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호] 조지 카펜치스 화상강연회 강연문(번역) : 노동/에너지의 두 개념에 대하여 (서창현 옮김)

강연
작성자
ludante
작성일
2018-10-22 21:42
조회
95


노동/에너지의 두 개념에 대하여
에너지 전환과 계급투쟁


조지 카펜치스(gcaffentz@aol.com)
서창현 옮김


※ 이 글은 2018년 9월 30일 저녁 7시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열린 『피와 불의 문자들』 출간 기념 저자 조지 카펜치스 화상강연회에서 발표된 강연문입니다. 원문(영문)은 여기, 질의 응답 정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피와 불의 문자들』에 대한 소개는 여기 있습니다.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환하면 가치를 규정하는 기초 그것이 보이지 않게 된다. …… [잉여가치와 이윤, 그리고 잉여가치율과 이윤율 사이에서 보여지는] 이론가들의 이런 혼돈 때문에, 무엇보다도 현실의 자본가[그는 경쟁전에 사로잡혀 있으며 경쟁전이 나타내는 현상들을 결코 깊이 이해할 수 없다]는 기만적인 외관을 뚫고 경쟁과정의 내적 본질과 내적 형태를 인식하는 데 완전히 무능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1)

요약
1970년대 후반, 미드나잇 노츠 콜렉티브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위기를 물리적으로 정의된 “에너지 위기”로 묘사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노동/에너지”라는 개념을 반핵운동의 담론에 끌어들였다. 그 후 제이슨 무어는 『생명망 속의 자본주의: 생태계와 자본 축적』(2015)이라는 유명한 책에서 1600년대와 현재 사이의 시기에 일어난 세계-생태계의 변천을 묘사하기 위해 “노동/에너지”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이 두 개의 노동/에너지 개념은 유사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몇몇 중요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이 논문에서 나는 에너지, 그리고 에너지에 대한 19세기의 학문인 열역학이 맑스와 엥겔스의 가치 이론에서 하는 역할을 고찰할 것이다. 그런 뒤에 21세기의 보다 최근의 “노동/에너지” 개념들의 개념적 차이와 정치적 결과들을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1. 서론

‘노동/에너지’ 개념의 기원은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의 핵심적인 정치적 질문은, 적어도 개념적으로도, 당시에 직면한 정치적 모순 ― 예를 들어 원자력 압력단체들의 “일자리, 일자리, 일자리가 먼저다”라는 요란한 주장과 “건강한 행성”이라는 환경주의자들의 요구 ― 에서 벗어나도록 반핵운동이 노동자와 생태운동을 하나로 결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노동자운동의 “적색”이 환경운동의 “녹색”과 융합될 수 있을까? 실제로 좌파의 맑스주의 반자본주의 활동가들이 이러한 질문에 대한 효과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면, 맑스주의의 바로 그 존재가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광범한 의문이 있었다. 왜냐하면 환경 문제가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의 반자본주의 정치[학]에 핵심적인 문제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창립 멤버였던) 미드나잇 노츠 콜렉티브는 이 적색/녹색 구분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수많은 “친연성 단체들(affinity group)” 중의 하나였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자본주의의 임금노동자 현실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이라는 가정 하에, 그리고 대부분의 공업상품생산에 필수적인 원료의 유한한 한계에 대한 ‘로마 클럽’이 조사한 생태학적 연구들에 힘입어, 미드나잇 노츠 콜렉티브는 환경과 계급 투쟁을 별개의 실체로 제기하는 대신,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와 요구를 당시의 반핵운동으로 가져오는 몇몇 새로운 개념들을 발전시켰다.
기후변화 반대 운동이 등장하고, 2008년 대침체에서 세계적인 이윤 위기에 대응하여 화석 연료 추출에 대한 (“반추출주의”로 알려진) 저항이 강화되면서, 최근 좌파의 “적색/녹색” 동맹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났다. 이 발전은 2000년 이후 과학 문헌에서 “인류세”2)라는 용어가 소개된 이래로 완전히 새로운 담론이 등장한 것과 특히 궤를 같이 한다. 왜냐하면 지질학처럼 (석유와 가스 산업 같은 자본주의의 기초적인 에너지 부문들의 작동에 너무나도 핵심적인) “자연과학”의 문지기들이 최근까지 자신들의 분야에서 표준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이분법들(예를 들어 자연과 사회의 구분)에 의문을 제기하는 새로운 용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인류세에 비추어 자본주의 분석에서도 유사한 충격이 감지되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자본주의의 비판가들의 경우 특히 사실이다. 티머시 미첼3), 안드레아스 말름4) 그리고 제이슨 무어5). 실제로, 자본주의 체제의 통상적인 기능이 평균적인 해수면, 전 지구적인 대기 온도, 그리고 지구 전역의 화석 연료 에너지 자원들의 총량과 분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기능이 그것들의 피드백 순환의 환류 속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다는 요점을 강조하기 위해 지질학자들의 인류세를 “자본세”로 개칭하려는 제이슨 무어6)와 안드레아스 말름7) 같은 일부 사람들의 노력이 존재한다.

이 논문에서 나는 새로운 담론에 등장하는 중요한 용어(노동/에너지)의 두 가지 의미 그리고 이 “새로운 과학”의 개념적 지형을 개관하기 위해 그것들이 수반하는 체계적‧정치적 차이들을 고찰할 것이다. 나는 맑스와 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에너지가 나타나는 장소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할 것이다. 이어서 1980년 초반 내 동료들과 함께 발전시킨 노동/에너지 개념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다음에는 노동/에너지에 대한 제이슨 무어의 해석을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적 차이들의 정치적 귀결들에 대한 소묘로 마무리지을 것이다.

2. 맑스, 엥겔스 그리고 열역학

“노동work”과 “노동labour”이 맑스주의 존재론에 핵심적이었지만, 에너지 개념은 맑스주의의 발전에서 훨씬 더 결정적이었다. 맑스의 가치이론의 구조가 열역학이라는 학문에서 빌린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훌륭한 증거가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에 들고 있는 도구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있는 ‘브리콜라주8)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맑스가 헤겔의 변증법적 범주들을 능란하게 다룬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열역학(당시의 에너지에 대한 그 학문)에 마찬가지로 능통했으며 더 적절히 활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맑스와 엥겔스는 19세기 중반의 열역학에 핵심적이었던 “에너지 전환” 개념에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물리학의 주요 단어들은 “에너지” 외에, “전환”, “보존”, “불변하는”, “등가” 들이었다. 전기, 기계적 운동, 열, 그리고 아직 규정되지 못했던 기타 다수의 것들이 추상적이지만 미혹적인 물리적 실체인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 동등하게 서로 [각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하는 것은 과학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엥겔스는 그것을 『반뒤링론』의 제2판 서문에서 매우 흥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에너지가 운동 에너지(소위 기계적인 힘)에서 전기, 열, 위치의 잠재적 에너지 등으로 변형 될 때(그 역도 마찬가지다), 운동량(소위 에너지)은 변경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은, 더 이상 어떤 새로운 것으로 설파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바로 그 전환과정, 위대한 기초과정, 자연에 대한 모든 지식을 포함하는 지식에 대한 훨씬 더 풍부한 연구를 위해 이미 확보된 토대로서 기능한다."9)

나는 자본주의의 작동에 대한 맑스의 시각을 헤겔 변증법이 아니라 이 에너지적 전환이라는 틀에 위치짓는다. 증기기관은 열을 기계적 힘으로 전환시켰을 뿐만 아니라, 맑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자체는 노동력, 기계적 운동 및 천연자원을 잉여가치로 전환시키는 거대한 엔진이었다. 사실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관점은, 각 자본가들이 투자된 그/녀의 자본에 따라 그/녀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는 잉여가치의 공동의 풀을 기초로 하는 전환 체계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자본론』 제3권의 9장 「[일반적 이윤율(평균이윤율)의 형성과] 상품 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환」이다. 이것이 전환 “문제”의 원천이다. 맑스는 전환이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이라고 대담하게 설명한다.

