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호] 니콜라예프스크블루스1ㅣ김명환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4-04-03 10:52
조회
159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니콜라예프스크블루스1

 

 

크리스마스선물

 

 

1919년 12월. 갈색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 한 대가 언덕을 넘어 바가로드츠코바마을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마차 앞쪽으로 기병 여덟, 마차 뒤쪽으로 기병 열여섯이 2열 종대로 행군하고 있었다. 수송부대가 보병이 아니라 기병인 것을 보면, 귀중한 물품의 수송마차인 듯했다. 마차가 내리막길을 벗어날 즈음 하얀 말 한 마리가 길을 막고 서있는 게 보였다. 기병소대 선임하사가 앞으로 내달았다.

“누구냐?”

비무장을 확인한 선임하사는 카이젤수염을 비비며 근엄하게 말했다. 상대는 하얀 옷을 입은 젊은 청년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미남이었다.

“야코프 이바노비치 트리피츤.”

청년이 카이젤수염을 비비며 근엄하게 말했다.

철렁! 선임하사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무르강물을 거꾸로 흐르게 만든다는 괴웅 트리피친”이 자신을 쳐다보며 정겹게 웃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야!”

다가온 기병소대장이 거칠게 소리쳤다.

“야코프 이바노비치 트리피츤…….”

선임하사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소대장은 꼼짝할 수 없었다.

“소대장님, 귀관의 부대는 포위되었습니다.”

싱글거리며 트리피츤이 정겹게 말했다.

소대장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쪽으론 아무도 없고 뒤쪽으로 멀리 언덕 위에 한 무리의 빨치산들이 보였다. 3십, 혹은 4십……. 길옆 양쪽 숲에는 옷을 벗은 나무들만 쭉쭉 뻗어 있었다.

“원하는 게 뭐요?”

소대장이 말했다.

“크리스마스선물.”

트리피츤이 짧게 대답했다.

“우리는?”

“마음대로 가도 좋습니다. 우리를 따라와도 좋습니다.”

트리피츤이 말했다.

그사이 마차와 소대원들이 다가와 있었다. 소대장은 바짝 긴장한 소대원들을 보았다. 선임하사가 연신 카이젤수염을 비비고 있었다.

상대를 쏘고 마을로 달려간다? 마을이 빨치산투성이라면? 상대를 쏘고 언덕을 돌파한다? 언덕너머가 빨치산투성이라면? 소대장은 결정할 수 없었다.

“우리를 따라올 사람들은 총과 말을 가지고 따라오고, 부대나 고향으로 갈 사람들은 총과 말을 놓고 가십시오.”

트리피츤이 말을 돌려 마을쪽으로 천천히 달려갔다. 마차가 마을쪽으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는 이미 빨치산이 몰고 있었다. 마차에는 비츠대대에 전달할 크리스마스선물과 우편물들, 탄약이 잔뜩 실려 있었다.

 

1905년 9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포츠머스강화조약’으로 한반도에서의 우월적 지위, 사할린섬 북위 50도 이남 영토, 대련과 여순 조차권, 장춘 이남 철도 부설권, 캄차카어장 조업권 등을 획득하였다.

1917년 10월. 사할린섬 북부와 니콜라예프스크가 볼셰비키에 의해 해방되었다. “니콜라예프스크 지도층 102명이 일본 천황에게 볼셰비키를 타도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1918년 8월. 일본군이 사할린섬 북부와 니콜라예프스크를 점령했다. 체포된 볼셰비키들은 살해되었다.

1919년 10월. 일본군 하바로프스크 주둔사령부와 니콜라예프스크 주둔사령부 간 통신선이 빨치산에 의해 차단되었다.

1919년 11월. 하바로프스크 인근 아나스타시요프카마을에서 “빨치산 파견대, 혁명적 농민 및 지하조직 대표 공동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사할린섬 북부와 니콜라예프스크를 해방시키기로 하고, 크루브리코바 기차역 인근 빨치산 사령관 ‘트리피츤’을 파견사령관으로 결정했다. 트리피츤이 이끄는 35명의 빨치산부대가 하바로프스크 인근을 떠났다.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이 수백 년 동안 각축을 벌였던 사할린섬은 오호츠크해와 동해와 타타르해협 사이에 있는, 석유와 천연가스와 석탄과 금속과 나무가 지천인 “천혜의 자원보고”다. 아무르강 하구에서 캄차카반도까지는 “물 반 고기 반”,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세계 최대의 어장” 캄차카어장이다. 타타르해협과 아무르강이 만나는 항구도시 니콜라예프스크에는 백군 2개 대대(대대장 비츠대령, 미드베제프대령) 2,000여 명과 일본군 1개 대대(대대장 이시카와소령) 800여 명, 중국군함 4척(강방함대 사령관 진세영장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1919년 12월. 니콜라예프스크에 주둔하던 백군은 사피이스크에 방어전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비츠대령은 자신의 대대와 미드베제프대대의 2개 중대 1,500여 명을 이끌고 사피이스크로 이동했다. 니콜라예프스크에는 미드베제프대대의 2개 중대 500여 명만 남았다. 트리피친은 부대 지휘를 부진비치에게 맡기고 자신은 사피이스크를 우회하여 바가로드츠코바마을로 갔다. 포위된 비치대대는 마리인스크로 철수했다. 그사이 니콜라예프스크를 떠나 비츠대대로 향하던 수송마차는 트리피친부대에게 포획되고 말았다.

