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와 후기] 11/28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7, 8, 9장

작성자
bomi
작성일
2020-11-24 14:49
조회
67
2020/11/28 토요일 저녁 7시30분에는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7, 8, 9장을 공부합니다.


[지난 세미나(11/14) 후기]

<근황 토크>

맥문동: 새로운 책을 편집했다. 제목은 『개념 무기들』이다. 들뢰즈의 실천철학에 관한 책이다.

구기자: 도서전들이 있었고, 『좀비학』『폭력의 진부함』 『페미니즘의 투쟁』 등 여러 권의 책을 내느라 한 두 달간 굉장히 바빴다. 최근에 미국 대선도 있었고, 세계적인 코로나 확산세 등 세계적 정황들도 바쁘고 점점 심각한 상황이 되어서 정신없이 시간이 흐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동초: 제주도 바닷가에 굉장히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바닷가에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작은 텐트를 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느낌이 각자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광대나물: 정동에 대해 공부하려고 세미나를 시작했다. 한 달 후부터는 역사비판 세미나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다.

가지바위솔: 인권운동 사랑방이 지금 후원을 모으는 일을 하고 있다. 인권운동 사랑방 홈페이지에 들어와 주고 관심도 가져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코로나 관련 강좌를 3개나 하고 있다. 모두 조금씩 다른 관점에서 코로나 19를 바라보는데 또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게 흥미롭기도 하다.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의 그림을 그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책 읽고 공부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12월부터는 정말 놀기만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죽절초: 『개념 무기들』이라는 책 제목이 흥미롭다. 개념을 무기화한다는 생각을 잘하지 않는데, 제목을 보았을 때 무척 기대가 된다.

<토론>

오늘 2부 역사적 자본주의, 역사적 자연이라는 쳅터는 맑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과 과잉생산이라는 개념을 더 확장시키고 또 반박하는 챕터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생태잉여가 저하되는 경향. 자본이 자연을 자본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한계에 부딪히는 과정이 나오고, 그게 바로 자본주의 축적의 위기라는 설명을 하고, 또 프런티어를 어떻게 전유하는지를 다루는 내용도 등장한다. 내용이 방대해서 꾀기가 쉽지는 않았다.

처음이니까 전체적인 질문을 먼저 한 번 던져보겠다. 어떻게 주장이 전개될지 아직 예측이 안되지만, 자본과 권력의 입장에서 이 책이 쓰였다는 오해도 하게 된다. 그런 느낌을 저만 받는지는 모르겠다. 초반부는 자본 권력의 위기 탈출 방식으로 '전유'라는 것이 많이 등장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오해하게 하는 원인인 것 같기도 하다.

보통 착취라고 하면 생산관계에서 자본의 노동 전유라는 개념이 등장을 한다. 전유, 자본의 입장에서는 거저먹기 일 텐데, 전유라는 개념이 신기하고 생소하면서도 기대가 된다. 이전의 방식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유'는 맑스의 텍스트에서도 굉장히 많이 등장을 한다. 맑스는 수탈이라고 표현을 한다. 착취와 수탈, 이렇게 이분화된 방식으로 자본이 자신을 뿔려나가는 걸 볼 수 있는데, 맑스가 자본론을 쓰면서 이 수탈의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의 논리 전개의 외부로 밀어 넣는 경향이 있었다. 왜냐면 맑스는 직접적으로 행사되는 폭력에 의해서 축적해나가는 측면보다는 교환이라고 하는 매개를 거쳐서 마치 정당한 교환처럼 보이는 교환 관계 속에서 축적이 이뤄져 나가는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교적 수탈이 적개 서술이 되고, 서술할 때도 대자본에 대한 중소자본의 수탈 등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다고 자본론 전체에서 자연에 대한 수탈이 완전히 삭제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식민지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꽤 자세히 서술이 돼 있고, 시초 축적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꾀 상세히 서술되었는데, 어쨌든 수탈(전유)이 자본론 전체의 핵심 지대는 아니다.

