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호]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를 읽고ㅣ남윤재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4-04-30 11:45
조회
47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를 읽고


남윤재(경희대학교 문화엔터테인먼트학과 교수)


문병호, 남승석이 저술한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는 제목 그대로 벤야민과 아도르노 사상을 시각의 근거로 하여 「공동경비구역 JSA」(2000, 한국), 「택시운전사」(2017, 한국), 「여름궁전」(2006, 중국),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대만), 「복수는 나의 것」(1979, 일본) 등 5편의 영화에 대하여 두 저자가 서로 대화하듯 이야기를 전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발터 벤야민과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20세기 초중반에 비판 이론을 발전시킨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주요 학자로서 이들 둘은 사상은 차이가 있으며, 관점이 대립하기도 하지만 공통된 점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이들 두 사상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문화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했는데, 아도르노는 자본주의 규범을 강제하고 비판적 사고를 억압하기 위해 대중문화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설명하기 위해 '문화 산업'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고, 벤야민은 대중 문화에 비판적이면서도 영화나 사진 같은 새로운 기술이 예술을 민주화하고 관객을 혁명적인 방식으로 참여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보았다. 두 사람 모두 사회와 문화를 분석하는 데 변증법적 방법을 사용하여 현대 자본주의와 그 문화적 표현의 모순을 밝히고자 했으며, 그들은 이러한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 현대 사회의 조건을 비판하고 궁극적으로 극복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또한 벤야민과 아도르노는 예술이 사회적, 정치적 규범에 저항하거나 강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학과 정치 사이의 교차점을 탐구했는데,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 드러난 벤야민의 사상과 진정한 예술이 사회의 현상 유지에 도전하는 반면 대량 생산된 예술은 비판적 능력을 무디게 한다는 아도르노의 시각은 이 책의 저자들의 논의에도 핵심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사상을 바탕으로 폭력, 특히, 영화 작품 속에 드러난 국가 폭력에 초점을 둔다. 벤야민은 그의 에세이 "폭력에 대한 비판"(Zur Kritik der Gewalt)에서 법의 기초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라고 주장하며, 경찰력이나 군사력의 형태로 나타나는 국가 폭력은 법을 집행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되는데, 벤야민은 이를 "신화적 폭력"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국가 폭력은 도구적이고 순환적이며, 국가의 권위와 현상 유지를 영속화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벤야민은 이러한 순환을 깨는 순수한 폭력의 한 형태, 즉 국가의 법 제정 및 법 유지 폭력을 잠재적으로 파괴하고 새로운 정의로 이어질 수 있는 비도구적 폭력으로서 '신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이 아이디어는 국가의 폭력 독점에 대한 급진적 비판이자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로 해석됐다. 아도르노는 벤야민과 같은 방식으로 국가 폭력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권위주의, 파시즘, 문화 산업에 대한 그의 생각은 국가 폭력이 정상화되고 영속화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한 틀을 제공한다. 특히 아도르노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계몽주의 이성이 인간을 해방하는 대신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지배와 억압으로 이어졌는지 탐구하며, 20세기 파시스트 국가의 부상은 합리성이 비합리성으로 변질하는 계몽주의적 사고의 가장 어두운 잠재력이 스스로를 향해 돌변한 예시라고 보았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파시스트 정권의 국가 폭력은 일탈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과 현대 사회의 권위주의적 경향의 표출인데, 이때, 국가는 대중을 진정시키고 주의를 분산시키는 표준화된 문화 상품을 생산함으로써 현상 유지를 뒷받침하고 국가가 더 교묘하고 효과적으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문화와 정보의 조작은 국가의 권력과 폭력을 정당화하여 자연스럽거나 필요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국가 폭력에 대한 시각을 바탕으로 이 책은 다섯편의 영화 속 인물 들의 피, 눈물, 고통, 죽음에 대하여 남승석이 영상 문법에 따라 분석적으로 설명하면서 화두로 던지면 문병호는 이를 벤야민과 아도르노 관점에서 다시 한번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서론에서 문병호는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사상을 통해 영화 해석을 시도하는 의미를 이 두 사상가의 예술의 본질과 능력에 대한 시각과 예술로서의 영화의 잠재력을 설명하면서, 영화가 세계를 인식하고 해명하며, 비판함으로써 결국 변혁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1장은 2000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를 다루는데, 남승석은 전쟁과 분단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과거의 역사적 비극이 폭력의 형태로 현재까지 이어지는 정치적 알레고리로서의 공동경비구역이라는 공간에 주목한다. 이에 문병호는 비극적 폭력이 발생한 대립과 고통 그리고 불안의 공간으로서 공동경비구역이 아닌 화해를 형상화하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영화로 이 영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려고 한다.


2장은 2017년 개봉한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를 다루는데, 남승석은 영화가 다중 캡슐과 같은 ‘마트료시카’ 구조처럼 민주화운동이라는 거대 사건과 담론 속에 세부 에피소드로 보는 개인의 의식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며, 이에 문병호는 벤야민이 언급한 ‘예외상태’인 비상계엄 시기에 광주민주화운동 속에 드러나는 극한 폭력에 대한 택시 운전사와 외국인 기자 개인의 응시 속에 폭력에 대한 묘사를 넘어 평화를 소망하는 의지를 영화가 보여준다고 한다.