 

“그대들에게 가던 크리스마스선물이 우리에게 있다. 원한다면 그것을 전하고 싶다.”

트리피츤이 비츠대령에게 ‘전신’을 보냈다.

“단독비무장으로 온다면 받겠다.”

비츠대령이 답신을 보냈다.

 

마리인스크마을 비츠대대 주둔지에 하얀 말 네 마리가 끄는, 하얀 깃발을 단 마차가 다가왔다. 마차를 모는 사내는 하얀 옷을 입고 왼팔에 하얀 완장을 차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기병중대장이 마중을 나갔다. 기병중대장이 적장에게 경례했다. 트리피츤이 답례했다. 기병중대장은 크리스마스선물을 수송하기 위해 니콜라예프스크에 파견했던 자신의 기병소대에 대해 묻지 않았다. 중대장은 적장을 대대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집으로 안내했다.

백발의 차르러시아 귀족출신 비츠대령이 23세의 기관차공장 노동자출신 빨치산사령관에게 담배케이스를 건넸다. 1차대전에 트리피츤은 사병으로, 비츠는 장교로 참전해서 독일군과 싸웠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인 트리피츤이 비츠대령에게 담배케이스를 돌려줬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인 비츠대령이 담배케이스를 다시 트리피츤에게 건넸다. 트리피츤이 가볍게 목례하며 담배케이스를 주머니에 넣었다.

 

비츠대대 부관이 마리인스크마을 학교운동장에 전 대대병력을 집결시켰다. 트리피츤이 연단에 섰다.

“전쟁이 끝나서 독일군은 물러갔는데, 우리는 고향에 갈 수가 없습니다. 마까끄(원숭이, 일본군)가 다시 러시아를 침공했기 때문입니다. 마까끄가 우리 땅에 와서 주인행세를 하며 러시아를 파멸시키고 있습니다. 빨치산의 목표는 러시아에서 마까끄를 몰아내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없는 평등한 노동자농민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입대하기 전에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이었습니다.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던 노동자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차르의 징집영장을 받고 전쟁터에 끌려왔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을 징집한 차르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왜,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여기에서 총을 들고 서 있는 것입니까? 우리들이 왜 여기에서, 농민과 노동자를 수탈하던 자본가들을 위해 피 흘리며 싸워야 합니까? 누가 우리를 여기에서 서로 총을 쏘게 만들었습니까?”

“자본가요!”

“마까끄요!”

병사들이 소리쳤다.

“빨치산은 니꼴라예프스크와 사할린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총구를 거꾸로 돌려, 자본가와 제국주의의 군대와 싸우러 가는 빨치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여러분 자신만을 위해 선택하고 결정하고 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선택은 여러분의 운명을 바꾸고, 러시아의 운명을 바꿀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결단의 순간입니다. 지금 결단하지 않으면, 다시는 여러분에게, 자신의 운명을 바꿀 기회는 오지 않습니다. 저와 함께 니꼴라예프스크로 갈 병사는 딱 한 걸음만 앞으로 나서주시길 바랍니다.”

침묵이 흘렀다. 장교들을 제외한 모든 사병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저는 이제 여러분들의 고향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이 보낸 크리스마스선물과 편지를 전달하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크리스마스선물이기도 합니다.”

“우라! 우라! 우라!”

병사들이 환호했다. 크리스마스선물과 편지가 병사들에게 전달됐다.

1,400여 명의 비츠대대 병사들이 빨치산부대에 합류했다. 비츠대령과 70여 명의 장교들은 데카스트리만으로 떠났다. 데카스트리만에 주둔하던 비츠대령은 1920년 2월 자신의 작은 부대를 해산했다. 그리고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는 유서에서 “차르군인으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차르군대는 해산되었고, 콜챠크정권을 위해서는 장교의 의무를 다할 수 없었고, 볼셰비키혁명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어서 자살하게 되었다며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장교들에게는 자신의 시신을 병사 매트리스에 넣어 러시아를 향한 바닷가에 묻어줄 것을, 자신의 권총을 빨치산 대장 트리피츤에게, ‘용기와 고귀함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넘길 것을 요청했다.”

 

 

* 이 글은 스말야크의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내전 МЕЖДОУСОБИЦА 미즈도우소비차)』, 하바로프스크 지역 전승 박물관, 2009년(amrugang 평역, 「트리피츤 연재」 연재본, https://blog.naver.com/amrugang), 최진일의 「사하린 빨치산대」, 1958년(이인섭의 회상기 『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정보시스템), 이지택의 「니항사변과 독립군」(동아일보사, 『신동아』 통권 제45호, 1968년), 김낙현의 「빨찌산의 수기」, 1967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홍범도편』, 1995년), 김준엽·김창순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제1권(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67년), 최호림의 수고 「원동 변강 고려인생활 역사초록」 제1권, 1932년 – 반병률의 『항일혁명가 최호림과 러시아지역 독립운동의 역사』, 한울아카데미, 2019년 수록본), 반병률의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년), 김규면의 「노병 김규면비망록」(박환, 『재소한인민족운동사』, 국학자료원, 1998년 수록본), 김홍일의 『대륙의 분노』(문조사, 1962년)를 참조해서 썼다.

 

** 김명환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사화집 『시여 무기여』에 시 「봄」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월간 『노동해방문학』 문예창작부장, 2000년 ‘철도노조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기관지 『바꿔야 산다』 편집장, 2007년 철도노조 기관지 『철도노동자』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시집 『첫사랑』, 산문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 『볼셰비키의 친구』, 『삐라의 추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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