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호] 부대낀 날들의 기록ㅣ손보미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9-04-09 22:22
조회
44
 
 

부대낀 날들의 기록


손보미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수상한 책,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제목도 빛깔도 수상한 책이다. 책의 제목은 우글거리는 정체불명의 떼거리를 연상케 하고, 빨간색도 분홍색도 아닌 불그스레한 빛은 표피가 벗겨진 고기를 연상케 한다. 제목과 빛깔이 만들어 낸 각각의 이미지들은 서로를 자극하며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책을 마주한 이를 긴장시킨다.


맞장뜨는 여자


어떤 주장이든 그에 반하는 주장을 맞닥뜨리기 마련이고 어떤 이론이든 곧이어 그에 반하는 이론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페미니즘만큼 거대한 저항을 동시에 만들어낸 주장이나 이론이 또 있을까? 페미니즘은 태어나자마자 그보다 더 거대한 반페미니즘을 동시에 만들어냈다.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은 평생 백래쉬를 일상처럼 견디고 백래쉬와 맞장뜨는 게 삶 그 자체라고 할 만큼 괴롭고 투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7)


갈등과 대립을 숙명처럼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페미니스트 이론가의 삶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고 보면 날카롭고 논쟁적인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는 실제 현실에서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페미니즘의 칼날


날카롭고 논쟁적인 페미니즘의 칼날은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낡은 관성의 장막을 갈라버린다. 번뜩이는 칼날 앞에 우리 사회의 붉은 속살이 훤히 드러난다. 큰 전환기마다 대대적으로 자행되온 여성살해의 역사, 모든 생산 현장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노동의 젠더 불평등 등. 예리한 페미니즘의 칼날이 아니었다면 이것들이 이토록 선명하게 우리 눈앞에 드러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낡은 장막을 가르는 일은 안으로 곪아 썩어가던 폐쇄된 공간에 시원한 바람구멍을 내는 일이기도 하다. 문단 내 성폭력 고발 해시태그 운동으로 시작된 페미니즘 운동은 기존 문단의 부패를 고발하며 문학 주체의 새로운 결속체를 구축하고 새로운 '문학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82년생 김지영』의 대중적, 문화산업적 성공으로도 이어졌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며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 권의 책이 이토록 많은 대중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을까? 대중 담론 차원에서 한국 페미니즘의 '원년'이라고도 칭해지는 최근 몇 년간 사람들의 곁에는 영화도 드라마도 아닌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있었다.


막장의 부대낌


최근, 대략 2016년쯤이 대중 담론 차원에서 한국 페미니즘의 '원년'으로 칭해진다면, 그 전의 페미니즘은 이 땅에서 어떻게 생존해왔던 것일까? 저자는 페미니즘 이론가로 살아남기 위해 한국 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지난날의 부대낌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책 자체가 "온 힘을 다해 무언가 '다른 삶'을 만들어보기 위해 부대낀 날들의 기록"(8)이기도 하다. 책의 4부에는 저자가 겪었던 공동체 실험에 관한 기록이 꽤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 구체적인 부대낌의 기록은 그 자체로 '실패의 기록'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안심의 유대관계


구체적인 실패의 기록들. 이 기록들에 이어 저자는 공동체 사유와 실험에 있어 한 가지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바로 안심의 정동이다. 저자는 2013년에 일본에서 있었던 지역 공동체들과의 만남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공동체들 또한 이미 많은 실패를 경험한 이들의 모임이었다. 계속되는 실패의 경험들. 극심한 차별과 혐오 발화로 인해 불안과 공포가 일상이 되어버린 듯한 상황. 하지만 이처럼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안심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관계'(341)를 찾아냈고 그 덕분에 다시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들과의 만남에서 저자는 '마음을 놓게 하는 마주침' 즉, '안심의 어소시에이션'의 중요성을 발견했다. '안심의 어소시에이션'은 모든 것이 소진된 이들에게 다시 능동으로 향할 수 있는 힘을 불러일으킨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는 것은 슬픈 수동에서 기쁜 능동으로 전환하는 정동의 변환을, 그 신체적 상태의 이행의 문턱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 마음을 놓는다는 것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기쁨과 마찬가지로 힘이 증가할 수 있는 잠재력을 활성화하는 동적인 과정이다."(345)


실패의 기록, 기쁨의 기록

'마음을 놓게 하는 마주침.' 이를 독자와 책의 만남으로도 이야기해 보고 싶다.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와 독자의 첫 만남은 강렬하다. 첫 만남에서 시작된 긴장감은 책을 읽는 내내 이어진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실패의 기록이라 명명된 활자들에 이르러 독자의 입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온다. 이 기록들을 통해 독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늘 다른 삶을 만들기 위해 분투했던 이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패를 경험한 이들이 안심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시작할 수 있었듯이, 안심한 독자도 이 부대낌의 기록들을 기쁨의 기록으로 다시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이론과 현장의 자리를 고민하며 독자들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진다. "계속 나아갈 것인지, 이제 너무 멀리 나아가지 않는 것이 좋은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기쁨의 기록을 마주한 독자는 이렇게 응답할 것이다. "계속 나아갑시다."


*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19년 4월 8일 웹진 <문화 다>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bit.ly/2ImsYrE)


*


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권명아 지음, 갈무리, 2012)

이 책은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지난 20여 년간의 변화와 낙차(落差)를 살펴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저자는 슬픔, 외로움, 사랑, 위기감, 불안 등 정념의 키워드들을 통해 영화,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문화들을 넘나들며 조망한다. 더불어서 시대를 초월한 여성 문인들의 삶과 작품들을 새롭게 조명하며 지난 20여 년간 한국 사회에서의 ‘정치적인 것’을 둘러싼 변화를 통합적이며 힘 있게 그려내고 있다.


정동 이론(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J. 시그워스 엮음, 최성희, 김지영, 박혜정 옮김, 갈무리, 2015)

아프 꼼 총서 2권. 정동 연구라는 이제 막 발아하는 분야를 정의하는 시도이자, 이 분야를 집대성하고 그 힘을 다지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정동 이론의 주요 이론가들을 망라하고 있다. 정동이란 의식적인 앎의 아래와 곁에 있거나 그것과는 전반적으로 다른 내장[몸]의 힘으로서, 우리를 운동과 사유, 그리고 언제나 변하는 관계의 형태들로 인도한다.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남성이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된 것 만큼 여성이 가사노동자이자 노동력 재생산기계로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페미니즘 역사서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았던 이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는 공식적인 역사서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책에서도 다뤄지지 않는 산파 여성들·점쟁이 여성들·식민지의 원주민 여성 노예들·여성 마술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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