 아프리카인 노동자들을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사람답게 대우하지 않았다. 주먹을 써야만 폭력이 아니다.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이 폭력이다.

마르크스는 노예무역과 노예제 대농장 등 제국주의적인 폭력을 통해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있었고, 자본주의는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저자 마리아 미즈는 그런 폭력성이 자본주의의 탄생 과정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유지하는데도 이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폭력은 자본주의적 축적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인지, 주변적인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상품을 매개로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임노동자에게서 혁명의 희망을 찾았다면, 미즈는 폭력을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변화의 출발점을 여성에게서 찾는다.

미즈는 자본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마녀사냥을 꼽는다. 서구 페미니스트들에 따르면, 교회와 국가가 중심이 된 3백여년 동안의 마녀대학살 사건으로 약 6백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역사학자 쇼르만(Gerhard Schormann)은 ‘전쟁 때문에 일어난 일을 제외하면, 인간이 저지른 가장 큰 규모의 집단학살’이었다고 했다. 미즈에 따르면, “산파를 마녀로 기소하고 화형에 처하는 것은 근대 과학의 등장과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여성의 몸을 칠성판 위에 올려놓고 치밀하고 단계적으로 고문하는 과정에서 의학이 자연과학으로 발달했고, 재판과정이 많아지면서 변호사, 판사, 심의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법학대학이 융성하게 되었다. “다양한 분야에서의 남성 헤게모니는 부서지고, 망가지고, 찢기고, 훼손되다가 마침내 화형을 당한 수백만 여성의 몸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즈는 마녀의 처형이 어두운 중세의 유물 때문이 아니라 근대 사회의 발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프랑스 신중상주의 경제이론가 보댕은 근대적 합리주의의 확고한 옹 호자인 동시에 마녀에 대한 학살을 강하게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국가가 새로운 경제를 위해 노동력을 충분히 확보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경찰은 무엇보다 마녀와 산파에 맞서는 싸움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임신이나 출산을 막는 이는 누구든 살인자이며, 국가가 나서서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마녀사냥을 거치면서 여성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출산에 대한 통제력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던 경제적 독립성을 상실했으며, 철저하게 남성에게 종속적인 존재가 되었다. 19세기의 연약한 빅토리아 여성상은 “교회, 국가, 자본가, 근대과학자”가 협력하여 폭력적 수단을 통해 만들어낸 여성상이다. 부르주아계급은 자신이 “소유한” 여성의 생활 영역을 가정으로만 한정하면서, 재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은 사치품과 부의 소비자와 과시자로 만들어졌고, 가정주부로 규정되었다. 이런 규정은 이후 보편적인 여성상으로 확대되어, 임노동을 하는 노동자 여성이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

19세기 중엽 서구에서 임노동이 지배적인 생산관계로 자리 잡으면서, 경제와 노동의 개념은 크게 협소해졌다. 특히 가사노동이 가지는 경제적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서, 가사노동은 여성이 하는 것이고, 노동이라기보다는 가족에 대한 사랑 혹은 본능에서 나오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가족의 의식주 생활을 유지시키고,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경제활동이다. 미즈는 마리아 달라 코스타를 인용하면서, “주부의 무상노동을 이해 못하면 임노동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미즈는 마르크스를 비롯해 근대 경제학자들이 배포한 경제와 임금 개념에 강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미즈는 경제활동과 노동을 고려할 때 중심에 두어야 하는 것은 소득과 성장이 아니라 삶(life), 즉 생활과 생명이라고 말한다.

