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호] 정동적 전회를 통해 시도되는 미디어 문화연구 새로운 패러다임 / 이도훈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6 12:40
조회
3435
정동적 전회를 통해 시도되는 미디어 문화연구 새로운 패러다임
『정동의 힘』 서평


이도훈(문화연구자)


* 이 글은 2016년 3월 3일 웹진 「문화 다」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inte_text&ps_boid=96


문화적 전회로부터 정동적 전회로

이토 마모루의 『정동의 힘 : 미디어와 공진하는 신체』(이하 ‘정동의 힘’)은 최근 문화연구 진영을 중심으로 각광받고 있는 ‘정동적 전회(affective turn)’의 흐름을 잇는 책이다. 최근 갈무리 출판사에서 번역된 이 책의 부제는 ‘미디어와 공진하는 신체’이며, 그 표지에는 “from cultural turn to affective turn(문화적 전회로부터 정동적 전회로)”라는 글귀가 인쇄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이토 마모루의 이론적, 개념적, 실천적, 그리고 학제적 위치를 대략적으로 가늠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정동적 전회라는 새로운 관점에 입각해 오늘날의 뉴미디어가 발산하는 정보 속에서 개개의 주체 혹은 신체가 공진하면서 만들어내는 집합적 힘의 가능성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연구란 무엇이며,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련의 전회들을 시도해 왔는지 질문을 던져 봄직하다. 간학제적 학문을 지향하면서 시작된 문화연구는 그 발생과 기원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식론적 및 방법론적 전회를 꾀해왔다. 문화 연구는 특정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국면 속에서 동시대의 위기를 진단하고, 한 시대가 긴급하게 요구하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긍정적인 사회 변화를 견인하는 역할을 자임해왔다. 학계 내의 이단이라는 손가락질을 감수하면서도, 학문이 한 시대와 벌이는 긴장의 끊을 놓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문화적 전회(cultural turn)’로부터 출발한 문화연구는 마르크스주의의 상부/하부 구조의 환원적 도식을 비롯해 문화를 나누는 고급/저급의 이분법적 구분 틀을 부수고 아래로부터 창발하는 하위문화들에 주목하였다. 이후 자본, 인구, 정보의 이동의 범위가 무제한적으로 확장되면서 국민국가의 경계가 흔들리는 시기 즉, 글로벌 네트워크 시대를 분석하는 데 주목하였다. 이 때 시도된 것이 ‘공간적 전회(spatial turn)’와 ‘미디어적 전회(medial turn)’였다. 보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 제동을 걸기 위해 ‘경제적 전회(economic turn)’는 물론, 종례의 감각, 지각, 인지에 대한 이해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정동, 다시 말해 신체를 비롯한 물질들 사이에서 촉발하고 촉발되는 정동을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서 파악하기 위해 ‘정동적 전회’를 시도하고 있다.

정동적 전회는 문화연구 진영 내의 자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토 마모루를 비롯해 대다수의 문화연구자들은 기존의 문화연구가 텍스트 해석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데에 한목소리를 낸다. 그들은 비록 수용자의 능동성과 저항성을 담보하더라도, 재현된 텍스트의 의미 해석은 수용자를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의 수동성에 가둘 뿐이라며 기존의 문화연구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적 성찰을 바탕으로 확장된 문화연구의 범위에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감각적 영역을 포함한다. 그것은 또한 브라이언 마수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각에 앞서 존재하면서 결코 의식될 수 없는 ‘내장지각(visceral perception)’, 또는 ‘순수지각(pure perception)’이라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정동을 중심으로 이론적으로 도약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은 물질과 비물질, 신체와 정신, 인간과 동물, 기호와 이미지의 구분을 넘어서 끊임없이 변용되고 생성되는 것으로서의 모든 이미지, 생명체, 그리고 사회를 읽어내려는 의지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모델 제시 : 정동, 정보, 공중

정동을 이론적 중핵으로 삼고 있는 『정동의 힘』의 미덕을 꼽으라면 단연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쇄신에 있다. 저자인 이토 마모루는 들뢰즈와 가타리에서부터 브라이언 마수미로 이어지는 정동의 철학적 개념을 초석 삼아 일본 문화연구 진영의 선행연구에서 정립된 일련의 정보 개념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이어서 사회학자인 가브리엘 타르드의 모방과 공중이라는 두 주요 개념을 통해서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정립한다.

