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호] 『광장과 젠더』 소영현 저자와의 인터뷰

인터뷰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3-12-29 18:00
조회
209
 

『광장과 젠더』 소영현 저자와의 인터뷰



Q. 이 책은 한국 근현대사 속 광장의 통치술을 추적하면서 이제는 하나의 광장이 아니라 ‘광장들’을 사유하고 가시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읽혔습니다. 이 책이 말하는 ‘광장’은 어디입니까? 무엇입니까?

구체적인 하나의 사례를 말씀드리자면, 2016년의 광화문 광장과 광장 내의 ‘페미존’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곳의 체제를 중지시키고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자리가 광장이라면, 광장을 구성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내부의 집합감정입니다. 그런데 집합감정은 균질적인 힘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들여다보면 방향성도 지향도 다른 힘들의 충돌이자 공존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광장 내부에 서로 다른 집합감정의 흐름들이 있는 것이고 그것 사이에 권력의 차이가 존재하며, 그 권력의 차이에 대한 관심이 광장 자체의 지향이나 방향성을 바꾸기도 하는 것이죠. 따라서 광장에 대한 관심은 내부의 서로 다른 힘들에 대한 것으로 집중되어야 합니다.

조금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광장은 지금 여기이자 동시에 지금 여기의 다음에 오는 미래의 공간입니다. 광장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허용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자리)가 보장된 곳으로,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 자리는 처음부터 확보되지도 제대로 보장되지도 않습니다. 목소리를 내거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고요. 권리도 권력의 위계 속에서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권리가 아닌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고요. 사실상 현실이나 사회를 구조화하고 작동시키는 힘은 실제로는 권력관계 속에 놓여 있고 그런 의미로 언제나 위계화되어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위계를 모두 철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나키한 사회나 현실을 원하는 것은 아니므로) 사회라고 하는 체계 내부 즉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원으로 좀 더 눈을 돌려야 하고 그 구성원의 자리와 목소리를 더 많이 보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여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믿는다는 점입니다. 모든 자리를 보장하는 일, 모든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일, 이것은 사실 아무런 갈등도 없거나 평화롭기만 한 상태는 아니겠지요. 수많은 갈등이 지속될 것이지만, 그러한 갈등이 사라지는 시공간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광장을 채우는 ‘광장’들은 지금 현실에서는 ‘광장’이라기보다, 있지만 보이지 않거나 지워진 혹은 잊힌 골목일 수도 지하통로일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광장은 사회이고 현실이며 삶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정치투쟁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장이 정치적 장이라고 할 때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광장에 대한 고민은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기도 합니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대해 계속 생각해왔는데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 아니라, 수행성의 차원에 관한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시켜나가는 것이라는 점, 정치체가 아니라(정치체이기도 하지만) 실천이고 운동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왔습니다. 한국사회가 직면한 많은 문제들이 신자유주의로 구현된 전지구적인 경제 상황과 무관하지 않지만, 그것은 경제 문제와 결합한, 경제 문제로 가시화되는 정치적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광장에 대한 관심은 민주주의의 열망과 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Q. 한국사회에서 광장과 젠더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었고, 앞으로는 이에 대한 어떤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랫동안 소수자와 타자에 대한 연구를 해왔습니다. 청년, 학생, 속물, 잉여, 하층민, 하녀, 식모, 어멈, 촌부, ‘위안부’, 범죄자, 팜므파탈, 디아스포라, 탈북여성, 이방인, 결혼-이주 노동자 등, 그들의 얼굴을 발견하고 자리를 복원하고자 해왔습니다. 과거의 기록물들, 다양한 형태의 아카이브에서 그들은 흩어진 조각 정보로만 발견되고 그 자체로 온전한 모습을 발견하기 어려워서 재현이나 복원 자체가 언제나 고민거리였습니다. 그런 고민은 오랜 축적의 시간 끝에 점차 그들의 자리를 배치하는 통치술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해갔습니다. 시야의 확장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러한 이동은 버틀러가 환기한 것처럼 재현의 방법론에 대한 통찰이 결국 재현을 허락한 범주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직시(혹은 돌파?)