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호] 하바로프스크블루스ㅣ김명환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4-01-23 20:14
조회
286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하바로프스크블루스


1917년 6월. 기차는 짧게 두 번 길게 한 번 기적을 울리고 천천히 페름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승강장에선 우랄노동자동맹 동지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쑤라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잔잔하게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멀어져가는 동지들 뒤쪽으로 급수탑이 높게 솟아 있었다. 급수탑 위로 검뿌연 하늘이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부을 듯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후두둑 툭 빗방울이 떨어졌다. 검뿌연 하늘과 쏟아지는 빗방울 속으로 기차는 달렸다. 쑤라는 창문을 닫았다. 금세 빗방울이 굵어져 차창으로 흘러내렸다. 창밖이 뿌옇게 흐려졌다. 쑤라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알 수 없는 긴장이 쿵쿵쿵쿵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밀려오고 있었다.

“하바로프스크……!”

극동의 심장이다. 볼셰비키당은 쑤라에게 하바로프스크 조직 및 선전선동사업을 지시했다. 서쪽에서 시작된 혁명은 동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이제 혁명의 불길은 산맥을 넘고 사막과 평원을 가로지르고 강과 바다를 건너 몽고로 중국으로 조선으로 일본으로 번져나갈 것이다. 쑤라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천천히 눈을 뜨고 뿌연 차창을 응시하였다.

“이제 가는 것이다. 혁명의 분화구 속으로……!”

쑤라는 자신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음을 알고 있었다.

 

1914년 4월. 블라디보스톡을 떠날 때도 검뿌연 하늘이 금방이라도 눈을 쏟아부을 듯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승강장에선 오와실리신부와 한민회(한인민회) 동지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쑤라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잔잔하게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멀어져가는 동지들 뒤쪽으로 급수탑이 높게 솟아 있었다. 급수탑 위 검뿌연 하늘에서 하얗게 눈송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대지에 내린 눈송이들은 금세 녹아 대지를 축축하게 적셨다. 검뿌연 하늘과 흩날리는 진눈깨비 속으로 기차는 달렸다. 쑤라는 창문을 닫고 손등으로 눈시울을 문질렀다.

“이제 결별이다. 사랑하는 와실리신부와 보리스와 보낸 시간들…….”

무엇인가 불안하고 어색하기만 했던 안락한 삶과의 결별이다. 쑤라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둘째 아이 보리스를 낳고 쑤라는 한민회 서기로 일하고 있었다. 집과 직장을 오가며 보내는 일상이 왠지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거 같아 쑤라는 자꾸만 거울을 쳐다보곤 했었다.

 

차르러시아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독일과 전쟁을 벌였다. 러시아 농민과 노동자들은 전선으로 징집되었다. 만주와 시베리아의 한인과 중국인들이 우랄지방의 군수산업 공장지대로 몰려들었다. 취업을 하려면 취업허가증이 필요했다. 러시아당국에 허가를 낸 “청부업자”들이 취업을 알선했다. 청부업자들은 한인, 중국인들과 군수사업자 사이에서 농간을 부렸다. 계약기간과 임금과 노동조건과 숙식 등 기타 처우가 각기 다른 이중계약을 맺는 것이다. 러시아에 귀화한 한인 청부업자 김병학이 페름의 나제진스크벌목장 벌목공을 모집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한인 1, 2천 명이, 하르빈에서 중국인 3, 4천 명이 계약을 맺고 페름으로 떠났다. 그렇게 가고 나서 연락이 두절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블라디보스톡 한민회엔 가족을 찾는 한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쑤라는 우랄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어려움에 처한 한인과 중국인들에겐 러시아어와 조선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통역이 필요했다. 쑤라가 적임자였다. 쑤라는 나제진스크벌목장 통역관으로 지원했다.

 

1915년 나제진스크벌목장에서 일하던 김시약은 “어느 날 벌목장 문 근처에서 중키의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다. 노동자들은 그녀가 러시아어, 조선어, 중국어에 능통한 통역관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는 정중하게 노동자들을 대했고, 사업주 앞에서 그들의 권익을 옹호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인, 한인, 중국인 노동자들은 그를 사랑하고 모든 점에서 그를 신뢰했다.”