미즈는 여성을 가사노동에 묶어두면서 가사노동의 생산성을 인정하지 않는 성별노동분업이 자본주의의 중요한 착취방식의 하나라고 말한다. 여성을 가정주부로 규정한다고 해서 여성이 임노동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여성의 값싼 노동력을 거름삼아 성장해 왔다. 미즈에 따르면, “여성은 보편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가정주부’로 규정되기 때문에 최적의 노동력이 되었다.” 여성운동은, 특히 사회주의적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이 임노동에 진출하게 되면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해결되어 나갈 것이라고 여기지만 미즈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소련, 중국, 베트남 등에서 있었던 사회주의 역사의 경험이다. 이 책의 영어판이 처음 발간된 것이 1986년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사회주의 국가였던 이들 나라에 대한 분석을 통해 미즈는 사회주의 나라들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가정주부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여성이 공식적인 일자리로 많이 진출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육아를 비롯한 가사노동의 책임을 크게 지고 있는 조건에서 여성의 정치 사회적 공공활동의 폭은 남성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게 되었다. 남성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조건에서 여성의 일자리는 보수가 낮고 비공식적인 부문에 집중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즈는 생활과 생명을 재생산하는 가사노동이 갖는 가치가 온전히 인정되고, 남성도 이를 함께 책임지는 변화가 없이는 어떤 혁명도 여성을 해방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즈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노동시장을 크게 양분한다. “높은 임금의, 자격을 갖춘 이들이 접근할 수 있고 대부분 남성으로 구성된 안정적인 임노동자”와 “비공식적이고 조직되지 않은 부문”이다. 후자는 “시간제 일자리에서부터 자유를 저당 잡힌 계약노동, 이른바 생계형 자영업, … 아주 낮은 임금의 가내 노동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산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부문의 특징은 저임금에, 일자리 ‘유연성’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이런 노동시장과 생산방식의 이중구조를 미즈는 빙산에 비유한다. 자본주의에서 자본과 노동의 임노동계약 관계는 빙산의 보이는 일각에 불과하다. 수면 아래에는 여성의 가사노동과 식민지인 등에 대한 비상식적으로 낮은 저임금의 비공식적 노동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저임금을 줘도 되는 집단들을 발명해 왔다. 아프리카인을 납치하여 노예로 부리면서 인종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라는 인종주의 딱지를 붙였던 것처럼, 지금도 그런 딱지는 다양한 방식으로 발명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다국적기업들이 제3세계에 공장을 세우면서 그런 경향은 국제적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이런 국제적노동분업은 성별노동분업과 융합되어 가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수출산업에서 노동력의 70%는 여성이다. 슈퍼마켓에서 공산품이나 농산물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제3세계, 특히 그 지역 여성에 대한 착취, 그것도 극도의 착취의 결과이다.

미즈는 생산과 소비 사이의 구분과 거리가 점차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산과 소비는 서로 얽혀 있고, 또 가사노동을 놓고 보면 그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기도 하다. 미즈는 생산과 소비가 너무 떨어지게 되어, 생산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상품이 어떻게 사용되는 지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소비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필요에 따라 소비하기 보다는 기업에 의해 유도된 취향과 유행에 따른 중독된 소비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미즈가 제시하는 것은 자급(subsistence)적 전망이다. [‘Subsistence’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를 두고 고민했는데, 앞서 미즈의 다른 책을 번역하신 분들을 무시할 수 없기도 했고, 생존 혹은 생계로 직역을 하는 것도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것 같아 자급경제로 했다. 개인적으로는 ‘자족(自足)’ 경제로 하고 싶었다.] 미즈는 자급적 전망이 “모든 개인 혹은 작은 공동체가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하고, 생태적 환경 속에서 모든 것을 찾아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이는 “삶의 생산이 일정한 지역, 일정한 공동체의 사람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자립적인 관계에 기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수입을 전혀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수입품이 비착취적인 관계에서 나온 결과물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즈는 이렇게 생산과 소비를 잇는 움직임을 통해 “착취의 가능성을 크게 줄이고, … 저항의 잠재력은 크게 향상”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한다.

미즈는 남성들에게 폭력이 사라지도록 하는데 앞장설 것을 촉구한다. 함부르크에서 있었던 ‘여성에 대한 남성 폭력에 반대하는 남성들’이라는 활동을 희망의 징후로 소개하기도 한다. 한국어판 서문에서는 9.11 이래 계속되고 있는 새로운 전쟁 사태를 우려한다. 특히 이슬람여성을 해방시킨다는 주장으로 중동에서 “자유로운 서구”가 벌이는 전쟁은 그야말로 기이하다고 혀를 찬다.

미즈의 책은 가정에서부터 세계의 군사 경제적 문제까지 세계 곳곳을 누비며, 나의 삶이 어떻게 역사와 세계에 닿아 있는지를 느끼고 생각하게 해준다. 무엇보다 나와 우리 사회가 먹고 사는 것을 놓고 좀 더 총체적으로 생각하게 해준다. 내가 먹고 사는 것이 누구의 노동에 빚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 좀 더 분명히 말하면 착취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따져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우리의 생활을 총체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하는 성찰 없이는 어떤 변혁도 가능하지 않다는 미즈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임금 구조에 대해 우리 사회가 좀 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미즈는 소득을 중심으로 경제를 바라보지 말자고 했지만, 돈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는 조건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검토는 자연스럽게 소득의 분배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현대 세계의 임금구조는 사실 또 다른 신분제이다. 알다시피 임금은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 타고난 국적이나 거주 지역, 성별, 학력이 임금의 상당 부분을 결정한다. 식당 주방일이나 건물 청소를 하는 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일반적으로 책정해 놓은 저임금, 가사 일을 하는 이들이 제공하는 부불노동 등을 고려할 때, 우리 모두는 착취자이다. 몰랐다기보다는 외면했던 부분일 것이다. 공식적이고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즈는 그 부분이 왜 중요한 부분이 아니냐고 묻는다. 공식과 비공식은 누가 쳐 놓은 선이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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