1860년대에 맑스가 『자본론』에서 이루어진 자신의 작업에 전환 개념을 적용하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은 그의 선견지명의 좋은 예다. 왜냐하면 전환 개념은 당시의 수학과 과학 전반에서 침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872년 펠릭스 클라인은 “에를랑겐 프로그램”10)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정한 군의 [모든] 전환들 아래에서 불변인 일정한 다양체 위에 나타나는 숫자들의 특징들을 조사하기 위해, 주어진 한 다양체와 그것 위에서 작동하는 전환 군.”11) “전환들 아래에서의 불변성”은 학문의 지위를 얻고자 하는 모든 분야의 주요 조직 원리가 되었다.

물론 맑스는 『자본론』에서, 에너지가 아닌 주로 자본의 가치에 대해 쓴다. 그것들의 관계는 무엇인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가치에 대한 에너지의 관계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자본론』 제3권의 목차를 훑어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변신metamorphosis”, “이행transition”, “전이transferring”, “보존conservation”, “전화conversion”, “순환circuit”, “재상산reproduction”, “형성formation”, 그리고 내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tranformation” 같은 전환적 용어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가치는 에너지가 물리학에서 전환되고 연구되는 “무엇”인 것과 마찬가지로 맑스의 비판에서 전환되는 “무엇”이 되었다.

이러한 가치 전환들은 대부분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등 뒤에서” 일어난다. 실제로, 그것들은 처음에는 경험적 실재에 의해 왜곡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의 역사에서 배워 아는 것처럼, 과학자들은 단순히 추상적 가설들이 관찰에 의해 왜곡된다고 해서 그러한 가설들을 좀처럼 거부하지 못한다.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은 16세기 비평가들에게는 명백한 경험적 증거에 의해 노골적으로 위조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지구가 발 밑에서 시속 약 천 마일의 속도로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지만 당시의 도구는 그럴 수 없는 “시차 효과”의 징후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12)

맑스에게 “전환”은 무엇을 의미할까? 다음 정의를 생각해 보라. “X를 Y로 전환하는 모든 과정을 완수하고, X의 모든 전환의 결과가 결코 Y에 ‘그치지 않는’ ‘확실한 과정’이 있어야 한다. 환상의 원천이기도 한 “보충의” 혹은 의미의 잉여가 존재한다.” [유사한 점이 에너지 전환에 대해서도 지적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줄Joule이 그 유명한 날개차와 열량 측정 장치로 수행한 실험들에서 역학적 에너지가 열 에너지로 전환된 예에서처럼 X 형태 에너지가 Y 형태 에너지로 (거의) 완전히 전환되는 것은 매우 드문 실험 조건들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다.]

『자본론』의 여러 상이한 환경들 속에서 이 정의를 설명해 보겠다. 예를 들어,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환의 경우, 전환 과정은 M-C-M'의 순환이며 보충은 M-C-M'과 C-M-C를 동일시함으로서 화폐와 자본을 혼동하는 것(따라서 자본가와 탐욕스러운 구두쇠를 혼동하는 것)이다. 후자의 순환[C-M-C]은 유한하다. 왜냐하면 교환의 핵심은 자신이 원하는 사용가치를 지니고 있는 상품을 사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품을 파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M-C-M 순환은 사용가치를 소유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화폐를 요구한다(바라건대 더 많은 화폐). 맑스는 보충적 혼란에 대해 쓴다.

"사용가치가 자본가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여겨서는 안 되며, 또한 개개의 거래에서 얻는 이윤도 그렇게 여겨서는 안 된다. 끊임없는 이윤추구운동만이 그의 진정한 목적이다. 부에 대한 무한한 탐욕, 정열적인 교환가치 추구는 자본가와 구두쇠에게 공통되지만, 구두쇠는 얼빠진 자본가에 지나지 않는 반면, 자본가는 합리적인 구두쇠다."13)

이러한 전환/보충 환상 과정의 또 다른 예는 수많은 다른 것들 중에서도 ‘노동력의 가치 및 가격의 임금으로의 전환’의 경우다. 이 과정은 숨겨진 기층,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에서 …… 현상하는 본질적인 관계”로 시작하는, “노동의 가치와 가격”이라는 현상 형태로 나타나는 과정이다. 이 경우 전환은 일관된 진실(실제로 노동자와 자본 사이의 거래에서 구매되는 것은 노동이 아닌 노동력이다)에서 혼동된 외관으로 이동한다. 이것은 순수한 전환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때 “전체 노동이 지불받는 노동으로 나타”14)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동으로 노동자에 대한 착취 그리고 그/녀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은 실존을 넘어 전환된다. “임금의 비밀을 폭로하는 데 세계 역사는 많은 시간을 들였지만, 이 현상 형태의 필연성과 존재이유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없다.”15)

(숨겨진 “진실”에서 외관상의 “환상”에 이르는 과정인) 이 전환 개념은 『자본론』 제3권에서 표준적인 용법이 된다. 예를 들어, 맑스는 두 가지 전환의 결정적인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잉여가치율의 이윤율로의 전환에서 잉여가치의 이윤으로의 전환이 도출되어야 하며, 그 역은 아니다. 물론 이윤율이 역사적 출발점이다. 잉여가치[s/v]와 잉여가치율[s/v+c]은, 상대적으로 말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조사되어야 할 본질에 해당하며, 그 반면에 이윤율, 따라서 잉여가치의 이윤형태는 눈에 보이는 표면적 현상이다."16)

또는 이윤과 잉여가치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윤율은 잉여가치율과 숫자상으로 다르지만, 잉여가치와 이윤은 사실상 동일한 것이고 숫자상으로도 동등하다 할지라도, 이윤은 역시 잉여가치가 전환된 형태며 잉여가치의 원천과 그 존재를 둘러싼 비밀이 은폐되고 모호하게 된 형태다. …… 마치 자본은 이 새로운 가치를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을 통한 자기 자신의 운동 중에서 창조하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에 나타난다. 어떻게 이것이 생기는가는 이제 신비화되고, 자본 그것에 내재하는 숨은 속성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의 가치증식과정을 추적하면 할수록 자본관계는 더욱 더 신비하게 되며 자본관계의 내부유기체의 비밀은 더욱 더 폭로되지 않는다."17)

다시 말해, 경쟁과정이 이윤의 평균이윤으로의 전환을 낳는 전환 메커니즘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가치화 과정은 잉여가치에서 이윤으로의 전환을 발생시키는 것[전환 메커니즘]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또한 전환 과정이 환상들 그리고 설명적 힘의 전복들을 창출한다.