3장은 2000년 개봉한 로우예 감독의 중국 영화 「여름궁전」을 분석하는데, 남승석은 이 영화가 천안문 민주화운동이라는 정치적 혼란과 교차하는 주인공 유홍을 중심으로 부유하는 젊은 이들의 삶의 정체성 탐색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에 문병호는 벤야민의 운명 개념을 바탕으로 이미 결정된 상태로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의 젊은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그들의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엿볼 수 있음을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4장은 1991년 개봉한 에드워드 양 감독의 대만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분석한다. 영화는 1961년에 한 14살 소년이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과정에 대만의 부조리한 사회 구조와 그로 인한 미시적 폭력 들을 탐색하는데, 남승석은 특히 주인공의 운명을 형상화하는 소도구로서 손전등을 주목한다. 이에 문병호는 손전등은 식민 통치, 문화 정체성 혼란, 정권의 폭압을 지시하고 이에 상처받은 삶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영화는 아도르노가 말하는 사회의 작동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거대폭력’이 종식되어야 한다는 의미 형성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마지막 5장은 1979년에 개봉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일본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을 분석한다. 이 영화는 1960년대 초반 일본의 연쇄살인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단순한 범죄물이 아니며, 일본인에게 고통을 강요하였던 일본 제국주의·군국주의의 폭력을 주제로 삼고 있다. 남승석은 이 영화의 영화사적 위상과 비선형적 서사 구조 그리고 장르적 스타일 및 구체적인 시퀀스 들을 해석하면서 이 영화의 수수께끼와 같은 엔딩이 관객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문병호는 일본 제국주의·군국주의가 저지른 총체적인 광기·폭력에 여전히 지배받는 일본인의 ‘죄의 연관관계‘를 보여주면서 오히려, 이 영화를 통해 동아시아 현실에 대한 비판은 물론 예술 작품의 고유한 계몽과 교육 기능이 작동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어떤 종류의 폭력도, 설사 직접 당하는 입장이 아니래도, 순수하지도 유쾌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폭력은 여전히 영화는 물론 예술 작품의 주요 테마이며, 오락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고 있다. 이는 폭력이 국가와 같은 구조적 요인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인간 내재적 본성 속에 감추어져 있고, 이러한 본성의 총합은 다시 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국가 폭력 형태로 표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이 단순하게 영화라는 대중 문화의 상업적 도구로써의 재료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이 책 작가 들의 주장처럼 ’예술적 능력‘이 작동되는 영화에 투영되어 우리에게 변화와 희망을 보여주는 빛이 되었으면 한다.


이 책은 벤야민과 아도르노라는 일반인에게는 다소 어려운 학자 들의 논의와 국가 폭력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지 않은 독자 들도 그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알기 쉽게 풀어주면서, 마치 두 가지 시선이 교차하며 대화하는 형식을 빌려 영화라는 표현형식이 예술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중심 명제를 놓치지 않고 있고 읽는 독자 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끝으로 이 책을 읽기 전에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영화를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4년 4월 26일 <교수신문>( https://bit.ly/3wzmu4i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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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동아시아 영화도시를 걷는 여성들』(남승석 지음, 갈무리, 2023)


서울, 홍콩, 타이베이, 베이징, 도쿄 등 국가적 트라우마를 경험한 동아시아 다섯 개 도시를 전지현, 장만옥, 서기, 학뢰, 카라타 에리카 등 다섯 명의 여성 산책자가 걷는다. 이 책은 이 다섯 개 도시에서 제작된 다섯 편의 영화 <엽기적인 그녀>, <화양연화>, <밀레니엄 맘보>, <여름궁전>, <아사코>를 통해 지구적 감성의 영화적 아틀라스를 재구성하고 아시아의 미 개념을 드러내고자 한다.


예술인간의 탄생』(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5)


예술성이 협의의 예술사회는 물론이고 생산사회와 소비사회 모두를 횡단하면서, 예술의 일반화, ‘누구나’의 예술가화, 모든 것의 예술 작품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예술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센세이셔널한 예술종말론들이 유행하고 있다. 예술종말론의 하위흐름으로 나타나거나 예술종말론에 대한 거부를 통해 나타나는 예술진화론들은 경제와 예술, 예술과 삶, 삶과 정치 사이의 전통적 경계소멸을 가져오는 다중의 출현을 직시하면서 그것으로 인해 도래할 예술의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예상을 표현한다.


이방인들의 영화 : 한국 독립영화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식』(이도훈 지음, 갈무리, 2023)


한국 독립영화는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우리 곁에 머물고 싶어 하는 이방인이다. 이 책은 그 이방인의 자리에서 대안적, 실험적, 저항적 영화 운동을 벌인 한국 독립영화에 관한 기록이다. 이도훈의 『이방인들의 영화』는 세 가지 마주침의 방식에 대해 고민한다. 그것은 한국 독립영화가 사회적 현실과 마주하는 방식, 영화라는 매체와 마주하는 방식, 그리고 미지의 관객과 마주하는 방식이다.


카메라 소메티카』(박선 지음, 갈무리, 2023)


만일 영화가 그림 속 인물에게 대사를 부여하고 움직임을 가미한다면 원작회화의 내용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카메라 소메티카』는 무엇보다 영화가 갱신하는 회화작품의 창작과 감상 그리고 전시체계의 새로운 의미들을 풀이해보려는 시도이다. 포스트-시네마의 미디어 생태계 안에서는 재현 매체의 전통적 구분이 사라진다. 또 창작과 감상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남는 것은 뉴미디어가 자극하는 수용자 개인의 유동하는 응시, 생동하는 감각, 그리고 능동적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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