 

1917년 2월. 혁명은 도둑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페름지역 노동자들에게도 자본가들에게도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다. 지하에 움추리고 있던 볼셰비키당이 쑤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볼셰비키당 예카테린부르크위원회 책임비서는 쑤라에게 입당을 권유했다. 레닌이 “볼셰비키 운동이 보유한 최상의 조직가”라고 말했던 스베르들로프가 책임비서였다. 예카테린부르크위원회는 볼셰비키당 극동지역의 거점이었다. 쑤라는 1914년부터 예카테린부르크위원회와 연계해 활동하고 있었다.

한 생애를 살면서,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이 겹치는 행운이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 일이 고통과 희생과 인내를 요구할지라도, 삶의 소중한 것들과의 이별을 강요할지라도, 도둑처럼 다가온 행운을 움켜쥐지 못하면 평생을 후회와 번민으로 보내야 한다. 쑤라에게 두려운 것은 다가올 고통과 희생과 인내와 이별이 아니라 후회와 번민이었다.

“영광입니다!”

쑤라가 짧게 대답했다.

“영광은 오히려, 우리 당입니다!”

검정 가죽자켓을 입은 스베르들로프가 가볍게 웃었다. 검정 가죽자켓은 볼셰비키의 일상복이자 전투복이었다.

 

1917년 3월. 페름지역에 우랄노동자동맹이 조직되었다. 한인노동자들과 중국인노동자들, 오스트리아·헝가리 포로병들이 주축이었다. 나제진스크벌목장은 우랄노동자동맹 서기로 선출된 쑤라를 해고했다.

 

“쉿!”

소리는 나지 않고 입술에 세운 손가락 한 개가 보였다. 볼셰비키당 예카테린부르크위원회 연락을 맡은 동지였다. 연락원은 입술에 댄 손가락을 움직여 오른쪽 관자놀이에 댔다.

암살!

빳빳한 소름이 발끝에서부터 온몸으로 번졌다. 쑤라와 연락원은 막사 뒷문을 통해 옆 막사로 이동했다. 기다리고 있던 러시아노동자들이 쑤라의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에 붕대를 감았다. 작업복과 붕대에 준비해온 닭의 피를 부었다. 피냄새가 진동했다. 쑤라를 들쳐업은 노동자들은 살금살금 뒷문을 빠져나가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비켜요, 비켜, 긴급호송이오!”

소리 지르며 달려가는 마차 앞을 무장한 사내들이 막아섰다.

“무슨 일이오?”

“나무에 깔렸소. 비키시오. 피를 많이 흘렸소!”

무장한 사내들이 마차 위를 살피다가 진동하는 피냄새에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며 길을 터주었다.

멘셰비키의 암살기도 이후 쑤라는 권총을 지니고 다녔다. 우랄노동자동맹에서는 무장경호원을 배치했다.

 

페름지역 노동자들이 혁명을 피부로 느낀 건 무엇보다 2년을 끌어오던 재판의 판결이 난 것이었다. 재판와중에 차르법원이 폐지되고 임시혁명정부법원이 수립되었다. 법원은 강제노동 금지와 밀린 임금 지불과 손해배상을 선고했다. 청부업자의 덫에 걸려 군수산업의 노예가 된 노동자들이 집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판결의 영향은 소송당사자뿐 아니라 전 군수산업에 파급됐다. 수천 노동자들의 소송대리인을 맡아 재판을 진행해오던 쑤라는 우랄지역 노동자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군수사업자들은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노동자들의 ‘면직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야 면직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쑤라는 검정 가죽자켓을 입고 연단에 섰다.

“우리 5천 조선인·중국인 노동자들은 오늘부터 더이상 짜르로씨야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가 권력을 쥔 국가의 국민이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청부인들과 짜르권력 사이에 맺어진 불공정한 계약의 이행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합니다. 그 계약이 무효임을 선언합니다. 로씨야의 노동자계급인 조선인·중국인 노동자들이여, 단결합시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합시다!”