제이슨 무어는 맑스의 서술에서는 상대적으로 구석에 놓인 것(수탈, 전유)을 꺼내서 자본 축적의 결정적인 지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어의 관점이 자본의 관점이라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맑스는 자본이 축적해가는 것을 서술해가면서 자본에 대한 비판의 관점에서 착취와 수탈을 이야기하는데 그 측면에서는 제이슨 무어도 똑같이 이중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루어져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네그리나 하트 같은 경우는 계급투쟁을 중요한 분석 대상이자 동력으로 바라보는 것에 비해 제이슨 무어가 그 부분을 굉장히 소홀히 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자본의 운동을 마치 자본 자신의 운동인 것처럼 서술하는 부분도 많다. 노동, 동물 미생물 식물 등 지질학적 차원 이런 것들이 자본의 전유 활동에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대항하고 자기 변화를 시도하고 생존을 추구하고 그런 것들이 있을 텐데 제이슨 무어가 이를 크게 관심대상으로는 삼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자본의 자기 운동을 저지해 나가거나 그것을 새롭게 재구성해나가려고 하는 존재들에 대한 세심한 분석을 하지 않는 점이 제이슨 무어의 한계 혹은 약점인 것 같다. 그럼에도 핵심적인 측면은 맑스에 대한 정통적 분석이 빠트리고 있는 지점인 폭력, 전유, 비임금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제이슨 무어의 이러한 기여 부분을 놓치지 않고 읽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을 한다.

관련해서 159쪽의 각주가 떠올랐다. 각주를 보면 동물을 유동자본으로 이야기를 한다. 일본의 반빈곤 활동가를 보면서 인간과 동물의 공동투쟁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책이 있다. 그 관점이 가능하려면 자본의 운동을 저지하는 힘이라고 하는 것을, 인간과 동물의 분투를 설득력이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이러하게 (책의 각주에서처럼) 자본이 동물을 비일꾼으로 지정한다는 (점을 부각) 했을 때 자본의 움직임을 불가항력적으로 여겨지게 하는 효과가 있고, 그럼 이 부분을 제이슨 무어는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할지 의문이다.

무어같은 경우는 노동계급이라고 하는 것을 우선 자본화 속에 있는 집단으로 이해한다. 무어의 관점에서는 우선 노동계급을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 임금관계를 맺고 있는 집단으로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래야만 착취와 전유가 구분되며 임금관계 바깥에서 무상으로 수탈당하는 고유한 위치를 도드라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관계로 착취하는 것에도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노동으로 간주되지 않으면서 무상으로 전유되는 활동은 노동력 상품의 저렴함의 직접적인 대상이라고 볼 수는 없고 바깥에서 (비로소) 자본의 주체형태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의 기원은 헤겔이 쓴 파우퍼 Pauper(극빈자)인데 이는 가난하다는 의미다. 주로 무산계급. 프롤레타리아트로 번역한다. 네그리도 가난함이라는 것을 부각한다. 가난한 자들과 노동하는 자들은 뉘앙스가 다르다. 어쨌건 가진 것이 없는 존재로 배재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로 쓸 수 있는 것인데 제이슨 무어는 노동 계급이라고 하는 것 속에 식물 미생물 이런 걸 집어넣을 마음은 없다고 각주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달라 코스타는 여성을 특별한 의미의 노동계급이라고 부른다. 노동 계급 중에서도 특수한 위치에 있고 배분받고 그런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다중'이라는 것도 훨씬 넓은 의미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염두에 두고 쓰는 것이다.

'동물권 직접행동 DxE'가 양계장에서 닭을 치러 나가는 차를 막은 일이 있었다. 이때 참여한 3명의 활동가가 기소를 당해서 손배소송에서 300만 원씩 벌금이 부과됐다. 이번 항소심에서도 일심에서처럼 활동가들이 변론할 때 어떻게 동물들이 학대당하고 있는지 동영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여러 감동적인 걸 했다. 기사 끝에 1심 판사의 말이 인용되는데 동물을 식용으로 사용한다거나 그런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이 판결문에 담겼다고 한다. 이 판결문이 동물이라고 하는 존재를 나름대로의 생명권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서술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되어 있었다. 법과 판결문의 간극을 판사가 인정한 샘이다. 일방적으로 동물을 대상화하고 생명 존엄성을 해치는 인류사회의 관행을 볼 수 있는데, 점점 동물에 대한 관점이 바뀌어나가면 여러 생각을 할 수 있고 다른 판단이 내려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되게 오래됐다 관계로서 보지 않는 그런 태도가 너무나 익숙하다는 생각이 든다. 습관으로 굳어져 있다. 인간중심주의가 나쁜 게 아니라 대상화하면서 이분화하는 태도와 습관이 굳어지는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심각하다.

