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1의 서문과 제1장

작성자
no-mad
작성일
2021-04-21 11:24
조회
439
프랑스어판 서문
* 이 연구서는 영화사가 아니다. 이것은 분류학이며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에 대한 시도이다.
* 영화의 위대한 작가들은 화가나 건축가, 음악가들뿐마 아니라 사상가들에 비견될 만하다. 그들은 개념 대신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갖고 사유한다.
* 영화의 역사는 기나긴 순교록/희생자명부martyrologe이다.
* 영화는 대체 불가능한 자율적 형식들의 예술사와 사상사의 일부이다.

영어판 서문
* 이 책은 어떤 영화적 개념들을 분리해내는 작업에 착수한다.
* 우리가 영화적 개념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지의 유형들과 그 유형들 각각에 상응하는 기호들이다.
* 시간이 몽타주(편집)에 의존하고 운동-이미지들로부터 도출되어 나오는 한, 시간은 간접적인 재현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 戰後에 직접적인 시간-이미지가 형성되고 영화에 부과될 수 있었다. (철학사에서도 오래 전에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운동-시간 관계에 하나의 역전이 일어났다. 즉 더 이상 시간이 운동에 의해 관계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편차들이 시간에 의존한다. 시간의 간접적인 재현이 운동으로부터 도출되는 대신에, 직접적인 시간-이미지가 운동으로부터 도출되고 직접적인 시간-이미지가 거짓 운동을 지배한다.
* 모든 것은 감각-운동 도식이 무너지면서 갑작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지각, 감정, 행동을 연결시켰던 이 도식은 일반적인 이미지 체제가 변화하고서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
* 영국 철학이 관계의 철학을 만들어냈던 것과 같이 히치콕은 관계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그는 고전 영화와 현대 영화의 접합부에 위치할 것이다.
* 모든 면에서, 영화의 위대한 감독들을 화가, 건축가 심지어 음악가와 비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은 또한 사상가들과도 비교되어야만 한다.

1. 운동에 관한 논제들 – 베르그손에 관한 첫 번째 주석

1. 첫 번째 논제: 운동과 순간

* 베르그손의 운동에 관한 첫 번째 논제에 따르면, “운동은 지나간 공간과는 다르다. 지나간[주파한] 공간은 과거이고 운동은 현재이다. 이는 가로지르는 행위인 것이다. 지나간 공간은 나누어질 수 있고 심지어 무한히 분할할 수 있는 반면 운동은 나누어질 수 없거나 또는 매번 나뉠 때마다 그 성질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즉 성질의 변화 없이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이는 이미 더 복잡한 관념을 전제한다. 즉 지나간 공간들은 모두 단 하나의, 동일한 균질적인 공간에 속한 반면 운동들은 이질적이고 환원 불가능하다.” 9

* 첫 번째 논제의 또다른 언표: “공간 속의 위치들이나 시간 속의 순간들, 즉 부동적 절편들[단면들, coupes=sections]을 갖고 운동을 재구성할 수 없다.

* 영화는 초당 24개의 이미지들이라는 부동적 단면(절편)들로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진소(포토그램들)이 아니라 운동이 덧붙거나 추가되지 않은 (하나의[어떤]) 매개적[중간적] 이미지(une image moyenne=an intermediate image)이다. 반대로 운동은 직접 주어진 것으로(comme donnée immédiate. = as immediate given.) 그 매개적[중간적] 이미지에 속하게 된다. 베르그손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참조할 것.
(결국 들뢰즈가 주장하려는 것은) 영화는 우리에게 운동이 부가된 이미지를 주는 것이 아니다, 직접적인 [하나의] 운동-이미지(une image-mouvement = a movement-image)를 준다. 영화가 주는 것은 단면이지만 그것은 움직이는 단면/절편이지 ‘부동적 단면+추상적 운동이 아닌 것이다.