해나가고자 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부장제를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전근대에서 근대 이후로 신분적 위계구조는 해체되지만 노동하는 주체의 정상성을 중심으로 계급적, 젠더적, 지역적 위계구조가 재편되고 강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대적 자본주의가 가부장제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변형시키면서 민족-엘리트-남성 중심의 정치체를 구축했다고 할 수 있는데, 적어도 한국사회를 두고 말하자면, 이때 그러한 체제를 구축하면서 규율과 조절과 배치의 대상이 된 것이 바로 하위-여성-감정(정념)과 같은 것들이라는 판단입니다. 말하자면, 차별과 배제를 사회적으로 구조화하는 광장의 통치술이 젠더 회로를 거치면서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 결과로 사회적 타자‘들’ 내부의 차이가 지워지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 봉합술을 해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판단인데요. 젠더 회로를 거치고 있지만 표면에서는 혐오와 같은 차별화 감정으로 가시화되고 있다고 봅니다. 새로운 광장에 대한 열망을 가시화하거나 다른 공동체에 대한 상상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표면에서는 감정을, 그 이면의 작동인 젠더 회로를 해부하는 비판적인 시선이 요청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젠더 연구자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듯, 젠더는 공기처럼 편재하지만 특정한 사회적 조건에서만 작동하는 정치적 산물입니다. 젠더는 그 자체로 가시화되지 않으며, 반대로 말하면 젠더로 가시화된다고 할 때 젠더만의 문제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위계와 차별의 다른 기제들이 교차적, 복합적으로 얽혀서 가시화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장의 젠더에 대한 관심은 광장의 젠더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광장을 둘러싼 위계와 차별의 기제들을 총괄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 관점 전환이나 진전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이러한 관점이 좀 더 정교해질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우리 시대에는 감정, 느낌, 정동, 정서, 감성에 대한 관심이 학계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학계에서 문화 연구와 페미니즘, 젠더 연구가 감정과 정동 연구로 이동해간 경향이 있습니다. 거시적인 접근과 미시적인 접근, 구조적인 분석과 표층적/일상적 분석이 여전히 중심-주변으로 위계화되는 이항대립적 인식론의 틀에서 온전히 벗어나기 어려우며, 더 나아가자면 근대 이후에 대한 상상이 어렵다는 차원에서, 그것 너머에 대한 접근과 이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융복합적 연구에 대한 요청이 이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학계의 경향 변화가 학계만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학계는 현실과의 관련성을 고민하지 않으면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고사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학계의 감정에 대한 폭발적 관심의 증가는 사회현실에서의 요청에 대한 응답의 성격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우리의 삶이 빠르게 변화한다고 할 때, 거시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전지구화가 급속도로 가속화되고 과학기술과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삶과 그 조건이 바뀌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요. 그렇다고 그것이 전지구화와 과학기술-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일방적인 영향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고, 지구적 차원에서 상호적으로 영향을 받는 경향이 점점 강화되면서 예측 불가능성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통과하면서 전 세계가 절감하게 되었듯,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만들어지는 지구적 차원의 재난의 상황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데, 그것이 지금까지의 방식, 국가나 민족, 지역, 이념, 정치체 등을 중심으로 한 해법으로는 문제의 중심에도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국사회의 문제로 좁혀보면, 신자유주의 20년 이상의 시간이 축적되면서 표면적으로만 보면 세계 바깥은 없고 탈출 가능성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끊임없이 변화하는(더 나빠지는) 한국사회에서 사회와 현실을 읽을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이론이나 인식틀은 사실 없다고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아직 무언가로 분명한 형체를 마련하지 않은 흐름들, 움직임들, 감정, 느낌, 정동, 정서, 감성에 대한 관심은 증폭될 수밖에 없는데요. 뚜렷한 적대도 가시화된 적도 없는 상황에서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의미화되는 힘의 흐름들만 존재하고, 그것들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채로 쉽게 다른 것으로 바뀌기도 하고요. 결국 현실 사회가 직면해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감정, 정동 등에 대한 관심을 확장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에 대한 포착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인문학자가 떠맡아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Q. 