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팅 <에티카> 정리21-39

작성자
nykino
작성일
2019-07-17 11:32
조회
82
《에티카》
제3부 – 감정의 기원과 본성에 관하여
황태연 옮김 | 비홍출판사

[정리39]
▶ 어떤 사람을 증오하는 자는 그 사람에게 해악[악]을 가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 단 그 일로 인하여 자기 자신에게 보다 큰 해악[악]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 이에 반하여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똑같은 법칙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 선을 베풀려고 노력할 것이다.

우선 정리39까지는 스피노자가 3 가지 기본 감정인 기쁨, 슬픔, 욕망의 변용인 사랑과 증오의 구도 속에 선과 악과 대응하여 정리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관된 자기 보존의 노력인 코나투스[conatus]를 통해, 각자의 감정적인 관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각자의 감정을 통해 우리는 ‘어떤 것이 선인지 아니면 악인지, 유용한지 아니면 유용한지 않은지를 판단한다’고 말한다(195).

[정리9]의 주석(169)에서 코나투스와 관련하여, “그것(충동)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인간의 보존에 기여하는 것들이 나온다.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행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라고 언급했다. 이 표현은 (개인적인 인상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운동이 향하는 목적’과 관계되어 있는 ‘원동자’개념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사랑과 증오의 개념 재확인
[정리13]의 주석(173)을 다시 살펴본다.
▶ ‘사랑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일 뿐이다.’
▶ ‘증오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에 지나지 않는다.’

또 이어서 덧붙이는 부분
“우리는 사랑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사물을 현실에 소유하고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반면, 증오하는 자는 증오하는 사물을 멀리하고 파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안다.”

※스피노자가 언급한 선과 악의 개념
[정리39]의 주석(195)에 선과 악에 대해 언급한다.
“나는 선을 모든 종류의 기쁨과 기쁨을 가져오는 것, 그리고 특히 온갖 종류의 열망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
“그리고 악을 모든 종류의 슬픔, 그리고 특히 열망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욕구와 선의 인과관계가 중요한 듯하다.
“[정리9]의 주석에서 우리가 밝혔듯이 우리는 사물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욕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욕구하는 사물을 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혐오하는 사물을 악이라고 부른다.”

※다시 [정리9]의 주석으로 가보면,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어떤 것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전반부의 밑줄 표현(어떤 대상이 선이기에 욕구하게 되는 것)은 목적론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을 떠올리게 한다. 곧 ‘신은 곧 선이기 때문에, 신이 창조한 이 세계가 좋은 것(‘창세기’에서 세상을 창조한 신이 보기에 ‘좋더라’하는 입장)’이라는 입장과 유사해보인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적인 관점을 비판하고 내재론적인 관점(후반부 밑줄)으로 돌아와 ‘우리가 어떤 것을 욕구하기 때문에 이 어떤 것이 선이다’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이해된다. 다시 말하면 이 문장은 ‘목적론적 관점’과 ‘내재론적 관점’의 대립구도를 아우르는 말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제 [정리39]를 다시 이해해본다.
: 우리는 우리가 증오하는 대상에 대한 증오가 클수록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에게 더 큰 악을 행하려고 하는 본성을 갖는다. 다만 이 행위를 통제하는 힘은 이 일로 인해 자신에게 보다 큰 악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정리39]의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이 두려움을 ‘소심’이라고 언급한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 의해 어떤 것이 유용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데,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바라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것을 바라도록 하는 감정은 ‘소심’이라 부른다.”(195)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이 “두려워하는 악이 치욕인 경우, 이 소심을 ‘수치’라고 부른다.”(195) 역으로 말하면 우리가 어떤 행위를 했을 때 행위의 결과를 따져보고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 가를 들여다보고 그것이 ‘소심’과 ‘수치’라면 그 행동(특히 타인에게 악을 행하려는 행동)을 우리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는 말로도 이해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수치’를 느끼면서까지 타인에게 어떤 악을 행하고, 그 후 폭풍을 개의치 않는다면, 우리는 타인들로부터 ‘수치심도 없는’인간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이것이 내게 선인지 악인지, 혹은 내게 쓸모가 있는 행위인지 아닌지를 우리의 ‘감정’으로 판단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이를 사랑하는 자가 같은 법칙으로 사랑하는 대상에게 선을 베풀려고 하는 본성과 행동의 통제에 대한 원리를 이해해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