파업의 불길은 나제진스크벌목장에서 시작됐다. 목재의 공급이 끊기자 탄광로 작업이 필요한 공장들의 조업이 중단되었다. 쑤라는 페름지역 공장지대를 순회하며 기업, 공장, 노동현장에 파업위원회를 조직하고 총파업을 이끌었다. 군수사업자들의 무장경비대로 일하던 중국인 용병들이 파업위원회측으로 넘어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포로병들이 파업에 합류했다. 러시아인 노동자들이 전면파업을 선언하고 총파업에 참여했다.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페름지역 기업관리소측에 “조선인과 중국인 면직명령”이 하달되었다. 하지만 기업관리소측은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총파업위원회는 기업관리소를 습격했다. 쑤라는 붙잡힌 기업관리소장의 가슴에 권총을 겨눴다. 소장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소장이 ‘면직 지시’를 내렸다.

“만세!”

“완쉬!”

“우라!”

함성이 솟구쳐 올랐다.

 

1918년 1월 12일. 일본은 “일본거류민들을 보호”한다며 군함 ‘이와미’를 블라디보스톡에 파병했다. 뒤이어 순양함 ‘아사히’를 증파했다. 영국과 미국도 군함을 파병했다.

1918년 1월 18일 소집된 러시아 제헌의회는 사회혁명당 체르노프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다음날 레닌은 군대를 동원해 제헌의회를 해산했다. 반볼셰비키세력이 봉기했다. 러시아는 내전상태에 돌입했다.

 

1918년 2월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정치망명자대회’가 열렸다. 이동휘, 양기탁, 유동렬, 이동녕, 안공근, 안정근, 조성환, 김성무, 김규면, 김립, 김하구, 홍범도, 극동소비에트의 집행위원장 크라스노쇼코프와 외무위원장 쑤라와 비서장 박애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이동녕 등은 “‘광의단’이라는 무장단체를 조직하되 극동소비에트정부로부터 후원만 얻자는 견해”를 제기했다. 이동휘 등은 “볼셰비키주의에 찬동하여 고려혁명을 그 길로 촉진시키자는 의견”을 개진했다. 회의는 결렬되었다. 이동녕 등은 회의석상에서 퇴장했다. 남은 이들은 한인 사회주의정당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1918년 3월 3일. 러시아혁명정부와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불가리아왕국, 오스만제국) 간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러·독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1918년 4월 4일. 일본 수출입사무소 블라디보스톡지부에 “미지의 악한들에 의한 비밀공격”이 감행되어 일본인 1명이 살해되고 2명이 부상당했다.

4월 5일. 일본 육전대(해군 소속 육상전투부대)가 “일본신민의 생명재산에 대한 위협을 미연에 방지”한다며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했다. 같은 날 영국 해병도 상륙했다. 쏘비에트정부는 즉각 페트로그라드 주재 연합국대표단에게 “날조된 도발행위”라고 항의했다.

4월 7일 레닌은 블라디보스톡소비에트에 “사태는 극히 심각하므로 끝까지 단호하게 싸울 것”을 지시했다.

 

쑤라는 블라디보스톡 주둔 일본군 병영에 반제반전 삐라를 배포했다.

“병사 여러분! 일본 부르주아는 여러분과 같은 프롤레타리아와 노동자를 희생시키기 위해 여러분을 이국에 파견했습니다. 여러분의 희생은 착취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병사 여러분! 착취자를 위해 여러분의 피를 흘리지 마십시오. 그들이 당신의 적입니다. 일본 부르주아는 당신의 피와 땀으로 자신들의 부를 증식시켰고, 당신을 더 궁핍한 생활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획책하고 있습니다. 병사 여러분! 총부리를 당신의 착취자들에게 돌리십시오. 일본 자본가와 사무라이 장군에게! 당신은 그들에게 억압받는 병사가 아닙니까? 당신은 노동자 농민 출신으로, 피착취계급입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혁명에서 본보기를 찾으십시오. 우리와 함께 손을 잡고 싸웁시다. 억압의 사슬을 끊읍시다. 우리의 목표는 만국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연대입니다. 병사 여러분, 우리 볼셰비키를 지지해 주십시오.”

 

1918년 4월 28일. 쑤라는 거울 앞에 섰다. 1914년 블라디보스톡을 떠날 때처럼, 1917년 페름을 떠날 때처럼, 쑤라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얼굴엔 홍조가 피어오르고 주근깨가 돋아나 있었다.

