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호] 사건의 실천ㅣ바이 바이 망서림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11-07 11:42
조회
28
 
 

사건의 실천


바이 바이 망서림


 

 

서평자 누구 누구. 직업 등등. 우리 서평회는 처음부터 유기체적입니다. 한편으론 서평자란 ‘항’과 ‘관심 있는 임의적인 참석자들’이란 ‘항’이 있고요. 그 항을 이어주는 것은 책의 유명세와 서평자들의 평판이 있습니다. 대부분 출판사들의 서평회는 독자와 저자 혹은 토론자라는 평판 있는 인물들과의 만남이라는 위계적인 이벤트인 것 같습니다. 갈무리 출판사는 그래도 저와 같은 평범한 서평자를 선정하는 것은 나름 진보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평회는 항과 항의 만남이 우선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 관계는 서평회의 목적에 종속됩니다. 서평자도 ‘ 관심 있는 임의적인 분들’도 이미 구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구조 속에 자리 잡기 전 서평자는 누구일까요? 또 ‘관심 있는 임의적인 참석자 분들’은 또 누구일까요? 장래 책의 광고자나 구매자일까요? 이어질 토론 속에서 대화 할 파트너일까요? 우린 암묵적으로 알고 있지 않나요? 이 분들은 이런 다소 따분한 서평회에 끌릴 정도로, 삶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 강렬한 욕망의 소유자들 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미 구조화된 항의 관계가 자리 잡은 서평회가 아닌 구조화 이전의 욕망들, 즉 정동들을 새로운 ‘질’로 경험할 수 있는 서평회는 없을까요?



지금 제 진술에는 사실 정치에 대한 어떤 핵심적인 두 가지 구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방금 제가 언급한 유기체적인 것과 관련된 진술이 있는데요. 그것은 서평회의 소개 팝 창처럼 의도된 기획자의 구성 원리에 따른 몇 가지 항들과 그 항의 지배를 받는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게 그것 이구요. 다음으로는 각각의 서평자들이 서평자 이전에, 또 ‘무작위적인 관심 있는 참석자들’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즉 항들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그들, 각각의 항들이 가지는 고유한 내재적인 것이 있다고 말하는 주장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미시지각은 바로 후자가 더 실재하다는 것이죠. 여기서 실재는 과잉실재입니다. 과잉은 많다는 것이 아니라, 이행의 조건이라는 의미죠. 이 과잉실재는 이행 혹은 생성하는 실재이구요. 이 이행하는 과잉실재를 지각하는 것이 미시지각입니다. 즉 정동이죠. “미시지각이란 .. 순수하게 정동적인 세계의 (재)시작(312)”인 것이죠.



이 정동적 미시지각의 세계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시작합니다. 마수미는 타인과의 관계를 시몽동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타자들에 의해 제한된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있어 타자는 지옥이 아닙니다. 실존주의에서는 지옥이었죠. 타자는 배출구입니다. 전개체적 장의 잠재태는 관계적입니다. 그리고 타자들을 통해서, 타자들과 함께 관계적으로만 표현 가능합니다.”(234) 따라서 자유도 이렇게 말해야 겠죠. “자유는 항상 복잡한 관계 장 속에 그 내-행동the in-acting을 위한 활동적 뿌리내림으로부터 나옵니다. 누구도 자유롭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연출할 뿐이죠.”(235)



이젠 이 책에서 핵심적인 개념인 마수미의 권능화 제약enabling comstraints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옮긴이의 해제를 인용해 설명하면. 그것은 어떠한 창조적 역량을 발휘하는 데 조건이 되는 제약을 말합니다. 권능화 제약은 권한과 자격의 조건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권능화 제약은 자유의 형식이기도 하다. 자유는 문제의 완결이나 도피가 아니라 주어진 제약을 이용해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118 주32)



“정동은 원정치적이다.(12)”라는 진술은 이런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동은 정치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실제적으로 정치적입니다. 현실적으로 정치적 매개로 표현되진 않지만 현실 정치가 작동하도록 추동합니다. 정동정치는 이러한 정동의 직접적 정치성, 이행으로서의 정치성, 미시 정치성을 사유하게 해 줍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정동정치의 실험체가 에린 메닝Erin Manning이라는 분이 디렉터로 참여하고 있는 <감각실험실>인 것 같습니다. 가타르의 <라 보르드>의 실험 진료소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네요. 이 책에서는 다양한 관점으로 이 실험실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래, 마수미의 진술이 이 실험실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해주는 것 같습니다. 다소 길게 인용하겠습니다.