"이리하여 경쟁에서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나타난다. 표면에 나타나고 있는 경제관계들의 완성된 모습은, 그 관계들의 현실적 존재에서나, 그리고 그 관계들의 실행자·당사자가 그 관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관념에서도, 그 관계들의 본질적인 그러나 은폐되어 있는 내부핵심의 모습 및 그 핵심에 적합한 개념과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사실상 그것과 정반대다."18)

따라서 일단 확립되면 자기-설명적이 되는 가시적인 외관으로 전환되는 은폐된 실재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일단 자본가들이 자신의 시대 동안 평균이윤율이 되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은 규정적이 되며 보상의 토대가 된다(물론 그것이 왜 그러한지에 대한 설명 없이 말이다).

자본주의는 게다가 “모든 사람의 등 뒤에서” 작동하는 “거꾸로 된” 체제다. 그것은 자신을 그 자체로 드러내기를 견고하게 그리고 체질적으로 거부하는 착취 제제다. (자본가건 노동자건) 모든 참가자들이 피상적인 지식을 걷어내고 자본주의의 “내적 핵심”과 “그에 부합하는 개념”을 갖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맑스는 이 실험을 미래 세대를 위해 남겨두고 오늘 우리의 모임은 이 과정에서 내딛은 작은 걸음이다.

실제로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시각은, 개별 자본가가 투자한 그/녀의 자본에 따라 그/녀의 이윤을 주장하는 잉여가치의 공통 풀을 그 토대로 갖는 전환 체계에 관한 시각이다. 이 사례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맑스는 “사유 실험”을 고안한다. 그는 “제로-워커”를 상상한다. 다시 말해, “자기의 생산분야에서 가변자본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자본가, 이리하여 노동자를 한 사람도 고용하지 않는 자본가(사실상 극단적인 가정이지만)는, 오직 가변자본만을 사용하는 자본가, 즉 자기의 자본 전체를 임금해 지출하는 자본가(이것도 역시 극단적인 가정이지만)와 마찬가지로, 자본에 의한 노동계급의 착취에 이해관계를 가지며 불불잉여노동에서 그의 이윤을 끌어낼 것이다.”19) 잉여가치의 공통 풀에 대한 이러한 충성은 자본가계급의 외적인objective 유대다. 실제로, 이 충성은 경쟁하는 자본가들의 잡동사니 집합으로부터 (내부와 외부가 있는) 하나의 계급을 만들어 낸다. 이 계급의 구성원들은 마술 서클 내부에서 자기-반영적이다. 즉 이것은 그들에 대한 사실이 아니라 그들 자체이다. 비록 그들이 그것을 모른다 해도 말이다.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쟁(또는 완곡어법의 시대에는 그것을 ‘시장’이라고 부른다)은 생산과정에서 항상 미리 만들어지는 것(잉여가치)을 정돈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본가들을 분열시키는 것(예컨대 경쟁)은 항상 그들의 단결에 종속되며 단결을 위해 기능한다. [그들은] 잉여를 향한 공통의 갈망 그리고 그러한 갈망의 폭로에 대한 공통의 두려움[으로 단결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폭로는 그것의 뿌리에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수탈, 절멸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을 환기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환에 의해 생성된 환상은 이데올로기적 투사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져야 한다. 즉 그것들이 법적‧문화적 구조물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이 생산적인 기반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져야 한다. 이데올로기적 구조는 자본주의의 생존을 문제 삼지 않고도 변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북 전쟁 전의 미국에서 재산법property law은 소위 “자유주”free states에 들어가 도주한 이전의 노예들을 붙잡아 주인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노예 사냥꾼”을 고용하는 관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법은 재산이 ‘자유주’에 거주하고 있는 인간이라고 해도 소유에 대한 재산권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상업적 격언에 근거했다. 나중에 이 판결은 (유죄 선언을 받지 않은) 사람을 소유 가능한 대상 목록에서 배제하는 헌법의 해석에 따라 거부되었다. 이데올로기의 이러한 변화는 노예제 지지자들이 [미국] 북부 사람들에게 [암울한 미래(즉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해] 계속해서 경고한 것과는 다르게 자본주의를 끝장내지 못했다.

그러나 상품 가치(v+c+s)와 상품의 생산가격((v+c)+r(v+c), 여기에서 r은 이윤율)을 포함하는 전환, 그리고 노동력의 가치 및 임금의 전환 또는 기타 이와 유사한 전환들이 작동을 멈춘다면, 자본주의는 붕괴의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환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바로 그 작동과 재생산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실제적인 추상 개념들이다. “추상이란 단순한 가면, 환상 또는 우회diversion가 아니라 세계에서 작동하는 것이다.”20) 왜냐하면 상품의 가치와 생산 가격 사이에 차이가 없다면 고도의 유기적 구성 산업에 대한 투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또 임금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에 차이가 없다면 노동자의 가치 창출에 대한 도둑질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나서 임금계약은 노동계약의 두 당사자 중 하나인 노동자에 의해 단호하게 거부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맑스는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주요 수익(이윤, 이자 및 지대)이 전체 노동에 대한 착취 체제에 의해 창출된 잉여가치 풀에서의 전환이라고 주장했다. (M-C-M' 블록으로 이루어진, 길게 뒤얽힌 유기화합물 같은 분자 회로를 갖는) 자본주의 사회의 수평적 표면의 끝없는 분주함은 가치의 은폐된 “본질” 또는 “핵심”을 표면과 연결하는 똑같이 활동적인 수직 차원과 결부된다. 이 사업의 세계에는 해체주의[탈구축] 철학자나 포스트모던 문학비평가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비밀, 속임수 및 환상이 많이 있다. 자신을 끊임없이 그리고 재귀적으로 재생산하는 이 거울들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절묘한 문제가 발생한다. 왜곡들은 무한히 증식되고, 혼란들은 더욱 큰 혼란 속으로 뒤섞여지며, 환상들은 환상의 훨씬 더 깊은 근원들이 된다. 따라서 잉여가치의 공통 풀에서 개별 자본가의 이윤의 기원은 그/녀에게 은폐되어 있지만, 그 근원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면 그것이 독자적으로 발생했다는 그럴듯한 인상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복리compound interest의 ‘마법’이 생겨나고, 자본은 열렬한 지지가 필요한 순간에 자신에게 또 다른 모든 동화들을 들려준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착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착취를 표현할 수 없도록 그리고 추적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요컨대, 에너지는 맑스주의에 본질적인 측면이거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에너지 전환은 가치 활동의 모델이다.