이번 장에서 제이슨 무어는 노동과 구별하여 무상 '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노동은 labor work를 일로 한 것 같다. 모든 구절에 적용되긴 힘들 것 같긴 하다. 엥겔스가 work와 labor를 구분했다. labor는 교환가치로 평가되는 작업이다. 이 책에서는 앵겔스의 가닥과 똑같지는 않지만 흐름에서는 상통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그걸 살리려 했다는 생각이 든다. 역자분이 물리학을 전공해서 '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면도 있는 것 같다.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에서는 저렴한 것들의 의미를 근본적으로는 탈 가치화, 즉 가치 바깥으로 내민다라고 하는 의미에서 규정을 한다. 보통 저렴하다고 할 때는 이미 가치화 속에서 높은 가치가 아니라 낮은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제임스 무어는 가치 영역 바깥으로의 추방이라는 의미를 우선해서 쓰고, 그래서 사실 우리말의 저렴함이란 말이 딱 맞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전체에서 보면 자연을 자본화한다고 했을 때, 자본화하지 못하는 것, 그것을 표현할 때 저렴함이라는 말을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노동력이 싸진다고 표현할 때는 이렇게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총임금, 지구 상에서 자본이 사용하는 전체 임금이 점점 싸진다고도 쓸 수 있는데, 정규직과 비정규직, 실업자로 나뉘고 그래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절대 액수에서는 과거에 비해서 높아져가는 경향을 보여왔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그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비정규직 임금관계 바깥에 있는 소득이 있다. 노동이 저렴하다는 표현을 구분해서 독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 세계 전체에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는 힘들다.

169페이지에 두 번째 단락. 착취와 전유를 구분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데카르트의 이항 구조랑 어떤 차별성을 가지는가 궁금하다. 이 책은 이항 구조를 극복하고 있는가?

최근에 한국판 뉴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봤다. 환경정책의 구체적인 과제로 '데이터 댐'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정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공공데이터를 모아서 기업에게 주겠다는 등 끔찍한 소리가 나온다. 데이터 댐을 미국의 후버댐에 비교하고 있다. 이 책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후버댐 또한 노동력뿐 아니라 무수한 객체들의 일을 전유, 강탈한 결과였다. 후버댐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물이 일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고, 뿐만 아니라 그 물, 강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의 일도 바뀌고, 또 파괴되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후버댐의 공적을 이야기하며 무수한 생명 객체에 관한 쏙 빠져있고 얼마나 많은 일자리(노동자)가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데이터 댐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터 댐을 통해 데이터를 가공하는 일자리(노동자)가 많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 데이터들이 무엇이고 그 데이터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에 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후버댐이 물과 강과 수많은 생명들이 마음껏 이용해도 되는 '공짜'라고 여겼던 것처럼 데이터 댐은 우리의 삶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데이터를 마음껏 이용해도 되는 '공짜'라고 여긴다.

169쪽의 말을 추가적으로 사용하면, "자본화는 데카르트의 이항 구조를 초월한다. 무상 일/에너지의 전유도 그렇다. 변증법에 힘입어 우리는 인류와 자연이라는 환원론적 언어 너머를 볼 수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경계선이 자연과 인류 사이에 있지 않기 때문인데, 그것은 자본화와 생명의 그물 사이에 있다. 자본주의의 오만은, 자본주의 세력권 안의 미상품화된 생명활동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그 활동에서 자신의 생혈을 끌어내는 한편으로 상품체계 안의 생명활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자본이라고 하는 것은 오소독스한 맑스주의에서는 인간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다. 물의 일이라거나 이런 걸 착취한다는 말은 적게 하고 주된 관심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인간 노동의 일을 착취한다. 맑스주의는 인류와 자연이라고 하는 것에서 인류를 자본화하는 것으로 보아왔다. 하지만 무어가 보기에는 자연이라는 것도 전유의 메커니즘 속에서 자본에게 이용당하고 있기 때문에 세심하게 바라보면 인간과 자연 사이에 적용되고 있던 이항 구조에서는 일단 벗어나게 되고 그러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따라올 수 있다.