“<감각실험실>에서 처음에 가졌던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사건으로 만들 것인가?’였습니다. 늘 그랬던 ‘소통’의 장르들을 재생산하지 않고, 예술가로서, 학자로서, 활동가로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활동적으로 모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관계 절차들 또는 관계의 테크닉들을 집단적으로 발명하고, 이름 짓고, 진짜로 사건이라고 부를 가치가 있는 사건을 만들기 위해 상황에 따른 실천을 감행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테크닉들의 종류는 비개인적 impersonal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재빨리 알았습니다. 그것은 초개인적 생성 안에 있는 시몽동의 전개체적 장처럼 바로 집단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다소 고상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기초적인 요소이고, 가장 좋은 의미로 절차적입니다. 언제나 문제는 ‘어떻게?’입니다.”(247)



위 인용문에서 ‘사건’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거칠게 말해, <감각실험실>에 목표를 세우자면, 어떤 사건을 발명하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어떻게 그 어떤 사건을 발명할지에 사활을 건 공동체라고 할까요? 물론 이 사건은 이 공동체의 참여자들에게 대상화된 사건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도박처럼 혹은 축구 경기처럼 우리는 사건의 결과를 예단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은 무슨 의미일까요?



마수미는 ‘즉접’immediation‘이라는 용어를 설명하면서 사건을 인용합니다. 즉접은 “사건을 실재의 가장 근본적인 단위로 보고 이에 주목하는 하나의 방식”(216) 이라 설명합니다. “실재적인 것은 어떻게든 그 자체로 느껴진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 느껴지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의 사건”입니다. 또한 “이것이 역설적으로 의미하는 바, 과거의 어떤 것이든 이 사건 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자신을 현재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16) 따라서 사건은 즉접의 형식으로 “현재 속에서 미래와 꽝 하고 부딪치는 과거입니다.”(218)



이 사건이 인간의 감각 지각 보다 항상 우선합니다. 인간의 감각 지각은 이 사건아래에서는 어떤 특권도 가질 수 없습니다. 감각 지각은 인간적인 것을 주어진 것, 사건을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니체 역시 인간과 자연사이의 그 ‘과’를 조소했죠. 오히려 이 사건은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그 결과는 항상 회고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 아, 이게 그거였구나! 하지만 우리는 ‘이게 그거였구나!’라고 말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과거를 가져와 미래에 얹으며 조용히 외칩니다. ‘이렇게 될 거야!’라고요. 즉접은 그러한 습관에 문제를 제기하려는 노력입니다.”(229)



여기서 마수미가 재빠르게 알아차린 ‘비개인적’것의 의미도 드러나는데요. 사건은 그 자체가 비개인적인고 초개인적 생성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주체와 상황을 만드는 것은 주체의 반성적인 사유가 아니라 새로운 사건과의 즉접적인 마주침에서입니다. 요약하자면 <감각실험실>의 전략은 이 글의 제목인 ‘사건의 실천’을 여는 것입니다. 주체의 반성적 사고나 의지가 아니라 사건 자체의 창출을 통해 변화된 주체는 생성됩니다.



저는 <감각실험실>의 시도가 우리에게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두에서 오늘의 서평회를 다소 유기적이라 비판했는데요. 사실 서평회만이 아니라 다지원에서 매주 참석하는 세미나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매주 정해진 시간에 관심 있는 좋은 책을 나누는 모임일 뿐이죠. 혼자 공부하기에는 난해한 책을 같이 공부하는 고상한 독서 모임 정도로 경험될 때도 있었습니다.



오늘 서평회에 참석한 저를 비롯한 모든 분들이나 여러 세미나의 구성원분들은 이미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규정 지워진 삶의 방식을 습관적으로 사는 것에 질린 분들인 것 같습니다. ‘항’으로 우리를 내 모는 그 습관적인 삶에서 다양한 사연으로 탈주해 우리의 모임들에 합류했습니다. 저는 그 탈주가 정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불안에 대한 시몽동의 설명이 있는데요. “시몽동에 따르면, 이 개방된, 형성의 장이 개인 주체가 출현하는 전개체적 장으로 인식되지 않고, 주체의 내면으로 오인 받을 때, 불안이 만들어 집니다. 전개체가 내면성으로 오인되면, 그 결과 주체는 자신이 장 자체 내의 모든 잠재태를 쥘 수 있을 것이라고 느낍니다.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 잠재태는 단순화할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으며, 전적으로 상황들 속에서만 취해질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개체적인 선택이나 결정으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사건들에 의해서만 접근할 수 있을 뿐입니다.”(234) 잠재적인 것을 주체의 내면으로 환원된 것이라 여길 때, 우리는 불안합니다. 불안에서의 탈주는 잠재적인 것, 즉 사건을 즉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 됩니다.