전환, 에너지 그리고 가치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전환적 시각은 19세기 후반부 자연에 대한 “에너지론자들”의 시각과 유사했다. 이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의 주요 초점인 움직이는 물체를 에너지의 흐름으로 대체하려 했다. 이러한 연결이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첫째, 어원적으로 “에너지”는 복합어다. “εν (in) + ερϒον(work)”.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제11판이 밝히는 것처럼 “[그것은] 누적된 기계적 일로 정의될 수 있는 용어이지만, 그러나 부분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21) 따라서 그것은 맑스의 일[노동]처럼 일의 존재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물론 두 경우에서 일[노동]의 개념은 서로 다르지만 관련되어 있다). 에너지는 개념들 중에서도 가장 추상적인 개념임과 동시에, 가치-창출 노동[일]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결정적인 개념이다!

맑스는 자본주의 체제 전반에 걸쳐 가치의 분열(특히 잉여가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관심을 가졌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가치의 ‘손실’(또는 실제로는 전환diversion)을 추적하고, 가치의 허구적 범주에 대한 잘못된 속성 부여(예를 들어, 임금을 노동력의 가치와 동일시하게 되면 노동자들이 자신이 창출한 잉여가치를 자본가들의 전유를 통해 착취당하고 있지 않다는 환상이 만들어진다. 또는 토지의 지대를 토지의 “생산성”과 동일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맑스주의적인 자본주의 분석의 토대를 형성하려는 마찬가지의 노력이 절실하다. 이러한 노력은 『자본론』제1권에서 제3권으로 더욱 치밀하게 전개된다. 제1권에서 자본주의 체제는 열역학적 체제로서의 지구에 대한 시각과 유사하게, 문자 그대로 외계로 간주된다. 이 에너지는 지구 표면에 영향을 미치는 태양의 빛 에너지와 열 에너지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에, 1년 동안 에너지 투입 총량 E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쉽다. 지구의 에너지 ‘손실’ EL을 결정하는 것은 좀 더 어렵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태양광의 반사, 우주로의 열방사, 이동하며 하늘을 덮는 구름, 대기의 화학적 조성 변화, 해양에 의한 에너지 흡수, (육상과 해저 모두의) 화산을 통한 지구의 뜨거워진 중심핵의 열 에너지 누출 등등. 그러나 진정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것은 순 에너지인 EN = E-EL의 운명이다. 광합성에 얼마나 들어가는가? 저장 에너지로 얼마나 전환되는가?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를 둘러싼 논쟁들과 “가이아 가설”22)은 두 거시적인 가설들의 개요는 쉽게 수립될 수 있지만 두 가설의 섬세한 요점들은 경험적으로 수립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40년대의 아름다운 열역학인 생태학적 육수학23)이 쉬운 전체와 어려운 부분 사이의 이러한 변증법을 완벽하게 보여주었다.)24)

맑스는 자본에 대한 좀더 미시적인 분석을 수행하기 위해 그 자신의 보전 원칙을 정말로 필요로 했다. 자본주의 체제를 하나의 전체로 취급하고 그 기능을 다양한 거시 변수들 T, V, C 및 S로 나누는 것은 충분히 쉬웠지만, 예컨대 (이 체제에서 햇빛의 역할을 하는) 1년 동안 총노동에 의해 창출된 총가치 T가 (재생산적 노동을 포함해서) 전체 산업 부문들로 어떻게 분산되는지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평가의 지침은 예를 들어 이윤, 이자 지불, 지대 및 세금의 총계가 S와 같아야 하고 임금 총계가 V와 같아야 하며 생산자본에 대한 총투자가 C와 같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일부 보전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이러한 가치 결산accounting은 지구의 에너지 회계acoount와 마찬가지로 달성할 수 있지만, 이러한 위업을 실제로 완수할 맑스주의적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의 에너지 회계가 다수의 생태학자와 기후과학자들의 성배이지만, 오늘날의 현재 의제에 대한 사회적 우주를 조사하기 위한 기획이 존재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두 기획 모두에서 보존 법칙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법칙들은 설명적 공백의 원천들을 추적해 내려가기 위한 발견적 방법heuristic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3. 미드나잇 노츠의 노동/에너지 개념

지금까지 나는 전환(규칙에 따른 변위)을 다루었지만, 이제 ‘노동/에너지’로 돌아가 보겠다. 이 문구는 『미드나잇 노츠 2호: 노 퓨처 노츠: 노동/에너지 위기와 반핵운동』의 제목에 소개되었다. 이 책은 1979년 가을에 출간되었다. 이 해에 스리마일 섬 원자로의 노심이 용해되었다. 이 문구는 명시적으로 정의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문구가 1970년대 휘발유 가격과 생태학적 피해의 복합체에 대해 폭넓게 사용되고 있는 설명, 즉 에너지 위기라는 설명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드나잇 노츠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이 위기는 결코 에너지 위기가 아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진정한 에너지 위기는 결코 없었으며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열역학의 제1법칙에 의해 에너지의 총량은 [에너지적으로 닫힌 체계에서는] 항상 일정하기 때문이다. 자본이 직면하는 것은 …… 실제로 에너지[-위기]가 아니라 노동-위기다. 이것은 자연적‧인간적 에너지의 사회적 에너지로의 전환으로의 위기, 잉여가치와 이윤으로의 전환의 위기다."25)

사실, 이 문구는 본문의 마지막 문장에서만 직접 사용된다. “반핵운동의 문제는 노동/에너지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생존을 위해 합성하려고 시도하는 핵과 ‘대안적’ 미래들에 대한 거부를 강화하는 것이다.”26)

[이 문구에 대한] 어떤 정의를 도입하려는 노력이 만들어진 것은, 대통령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한 해인 1980년 11월에 출간된 『미드나잇 노츠 3호: 노동/에너지 위기와 종말론』에서이다. 미드나잇 노츠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렇다면 이 위기에 대한 적절한 이름은 ‘노동 위기’ 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노동/에너지 위기’가 될 것이다.” 정의를 내리기 위한 노력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었다.

"왜냐하면 자본이 직면한 문제는 노동 자체의 양이 아니라 자본을 창출하는 에너지(즉 노동력)에 대한 그 노동의 비율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단순히 노동의 산물이 아니다. 자본은 노동을-창출하는 과정, 즉 에너지를 노동으로 전환하기 위한 조건이다."27)

그것은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서 측정된 양들(S, C 및 V)과 줄 즉 영국 열량 단위(J)28)로 측정된 에너지 사이의 비율이다. 이것은 이전의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측정 형태들을 결합하기 위한 시도다. 가치 창출을 측정하는 확장된 맑스주의 노동가치 이론으로 에너지를 정량화하기 위한 열역학적 용어들. 그것은 뉴턴의 척도들을 “실험적 철학을 도덕적 주제에” 응용하는 것과 결합하려는 데이비드 흄의 기획에서 절정에 달할 것이다. 흄은 자신의 기획이 ‘인간의 과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킬 것으로 보았다.29)

이것은 줄 즉 영국 열량 단위 당 사회적 필요노동 시간에 의해 명명된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과정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데 일반적으로 에너지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되는지를 직관적으로 측정한다. 그것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의 양 그리고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 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자원기반이 생산한 에너지의 양 사이의 비율”이다. 상징적으로 말해, 그것은 가치 척도에 의해 수치화되고 에너지 척도에 의해 명명된 비율 집단을 명시할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거친 예를 들자면, 총에너지 생산으로 나눈 미국의 GNP가 될 것이다.

