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반복> 머리말_발제문

작성자
영수
작성일
2022-03-06 10:25
조회
725
<차이와 반복>은 들뢰즈가 흄, 스피노자, 니체, 프루스트를 공부한 후 열정적으로 쓴, “[철학사가 아닌] 철학을 한” 책이다. 그는 그동안 했던 모든 것이 이 책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차이와 반복>의 짧은 서문(머리말)은 그와 반대로 본문의 한 챕터보다도 긴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서문을 연상시킨다.
“서문은 맨 마지막에 읽어야 한다”(헤겔)지만, 이는 맨 마지막에 쓰이는 서문과 같이 결론이 책 전체를 요약하고 정리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철학 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헛된 의도’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이 책- 또는 ‘차이’와 ‘반복’이라는 주제-이 나오게 된 프랑스의 시대적/사상적 상황(1968년)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존재론적 차이의 철학으로 더 나아가고 있던 하이데거의 철학; 공존의 공간에 변별적[차이를 만드는] 특성들을 분배하는 것에 토대한 구조주의; 가장 추상적인 성찰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기법에서도 차이와 반복을 맴도는 현대 소설; 모든 영역에서 무의식, 언어, 예술의 힘으로서 나타나는 고유한 역량을 가진 반복. 이 모두의 사상적 배경을 들뢰즈는 “반-헤겔주의”로 집약해 일컫는다.
차이와 반복이 동일자와 부정적인 것, 동일성과 모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차이는 동일자에 종속되는 한에서만 부정적인 것을 함축하고 모순에 이른다.
동일성의 우위가 재현의 세계를 정의하고 있었다.
현대적 사유는 재현의 파산과 더불어 탄생했다.
동일성의 소멸과 더불어, 동일자의 재현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모든 힘들의 발견과 더불어 태어난 것이다.
이제 동일성은 흉내 낸 것에 불과하며, 차이와 반복이라는 보다 심층적인 유희가 만들어낸 광학적 ‘효과’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차이를 즉자적으로/그 자체로 사유해야만 하며, 차이소들different 간에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해 사유해야만 한다.
이는 차이나는 것들을 동일성the Same으로 환원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통과하게 만드는 재현의 형식들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한 것이다.

현대적 삶의 특징은, 우리가 기계적이고 천편일률적인 반복들에 직면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반복들은 어떤 작은 차이, 변이/이형variations, 변양modifications을 추출할 뿐이다.
반면 자리를 바꿈(전치)을 통해 차이를 살아나게 하는 반복들, 즉 비밀스럽고 위장한 채 숨어있는 반복들이 있다.
반복은 허상simulacra 속에서 이미 반복들을 이용하며, 차이는 이미 차이들을 이용하고 있다.
분화소diffenrentiator가 스스로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다면, 반복은 스스로를 반복한다.
삶은 차이가 분배되는 공간에 모든 반복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들뢰즈는 이 책에서 부정 없는 차이 개념과 반복 개념을 다루려고 한다고 말한다.
순수한 차이를 둘러싼 개념들<-> 복합적 반복을 둘러싼 개념들. 서로 얽힘. 다시 연관되고 합쳐진다.
차이의 영구적 발산과 탈중심화는 반복 내에서 자리를 바꾸고 위장하는 것과 밀접하게 상응하고 있다.

동일자에서 벗어나 부정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 차이를 촉발하는 데에는 또 다른 위험이 따른다.
가장 큰 위험은 순수 차이들이 아름다운 영혼의 표상들로 전락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아름다운 영혼의 표상들로 전락한 순수 차이들은 피 흘리는 투쟁들과 거리가 먼,
서로 연합하고 화해할 수 있는 차이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한 순수 차이는 “서로 다르지만, 대립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철학 책이 한편으로는 추리소설이 되어야 한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공상과학소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추리소설이 개념이 현전의 반경을 통해 국지적local 상황에 개입해 해결하는 것이라면, 공상과학소설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다르게 쓰는 것을 말한다.
개념들은 ‘드라마’(극화)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특정한 ‘잔혹성cruelty’을 통해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영역을 가진다. 개념들은 개념들 사이에서 정합적이어야 하지만, 그 정합성은 개념들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그 정합성을 다른 곳에서 끌어와야만 한다.

들뢰즈의 경험론이란 이제까지 보거나 듣지 못했던 개념들에 대한 지극히 광적인insane 창조를 시도하는 것이다.
경험론은 개념의 신비주의이자, 개념의 수학주의이다.
경험론은 개념을 어떤 마주침의 대상으로, 그리고 지금-여기로 다룬다.
나아가 개념을 지치지도 않고 항상 새롭게, 다르게 분배되는 ‘지금들’과 ‘여기들’로 등장하는 에레혼erewhon으로 다룬다.
들뢰즈의 [자칭] 경험론자들은 개념들을 ‘인류학적 술어들’을 넘어서 있는 사물들 자체로 보며,
자신은 개념들을 만들고, 다시 만들며remake, 부순다고 말한다.
움직이고 있는 지평에서, 언제나 탈중심화되고 있는 어떤 중심으로부터, 개념들을 반복하고 분화시키면서 언제나 위치를 바꾸는 어떤 주변으로부터.
현대 철학의 특징은 시간성/무시간성, 역사성/영원성, 특수/보편 같은 양자택일적 선택을 넘어서며,
니체는 시간과 영원보다 심오한 반시대성을 발견했다.
이제 철학은 언제나 반시대적이며, 오로지 반시대적일 뿐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우리 시대에 반하는, 그리하여 우리 시대에 따라 행동하는, 도래할 시대를 위한 철학”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에레혼은 근원적인 ‘부재의 장소nowhere’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위치를 바꾸고 위장하며 양상을 달리해 언제나 재창조되는 ‘지금-여기’를 의미한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다르게 써야할 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무언가 말할 것이 있다고 필연적으로 상상하게 된다.
글을 쓰게 되는 것은 오로지 앎이 끝나는 최전방의 지점에 도달할 때이다.
글쓰기는 앎과 무지를 가르고 또한 앎과 무지가 서로를 변형시키는 경계의 지점에서만 시작된다.
글을 쓰고자 결심하게 되는 것은 오직 이런 길을 통해서이다.

이제 “낡은 스타일”의 철학 책을 쓰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니체처럼] 새로운 철학적 표현 수단을 탐색해야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철학의 탐색은 연극이나 영화같이 새로운 면모를 갖춘 여타 예술들의 기법에 부응해야만 하는데,
철학사는 회화에서 콜라주가 맡는 역할과 유사하다고 들뢰즈는 지적한다.
지금까지 철학사에서 철학의 분신double처럼 기능했던 철학사의 해설은 이제 철학 그 자체의 재현이 아니라, 텍스트가 보여주는 일종의 느림slow motion, 응결, 정지/부동성immobilization 등을 재현해야만 한다.
해설은 대상으로 하는 텍스트뿐만 아니라 해설이 담기는 텍스트 역시 그러한 이중적 실존성을 띠어야 한다.
우리 역시 이 이중적 실존성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텍스트 안에 역사적 주석을 통합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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