“히히히히힝!”

창밖에서 힘차게 말이 울었다. 쑤라는 현관문을 열었다.

“꼬미싸르동지, 준비됐으면 갑시다!”

마부석에 앉은 이인섭이 말했다. 하얀 말 한 마리가 끄는 마차였다.

“웬 마차예요?”

“오늘은 조선혁명이 시작되는 날이니, 꼬미싸르동지는 아무 말 마세요.”

이인섭이 말했다. 이인섭은 평안도 의병출신으로 쑤라가 페름을 떠나 옴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 이르쿠츠크, 치타, 모고치, 보츠카레와를 거쳐 하바로프스크로 올 때 옴스크에서부터 동행했다. 이인섭은 옴스크 한인단체 “드르주바(친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드루주바는 “우랄노동자동맹 옴스크지회”로 개편되었다. 하바로프스크에 이르기까지 철도 기착지마다 한인들이 모여들어 쑤라를 환영했고 지역단체들이 조직되었다.

“깃털 달린 모자”를 쓴 쑤라가 마차에 오르자 이인섭이 채찍을 휘둘렀다. 하얀 말이 앞 다리를 번쩍 쳐들더니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 꼬미싸르가 간다!”

“꼬미싸르! 꼬미싸르! 꼬미싸르!”

말울음소리를 듣고 몰려든 동네 아이들이 꼬미싸르(인민위원)를 연호했다. 쑤라가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잔잔하게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마차는 하바로프스크 뽀뽑스카야 15번지 붉은 벽돌집 앞에서 멈췄다. “붉은 벽돌집 2층” 인민위원회 사무실에서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정당 ‘한인사회당’이 창립되었다. 중앙위원으로 이동휘(위원장), 오와실리(부위원장), 유동렬(군사부장), 김립(선전부장), 이한영(조직부장), 이인섭(재정부장), 쑤라 등이 선출되었다. 선전부는 1918년 5월 1일 한인사회당 기관지 『자유종』(주필 김립) 창간호를 발행했다. 군사부는 하바로프스크에 사관학교(교장 유동렬)를 설립했다. 생도들은 서간도 유하현에 있던 사관학교에서 10여 명씩 나뉘어 파송되었는데, 50~60명을 파송한 뒤 백위군의 연해주 점령으로 중단되었다.

 

1918년 5월 체코군단이 러·독강화조약에 반발해서 봉기했다. 16세기 초 오스트리아에 합병된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차르러시아군의 포로가 된 체코군은 “연합국측에 가담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의용군을 편성”했다. 러시아 거주 체코인들도 가담하여 병력이 5만에 이르는 1개 군단이 키에프 부근에 집결했다. 러시아혁명정부는 체코군단을 블라디보스톡항구에서 선편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여단이 설립된 프랑스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60개 부대로 나뉘어 시베리아철도를 타고 이동 중이던 5만여 체코군단이 봉기하자 연합국은 “체코군단 구원”을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출병했다. 명분은 “체코군단 구원”이었지만 “볼셰비키혁명에 대한 간섭”이 목적이었다.

1918년 6월 4일.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일본은 “체코군단이 연합군이고, 연합군의 보호 아래 있음”을 천명했다.

1918년 7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4개국은 “체코군단을 구원”하기 위해 병력 2만 8천(일본 1만 2천)을 파견하기로 협정을 체결하고 출병을 단행했다.

1918년 8월 3일 영국군 8백, 캐나다군 6천, 8월 10일 프랑스 외인부대 1백, 8월 16일 미군 5천 명이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4개국 협정을 어기고 2만 8천이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했다. 이후 일본군은 병력을 7만으로 늘렸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바이칼호수 동쪽 베르흐네우진스크까지 철도연선을 따라 크고 작은 도시들에 일본군이 주둔했다. 이것은 “러시아지역 한인들이 빨치산부대를 조직하여 소비에트적군편에 서서 싸우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간섭군이 상륙하자 반혁명군(백군, 백위군)이 전면공세에 나섰다.