제이슨 무어는 인류와 자연이라는 이항구조가 아니라 경계선이 있다면 자본화와 생명의 그물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생명의 그물이 자본화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오만은 '자연'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 후버댐도 그렇고 데이터 댐도 마찬가지다. 정보화된 지식. 상품으로 만들어진 지식 그것이 싼 가격이냐 비싼 가격이냐와 무관하게 우리의 지식 활동이 정보로 되고 정보가 다시 데이터로 되는 과정에서는, 즉 인간의 지각활동이 정보로 되는 순간 선별이 이루어진다. 수많은 감각 내용들 중에 행동의 필요에 의해 선별된 것이 정보인 것이고 그 정보가 측정 가능한 것으로 격자화 되어서 포장된 것을 데이터라고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터를 쭉 소급해서 그것의 원천으로 내려가 보면 인간, 세게 내 존재들의 삶이 있다. 데이터를 이용하는 자본의 경우는 요 부분은 괄호 처 버리고 그냥 주워진 것으로 공짜로 받아들이게 된다.

공공데이터를 자본에게 준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코로나 통제 과정에서도 공공데이터들이 굉장히 많이 활용됐다. K방역의 핵심이 공적데이터와 비공적데이터를 국가권력이 자유롭게 활용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서구사회는 그에 대한 저항이 굉장히 심했다.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것들을 국가권력을 통해서 강제로 내놓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고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기록들 이런 것들을 전부 국가기구 방역당국에서 임의로 활용해서 동선을 만든다. 이것이 실제로 방역에 성과를 보긴 했지만 폭력적인 부분이 있다. 국가기관은 효율을 드러내면 칭찬을 받기 때문에 뒤돌아 볼 여유 없이 이미 그 행위를 하고 있고, 지금은 국민도 그 정도는 감례 하겠다고 해서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정보, 데이터가 중앙에 집중이 되어가고 축적이 됐는데 여기에 만약 자본가들이 들어가서 이 축적된 데이터들을 입맛에 맡게 마사지를 해서 가져갈 수 있게 되면, 이는 자본이 우리의 삶 활동을 구미에 맞게 요리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미 상품화된 생명을 탈가치화시킨다. 무상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공짜가 아니게 된 생명 활동에는 높게 가치를 부여해서 이중화시킨다. 탈가치화와 가치화.

책이 밀도가 높아서 한 번에 쉽게 읽히는 않았다. 자꾸 읽은 부분을 돌이켜 보고 끊어서 읽으며 곱씹어야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통찰들을 주는 부분은 있는 것 같다. 특히 생태와 자본주의에 대해. 자본주의가 역사적 자연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를 얘기하는 것들이 어쨌든 기존의 흔히 말하는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160쪽 보면 밑에서 여덟 번째 줄이 눈에 띄었다. "축적의 한 장기파동의 소멸과 다른 한 장기파동의 발흥을 특징짓는 시대는 '새로운' 제국주의와 '새로운' 과학혁명이 수반되는 경향이 있다. 이 시기에, 자본주의적 행위자와 영토주의적 행위자는 구체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저렴한 자연을 찾아내고 확보하여 전유하고자 한다." 영토주의적 행위자와 자본주의적 행위자를 분리하고 있는 부분이 궁금하고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리기(조반니 이리기)라는 사람이 있는데 '장기 20세기'라는 책을 쓴 사람이다. 이리기는 축적의 장기파동 이야기를 하면서 14,16세기 사이부터 20세기까지 긴 시간 동안 4번 정도의 커다란 파동이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헤게모니로 구분을 한다. 이탈리아 제네바에서 있었던 것이 포르투갈로 갔다가 스페인으로 가고 그다음 네덜라드로 가고 영국 그다음 미국으로 가는 헤게모니의 교체 국면을 가지고 파동적 시기 국면을 나눈다. 각 헤게모니 시기마다 두 개의 소국면이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적 행위자가 우세할 때와 영토주의적 행위자가 우세할 때가 구분이 된다고 본다. 그러면서 이 둘 중에서 자본주의적 행위자가 우세할 때 교체가 임박해지는 하양기로 내려간다고 본다. 금융 행위자가 우세해지면 국면이 하양기로 접어든다고 보는 것이다. 영토주의적 행위자는 식민주의라거나 제국주의를 생각하면 금방 떠오른다. 폭력으로 침략하고 물자를 강탈하는 것을 말하고 자본주의적 행위자는 시장매커니즘으로 돈을 벌어가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 두 행위자 사이에 힘의 우열관계를 중시하면서 각 파동의 중요한 국면에서 두 행위자의 우세가 어떻게 교체되어가는지에 이리기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여기서 제이슨 무어는 장기파동의 발흥, 솟구쳐 오름의 시대를 보면 새로운 제국주의와 새로운 과학혁명이 수반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제국주의라고 해도 다 같은 제국주의는 아니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다르다. 자본이나 상품을 수출하는 경우는 시장행위가 가운데 놓이는데 원료 수입은 강탈인 경우가 많다. 제국주의가 역사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진다는 것. 영국 제국주의 미국 제국주의 등 새로운 각기 다른 제국주의가 등장한다는 것. 제이슨무어는 과학 혁명. 지성의 발전이라는 것도 자본 축적의 파동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데카르트는 17세기 전후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데 중요한 철학혁명을 했다. 아리기가 파동을 그려내는 데 관심이 있어서 그걸 논증하는데 시간을 다 바쳤다면 무어는 파동의 교체에서 아리기가 말한 지 않은 지점이 하나 있는데 그게 저렴한 자연을 찾아내는 것이고 그것이 그러한 교체의 새로운 발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2부의 제목이기도 한 '역자적 자본주의 ' '역사적 자연'의 설명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하다.