대략적인 추정치를 사용하면, 이 비율은 2016년 18조 6천240억 달러/8만 3천400조 BTU[영국 열량 단위], 즉 대략 환산하면 1달러/4,600BTU에 해당할 것이다. BTU의 정의는 1.055×103줄에 해당하는, 1파운드의 물을 최대 밀도에서 화씨 1도 올리는 데 필요한 열의 양이다. 미국 경제에서 1달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4,600파운드의 물을 화씨 1도 올리기에 충분한 열을 사용해야 한다!

노동/에너지 위기는, 주어진 에너지의 양으로부터 약간 스칠 정도(tangentially)의 적은 노동(또는 그것의 기대되는 결과인 가치)이 창출될 때 발생한다. 이러한 위기는 노동/에너지 비율을 높이기 위해 의도된 에너지 체제의 이행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바람, 물, 동물에 의해 구동되는 태양에너지 자원기반에서 석탄기반 산업으로의 이행30), 또는 석탄에서 석유동력 산업으로의 이행31) 같은 몇몇 이행들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일부는 실패였다. 예를 들어, 20세기 후반의 석유에서 원자력으로의 이행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실패”란, 전세계에서 평균적으로 지난 10년 동안 1년에 3개의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가 도입된 반면, 1975년과 1984년 사이에 매년 20개의 원자력 발전소가 도입되었다는 뜻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노동/에너지’라는 문구는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널리 사용된 것은「노동/에너지 위기와 종말론」에 대한 언급 덕분이었다.

노동/에너지 비율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근육의 힘에 의해 구동되는 배를 타고 있는 노 젓는 프롤레타리아가 잠수함의 원자로를 모니터하는 사람과 “동일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고 생각해 보라.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상이한 규칙들이 실행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상이한 거부 논리가 상이한 형태의 기동력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노예가 된 프롤레타리아는 핵 잠수함이나 우주 식민지에 적합한 승무원이 아니다.32) 마찬가지로 숙련공이 근무하는 조립라인은 자본가들에게도 역시 문제가 될 것이다. 노동자와 기술적 생산수단 사이의 이런 연계를 애덤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 같은 18세기와 19세기의 정치경제학자들은 이해했다. 예컨대 노예제도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그것[노예제도]의 비효율성에 기초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떤 합리적인 자본가도, 노예의 가치보다 몇 배나 비싼 기계들을 돌보는 노예들을 원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예생산은 가장 낮은 수준의 기술적 수준과 양립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노예는 “가능한 한 적게 노동할 것으로” 그리고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일” 것으로 예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33) 자본주의의 에너지 자원기반에 변화가 있을 때마다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새로운 기반을 만들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성격에는 필수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 결정적인 것은 노동만도 에너지만도 아닌 노동/에너지다. 즉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의 양과 자원기반에 의해 생산되는 에너지의 양 사이의 비율이 그것이다.34)
인과관계의 사슬 또한 반대방향으로 간다. 왜냐하면 노동/에너지 비율의 변화는 프롤레타리아 행동에 의해 야기되기 때문이다. 티머시 미첼이 강력하게 주장한 바와 같이, 석탄에서 석유로의 변동이 있었던 이유는 산업생산에서 후자의 물질이 지니고 있는 우월성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광부들과 그들의 파업이 그들의 직접적인 사장들에게뿐만 아니라 새로운 수준의 노동계급 권력을 창출함으로써 전체 자본주의 체제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는 계급 문화, 집단 이데올로기 또는 정치 조직의 약한 유대 관계보다는, 그들이 채굴, 적재, 운반, 보급, 작동시킨 탄소 에너지의 점증하고 고도로 집중된 양에 의해 점차적으로 연결되었다. …… 단순한 사회운동보다 더 많은 사회­기술적인 작인[기관]이 일련의 민주적인 주장들을 위해 작동되었다. 이러한 주장들이 점진적으로 이행되면서 산업사회에서의 삶의 불안정성은 근본적으로 줄어들었다."35)

석유로의 이동은 석탄 회로에서의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 자원기반을 찾기 위한 자본의 시도였다. 석유의 수많은 특징들은 에너지 자원기반에 대한 훨씬 더 많은 통제를 제공했다.

"석탄에 비해 석유산업의 전 세계에 걸친 상이한 분포는, 그리고 근대 산업의 등장 이전이 아니라 이후 석유산업의 발전은, 관리자, 숙련 노동자, 비숙련 노동자를 따로따로 수용하고 대우하고 노동력을 분리된 인종 집단으로 나누어 노동력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났다."36)

이러한 분석은 다수의 에너지 자원기반 이행들을 촉발하는 계급적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사례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행들은, 성장이론가들이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믿도록 하려고 할, 희소성과 에너지 밀도 문제에 의해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37)

16세기 이래의 노동/에너지 이행 전반에 걸쳐, 자본주의적 축적은 줄어들지 않고 지속되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기본 범주들이 당대의 에너지 자원기반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윤, 임금, 지대, 이자, 가치, 잉여가치, 불변자본 등등은 부수적인 에너지 자원기반을 갖는 특정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어떤 것이든 좋다”라거나 또는 예를 들어 자본주의가 잇따라서 “태양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명기의 자본주의는 현재 규모에 비해 아주 작은 세계인구와 현재 속도에 비할 바 없이 느린 속도로 작동하는 순환과정을 대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들은 자본주의가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전복시키는 데 필요한 사회적 권력을 창출하지 못하는 반대세력의 무능력으로 인해 많은 에너지 자원 이행을 시작하고 생존할 수 있었던 매우 오래된 사회체제라는 사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에너지 자원기반이 바뀔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항상 생계수단과 생산수단에 직접 접근할 수 없는 노동자가 있을 것이며, 그들의 노동은 착취되어 다양한 형태의 수익(이윤, 이자, 지대) 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에서 훨씬 낮은 에너지 밀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한(즉 낡은 기술적 수준으로의 회귀), 자본가는 축적과정을 계속할 수 있다. 왜냐하면 축적되는 것은 에너지가 아니라 노동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럴까? 이것이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장차 투쟁의 지형이 “추출주의”(즉 경제의 뿌리가 “천연자원”의 추출 및 수출에 있다는 교리)에 대한 거부, 특히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에 의한 거부가 될 것이라는 징후는 존재한다.38)

에너지 자원기반에 대한 나의 분석을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 소박한 질문을 던져볼 가치가 있다. 이 에너지 자원기반은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인가? 대부분의 경우 에너지의 주요 목적은 (트럭과 트랙터에서 전력발전소에 이르기까지) 기계에 전원을 공급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기계를 만나고 또 다른 소박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계는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인가? 기계는 분명 노동과정의 고통과 위험을 줄이기 위해 도입된 것이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기계는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착취하는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통해 기계를 소유한 자본가들의 이익률[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기계 자체는 단순히 화석 연료에서 축적된 에너지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산 노동에 의해 고용되기를 기다리는 인간 노동의 융합된 형태들로 가득 찬 과거 노동(역사적 유물론의 관용구로 말하자면 죽은 노동)의 산물이다. 맑스는 기계가 잠에서 깨어나지도 못하고 자발적으로 공장에 가기로 결심하지도 못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개별 자본가의 핵심 문제는 그/녀가 경쟁을 따라잡기 위해 상품생산에 사용할 기계를 구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변화를 촉발할 수 있는 경쟁 압력을 받지 않는 당해 초기의 기계 채택자들에게 그것을 미루는 것이다. 해답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핵심적인 시각은 기계가 계급투쟁의 도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장은 임금인상, 노동일 단축, 생산적인 장치에 대한 요구에 성공한 노동자들을 [기계로] 대체하겠다고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체 역시 또한 수학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기계의 비용(기계의 에너지 비용과 감가상각)은 노동자의 투쟁(예컨대 사보타주)과 관련된 임금 및 기타 비용의 “저축”보다 적어야 한다.

