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호] 『불타는 유토피아』 안진국 저자와의 인터뷰

인터뷰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3-12-29 17:52
조회
189
 

『불타는 유토피아』 안진국 저자와의 인터뷰



Q. 이 책을 통해서 ‘디지털’ 기술이 예술에 가져온 변화가 참으로 크다는 감각을 새삼스럽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변화들이 두드러지는지 독자들을 책의 내용으로 안내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사례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디지털 기술은 디지털아트와 인터렉티브 아트 등과 같은 뉴미디어아트를 불러왔습니다. 또한 예술의 기록과 재생, 공유, 보관 등도 간편하게 했습니다. 그 외에도 작업 과정에서 여러 편리함을 주고 있습니다. 디지털은 예술에서 여러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에서 긍정적인 부분보다는 비판적 시각에서 예술과 디지털 기술의 관계에 접근했습니다.

디지털 기술은 복제, 변형이 손쉬워서 예술가의 작업 방식을 바꿨습니다. 예전에는 손으로 종이에 직접 작업의 예비 드로잉을 했었는데, 이제는 디지털 프로그램에서 복사, 붙이기, 편집, 삭제 등으로 하고 있습니다. 작업 중간에 실수하는 부분이 있으면 바로 작업을 뒤로 돌려 실수 이전으로 돌아가 다시 작업합니다. 그렇다 보니 완벽한 이미지가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실수와 오류는 어찌 보면 예술의 정수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기술을 예술가가 사용하면서 그런 점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본력이 없는 신진예술가들은 컴퓨터를 통해서 완벽하게 작업하여 그것을 다시 물질성 있는 작품으로 그립니다. 그들에게 실수나 실패는 비용이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술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만드는 과정 중에 순간적으로 나오는 감각적 표현입니다. 완성과 같은 완벽한 예비 작업은 이러한 표현을 소멸시킵니다.

또한 디지털의 편의성과 자본주의의 경제성이 결합되면서 예술가를 1인 기업가로 만들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작업 제작뿐만 아니라,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작품 사진을 올리고, 자신의 전시 보도기사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인디자인과 같은 프로그램을 배우고 있습니다. 작업 외에 자신을 메니지먼트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것이 비단 예술계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디지털 기술은 예술가의 작업할 시간을 끊임없이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작업의 변화를 보자면, 모든 사람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평등하게 작품에 접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웹아트나 넷아트의 기대는 현재 포스트-인터넷 아트라는 형태로 뒷걸음질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비물질적 디지털 데이터를 온라인에서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하겠다는 이상은 퇴색되고, 미술제도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커지면서 온라인에 떠도는 비물질적 이미지들을 물질화시켜 그것을 미술관이나 갤러리와 같은 미술제도권에 전시하는 방식으로 변하게 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도 예술에서 중요한 화두입니다. 인공지능은 디지털과 빅데이터, 딥러닝 알고리즘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현대 미술에서는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방식을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인공지능이 창의력을 가지는지 의문이지만, 기능적으로 인간만큼, 혹은 인간보다 더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을 단순히 도구로만 활용해야 할지, 도구 이상의 인간 조수(비서)로 활용해야 할지, 아니면 인간과 동등한 새로운 종의 예술가로 인정해야 할지 예술계에서는 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합니다. 더불어 인공지능이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감상자로서 인공지능이 가능한지에 대한 기술적, 인지과학적, 윤리적 논의도 필요합니다.


Q. 책의 여러 곳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의 예술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변화들을 조망하고 분석하고 계십니다. 코로나19는 예술계에 충격이었는지요? 팬데믹 이후의 예술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이후에는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 나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코로나19는 예술계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공연예술 분야가 가장 심한 타격을 받고 있지만, 시각예술계도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올라가면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빗장을 걸어 잠글 수밖에 없고, 선별적 개방과 폐쇄가 거듭 반복되면서 미술 전시를 찾는 감상자의 수가 줄더니, 지금은 아예 찾지 않는 상황에 이른 듯 보입니다. 이것은 개인전으로 자신의 작업 세계를 보여주던 예술가에게는 심각한 타격입니다. 미술관과 같은 기관들도 타격은 심합니다. 이런 기관의 목적에는 미술작품의 수집과 연구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주요한 활동이 전시와 교육입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이 활동이 거의 마비된 상황입니다. 그렇다 보니 이 활동을 온라인에서 풀어보고자 여러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유튜브로 전시 투어 영상을 올린다거나 전시장을 그대로 스캔하여 온라인 가상갤러리로 구현하는 등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온라인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방식으로 변하는 것은 매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은 그 크기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데, 스마트폰 화면에서 보는 작품과 대형 티브이로 보는 작업은 같은 작업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작품이나 장소가 지닌 분위기와 상호 작용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할 텐데, 온라인 화면만 보는 것은 이것이 제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미술관 전시는 이런 방식의 온라인 전시로 대거 이동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 이전부터 서서히 진행되어왔는데, 코로나19로 급격화되었을 뿐이니까요. 이제 미술관이나 갤러리와 같은 물리적 공간이 왜 필요하냐는 식의 말이 나오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변화에서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에 대한 저의 짧은 생각을 책에 담기도 했습니다.