1918년 7월 11일 옴스크에서 시베리아 각지의 백군세력이 통합 ‘시베리아정부’를 수립했다.

 

쑤라는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조선어로 삐라를 만들어 배포했다.

1918년 7월 4일. 하바로프스크 극동소비에트정부는 “소비에트를 방어하기 위한 전투에 돌입한다”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여러분은 적위군부대의 일원으로 모두 일어나 전선으로 가십시오. 혁명의 적들을 절멸시킵시다. 동지들이 자신의 집, 아내, 자식, 자유와 노동권을 보호하려 한다면 누구도 집에 남아있어서는 안됩니다. 모두 무기를 잡으시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백군과 적군의 전투는 8월 23일 일본군을 주력으로 하는 간섭군이 전투에 참가하며 급격히 백군의 우세로 돌아섰다.

 

“1918년 6월 말, 서간도에서 온 사관학교 생도 50~60명과 다반 등 하바로프스크 인근에서 모집한 한인청년 등 100여 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한인사회당 적위군’이 조직되었다.” 극동군 산하에 러시아인·중국인·헝가리인·세르비아인·라트비아인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합동민족부대’가 편성되었고 그 산하에 ‘한인사회당 적위군’이 편입되었다. 한인사회당 군사부 유동렬과 전일이 ‘한인사회당 적위군’을 이끌고 우수리스크전선으로 출정하였다. 전투는 이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극동군 사령부로부터 하바로프스크 방면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합동민족부대’ 사령부는 이만역 방어를 ‘한인사회당 적위군’에게 맡기고 먼저 철수했다. 날이 밝으면 ‘합동민족부대’ 본대를 뒤쫓아 ‘한인사회당 적위군’도 이만정거장을 떠날 요량으로 군장은 이미 꾸렸다. 하지만 날은 좀처럼 밝지 않았다. 짙은 안개 속에서 해는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이만역 급수탑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말발굽소리와 군홧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멀리 짙은 안개 속에서 기병부대가 행군해 오고 있었다. 기병부대 뒤로 보병부대가 행군해 오고 있었다.

“퇴각!”

중대장 전일이 퇴각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1소대장 안홍근의 복창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홍근은 안중근의 사촌이었다.

“왜놈이다……!”

누군가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안개보다 짙은 침묵이 흘렀다.

고개를 돌린 전일은 보았다. 멀리 짙은 안개를 뚫고 행군해 오는 기병부대 위로 빨갛게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커다란 태양 속에 기병부대 기수가 든 깃발이 보였다. 그것은 놀랍게도 ‘욱일기’였다. 안홍근과 두 눈이 마주쳤다. 순간 안홍근의 두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전일은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자신의 눈에서 떨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따각따각!

저벅저벅!

말발굽소리와 군홧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전일은 숨을 쉴 수 없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음을 알고 있었다.

전일은 총을 겨눴다. 가늠자 속에 빨간 태양과 하얀 말과 욱일기를 든 기수가 들어왔다.

탕!

누군가가 총을 쏘았다. 펄럭 욱일기가 날아올랐다. 총성이 이어졌다. 놀란 말들이 날뛰었다.

“여보! 앞으로!”

누군가가 돌격명령을 내렸다.

“죽여라!”

함성이 솟아올랐다. 병사들은 기병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돌아와!”

전일은 목청껏 소리쳤다. 하지만 소리는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전일은 병사들의 뒤를 쫓아 달렸다.

 

일본군이 나타나자 한인사회당 적위군들은 “왜놈을 죽이고 우리의 원수를 갚자”며 지휘관의 명령을 위반하고 “단병접전”에 뛰어들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왜놈들을 잡아 치우겠다”며 후퇴대열에 참가하지 않았다. “당시 전투에서 안홍근동지는 왜놈만 보이면 ‘내 형 안중근과 명근의 원수를 갚겠다’며 대오에서 뛰어나갔다.” 한인사회당 적위군은 “이만역과 바셉스크역 전투에서 대부분 전사하고 열 명이 조금 더 되게 남았다. 우수리스크전선은 백위군, 일본군, 체코군단에게 점령되고 하바로프스크는 사면 포위되었다.”