세미나나 서평회 같은 우리의 모임으로의 탈주가 이렇게 전개체적이고 비개인적인 위상으로 전위하는 것이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이에 흐르는 정동의 초개인적인 흐름을 사건화하는 정동정치를 우리 사이에서 실험하기를 바래봅니다. 문제는 항상 ‘어떻게’이죠!



음! 서평회의 서평자들의 인물로서의 신상을 지우면 어떨까요? 서평자들의 이름으로 서평회를 전제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위계적 인물 중심의 서평회를 만드는 것 아닐까요.? 저는 서평회를 아래로부터 즉 내재성으로부터, 비개인적으로 시작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예를들어 마치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처럼 주인공의 이름을 ‘늑대와 춤을’이라고 명명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이름은 인물이 아닌 정동적인 이름이니까요. 저는 ‘바이 바이 망서림’이라고 제 이름을 바꾸고 싶습니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나이와 성별, 직업을 단지 참고사항만으로 두고 우선 그 사람의 정동을 호명하는 양식을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무작위적 관심 있는 참여자라는 항도 사실 위계적 질서를 전제합니다. 서평회가 비개인적이고 유기체적인 규정 틀을 거부한다면 이 분들이 서평에 참여할 수 있는 어떤 통로를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양식도 단순한 글자 중심이 아니라 삶만큼 다앙한 장르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아직 실험적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공상적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의도만은 분명합니다. 인간 중심의 위계를 따르지 말고 비개인적인 삶의 방식을 우선하자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인물이 아니라 여러분의 정동이 떠들도록 합시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18년 8월 26일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개최된 『정동정치』 서평회에서 발표되었습니다.

http://bit.ly/2QqAQth


*


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가상과 사건 ― 활동주의 철학과 사건발생적 예술(브라이언 마수미 지음, 정유경 옮김, 갈무리, 2016)

사건은 늘 지나간다. 어떤 사건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지나감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현실적으로 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금-존재했던 것과 곧-존재하려고-하는-것을 포괄하는 경험을 지각하는가? <가상과 사건>에서 브라이언 마수미는 윌리엄 제임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질 들뢰즈 등의 저작에 의존하여 ‘가상’이라는 개념을 이 물음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전개한다.


가상계 ―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브라이언 마수미 지음, 조성훈 옮김, 갈무리, 2011)

윌리엄 제임스의 급진적 경험주의와 앙리 베르그송의 지각에 관한 철학을 들뢰즈, 가타리, 그리고 푸코와 같은 전후 프랑스 철학의 여과를 통해 재개하고 평가하면서, 마수미는 운동, 정동, 그리고 감각의 문제와 변형의 문화논리를 연결시킨다. 운동과 정동 그리고 감각의 개념들이 기호와 의미작용만큼이나 근본적인 것이라면, 새로운 이론적 문제설정이 출현한다. 또한 그 개념들과 아울러 과학과 문화이론의 새로운 잠재적 가능성이 열린다.


정동 이론(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J. 시그워스 엮음, 최성희 외 옮김, 갈무리, 2015)

이 선집은 정동 연구라는 이제 막 발아하는 분야를 정의하는 시도이자, 이 분야를 집대성하고 그 힘을 다지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글쓴이들은 정동 이론의 주요 이론가들을 망라하고 있다. 정동이란 의식적인 앎의 아래와 곁에 있거나 그것과는 전반적으로 다른 내장[몸]의 힘으로서, 우리를 운동과 사유, 그리고 언제나 변하는 관계의 형태들로 인도한다.


정동의 힘 ― 미디어와 공진(共振)하는 신체(이토 마모루 지음, 갈무리, 2016)

전자미디어가 창출하는 네트워크가 인간사회의 기본적 환경의 하나가 되면서 생기는 사회현상 및 인간의 지각이나 감각의 변용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는 책이다. 포스트포디즘적 산업구조는 정보서비스 산업을 확대시켰고, 지식이나 커뮤니케이션, 감정 등을 자본축적의 자원으로 활용했으며, 한편 불안정한 노동자층을 글로벌하게 양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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