역사라는 게 제이슨 무어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일단 제이슨 무어는 자연 일반이라는 것은 없다고 본다. 자연 일반이라는 것을 상정하는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지속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있다. 자연은 영원해 라고 말해 버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인간 바깥의 거대한 존재를 상정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으로부터 사람은 자연의 일반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것을 제이슨 무어의 언어로 보면 생명의 그물이라는 것이 있어서 작동해 왔고, 생명의 그물의 실제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장기적인 영원이라고 말하는 게 적합해 보이는 그 실제성과는 별도로 시간의 또 다른 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럴 때 역사라는 게 등장한다. 우리가 영원이라고 부르거나 자연 일반이라고 부르거나 너무 커서 그것의 변동을 말하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그것에 중층성이 있다고 무어는 말하는 것이다. 각각의 층들이 각자의 문제에 대해서 동등하게 창조되는 것은 아니다. 무어가 개입하는 논쟁 중 하나가 인류세냐 자본세냐 인데, 그 굉장히 많은 세들 끝에 등장한 것을 사람들이 인류세라고 부르는데 그것보다는 자본세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말한다. 영원이라고 부르는 시간에 세들이 층을 지어서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와는 다른 세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대가 어떤 층에 해당되는 건지 살피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게 우리가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위기를 보는 데에도 중요하다.

동일한 주어진 시간이 있지만 우리가 만들어내는 역사는 다를 수 있는데, 거칠게 예를 들면 220년에 대해서 제가 만들어내는 역사적 시간과 다른 누군가가 만드는 역사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시간이 중층적이라고 하는 것일까?

좀 더 미시적으로 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시간이라는 건 생명의 활동에 붙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개개의 생명은 각각 다른 시간이다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무어는 그거보다는 좀 더 거시적으로 그런 시간들이 특정한 역사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자본주의라는 것은 이 우주 속에 여러 다양한 관계들이 맺는 시간 속에 있는 거고 미시적 존재들이 압도해 들어오는 거기에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필요하다.

무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 자연 일반을 부수어서 자연을 역사화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넘어서야 할 것이 있다. 수십억 년 동안 지속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자연이라고 개념화했던 것. 그래서 인간의 시간만 시간이라고 보는 인간 자연의 이분에서 나타나는데, 이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 비인간의 시간을 같이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간적으로 프런티어를 확장하는 것이 기술혁명과 기술혁신과 동시적으로 작동한다. 다른 시간대를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적 활동이 있고 그것과 함께 구성된 자연이 있다. 단순화시켜 보면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지만 봉건적인 관계라든지, 자본주의의 변천에서 다른 시간데의 양식이 같이 있고, 그럴 때 무어는 역사적 자연이라는 것도 균질하지 않고 자본주의와 함께 살아남으려는 과정에서 자신의 변화를 꾀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이게 자본주의를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우연성들이 중층적으로 작동을 하는 것. 고정된 생산양식이 필연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들, 그러니까 균질화되는 것들이 아니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

그냥 우연적으로 다르게 살고 있다는 의미를 말한 것은 아니고 자본이 자신의 축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어떤 혁신을 이뤄내고 그 모습을 바꾸어 가는데 그 바꾸어가는 게 뭔가 세계 생태체제가 동시대성을 가지고 변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중층성을 이해한 것 같다.