렌프루 크리스티가 수년 전에 지적했듯이, 계급투쟁에 유용한 기계들의 추가적인 속성들이 존재한다.

"기계 형상 속의 죽은 노동은[기계는] 산 노동을 넘어서는 또 다른 이점이 있다. 그것은 말대꾸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파업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둑질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가의 의도에 저항하지 않는다. …… 따라서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적대자인 노동자들의 철회 가능한 기술과 고의적인 무규율에 대한 대체물로서 기계의 기술과 규율을 사용한다."39)

노동과 에너지 사이의 이러한 연결은 맑스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며, 『자본론』 제1권을 구조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기계의 역할에 대한 논의로 주로 구성된 제4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 노동일을 줄이기 위한 성공적인 투쟁에 관한 제11장[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 뒤에 이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상품생산의 시점에서 계급투쟁이 더 효과적이면 효과적일수록, 자본이 기계화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며, 따라서 에너지 자원에 의해 생성된 권력에 대한 필요성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이 에너지 자원기반이 노동력을(만약 그것이 투쟁으로 충만하다면) [기계로] 대체하고 착취를 강화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생산의 컴퓨터화가 에너지 사용량의 증대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전 세계 전기 사용량의 10퍼센트가 컴퓨터 과학기술에 기인한다고 추정했다!40)

전체 상품의 가치의 합(T)이 불변자본(C), 노동력 가치(V), 그리고 잉여가치(S)에 의해 구성되고(T+C+V+S), 체제 전체의 이윤율이 S/V+C라고 가정함으로써 에너지 수요와 계급투쟁의 관계를 도식적으로 고찰해 보자. 성공적인 계급투쟁은 노동력의 가치를 높이고 이윤율을 감소시키는 투쟁이다. 자본가들은 이윤율의 감소에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대답은 이렇다. 필요한 노동자들의 수와 그들의 임금(19세기 정치경제학에서 알려진 바의 임금계산서) V를 줄이기 위해 C를 늘리고 또한 S를 늘리는 것. 일반적으로 말해, 그로 말미암아, 증대되고 성공적인 계급투쟁에 대한 반응은 기계화의 증가와 그에 따른 생산의 에너지 요구다.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투쟁이 증가하면 에너지 자원기반의 사용을 가속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투쟁이 통제되고 있는 한, 기계화 속도를 높이기 위한 추진력이 감소되어 더 많은 에너지에 대한 필요성이 감소한다. 이것이 자본가들의 보존 방식이다! 그러나 통제에서 벗어나고(V를 늘리고 S를 감소하는 것) (C 수준을 유지하는) 기계에 의한 대체에 성공적으로 저항하는 투쟁은 자본주의에서 멀어지는 노동자의 생태적 경로다. “노동자와 기계 사이에 투쟁”이 존재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러다이트를 통해 맑스가 배웠던 것처럼, “노동수단이 노동자를 파멸시킨다.”41) 이 투쟁은 축적 과정에 제동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유물론의 전통에서 반자본주의적인 이행의 유일한 공식적인 경로다.

자본주의 수학에 대한 이러한 여담은 에너지와 노동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계급투쟁이 자본주의에서의 에너지 사용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측면이 아니라 자본주의에는 한계인 노동과정의 “부정적인 주관적” 측면일 뿐이다. 이 주관성[주체성]의 문제는 그것이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의 ‘인내’를 얼마나 기대할 수 있을까? 이것은 예컨대 주어진 입방 부피의 하층토 내부의 석유의 양을 알 수 없는 것처럼,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는 알 수 없는 (미래의 지식 같은) 양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종말에 관한 문제를 공식화하는 방식으로 드라마가 제안된다.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이 혁명적인 반응을 가져오지 않고 전례 없는 수준으로 축소되는 것이 완전히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1세기가 넘는 투쟁이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에서 그러한 전개를 목격하고 있다. 남북전쟁을 포함해서, 노동계급에 대한 덜 불안정한 삶을 보장하는 것은 (어쩌면) 시스템과의 근본적인 단절 없이 증발해 버렸다. 결국 ‘자본주의의 종말’은 결정적인 질문을 다루는 것을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계급투쟁은 악화하고 있는 자연조건에 직면하여 언제 완전히 효과적인 거부의 지점에 도달할 것인가?

4. 제이슨 무어의 노동/에너지 개념

제이슨 무어의 책 『생명망 속의 자본주의: 생태계와 자본 축적』이 2015년에 출간되면서 “노동/에너지”라는 개념에 대한 관심이 바뀌었다. 무어는 자신의 중요한 책의 한가운데에 “노동/에너지”를 놓았다. 하지만 나는 무어가 사용하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노동/에너지”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 절에서 “노동/에너지”에 대한 나의 개념과 무어의 개념을 대조, 분석하여 차이점이 무엇인지 이해해 볼 것이다.

내 용어법에서 “노동/에너지”는 가치 창출의 여러 단위들의 비율로서, 창조과정 동안 이러한 단위들이 소진된 에너지에 의해 명명된 것이다. 이 단위들은 미시-자본주의 기업에서 자본 전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헤겔이 ‘양적 비율’에 대해 지적했듯이, “비율의 양쪽 측면들은 여전히 직접적인 양자들[특정량들]quanta이며, 질적‧양적 특성들은 여전히 서로에게 외부적이다.”42)

나는 제이슨 무어가 생각하는 방식의 가치 창출과 에너지의 통일을 표현하는 것과 달리, 그것의 분리를 활자체로 표현하기 위해 슬래시 “/”를 사용한다. 한쪽에는 “일”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에너지”가 접해 있는 경우 무어의 용어법에서의 슬래시는 비율이 아니다. 그것은, 예컨대 주부, 폭포, 죄수 노동 또는 마리아 미즈가 말한 바의 “여성, 자연, 그리고 식민지”43)에 의해 수행된(대부분 임금을 받지 못한) 공통의[통상적인] 노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평가절하된 존재 범주들의 ‘세상을-바꾸는’ 활동들을 가리킨다. 여성과 자연(예를 들어 동물)이 자본(노동/에너지)을 위해 수행한 광대한 비임금 노동의 풀은 생산 및 재생산 비용을 낮춘다. 이것이 무어의 체계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위한 노동/에너지의 기능이다. 이것은, 내가 상품 가치의 상품의 생산가격으로 전환에서 다룬, 고도로 유기적으로 구성된 산업분야들로 흘러들어가는 잉여가치의 풀과 유사한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징이다. 그것의 기능은, 잉여가치를 많이 창출하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체제 전체의 생산 및 재생산에서 중요한 기능을 제공하는, 산업에 잉여가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무어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동/에너지는 자본주의를 인간과 인간 외부 자연에 의한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이 사회적 필요노동 시간으로 이해되는 가치(추상적 사회노동)로 전환되는 일련의 관계로 다시 사고하도록 돕는다. “노동/에너지”(또는 잠재적인 노동/에너지)는 (금전적 결속을 통한 상품화된 노동력에서처럼) 자본화될 수도 있다. 또는 강, 폭포, 삼림이 수행하는 작업에서처럼, 또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재생산에서처럼, 비경제적 수단을 통해 전유될 수도 있다."44)