 

1918년 9월 1일. 하바로프스크시립공원 회의실에서 아무르주소비에트 위원장 무힌, 볼셰비키당 하바로프스크위원회 책임비서 쑤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소비에트 및 당 간부회의가 열렸다. 극동소비에트는 이미 블라고벤스크로 철수했고, 적군(적위군)도 순차적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회의는 “전투 없이 하바로프스크 철수”가 결정되었다. “화약창고와 아무르강 철교를 폭파”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동지들, 우리는 시내에서 아주 영 물러가는 것이 아니고 임시로 떠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물러간 뒤에 시내에는 우리의 적들만이 살 것이 아니고 우리가 돌아올 것을 갈망할 인민들이 또한 살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화약창고를 폭파시킨다면 적들만이 죽을 것이 아니고 주민들도 피해를 입을 수 있을 것이며 건물들이 파괴될 것이니 우리가 전투를 하지 않고 시내에서 퇴각한다는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또한, 극동지방에서 가장 웅장한 아무르강철교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것을 폭파한다면 내일 우리는 그것을 다시 복구해야만 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철교를 폭파한단 말입니까?”

쑤라가 말했다. 회의는 철교와 화약창고들을 폭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밤늦게 쑤라는 집에 들렀다.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오와실리가 쑤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쑤라에게 “조선여자 옷을 입고 쪽머리를 하고 조선인촌으로 피신할 것”을 제의했다.

“나는 당의 간부예요.”

쑤라가 말했다. 쑤라는 볼셰비키당 하바로프스크위원회를 무사히 철수시켜야 했다. 쑤라는 두 아이가 깨기 전에 보모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집을 나섰다.

 

1918년 9월 2일. 뱃고동이 울렸다. ‘바론코르프호’는 고동을 짧게 두 번 길게 한 번 울리고 천천히 하바로프스크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당 하바로프스크위원회는 제일 마지막 배편 바론코르프호로 철수했다. 3, 4백의 적위대원들과 유동렬, 전일, 이인섭, 김립, 안홍근, 심백원 등 한인사회당 간부들도 쑤라와 동행했다. 이동휘는 일주일 전에 주건과 함께 목선을 타고 우수리강변 한인촌 하이강으로 도피했다. 나머지 간부 12명은 바론코르프호를 타고 블라고베시첸스크로 가서 볼셰비키당 간부들과 합류, 아무르강을 따라 상류까지 이동해서 몽고, 신장, 중앙아시아를 거쳐 모스크바로 이동하기로 했다. 쑤라는 한인사회당 간부들에게 미리 준비해둔 중국여권을 건넸다.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동지들은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이동을 계속하세요.”

쑤라가 말했다. 모두들 말없이 쑤라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바론코르프호는 아무르강 거친 물살을 거침없이 헤치고 달렸다. 멀리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9월 4일. 예카테리노-니꼴스코예 근방에서 바론코르프호 승객들은 모두 백군(칼미코프군대)에게 체포되었다. 학교건물 창고에 3일 동안 수용되었다. 쑤라는 “유동렬동지는 북경, 만주, 몽고 등 전에 공작하던 곳으로 가서 거기서 공산주의 선동을 진행하고, 김립동지는 간도, 만주, 연해주로 가서 우선 선동삐라를 인쇄 전파하고, 이인섭동지는 또다시 시베리아 옴스크로 가서 모스크바와 연계를 설정하고 백위군과 간섭군에 의하여 일시 강점된 지대의 조선인들 사이에서 해방운동을 준비할 것”을 권했다.

“연해주와 만주에서의 빨찌산운동에 나를 이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인섭이 말했다.

“연해주와 만주에서의 빨찌산운동에서는 로씨야와 중국 동지들과 긴밀한 접촉하에 행동하여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전에 하던 것과 같이 각국어로 된 선동삐라를 전파하세요. 한 알의 탄환은 한 사람만을 죽일 수 있지만 한 장의 삐라는 적의 모든 군사력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내 생각엔, 조선에 선동삐라와 조선어로 번역된 정치도서를 보내는 것이 준비되지 못한 일꾼들을 파견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습니다.”

쑤라가 말했다.

