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호] 그라디바를 통한 동아시아의 ‘여성’ 정체성 모색ㅣ백주진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4-01-28 21:32
조회
216
 

그라디바를 통한 동아시아의 ‘여성’ 정체성 모색


백주진 (용인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남승석(이하 저자)의 <동아시아 영화도시를 걷는 여성들>은 동아시아 영화를 통한 여성 모빌리티에 대한 철학적, 문화비평적 연구이다. 저자는 분열된 동아시아를 연결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여성 모빌리티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도시 산책자는 도시라는 찬란하고 매혹적이면서도 동시에 어둡고 폭력적인 공간을 가로지르며 도시의 욕망과 상처를 조망하는 구체적 '현존재'를 나타낸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도시산책자는 단순히 도시에 국한되는 현존재가 아니라 세계와 관련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도시 산책자는 저자에게 현대적 현존재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저자는 현존재를 무젠더적 존재가 아닌 철저하게 젠더적 존재로 봄으로써, 기존의 현상학적 분석과 거리를 둔다.

이 책의 1부에서 저자는 새로운 젠더 주체로서 여성 산책자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19세기 도시 산책자의 개념은 보들레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남성으로 제한되었다. 산책자의 개념을 현대 도시사회를 인식하기 위한 발판으로 생각했던 벤야민도 도시 산책자를 남성으로서 이해했다. 저자는 도시 산책자의 개념을 남성적인 것으로 보고 파기하는 대신, 여성 산책자의 개념을 제안하고 그것의 선험적 가능성을 보인다. 이 책의 1부가 하는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 산책자 개념은 다양한 개념과 관련하여 디자인된다. 저자는 개념적 예리함을 통해 정신분석학자, 예술가, 철학자가 제시한 개념들 사이의 연계를 보며,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도시산책자 그라디바' 개념이다.

원래 그라디바는 걷고 있는 여성의 옆모습을 보여주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부조상의 이름이었다. 이 부조상은 정신분석학자와 예술가의 관심을 받으며 독특한 하나의 개념이 되었다. 프로이트는 그라디바의 근원성에 주목했다. 그는 그것을 정신의 근원적 고착화, 패티시즘과 관련지었다. 반면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라디바의 운동성에 주의함으로써 그것을 고착화가 아닌 '일탈'과 관련시켰다. 나아가 분열분석을 주장한 로트랭재, 들뢰즈와 가타리 같은 철학자들은 그라디바를 페티시즘적 시선을 가로지르는 해방적 일탈, 즉 "탈영토화"를 실행하는 모습으로서 이해했다. "그라디바의 혁명적인 요소는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이다(p. 45).

저자는 여성 산책자의 존재론적 가능성을 보이기 위해서 역시 아감벤의 "몸짓" 개념을 중요하게 도입한다. 몸짓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p. 65) 안에서 해방적 일탈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저자는 여성 산책자 개념의 선험적 가능성을 이렇듯 엄밀하게 확립한다. 저자는 나아가 그라디바 개념을 "영화적 지도그리기" 개념에 연결하는데, 이는 칸트식의 '도식작용'으로서 개념의 의미를 실질적 수행 안에서 해명하기 위함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화적 산책자는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 영화적 지도로서 도시를 탐색한다. 그리고 동시에 영화적 지도를 생산한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영화도시는 배우가 도시를 횡단하는 산책을 통해 생산하는 무빙 이미지이다." (p. 55)

이렇게 저자는 여성 산책자 분석을 위해 필요한 개념들을 확립한 다음 2부에서 그 개념들이 어떻게 구체적 현존재를 통해 구체적 세계-내-존재에 투사되는지를 기술한다. 이는 개인의 기억과 역사의 기억이 공간적으로 재현되는 방식에 대한 꼼꼼한 기술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엽기적인 그녀>, <화양연화>, <밀레니엄 맘보>, <여름 궁전>, <아사코>의 여성 주인공들의 일탈적 걷기와 몸짓을 자세히 분석한다.

