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호] 도시에서 다른 삶과 연대는 가능할까ㅣ권수빈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4-04-06 17:55
조회
52
 

도시에서 다른 삶과 연대는 가능할까


권수빈 (안동대 민속학연구소 연구교수)


임금이 없어도 삶은 가능할까? 나는 한동안 전일제 대학원생이었다. 월급은 없었지만 갖가지 방법으로 돈을 벌며 생계를 유지했다. 가장 큰 출처는 장학금이었고 내가 치른 지식노동의 임금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이 국가의 장학금이었다는 점,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는 나를 곧잘 취업준비생으로 만들었다. 예술가인 친구는 설날이면 어김없이 공무원 준비를 하라는 충고를 받는다고 했다. 꽤 오래 예술 작업을 지속해 왔던 그의 일도 임금노동이 아니기에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졌다. 일해야만 하는 사회, 우리는 정상화된 그 규범에서 탈락한 사람일 뿐이었다. 특히 가난하면서도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불안정한 일은 지속되지 못하리라는 이유로 충고는 손쉽게 날아들었다. “임노동으로부터의 배제가 주체적인 선택이기도 하다는 점”, 그에게 “불안정함이란 역설적이게도 자유를 나타내는 기호”라는 점은 그다지 중요한 정보가 아닌 듯 말이다.

이런 식의 일화는 도시 정부의 예술정책에서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모든 사회적 관계를 자본의 체제에 종속시키는 사회적 공장(social factory)이 되어버린 도시에게 예술가의 비임금 노동 상태는 그들에게 기생할 좋은 구실이 된다. 가난과 궁핍을 예술가의 대표 이미지로 삼고 지원사업의 당위성을 만들어 내는 한편 예술가를 가용할 자원으로 이해하며 도구적 활용을 기대하는 레퍼토리는 익숙하게 반복된다. 물질적 기반이 약한 예술가들은 기금으로부터 생계를 지탱하고 삶을 재생산한다. 도시 정부는 바로 그 불안정성에 기대어 예술가의 비임금 노동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전유하고, 기금을 명목으로 그들을 규범적 질서에 기입할 수 있는 기초로 삼는다. 물론, 도시는 기금이라는 계약 관계 없이도 예술가의 비임금 노동을 무상으로 편취해 왔다. 『예술과 공통장』은 자본이 여성의 부불노동을 ‘사랑’에 비롯한 것으로 비노동화하고 무상 전유하면서 더 많은 생산을 추동했던 것처럼 도시가 예술가의 비임금 노동을 “창조성에 헌신”하고 “예술을 위해 희생하는” 숭고한 작업으로 자연화하면서 “자유롭게 도용할 수 있는 시장의 외부재, 자본의 공통재”로 다뤄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 책은 역설적으로 “임금에서 배제된 까닭에” 예술가들이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생성함을 주목한다. 스쾃(공간 점거)은 그 예다. 공통장 논의에 있어 재생산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페미니스트 저자들 가운데 실비아 페데리치는 “재생산에 필요한 물질적 수단의 공통화가 공통되기를 이루는 주요 메커니즘”이라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노동력이 되기를 거부한 예술가들의 스쾃은 “우리의 삶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재생산 조건에 대한 통제를 되찾고 공유와 평등한 접근에 기초하여 자원을 제공하는 자율적 공간”으로서 공통장이다. 이 책이 주목한 오아시스의 스쾃은 공통권에 관한 담론 공간을 열고 예술을 넘어 다른 틈새들과 연대하면서 공통하기의 실험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기금은 “공공성을 공통성으로 재전유하는” 투쟁 기금으로 변모한다. 기금의 출처가 국가기관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내장하지만, 예술가들이 만들어 낸 틈새가 자본과 다른 결을 생성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장된 한계는 도시가 “공통장을 모의하고 양성하며 촉진”하는 전략을 배태하는 데 기여한다. 도시가 예술 공통장에 접근하는 방식은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끌어안고” 흡수하는 것이다. 창조도시, 창의도시, 문화도시, 예술도시…. 쏟아지는 익숙한 조어들은 도시가 자신의 생명을 활성화하기 위해 삼은 전략이 스스로 예술이 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도시 정부는 스쾃을 “스펙터클로 흡수”할 뿐 아니라 육성한다. 때문에 예술가의 “불온한 점거”는 도시 정부에 의해 질서화된 입주로 변모하기 일쑤다. 이처럼 도시 자본과 예술 공통장의 회로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예술과 공통장』은 그 관계 역학을 미셸 드 세르토의 전술과 전략 개념에 착안해 전술 공통장과 전략 공통장으로 구별해 살핀다. 마냥 대립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자본과 공통장의 복잡한 관계를 사유하기 위해서다. 맛시모 데 안젤리스에 따르면 자본의 외부로서 공통장은 공통재, 공동체, 공통화가 결합한 체계다. 저자는 자본 역시 공통장을 필요로 하며 촉진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공통장으로 나타남을 주목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도시는 “공통장의 전장”이다. 주체의 공통하기에 따라 공통장은 전략으로도, 전술로도 나타난다. 저자는 “의지와 권력을 지닌 주체가 행하는 권력관계의 계산”이 전략이라면 전술은 “유동적으로 흘러 다니면서 지배 질서의 균열에 침범하는 약자의 기술”이라 말한다. 도시 정부는 공통장의 생산방식과 같은 행동 체계를 구축하면서 예술가의 비임금 노동과 그들의 공통장을 전유하는 전략 공통장을 만든다. 이 책이 문래예술공단의 사례로 설명하듯 낮은 임대료를 찾아 저개발된 동네로 찾아든 예술가들의 활동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이어진 사례들, 도시가 적극적으로 나서 문화예술의 새로운 발상지로 관광화하는 전략들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목격해 왔다.