자본주의가 안 올 수도 있었다고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본원적 축적도 우연적이다. 균질화된 것들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무어가 그런 맥락인지는 잘 모르겠다.

무어는 본원적 축적이 자본주의를 낳고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함께 작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셈이다. 그것이 필연적 과정이냐 우연적 과정이냐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다.

세계 생태혁명에 대한 무어의 그림은 무엇일까?

자본이 축적 위기를 타파해 나가는 혁명이다. 세계생태혁명, 즉 새로운 자본주의의 발흥에는 새로운 제국주의 새로운 과학 이런 것들이 있다고 했는데 새로운 제국주의가 영향력을 형성한다거나 그럴 때마다 생태 자체가 혁명적으로 변화된다고 보는 것이다. 좀 전의 시간문제, 자연 일반이 아니라 역사적 자연이다. 자연은 부동의 것으로 있지 않고 그 내부의 다양한 중층적 요소들의 상호작용들에 의해서 계속 변화해 나간다는 것이고, 자연 그 자체가 역사적이라는 것이다. 생태혁명이라는 것은 바로 그 제국주의적 행동이라거나 그런 것들이 시간 속에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통해 자본이 위기를 돌파해 나가는 것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세계생태혁명을 이야기할 때 들뢰즈의 개념인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를 떠올렸는데, 연결시켜서 이해할 수 있을까?

영토화나 탈영토화라고 하는 것이 들뢰즈에게서 사용되는 방식은 존재론적 개념으로써다. 실제, 실제라고 하면 들뢰즈에게서는 차이들인데 이 차이들이 크게 보면 운동하는 거고 내포적인 측면에서 보면 자기의 힘을 구현해 나가는 방식으로써 설명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영토화나 탈영토화가 존재론적으로 서술되는 것을 무어의 논의에 바로 적용하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들뢰즈가 사회적 거시적 현상을 사용할 때도 이것들을 가져와서 사용할 때가 있다. 영토화한다는 것은 국가체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국가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영토화하는 새력이라고 볼 수 있다. 탈영토화는 세력 영토들을 건너뛰어서 이용한다. 자본은 국가에 비하면 탈영토화적인 성격을 갖는데 들뢰즈는 그 탈영토화하는 경향이 절대적이지 못하고 상대적이라고 본다. 자본이 계속 탈영토화하는 경향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식민지 침탈, 그러니까 동인도 회사 같은 것처럼 그런 경우는 탈영토화를 멈추고 재영토화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본의 탈영토화하는 성격은 상대적이다. 이처럼 영토화, 탈영토화의 문제를 사회 문제에 적용하는 경우도 발견할 수 있으므로 무어가 다루는 현상에 생각해 보고 검증해 보는 것은 유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리기 같은 경우는 자본주의 새력하고 영토주의 새력이 교체해 가는 과정에서 영토주의는 영토화하는 것으로, 자본은 탈영토화의 힘으로 쉽게 나눠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세계생태 혁명 자체는 역사적 국면이 때로는 영토화 할 수 있고 혹은 재영토화할 수도 있으므로 일대일 대응은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프런티어를 말하는 방식이 영토적으로 상상이 되고, 지리적 재구성을 한 게 사실이고 자본주의가 자기의 축적 위기를 모면하는 방식에서 혁명이 일어나는데 그것 자체가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힘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것이 그것 없이는 안된다는 것으로 생각한다. 전유 없는 착취란 불가능하다는 게 무어가 말하는 방식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그걸 아우르는 철학적 개념으로 영토화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착취 관계가 재생산될 수 있는 전유 관계가 이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를 보는 핵심이라 생각한다.