첫 번째로, 저자는 <엽기적인 그녀>에서 전지현의 몸짓을 연구하며 영화에서의 "복장전도"에 대해서 논한다. 그라디바는 페티시적 시선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의 일탈하고자 하는 몸짓을 나타낸다. 그렇기에 그라디바는 여성의 몸짓이다. 전지현이라는 문화 기표는 한편으로는 여성을 순종적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남자의 시선을 내포한다. "전지현의 긴 머리는 한국 여성의 일종의 전형을 형상화하는 페티시로 기능한다"(p. 113) 그러나 저자는 전지현이라는 문화 기표가 그러한 시선에 저항하는 지점 또한 지적한다. "전지현이라는 기표는 일방적인 지배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며, 관객에게 사회문화적 규약과 젠더적 규범의 한계를 너머로 거침없이 나아가는 쾌감을 느끼도록 유도하는 면이 있다."(p. 113) 물론, "그녀(전지현)"가 "견우(차태현)"에게 보이는 공격성은 자신의 상처(과거 남자친구의 죽음)에 대한 방어기제의 측면이 강하다. 이는 저자에 의해서 잘 지적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녀의 공격성이 단순한 방어기제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단순히 남성 페티시적 시선의 대상이 아님을 그녀의 몸짓을 통해서 설명한다. 그녀의 몸짓은 공격적 몸짓이기 이전에 일탈의 몸짓, 그라디바인 것이다.

저자는 다음으로 홍콩으로 넘어간다. 왕가위의 <화양연화>를 분석하면서 저자는 다시 몸짓 개념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즉, 배우들의 몸짓은 중국 현대상에 대한 기억의 저장소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이자 영화적 기억의 촉매제가 된다." (p. 80) <화양연화>의 분석에서 부각되는 개념은 "폐허"이다. 여성 산책자의 근원적 걷기는 근원적 트라우마로 되돌아가는 움직임이다. 그러한 점에서 걷기는 아주 오래된 어떤 폐허와 관련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를 화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서 보여준다.

세 번째로, 저자는 허우 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를 자세히 분석한다. 그는 그 영화에서 여주인공 서기가 지붕이 덮인 타이베이의 육교 터널을 달려가는 유명한 장면을 자세히 분석하며, 그것을 차이밍량의 <애정만세>의 여주인공 "메이"가 걷는 장면과 비교한다. 대만은 중국의 영향권 안에서 정체성의 혼돈을 겪고 있는 국가이다. 저자는 이러한 대만의 상황과 관련하여 걷기가 내포한 일탈이 정치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메이는 하염없이 타이페이의 거리를 걷다가, 결국 벤치에 앉아 흐느낀다. "메이의 타이베이 걷기는 해방과는 안티테제 관계에 놓이며, 사회에 의해 폐기된 개인의 비극적 상황 그 자체를 수행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p. 191) 그렇지만 저자는 여기서 걷기가 전혀 해방적 측면이 없다고 말하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걷기가 해방을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정치적 목적으로서의 해방이 아니라 목적없는 합목적성으로의 해방, 즉 그라디바의 가능성을 "비키"와 "메이"의 걷기에서 보고자 한다.

네 번째로, 저자는 <여름 궁전>을 분석한다. <여름 궁전>에서의 트라우마는 천안문 사태이다. 트라우마를 겪은 젊은이들은 성과 걷기를 통해 무언의, 무의식적 저항을 지속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적나라한 성적 욕망은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여주인공 "유홍"의 걷기가 중국의 각 지역을 연결하는 방식, 그리고 남주인공 "저우웨이"의 걷기가 중국과 세계를 어떻게 연결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들의 이동은 어떤 특정한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동은 세계를 연결하고, 그러한 점에서 어떻게 목적 개념의 바깥에서 연결을 생각하고 '저항'을 생각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목적 없는 합목적성으로서의 지도그리기는 그 자체로 저항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 듯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아사코>를 분석한다. 아사코에서 저자는 "생태비평" 개념을 도입한다. 도시산책자는 도시 안을 걸을 뿐만 아니라, 도시의 경계를 넘어 걷는다. 즉, 탈영토화로서의 걷기는 자연과 도시의 연결을 포함한다. 아사코는 저자가 잘 보여주었듯이 특정한 장소에 묶여있지 않은 이동하는 주체, 즉 걷는 주체이다. 그렇기에 아사코는 도시를 넘어, 도시와 도시를 도시와 자연을 연결하는 주체이다.