실제로 무어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노동/에너지 개념을 내 개념과 차별화한다. “나의 노동/에너지 용법은 가치로 전환되는 인간 및 인간 외부[존재들에 의해 수행된] ‘노동’을 전유하는 자본주의의 통일된 논리까지 그것을 확장한다. 다시 말해 무어의 슬래시는 비율의 기호가 아니다(나의 슬래시는 비율의 기호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가치 창출의 기능을 하는 인간 및 인간 외부 에너지의 종합의 기호다. 그러나 자본은 그 분리를 초월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지대 범주와 금리 생활자 계급(지대 수령자)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케인스가 시사한 안락사를 겪는 대신, 21세기 초 금리생활자 계급에는 엄청난 활기가 존재한다. 백악관에 도널드 트럼프가 거주한다는 사실이 어떤 징후라면 말이다.

사실 무어는 다음과 같이 씀으로써 노동/에너지 개념의 중요성을 증명한다. 그것은 “이 주장에서 중요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 및 인간 외부 노동의 통일을 둘러싸고 있는 데카르트적 안개를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준다.”45) 그러나 이 “안개”는 단순히 정신적 한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또는 심지어 “신성하기까지 한”) 특징 - 재산권 및 임대 수입을 받을 수 있는 권리 - 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는 대안적인 “노동/에너지”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무어의 “노동/에너지” 개념에 대해서는 몇 가지 비판할 점이 있다. 첫째, 무어의 개념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가 행하는 것’과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을 전개하는 사람들’을 혼동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가 모든 사용가치를 상품으로 환원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환원이 실제로 보편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상품화에 한계를 설정하려는 반­경향들이 존재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은 상품화의 불완전성을 인식해야 한다. 설령 ‘비판’이 자본주의가 보편적 상품화가 초래할 소외의 총체화로 불가피하게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해도 말이다.

또한 무어가 종종 그러는 것처럼, 단순히 분석이 “관계적”이지 않고 “실체적”이라는 이유로 분석이 존재론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너무 기계적이며 거의 새로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무어의 물질/관계 이분법과 유사한 물질/기능 이분법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에른스트 카시러와 같은 신칸트주의 철학자의 산물이며, 1989년 『빛보다 더 많은 열: 사회 물리학으로서의 경제학, 자연의 경제학으로서의 물리학』이 저자 필립 미로스키에 의해 부활되었기 때문이다.46)

그러나 ‘자본이 자신에 대해 스스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말하는 것을 상술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다. 그러니까 자본은 노동일에는 노동자가 창출한 잉여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분석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알고 있다. 왜냐하면 노동이 소유되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자본가가 지불하지 않은 노동일[의 일부 시간]에 창출된 잉여가치의 소유를 요구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적인 ‘주인 없는 땅terra nullius’이다.

V. 개념적 차이 : 이전과 지대의 중요성

앞서 언급했듯이 무어에게 “노동/에너지” 용법은 노동(가치를 창출하는 인간 노동)과 에너지(우주에서의 신체의 일반적인 운동)의 종합을 언급하는 새로운 유형학적 방법이다. 그러나 이 전체성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일어난 “좋은 생각”이 아니다. 열역학과 가치이론 사이의 분리의 초월은 완료되지 않은 투쟁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인들이 자신을 소유하지 않는 자연의 일부로 간주되었다(다라서 “자연적으로”는 무임금이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프리카 대륙의 특징을 “똥구덩이shit hole”라고 표현한 것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류에 대한 인식은 영구적인 성취가 아니지 않을 뿐더러, 가치 창출에 대한 그들의 접근방식조차도 뒤집을 수 없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본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심문관의 전등에 노출되어 있다.

무어는 변증법적 사상가로서 그가 “세계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통일된 전체를 가정하는 비판 원칙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통일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시된다. 그는 다음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에게 명백한 이분법을 보여달라. 그러면 나는 숨겨진 통일을 보여주겠다.” 자연과 사회를 보여달라. 그러면 나는 우선 당신에게 사회­안의­자연과 자연­안의­사회를 보여준 뒤, 야누스의 얼굴 같은 자연/사회를 보여줄 것이다. 해체는 무어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다.

무어의 변증법적 방법론은 맑스의 변증법적 방법론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맑스는 분명 헤겔의 논리에 절대적으로 헌신하는 사상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헤겔 방법론에 대한 맑스의 비판은 맑스주의 담론 속에서 널리 알려지고 논평되었다. 그러한 해석의 많은 해설자들 중에 칼 코르쉬가 있다. 그는 자신의 비판을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표현했다.

"기존 사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적인, 더 이상 부르주아적이지 않은) 맑스주의적 비판 원칙들은 내용, 주제 및 목표에서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형태에서조차 헤겔의 철학적 체계와 반대된다. 맑스가 헤겔의 방식에 내재된 원리들을 비판적이고 혁명적으로 뒤집은 데서 출발했다면, 그는 분명 자신의 유물론적 비판과 연구의 구체적인 방법을, 엄격한 경험적 방식으로, 개발하기 위해 계속 나아갔다."47)

이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정확하다. 코르쉬의 요점을 무어의 용어에 적용해 보자. 자본은 여전히 데카르트적이다. 그것은 동물, 환경 및 기계를 (그들이 가치 창출 과정에서 아무리 유용하다 할지라도) 가치 창출자들로 분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가치 창출에 부정적인 요소를 도입할 수 있는 소유자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어는 자본가들과 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는 사람들을 혼동한다. 자본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말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별개다. 하나는 대상의 내부, 자본에 서 있고, 다른 하나는 바깥에 서 있다(설영 자본이 아무것도 도망갈 수 없는 무한하고, 자기반영적인 전체로 자신을 제시하더라도 말이다). 자본가들은 가사노동에 대해서 그것이 가치 없으며, 노동자들이 노동일에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표현은 그/녀에게는 정확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녀의 등 뒤에서” 자신을 구성하는 전환된 세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무어는 실체를 둘러싼 관계에 대해 존재론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관계는 실체보다 선험적으로 우월하지 않다. 내가 맑스를 실체 사상가로 비판한 미로스키에 대한 글을 썼듯이, “우리는 과학의 역사에서 종종, 실체에서 장으로의 이행 마디들을, 그리고 다시 그 역으로의 이행 마디들을 발견할 수 있다. 파동(장)에서 입자(실체)로의 그리고 다시 그 역으로의 양자 기계학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복잡한 변증법적인, 교차하는 춤에 대해 생각해 보라.”48)