주지할 점은 저자가 지적하는 건 자본과 공통장이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하는” 힘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즉 도시가 예술가의 비임금 노동을 흡수하고 왜곡한다면 예술가들은 그 틈새에서 저항의 전술을 구축한다. 예컨대, 목동 예술인회관이 상징하는 “공과 사의 부패한 연대”와 “빈 공간의 모순”이 오아시스의 스쾃 운동이 생성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공통장과 자본의 관계는 “대립적인 것만이 아니라 좀 더 복합적”이다. 자본이 예술가들의 공통하기에 기생하고 공통장을 전유하는가 하면 예술가들이 그것을 재전유해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벼린다. 자본과 공통장의 관계는 길항하면서도 “공생”하는 관계다. 먹고 먹힘은 “상이한 가치 실천들의 부딪힘”을 드러낸다. 바로 여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성될 대안적 삶의 가능성이 자리한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전술 공통장은 비록 “지배 전략의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을 잠재하면서도 기존의 질서를 침식하는 집합적 삶을 생산하는 형태로 언제든 출현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혁명 이후에 도래할 어떤 세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실천”이다. 자본주의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질 구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독자들은 이 질문의 답을 이 책이 다룬 사례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스쾃이 공통장을 위한 목표가 아니라 공통장을 통한 활동”이었다고 말한다. “제도 바깥에서 삶의 양식을 구축해야 하는” 비임금 노동자인 예술가들에게 네트워크는 삶의 일차적 조건이다. 문래예술공단이 보여주듯 예술가들은 생계를 유지하면서, 또 예술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무언가와 연결되고 접속하는 흐름을 만든다. 이것은 대안적 삶과 예술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생성하는 공통화의 실천이 되기도 한다. 점거는 그 과정의 일부이며 그와 함께 펼쳐진 공통하기의 삶 실천은 예술가들에 의해 공통감각으로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 내부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양식들로 구성되고 따라서 다른 가치실천들에 의해 절합되는”(맛시모 데 안젤리스, 권범철 옮김, 『역사의 시작』, 갈무리, 81쪽.) 구성은 지금 여기의 예술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다. 공생공락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예술의 마디들은 자본과는 다른 생명력으로 관계를 구성해 나갈 힘을 가진다.

저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삶과 스펙터클이 끝없는 길항관계에 있다는 것이고,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건 어떤 가능성의 조건일 뿐”이라 말한다. 가능성의 조건을 예술에서 길어 올리는 이 책이 발견한 건 지금 여기의 삶과 공통하기의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자본과 공통장이라는 힘들의 역학 관계에 얽혀 있는 삶-노동자인 우리에 관한 글이기도 하다. 『예술과 공통장』은 자본의 가치 실천이 아닌 다른 가치 실천을 지향하는 자급적 삶을 위한 공생의 기지로서 대안적 공통장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겠는지, 그럼으로써 “어떤 우리가 될 수 있는지”를 곱씹어 묻는다. 이 책이 예술과 공통장이라는 주제 아래 탐구하고 있는 공통장의 저항과 구성이 지금 여기 우리의 삶과 결부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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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공통장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4년 4월 5일 <교수신문>( https://bit.ly/4aMZ75P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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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예술인간의 탄생』(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5)


예술성이 협의의 예술사회는 물론이고 생산사회와 소비사회 모두를 횡단하면서, 예술의 일반화, ‘누구나’의 예술가화, 모든 것의 예술 작품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예술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센세이셔널한 예술종말론들이 유행하고 있다. 예술종말론의 하위흐름으로 나타나거나 예술종말론에 대한 거부를 통해 나타나는 예술진화론들은 경제와 예술, 예술과 삶, 삶과 정치 사이의 전통적 경계소멸을 가져오는 다중의 출현을 직시하면서 그것으로 인해 도래할 예술의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예상을 표현한다.


피지털 커먼즈』(이광석 지음, 갈무리, 2021)


이 책은 동시대 디지털 기술세계의 확대에 의해 파생되는 ‘피지털’(phygital)계의 등장을 주목한다. ‘피지털’은 ‘피지컬’(physical, 물질)과 ‘디지털’(digital, 비물질)을 합친 조어로, 두 공간 지각이 뒤섞인 혼합 현실을 지칭한다. 『피지털 커먼즈』는 거의 모든 유무형 자원을 포획하고 뭇 생명을 예속화하려는 플랫폼자본주의의 인클로저 질서에 맞서서 지속가능한 공통의 미래 대안을 찾기 위한 시도이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피지털’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호혜의 공통장을 기획할 수 있을까?


혁명의 영점 : 가사노동, 재생산, 여성주의 투쟁』(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옮김, 갈무리, 2013)


재생산 활동의 국제적인 재조직과 그것이 노동의 성별분업에 미친 영향, 돌봄노동과 성노동의 세계화, 노인돌봄의 위기, 감정노동의 발달 및 공유재의 정치 등을 아우르는 폭넓은 주제들의 권력과 정치가 심도 있게 논의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노동의 자본주의적 조직방식과 ‘소외된 노동’에 내재한 모순들의 이면에는, 집단적인 재생산과 관련된, 일상적인 현실을 변화시키는 폭발적 잠재력을 지닌 영점(Point Zero)이 있음을 역사와 이론, 현실 운동 사례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투쟁 :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부터 삶의 보호까지』(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지음, 이영주, 김현지 옮김, 갈무리, 2020)


전 세계 어디에서도 동일한 형태로 출판된 적이 없는 이 선집은 영향력 있는 이탈리아의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활동가인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의 30여 년에 이르는 이론 성과를 집대성한 것이다.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달라 코스따가 작성한 글들 가운데 그의 정치사상적 궤적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28편의 핵심 텍스트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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