동아시아 영화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이 책은 짧은 서평으로는 도무지 다 담을 수 없는 깊이와 풍부함을 지닌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을 내가 언젠가 다시 읽게 될 것임을 즐겁게 예감한다. 그렇지만 이 책은 당장의 즐거움을 주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나는 읽으면서 기존에 내가 봤던 영화들(<밀레니엄 맘보>, <엽기적인 그녀>)을 재발견하고 새로운 영화들(<아사코>, <여름 궁전>)을 발견하는 커다란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나와 같이 자신의 세계를 넓히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덧붙여 저자가 철학에서부터, 정신분석학, 문화예술 비평에서 보여주는 해박한 지식과 통찰은 책 읽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한다.

동아시아 도시의 여성 산책자의 걷기를 해명한다는 과제는 동아시아인들의 깊은 상처를 밝히는 과정이기도 하기에 책은 밀도와 무게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무게와 깊이를 통해서 더 큰 것이 이 책에서 분명히 성취되고 있다. 그것은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이다. 우리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주장되었던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제국주의적, 남성적 판타지를 기억하고 있다. 저자는 이와 정반대되는 방향에서 동아시아를 연결하고 국가를 넘는 동아시아의 정체성을 모색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여성 산책자의 사유는 어쩌면 동아시아의 새로운 평화와 조화를 생각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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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영화도시를 걷는 여성들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4년 1월 27일 <프레시안>( https://bit.ly/48Tjy0q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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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간의 탄생』(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5)


예술성이 협의의 예술사회는 물론이고 생산사회와 소비사회 모두를 횡단하면서, 예술의 일반화, ‘누구나’의 예술가화, 모든 것의 예술 작품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예술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센세이셔널한 예술종말론들이 유행하고 있다. 예술종말론의 하위흐름으로 나타나거나 예술종말론에 대한 거부를 통해 나타나는 예술진화론들은 경제와 예술, 예술과 삶, 삶과 정치 사이의 전통적 경계소멸을 가져오는 다중의 출현을 직시하면서 그것으로 인해 도래할 예술의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예상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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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영화는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우리 곁에 머물고 싶어 하는 이방인이다. 이 책은 그 이방인의 자리에서 대안적, 실험적, 저항적 영화 운동을 벌인 한국 독립영화에 관한 기록이다. 이도훈의 『이방인들의 영화』는 세 가지 마주침의 방식에 대해 고민한다. 그것은 한국 독립영화가 사회적 현실과 마주하는 방식, 영화라는 매체와 마주하는 방식, 그리고 미지의 관객과 마주하는 방식이다.


카메라 소메티카』(박선 지음, 갈무리, 2023)


만일 영화가 그림 속 인물에게 대사를 부여하고 움직임을 가미한다면 원작회화의 내용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카메라 소메티카』는 무엇보다 영화가 갱신하는 회화작품의 창작과 감상 그리고 전시체계의 새로운 의미들을 풀이해보려는 시도이다. 포스트-시네마의 미디어 생태계 안에서는 재현 매체의 전통적 구분이 사라진다. 또 창작과 감상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남는 것은 뉴미디어가 자극하는 수용자 개인의 유동하는 응시, 생동하는 감각, 그리고 능동적 해석이다.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김곡 지음, 갈무리, 2019)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영화는 문학, 사진, 미술과 어떻게 다르기에, 관객은 책상 앞이나 갤러리 안에서 비명을 지르진 않아도, 스크린 앞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일까? 이에 대답하기 위해 이 책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추상적인 질문을 보다 구체적이고 촉각적인 문제로 전환하는 전략을 선택한다. ‘영화의 몸무게는 몇 kg인가?’ ‘영화의 나이는 몇 살인가?’ ‘영화의 살은 몇 겹인가?’ 같은 엉뚱하지만, 실질적인 질문들 말이다. 작가의 전작 『투명기계』를 위한 보론 같은 책이다.


영화와 공간』(이승민 지음, 갈무리, 2017)


시공간의 예술인 영화에서 공간이 해방되고 있다. 공간을 다루는 이미지는 왜 지금 우리에게 자율적으로 드러나는 것일까? 이 책은 ‘왜 공간이 부상하기 시작했을까?’에 대한 거시적 물음에서부터 ‘재개발 투쟁과 은폐된 역사를 파헤치는 비판 정신에서 출발한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공간은 지금 어떤 기능을 하고 있을까?’라는 로컬적 질문까지 아우르면서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역사를 공간으로 재편성하는 동시에 2010년 이후 부상한 영화의 공간(들)을 정리해서 공간의 의미를 펼치며 다양한 함의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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