6. 결론: 노동 계급의 자율성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지만 무어의 책에는 지대 범주 옆에 더 중요한 공백이 존재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노동계급의 자율성과 자기­활동 개념들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계급구성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계급분해와 계급재구성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무어는 1968년 이후 맑스주의의 다수 개념들을 노동/에너지 주변에 적용하는 데 매우 열심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여기에는 비임금노동, 재생산적 노동, 새로운 인클로저, 물질대사의 단절, 세계체제이론이 포함된다. 그는 가사노동을 위한 임금 운동 이론가들이 1970년대에 탁월하게 만들어 이제 반자본주의 담론의 주제가 요소가 되었고 무어의 “값싼 것들”, 특히 “값싼 노동”의 토대가 된 비임금노동 개념을 사용하는 데 특히 능숙하다.49)

무어는 노동계급의 조건에 대해 (종종 웅변적으로) 많은 말을 하지만, 1968년 이후의 이론적 혁명의 노동계급의 자율적 측면들에서 뒷걸음을 친다. 자본과 그 계급적 표현들은 항상 명령 속에서 또는 그 내부의 싸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분열의 계기(해체)와 부분적 단결의 계기(재구성)를 겪고 있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과 유사한) 특정한 계급구성의 자기­활동적인 노동계급에 의한 ‘자본 내부에서, 자본 없이, 자본에 반대하는’ 투쟁 역시 존재한다. 계급투쟁이 무어에게도 존재하지만, [그의] 계급투쟁은 임금[노동] 측면과 비임금[노동] 측면 모두에서 자기­활동성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마치 임금노동자들의 축적된 영향이 과거의 역사나 특히 역사의 미래에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계급투쟁의 폭력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역사적인 현존이다. 1848년 『공산당 선언』첫 줄을 기억해 보자.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50) 이 폭력이 끝날 수 있을까? 아니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본의 힘과 지식은 결코 완전무결하지 않으며 그래서 언제나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치명적인 가치­전환들이 자본가들의 “등 뒤에서” 발생해 지배계급의 영원한 불안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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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1) Marx 1981: 268-269[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 정치경제학비판 III[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208~209쪽]
2) [옮긴이]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가 지구 환경에 큰 영향을 준 시기를 구분한 지질시대의 이름. 공식적인 지질시대는 아니며 2016년 기준 국제층서위원회(ICS)에서 검토 중이다. 인류세의 시작 시점으로는 화석연료 사용이 급증한 1800년대 산업혁명이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경이 논의되고 있다. [다음백과]
3) Mitchell 2011.
4) Malm 2016.
5) Moore 2015, 2016.
6) Moore 2016 : xi.
7) Malm 2016 : 391.
8) [옮긴이] 손에 닿는 아무것이나 이용하여 만드는 일.
9) Engels 1976: 14~15.
10) [옮긴이] 에를랑겐 프로그램(Erlangen Program)은 1872년에 펠릭스 클라인이 에를랑겐 대학교의 교수로 임용되면서 기하학의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제안한 연구 방법론이다. 발표 당시의 정식 제목은 〈Vergleichende Betrachtungen über neuere geometrische Forschungen(새로운 기하학 연구를 위한 비교적 관점)〉이다. 당시 기하학의 중심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모델로 삼아 공리로부터 정리들을 증명해내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클라인은 두 가지 점에서 혁신적인 제안을 했다. 첫째로 그는 대칭의 개념을 담고 있는 대수적인 이론인 군론이야말로 기하학적 지식을 종합해 낼 올바른 토대라고 주장했다. 둘째로, 그는 각 기하학적 언어에 대해 그에 맞는 개념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사영기하학은 원뿔곡선을 다루기에는 적합하지만 사영변환에 대해 불변이 아닌 원이나 각도 개념은 제대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하학은 여러 언어를 필요로 하며, 이 각각의 언어들을 대칭군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클라인의 제안이었다. [위키백과]
11) Klein 1872, Waismann 1961.
12) Kuhn 1958.
13) Marx 1976: 254)[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 정치경제학비판 I[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199~200쪽].
14) Marx 1976 : 680[앞의 책, 733~737쪽].
15) Marx 1976: 680-681)[앞의 책, 734쪽].
16) Marx 1981: 134[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 정치경제학비판 III[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50쪽].
17) Marx 1981: 139[앞의 책, 56~57쪽]
18) Marx 1981: 311(강조는 맑스)[앞의 책, 258쪽]
19) Marx 1981: 299[앞의 책, 244쪽].
20) Finelli 1987.
21)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너지” 항목.
22) [옮긴이] 영국의 제임스 러브로크의 견해를 기초로 한 ‘지구 전체는 생물적인 구성요소와 비생물적인 구성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자기조절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
23) [옮긴이] 육상에 있는 수역, 즉 호소, 하천, 지하수 등의 육수에서의 물리, 화학, 생물학적인 여러 가지 현상을 연구하는 과학.
24) Lindeman 1942.
25) MN Collective 1979 : 7.
26) MN Collective 1979:38.
27) MN : 3.
28) 국제 단위계(SI) 내의 ‘줄’이라는 용어는 1미터 거리에서 1킬로그램 무게의 물체에 적용된 뉴턴(1킬로그램의 질량을 초당 1미터로 가속시키는 데 필요한 힘)에 의해 소비되는 에너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하나의 줄은 꽤 큰 양의 에너지다. 가속을 위해 1미터 이상 1킬로그램(약 2.2 파운드)을 밀고 있다고 상상해 보면, 이것은 대략 큰 돌을 한 장의 유리창에 던지는 것과 맞먹는다.
29) Demeter 2016.
30) Malm 2016.
31) Mitchell 2012.
32) 후자[우주 식민지]는 실비아 페데리치와 필자가 공동 저술한 논문인 「공간 속의 모르몬교도들」을 보라. Caffentzis, 2013: 58~65[조지 카펜치스, 『피와 불의 문자들』,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18, 112~125쪽].
33) Smith 1998 : 438 그리고 Mill 1961 : 251.
34) Midnight Notes 1992.
35) Mitchell 2011 : 27.
36) Mitchell 2011 : 36.
37) Meadow 2004.
38) Vasquez 2014, Caffentzis 2004.
39) Christie 1980 : 14.
40) Clark 2013.
41) Marx 1976: 559[김수행 옮김, 앞의 책, 『자본론­정치경제학비판 I[하]』 , 584쪽].
42) Wallace 1892: 199.
43) Mies 1986[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최재인 옮김, 갈무리, 2014].
44) Moore 2015 : 14.
45) Moore 2015 : 14.
46) Cassirer 1953, Mirowski 1989.
47) Korsch 2017 : 41.
48) Caffentzis 2013:185[서창현 옮김, 앞의 책, 『피와 불의 문자들』, 299쪽.
49) Dalla Costa 1972, James 2015, Federici 2013, Patel and Moore 2017.
50) Marx and Engels 1967: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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