저자는 기존의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단선적인 의사소통 구조를 넘어서려고 한다.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오늘날 “누구나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을 넘나들며” 정보를 확산하고, 그 “정보 자체가 계속 변용하면서 이동하는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에 있다(14쪽). 이러한 미디어 환경에서 최초 정보의 생산자나 최초 정보의 형식과 내용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저자는 오늘날 미디어 환경의 특징으로 정보의 고속성, 확산성, 산일성(散逸性)을 꼽는다. 쉬운 예로, 오늘날 SNS에서 실시간으로 퍼지는 입소문이 기존의 뉴스의 속도를 앞지르는 현상, 인터넷의 다양한 콘텐츠들이 퍼지고 흩어지는 와중에 수용자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용되는 전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뉴미디어에서 정보 개념은 정동의 테두리 안에서 파악되고는 한다. 이토 마모루는 정보가 물질과 에너지가 이루는 정성적 그리고 정량적 패턴이 아니라 생명체의 활동에 따라서 생성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그가 말하는 정보는 철학적으로 세계의 거울로서의 모나드에 가까우며, 이러한 정보는 “우리의 마음에 ‘분명한 형태를 갖지 않지만’, ‘질료’가 새겨지고 각인되어 생겨나는 ‘형상’”(60쪽)과 같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저자가 정보와 정동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스피노자와 들뢰즈를 따라서 두 가지 측면에서 정동을 논의한다. 하나는 “affectio=변용”으로, 그것은 물체적 그리고 신체적 흔적이자 관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인 “affectus=정동”으로, 그것은 신체나 정신의 어떤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정동은 감정과 구분될 필요가 있다. 현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정동 연구들에는 사랑, 기쁨, 슬픔, 혐오 등을 다루는 감정 연구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마사 누스바움이 자신의 『감정의 격동』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듯이, 감정이란 “세계를 가치에 따라 판단하는 방식”으로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정동 개념과는 차이를 갖는다. 이토 마모루 또한 감정이 판단을 요구하는 반면, 정동은 신체가 감각을 통해서 판단하고 반응하기 이전에 발생하는 ‘내장 감각’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밤중에 등 뒤에서 브레이크 소리를 듣고 반응할 때, 우리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를 판단하기 전에 식은땀을 흘리거나 몸이 먼저 반응한다. 즉, 정동은 감정보다 더 빨리 도착하는 무엇이다.

정동으로서의 정보 또한 기습적으로 다가와 우리의 심신을 변화시킨다. 이때 저자는 ‘무엇이 전달되고 있는지’보다는 ‘무엇이 생성되고 있는지’에 집중한다. 그는 크게 개인과 집단으로 나누어서 미디어를 통해서 신체적 그리고 사회적 변용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저자는 브라이언 마수미의 논의를 따라서 부지불식간에 판단하고 행동하는 운동선수의 탁월한 신체적 역량을 검토한다(3장 참고). 예컨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처럼 감각적인 드리블을 자랑하는 축구선수의 신체적 역량이 촉발되면, 관중이나 청중의 신체 안에서는 이미 의식에 앞서서 정동이 현실화된다. 한편, 저자는 미디어로부터 파생되는 변화가 집단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한 집단적 변화의 사례들은 주로 일본의 스포츠 경기 중계(4장 참고)와 다국적 언어로 방송되는 지역 라디오 방송(6장 참고)을 예시로 삼아 설명되고 있다.

이처럼 『정동의 힘』의 논의는 미디어로부터 발산되는 다양한 정보들로 인해 발생하는 결집된 사회적 힘으로 그 논의가 귀결된다. 미디어와 공진하는 주체는 일반 대중이지만 그들이 변화된 결과는 공중이다. 일찍이 가브리엘 타르드는 익명의 개개인의 집합으로서의 군중과는 달리 공중은 육체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정신적 공동체’를 이룬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초창기 신문을 읽으면서 카페, 선술집, 길거리 등에서 여론을 조성한 공중으로부터 근대적 주체의 자율성을 내다보았다.

저자인 이토 마모루 또한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같은 올드 미디어를 비롯해 오늘날 인터넷 공론장, 소셜 미디어 등과 같은 뉴미디어에서 창출되는 ‘정신적 공동체’에 주목한다. 그는 미디어를 매개한 가상적 공동체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힘에 기대를 건다. 물론 그 힘은 양날의 검처럼 쓰일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의 변화무쌍한 미디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고 그것을 어떻게 벼려서 보다 더 가치 있게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토 마모루의 『정동의 힘』 이 고민하는 바이다. 저자는 개척해야 할 것으로서의 우리의 미래가 동시대 미디어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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