* 이 절의 마지막 문단은 들뢰즈의 친절한(?) 요약: 베르그손의 운동에 관한 첫 번째 테제는 훨씬 복잡한 것. (1) 지나간(주파한) 공간(l'espace parcouru = the space covered)과 함께 재구성하려는, 즉 순간적인 부동적 단면(절편)들과 추상적 시간을 추가하여 재구성하려는 시도들 전체에 대한 비판. (2) 환영적인 시도들 중의 하나라는 영화에 대한 비판. 그러나 또한 ?물질과 기억?의 테제, 즉 동적인 단면, 시간적인 면(?)/쇼트(les coupes mobiles, les plans temporels = mobile sections, temporal planes)이 있다. 들뢰즈는 이 테제가 영화의 미래이자 본질이라고 주장. 14

2. 두 번째 논제 : 특권적 순간들과 임의의 순간

* ?창조적 진화?에서 제시된 두 번째 논제는, 운동을 상이한 두 가지 환영으로 구분 짓는다. 오류는 항상 운동을 순간들이나 위치들로 재구성하는 데 있다.
(1) 고대의 방식 : 고대에 운동은 관념적인 요소들intelligibles, 즉 영원불변의 형상Formes=Forms이나 이데아Idées=Idea에 준거했다. 운동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다듬어진 이행(passgae=transition)이다. 이는 포즈poses나 특권적 순간들(instants privilégiés = privileged instants)의 질서이다. (?창조적 진화? 佛330/韓485-486 인용 검토) 14-15

(2) 근대의 방식 : 운동을 (특권적 순간들이 아닌) 임의의 순간(instant quelconque=any-instant-whatever)과 연관시킨다. 운동을 재구성한다 해도 그것은 더 이상 형상적인 초월적[선험적]formal transcendental 요소들(즉 poses)이 아니라 내재적인 물질적immanent material 요소들(즉 coupes=sections)로 재구성한다. “근대과학은 무엇보다도 시간을 독립적인 변수로 보고자 하는 열망에 의해 정의돼야 한다.” (?창조적 진화?, 佛335/韓493) 15

* 영화란 임의의 순간과 관련하여(en fonction du moment quelconque/any-instant-whatever), 즉 연속성의 인상을 부여하기 위해 선택한 등거리의 순간들에 의거해서 재생산하는 체계이다.

* 영화는 특권적 순간들에 의해 스스로를 유지하는 것 같다. 에이젠슈테인/마레이와 머이브리지의 특권화된 순간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는 운동에 속하는 두드러지거나 독특한(singuliers/singular) 점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17

* 임의의 순간은 규칙적이거나 독특한 것일 수도 있고, 평범하거나 또는 비범한 것일 수도 있다. 18

* 임의의 순간이란 다른 순간으로부터 등거리에 있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화란 운동을 임의의 순간과 연관시킴으로써 재생산해내는 체계라고 정의한다. 18

* Bergson은 영화가 운동의 근대적 개념에 속한다고 했다. 19 (여기서 그는 두 길 사이에서 머뭇거림.)
(1) 첫 번째 논제. 영원한 포즈들이나 부동적 단면들을 갖고 운동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운동을 놓치게 된다. 우리는 전부가 주어져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운동은 전체가 주어지지 않거나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은 단지 영원성의 이미지일 뿐이거나 또는 그 집합의 귀결이 될 뿐이다.(?창조적 진화? 353) 이는 실제 운동과는 다르다. 20
(2) 근대적modern 개념과 과학은 또 다른 철학을 요구한다. 운동을 임의의 순간들과 연관시킬 때 우리는 이 순간들 중 어느 것에서도 새로움의 생산, 즉 비범함과 독특함(유일성)의 생산을 사유할 수 있어야만 한다. 영화란 새로운 사유, 새로운 사유방식의 탄생과 형성에서 맡아야 할 역할이 있을 것이다. 베르그손의 두 번째 논제는 영화에 대한 또 하나의 관점을 가능하게 한다. 영화는 더 이상 가장 오래된 환영을 이룰 완벽한 장치가 아니라 반대로 새로운 현실을 완성시킨 기관이 될 것이다. 21

3. 세 번째 논제: 운동과 변화

* (?창조적 진화?의 세 번째 논제) 순간이 운동의 부동적 단면인 것처럼, 운동은 지속, 즉 전체 혹은 어떤 전체의 동적인 단면이다. 이는 운동이 지속 혹은 전체 안에서의 변화를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속은 계속 변화하며 변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한편으로 운동은 지속이나 전체 안에서 변화를 표현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지속’의 동일화이다. 21

* 운동이란 공간 안에서의 이동이다. 매번 공간 안에서 부분들이 이동할 때마다 전체 안에서도 질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 운동이란 어떤 잠재적인 차이를 상정하며 스스로 그것을 메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베르그손의 세 번째 논제 유추:
부동적 단면들 / 운동 = 동적인 단면으로서의 운동 / 질적인 변화
환영 실재