세월호에 대한 장은 6년 만에 10.29를 맞이한 한국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처럼 읽히기도 했습니다. 참사 24일 후에야 유가족들의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4.16과 다른 점들이 즉각 포착되기도 합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문학장을 비롯하여 한국사회에 이미 축적된 고민과 사유들이 다시 10.29에 직면한 우리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앞서 실천과 운동이라고 언급했지만, 그것이 실질적인 행위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4부 1장 「차마 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에서도 언급했듯이, 참사에 대한 문학적 개입은 그것에 대한 재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지속적으로 사유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사는 가해와 피해의 구도로 납작해질 수 없으며 그렇게 만들어져서도 안 된다고 보는 것이죠. 사법적 정의의 실현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참사와 같은 사건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가해와 피해의 구도에 잘 들어맞지 않는 자리, 방관이나 목격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참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요. 우리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고통에 대해서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고, 연루 속에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사유하거나 성찰해야 하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 시인, 소설가, 비평가가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한 개입을 시도했고, 그것이 이후에 쓰거나 읽는 자리에 깊이 영향을 드리웠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문학이란 결국 현실의 텍스트화라는 점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문학이 다른 현실의 가능성을 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직접적인 개입과 함께 우회적인 개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중요하며, 문학장을 포함한 한국사회의 축적된 고민이 은폐된 형태의 집합감정으로 한국사회의 저변에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힘의 형태로 존재하는 집합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이곳의 우리의 문제를 처음부터 반복하는 오류를 벗어나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Q. 이 책이 지향하는 포스트 민주화 시대의 상이 궁금합니다. 이에 대해 부연설명해주실 수 있을지요? 그리고 최근에 선생님께서 하시고 계신 작업, 최근의 관심사, 이 책의 고민들을 어떤 작업들로 이어가고 계신지 소개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포스트 민주화 시대의 상이라고 하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기대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언제나 지나간 것들, 지나갔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한 재고 속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식으로 말하자면 미래 연습을 지속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소수자, 타자에 대한 관심이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서 지속되어왔다면, 포스트 민주화 시대에 대한 논의는 한국사회에서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민주화 논의와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한국사회의 젠더적 재편과 섹슈얼리티 차원의 재편의 면모와 그 여파, 그것을 위한 규율화 원리의 구축과 감정, 정동, 정념 등으로만 상상 가능한 것들의 배치들을 살피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 식민지기를 중심으로 여성의 범죄가 발명되는 장면, 성지식, 성교육, 성문제가 뒤얽히는 장면, 근친상간과 팜므파탈 장치가 마련되고 작동되는 과정 등에 대해 살피면서 한국사회가 젠더적, 섹슈얼리티적 차원의 전면적 재구축이 이루어졌음을, 그것이 근대 체계로의 변모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음을 살피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젠더 갈등이 정치적 보수화가 강화한 면모가 아니라 근대 이후 광장의 통치술의 결과물로서 관습과 일상으로 굳어진 것들이자 구성된 것이라는 점을 밝히려고 하는 작업입니다. 앞으로 해방 이후 전쟁기의 면모까지를 살필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덧붙여, 포스트 민주화 시대의 상 관련하여 최근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문제는 장애, 질병, 피해, 고통 관련된 것들입니다. 좀 더 유동적이고 우연적이며 신체적인 면모에 대한 관심이라고도 할 수 있고, 젠더적, 섹슈얼리티적 사회 재편을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광장과 젠더


※ 편집자 주 : 이 인터뷰는 <광장과 젠더> 보도자료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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