페미니즘과 자율주의 운동에서 비임금 문제 이것이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제기되었었다. 마리아 로사 달라코스따 이런 사람들이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무상 수탈 문제를 열정적으로 제기했었고 그것을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지불 운동도 했다. 지금 제이슨 무어는 그러한 역사적 선 연구에서 굉장히 큰 아이디어를 얻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 운동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원료 식량 에너지 여기까지 확대하는데 이러한 에너지 수탈 문제는 해리 클리버라는 사람이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여기서 상세하게 파헤친 적이 있다. 무어가 그 책을 인용하진 않던데, 석유와 쌀, 원료 등을 가지고 깊이 파고 들어서 썼기 때문에 제이슨 무어가 읽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전의 역사적 연구들을 종합하면서 전유의 중요성 전유를 맑스주의 담론에서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데에서 이 책,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는 독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247쪽 보면 기술과 테크닉스를 구분한다. 테크놀로지와 테크닉스를 구분했는데 예를 들어 이런 용법은 들뢰즈가 메커니즘 하고 머신을 구분해서 메커니즘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기계 체제로 보고 머신은 존재들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으로 구분했다. 생태론 중에서 기술발전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보는 움직임이나 경향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유나바머 같은 경우에 우편 폭탄을 과학 기술자들에게 배달해서 그걸 열면 다치거나 죽게 만들어서 과학 기술자들이 과학 기술 연구를 중단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유나바머는 수학교사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유나바머가 중지시켜야 한다고 한 과학 기술은 대규모 과학기술이었다. 이런 것들을 중단하라고 했던 것이다. 고용되어서 일하는 지식인들을 공격한 것이었다. 테크닉스를 기술과 구분했을 때 테크닉스는 그 기술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테크닉스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다. 맑스 사례를 들어보면 자본론 15장에서 대공업이라 하는 챕터에서 자본이 기술을 채용하는 이유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찌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노동자들이 저항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원시적인 신체기계를 활용해서 하는 게 충분할 때는 자본가들이 기술을 도입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자기 몸을 비싸게 팔려고 할 때는 기술 발전에 투자할 것이다. 기술 발전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윤과 맺는 관계를 보는 것이다. 기술이 이윤에 도움이 되면 채용, 그렇지 않으면 버리는 테크닉스. 이렇게 관계를 보는 것이 테크닉스다.

자본주의의 문제가 너무 적은 자본화였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 많은 경우 자본화되지 않은 것을 자본화시켜 나가면 자본주의가 극복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무어 생각에는 초기부터 이미 너무 많은 자본화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맑스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다. 마르크스는 근데 자본주의를 제 발로 선 자본주의라고 부르고 초기는 제 발로 서지 못한 자본주의라고 부르면서 제 발로 서려면 자본화가 많이 진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제이슨 무어는 초기 자본주의부터 너무 많은 자본주의고 진정한 자본주의는 초기부터 시작되는데 그때부터 저렴한 것들을 엄청나게 수탈하고 그것을 위한 과학 기술, 배의 건조술, 지도 작성법 이런 과학 기술을 엄청 발전시키고 그럼으로써 자본화가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던 시기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맑스와 자본주의 역사관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럼 왜 너무 많은 자본화가 문제냐 하면은 금속 같은 걸 처음엔 채굴하기가 쉽지만 경쟁적으로 금을 채굴하다 보니 나중엔 깊이 파야하고 모험을 해야만 할 때, 나중엔 그 금을 파는 행위가(노동력이) 비싸진다. "아래로 줄곧 아래로" 자본화를 향한 움직임.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의 양대 발전 방향이 하나는 유전자를 향하고 다른 하나는 우주로 향한다. 우리의 통상적 일상 세계를 넘어서는 자본화의 움직임이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고 보고 무어의 경우에는 전유, 강제로 빼앗는 것 수탈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최대 강점이라고 말하고, 예컨대 원료 같은 경우 채광 채굴을 들 수 있다. "가로지르며 통과" 이런 표현들은 지질학적 이동을 통해 아메리카 등을 전유해온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마무리 발언>

다중지성의 정원 만들고 공부를 쭉 하면서 세미나에 참여하는 방식이 다양할 수 있을 텐데, 작년부터 든 생각은, 저는 지금 10년 쭉 세미나를 해오면서 새로운 분들이 계시고, 지금은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마음이 99퍼센트 정도 됩니다. 오늘도 좋은 이야기 좋은 질문 또 조정환 선생님의 강의와 비슷한 답변까지 모두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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