* Bergson : ‘전체는 주어지지도 않고 주어질 수도 없다.’(고대과학과 근대과학의 오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스스로 전체를 주어진 것이라고 상정한 것이다.) 전체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은, 전체가 열린 것이며, 그[전체] 본성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또는 새로운 것을 발생시키는 것, 다시 말해 지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지속은 거기서 자리잡을 수 있는 창조의 범위와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CE, 佛339/韓498) 매번 우리가 지속을 대면하거나 또는 지속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변화하며 또 어딘가에 열려있을 어떤 전체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을 것이다. 24

* Bergson : “무언가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시간이 기입되는 장부registre가 어딘가는 열린 채로 있다.” (CE, 佛16/韓44)

* 전체는 관계Relation라고 정의할 수 있다. 관계는 개방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영적이거나 정신적인 실존을 나타낸다. 관계들은 대상들에 속하지 않고 전체에 속해 있다. 한 집합 안의 대상들은 공간 속에서의 운동에 의해 각각의 위치를 바꾼다. 그러나 관계들에 의해 전체는 변형되거나 질적으로 변화한다. 우리는 지속 자체나 시간이 관계들로 이루어진 전체라고 말할 수 있다. 25 (?시간기계? 인용)

* 우리는 전체들을 집합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집합들은 닫혀 있다. 하나의 전체는 닫혀 있지 않다. 그것은 열려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부분들을 갖지 않는다. 왜냐면 전체란 분할의 단계마다 자신의 성질을 바꾸지 않고는 결코 분할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 전체는 하나의 불가분적 연속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CE, 佛31/韓65) 전체란 폐쇄집합이 아니다. 25

* 전체는 스스로를 창조한다. 전체는 부분들이 없는 또 다른 차원 속에서 끊임없이 창조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영적이거나 정신적이다. 25

* 집합들은 공간 속에 있고 전체나 전체들은 지속 안에 있으며, 지속 자체이다. 그 지속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인 한에서. 26 (?시간기계? 인용)

* 베르그손의 첫 번째 논제에 대응하는 두 개의 공식들: ‘부동적 단면들 + 추상적 시간’은 사실상 부동적인 단면들을 부분으로 갖는, 그리고 어느 하나의 추상적 시간에 입각해 계산된 연속적 상태들을 부분으로 갖는 폐쇄집합을 가리킨다. 반면, ‘실제적 운동 → 구체적인 지속’이란 지속하는 어느 한 전체의 열림을 가리킨다. 이때 이 전체의 운동들이란 닫힌 체계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동적인 단면들이다. 26

들뢰즈의 친절한(?) 요약:
* 세 가지 단계: (?시간기계?에서 인용)
(1) 판별될 수 있는 대상들이나 구분되는 부분들로서 정의되는 폐쇄집합들 또는 체계들.
(2) 이 대상들 사이에 성립하며 그 각각의 위치를 변경시키는 이전(移轉) 운동.
(3) 자체의 고유한 관계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적, 정신적 현실로서의 지속 또는 전체.

* 운동은 (1) 대상이나 부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2) 지속 또는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속은 질적인 변화에 의해 대상들로 분할되며, 대상들은 하여금 스스로 심화하면서 또한 그 윤곽들을 상실하며 지속 안에 결합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운동은 닫힌 체계 안의 대상들을 열린 지속에 연관시키며, 지속을 그것이 강제로 열리도록 하는 체계 안의 대상들과 연관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27 (?시간기계?에서 인용)

* 운동은 대상들 사이에서 성립되며 그 대상들을 운동이 표현하는 전체와 연관시킨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운동에 의해 전체는 대상들 안에서 분할되며 대상들은 전체 안에서 결합된다. 그리고 바로 이 두 가지(대상들과 전체) 사이에서 ‘전체’가 변화한다. 27 (?시간기계?에서 인용)

* 운동은 이 단면들 사이에서 성립되며, 대상이나 부분들을 변화하는 한 전체의 지속과 결부시킨다. 그러므로 운동은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전체의 변화를 표현하며 운동 그 자체가 지속의 동적인 단면이 된다. 27

* (?물질과 기억? 1장의 논제에 대한 이해) (1) 순간적[스냅사진]instantanées 이미지들, 즉 운동의 ‘부동적 단면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2) 시간적 지속의 동적인 단면들인 ‘운동-이미지’들이 있다. (3) 마지막으로, 운동 너머에 시간-이미지, 즉 지속-이미지와 변화-이미지, 관계-이미지, 부피-이미지 등이 있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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