 

9월 7일. 일행은 하바로프스크로 연행되었다. 쑤라는 “살아서 나오지 못 한다”는 칼미코프군대 “죽음의 열차”로 끌려갔다. 중국인으로 위장한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석방되었다.

 

1918년 9월 16일. 총성이 울렸다. 총성이 이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포로로 구성된 적위군 군악대원 16명에 대한 총살이 집행되었다. 이어서 볼셰비키당 하바로프스크시위원회 간부들에 대한 총살이 집행되었다. 쑤라의 일행이 사형대에 섰다. 쑤라는 눈가리개를 거부하고 집행관의 두 눈을 쏘아보았다. 쑤라의 두 빰은 바둑판 모양으로 난자되어 있었다. 쑤라는 집행부대 뒤 군중들 위 검뿌연 하늘을 응시했다. 후두둑 툭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총성이 울렸다. 쑤라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두 무릎은 힘없이 꺾어졌다. 쑤라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려고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두 팔도 움직일 수 없었다. 총성이 이어졌다. 쑤라는 아주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이날 볼셰비키당 및 소비에트 간부들, 우스리스크전선에서 잡힌 적위대원들, 이만역전투에서 잡힌 적위대원들, 적위군 군악대원들이 함께 총살되었다. 내전이 끝나고 쑤라가 묻힌 곳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곳에서 백군들과 외국군들이 소비에트정권 투사들을 총살했다. 이곳을 사람들은 ‘죽음의 계곡’이라 부른다. 구세계에 대항한 강인한 투사들에 대한 기억은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 “쑤라”는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의 아명이자 애칭이다. 1885년 러시아 연해주의 니꼴리스끄·우수리스끄 인근 이주한인마을 시넬리니꼬보에서 태어나 니꼴리스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 교사로 일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우랄지방 군수산업 공장지대인 페름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 1917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여 그해 12월부터 하바로프스크위원회 책임비서와 극동소비에트 외무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18년 9월 러시아반혁명군(백군)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 이 글은 이인섭의 『알렉싼드라 뻬뜨로브나 김(쓰딴께위츠)의 전기』(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직속 당력사연구소, 1958년 - 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제30집 『이인섭과 독립운동자료집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년 수록본)과 『망명자의 수기』(한울아카데미, 2013년), ‘다큐코리아’의 수요기획 『아무르강의 조선여자 알렉산드라 김』(2002년), 정철훈의 『(소설)김알렉산드라』(실천문학사, 2009년)와 『(일대기)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시대의 창, 2021년), 정철훈·김금숙의 『(만화)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서해문집, 2020년), 임경석의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역사비평사, 2003년), 십월혁명십주년원동기념준비위원회의 『십월혁명십주년과 쏘베트고려민족』(해삼위도서주식회사, 1927년 – 정동주의 『까레이스끼, 또 하나의 민족사』, 우리문학사, 1995년 수록본), 윤상원의 「시베리아내전의 발발과 연해주 한인사회의 동향」(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제41호, 2010년)과 「시베리아내전기 러시아지역 한인의 군사활동」(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6호, 2011년), 반병률의 「한인사회당의 조직과 활동」(인하대학교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5권, 1993년)과 「김립과 항일민족운동」(『한국근현대사연구』 2005년 봄호)과 「러시아 지역 항일여성독립운동」(3·1여성동지회, 『해외 한국여성의 항일 독립운동』 2006년)과 『성재 이동휘 일대기』(범우사, 1998년)와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년)과 「일제강점기 전일의 생애와 독립운동」(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9집, 2017년), 김규면의 「노병 김규면비망록」(박환, 『재소한인민족운동사』, 국학자료원, 1998년 수록본), 이현영의 「1910년대 사회운동과 김알렉산드라」(부산대 대학원 사회학과 석사학위논문, 2004년 2월),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돌베개, 2015년), 강만길·성대경의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년)을 참조해서 썼다.

 

*** 김명환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사화집 『시여 무기여』에 시 「봄」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월간 『노동해방문학』 문예창작부장, 2000년 ‘철도노조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기관지 『바꿔야 산다』 편집장, 2007년 철도노조 기관지 『철도노동자』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시집 『첫사랑』, 산문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 『볼셰비키의 친구』, 『삐라의 추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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