Q. 일반적으로 저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만병통치약처럼 생각되곤 하는 ‘저작권’이 사실은 저자(작가)가 아니라 “테크 기업과 법률가, 불로소득 플랫폼”을 살찌우는 제도라는 지적이 날카로웠습니다. “이제 저작권 전쟁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라는 문장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떤 이는 ‘창작’의 시대는 지났고, 지금은 ‘제작’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것을 만들더라도 그것은 다른 것에 빚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예술가가 생각하여 예술이 공유재로서 기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저는 지금도 심각하게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술가가 작업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들어낸 작품을 손쉽게 도용하거나 복제하는 것을 그저 디지털 시대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하면서 시대적 환경을 두둔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시대가 변한 것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을 수도 없고요.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더 연구하고 생각하고 다른 분들과 더 폭넓게 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저작권 전쟁의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은 도용이나 복제 등에 관한 작은 범주의 논의가 아닙니다. 저작권에서 보이지 않는 부류가 큰 이익을 가져가는 시스템을 만드는 법과 이를 이용해 불로소득을 가져가는 플랫폼을 저작권 논의의 테이블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저작권의 장에는 창작자와 복제자가 있고 그들 사이의 논쟁처럼 단순해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저작권법을 갱신하는 법률가가 있고, 그 법률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기업가가 있습니다. 저작권은 단순히 저작자의 권리를 넘어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업은 저작권을 사들여 저작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득을 얻고 있습니다. 플랫폼은 저작자와 사용자 사이에서 거래를 맺어주면서 저작자보다 더 큰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저작권 전쟁에서 보이지 않았던 세력들을 드러내고 그들이 하는 행위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전쟁의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Q. 이 책은 예술장을 포함하여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커머닝’, ‘커먼즈’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커머닝 예술 행동’이라는 조어가 인상적이었고, 어떤 예술 행동이 커머닝일 수 있을지 상상력을 자극하는 말이었습니다. ‘커먼즈’나 ‘커머닝’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그 개념이 무엇인지와 예술과의 관련 속에서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는 말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책에서는 서술하지 않았지만, 1968년 미국의 생태학자 개릿 하딘의 짧은 에세이 제목입니다. 공유지는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목초지나 바다, 산 등을 의미하는데,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과도하게 그것을 사용한다면 황폐해지고 전체의 이익을 파괴해서 공멸을 자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글을 반박하면서 하딘의 가상의 초원은 진입이 개방된 열린 접근 체제(오픈 액세스의 비극)이지, 공유지가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엘레노어 오스트롬입니다. 그는 『공유의 비극을 넘어』라는 책에서 하딘을 반박했습니다. 개럿 하딘 자신도 ‘관리되지 않는 공유지의 비극’이라고 제목을 달았어야 한다고 인정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논쟁을 거치면서 공유지는 공동이 함께 개입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높아졌습니다. 이 ‘공유지’가 바로 영어로 ‘커먼즈’로, ‘공유지’라는 한국어가 뜻을 너무 한정시킨다는 생각에 ‘공유재’나 ‘공통의 것’, ‘공통장’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 뜻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영어 그대로 ‘커먼즈’라고 사용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커머닝은 공통의 것으로 잘 조직하기 위해 개입하고 관리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예술도 어떤 측면에서 ‘공유재’, 즉, ‘커먼즈’의 속성이 있습니다. 예술이 사회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인류 공통의 난제가 이곳저곳에서 등장하고 사회시스템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술은 상상력으로 그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나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커머닝 예술 행동’이란 공동의 이익을 위한 예술의 사회적 역할의 한 단면입니다. 모든 예술이 어느 정도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지만, 커머닝 예술 행동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행동하는 예술을 의미합니다. 예술은 기존 질서가 가지 않았던 길을 상상하고 실험하는 장입니다. 그래서 논리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상상력을 자극하고 대안의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커머닝 예술 행동은 예술적 상상력을 예술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공통의 것으로 조직하여 대안적 예술을 형성하거나 누리는 예술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우리 시대에 ‘데이터’는 예술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데이터는 예술에서 큰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작품이나 작가를 분류하여 큐레이션하는 것이 이제는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작품이나 작가의 데이터가 풍부해야 합니다. 그렇다 보니 다다익선처럼 많은 작품이나 작가, 혹은 관람객 반응에 대한 데이터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있습니다. 이런 데이터주의(다타이즘)가 여러 모양으로 예술 작업이나 전시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책에서는 빅데이터의 사생아로 아카이브를 보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미술계에서는 아카이브 전시가 부쩍 늘었고, 꾸준히 열리고 있습니다. 수집에 대한 열병을 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모으고 분류하는 것이 예술의 중요한 기능처럼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물론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맥락을 밝히는 데 중요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되기 시작한 시기에 아카이브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자료의 수집, 검색, 축적이 손쉬워짐에 따른 것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근대가 수평적인 병렬 구조의 ‘아케이드’ 시대(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였다면, 현대는 수직적인 축적 구조의 ‘아카이브’ 시대(고층 빌딩, 멀티플렉스)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아마도 계속 데이터를 수집할 것이고, 그 데이터를 아카이브 전시 형태로 드러내거나 색상별로, 주제별로, 구도별로 분류하고 통계를 작성해 어떤 규격화된 결과 자료를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작업을 하는 예술가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고, 어쩌면 작가들의 상상력을 훼손시킬지도 모를 일입니다.

데이터 수집은 한 번 가속이 붙으면 멈출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해온 결과물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술에서 데이터 수집은 계속될 것이고, 수집된 데이터는 예술을 재단하는 데 사용될 가능성이 큽니다.


*


불타는 유토피아


※ 편집자 주 : 이 인터뷰는 <불타는 유토피아> 보도자료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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