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호] 자본과 언어 | 신혜정(정치학 대학원생)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3 10:18
조회
1685
자본과 언어

신혜정(정치학 대학원생)


오랜 시간에 걸쳐 「자본과 언어」를 다 읽었습니다. 경제와 금융에 문외한인 저로써는 이 책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을 긴 시간을 두고 다시 꼼꼼히 읽을 생각입니다. 「자본과 언어」는 분명 오늘날의 한국이 포함되어있는 거대한 세계경제체제의 흐름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현재와 미래의 서書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티안 마라찌는 오늘날의 경제적 상황을 ‘신경제’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합니다. 신경제의 특징은 투기자본 중심의 금융 부문이 경제의 중심이 되는 것, 언어와 언어적 수행을 통해 생산되는 새로운 노동이 지배적인 노동형태가 되면서 노동과 삶의 분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장기간의 변화,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급격한 세계화로 인해 이와 같은 상황은 심화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08년의 미국 발 금융위기 때, 우리는 우리의 노동과 재화 유통에 아주 얇은 끈만을 연결한 것 같은 가상의 체스판으로서의 금융계가 그 모순을 드러낸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모든 문제는 실물경제와 금융자본의 이동 사이의 불균형이 만들어낸 당대의 특수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라찌는 그러한 생각에 반대합니다. 그가 볼 때 2008년과 그 이후에 드러난 신경제적 상황은, 역사적 실수나 우연이 아닌 우리가 걸어온 역사의 귀결입니다.

마라찌는 책 전반에서 그와 같은 역사적 경로를 닦아온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금융조치와 복지국가 축소를 통한 자본주권의 강화를 지적합니다. 이 논의 역시 매우 날카롭고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마라찌의 주된 주장인 언어와 노동의 관계입니다. 신경제의 노동은 언어와 언어적 상징들을 사용하여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입니다. 욕망이 자본화되고, 욕망을 제한하는 물질적 공간이 사이버 스페이스와 기타 다양한 과학기술을 통해 무한하게 확대되면서 이러한 언어적 노동은 중요해졌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언어와 상징들을 내 욕망의 상상을 풍부하게 하는 원료 삼아 소비합니다. 이러한 소비재를 만드는 생산자 역시 자신의 언어와 욕망을 노동하게 함으로써 상품을 만들어내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그들’의 욕망과 연결짓고 확대하는 형태의 노동이야말로 내밀하고도 공통적인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작업이니까요.

이러한 심리적이고 ‘아이디어’ 적인 작업, ‘유연하고 인지적이며 소통적인 노동’이 가져온 상황은 노동 시간의 연장입니다. 신경제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은 점차 상승하지만 그들의 실질적 노동시간에 비하면 임금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고 마라찌는 지적합니다. 오늘날의 노동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항상 일할 수 있는 두뇌와 매체들, 스마트기기를 앞에 두고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 기업의 마케팅부서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지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회사에 몸을 두고 있는 주중 시간에 상품 이름, 또는 좋은 광고 글귀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주말에도 계속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고 합니다.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도, 연애를 하는 동안에도 그의 업무는 계속됩니다. 오늘날의 모든 노동이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마라찌의 말 대로 삶과 일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이러한 노동형태들은 현대의 주된 노동이라고 생각됩니다.

마라찌의 말대로 오늘날의 첨단기술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삶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으로, 가장 특이하고 개인화된 부분으로 간주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아니더라도 오늘날의 ‘혁신적인’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노동은 거의 언제나 자아실현이자, 가치 실현입니다. 마라찌는 젊은이들을 채용하는 기준이 ‘적성’, ‘적응성’, ‘잠재력’ 등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오늘날의 한국에서 구직기간을 겪은 젊은이로써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언어 한마디는 이러한 상황과 많은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타인의 욕망의 현현을 소비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가치를 향한 욕망의 실제가 되어서 노동력으로써 소비되는 것은 모두 언어적 작용입니다. 그런데 마라찌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이들의 언어는 관습적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공동체에 통용되고, 진리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 관습적인 언어는 시장의 참여자들을 ‘합리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명령어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전반이 이러한 관습적 명령의 힘을 지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소비자들의 욕망과 연결지어 상품을 제작하고 광고를 선보이는 노동자들은 이러한 관습 명령어의 영리한 프로그래머들입니다. 주식시장의 동향을 몇 마디 말로 좌우하는 그린스펀 같은 사람들과 그 말을 통해 자신의 투자경로를 빠른 속도로 변경하는 투자자들 역시 그러한 관습 언어의 훌륭한 사용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세상의 흐름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즉 이들은 자신이 쓰는 언어가 진리적임을 자신하고 있으며, 또한 이들이 형성하는 일반지성적인 여론이 세상의 경제적 흐름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어떤 발화가 시장 흐름을 좌우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경제적/사회적 상황이 노동으로서의 언어작용에 좌우된다는 마라찌의 지적은 그러므로 무서운 면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 흐름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들을 수행하는 언어들은 자본주의의 관습 명령어입니다. 문제의 지적과 대안의 제시는 같은 언어 안에서 순환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경제상황의 문제들을 많이 알고 있고 심지어 체감하면서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마라찌의 지적대로 현실의 언어들 속에서 한 개인으로서 소통하며 살아가길 원하고 그렇게 생존할 수 밖에 없는 인간적 상황 때문에, 그리고 다른 소통의 길을 열어주는 새로운 언어가 없기 때문은 우리는 그렇게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구, 아니 체스판을 깨는 것은 바로 관습의 위기입니다. 다른 관습을 선택하고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라찌와 여러 지성들이 강조하는 ‘다중’의 흐름입니다.

서평을 마무리 질 단계에 오니 제 금융이해의 부족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자본과 언어」는 지금 나와 벗들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에 대한 적절하게 지적하고, 우리가 휘둘리고 있으면서도 안주하는 자본주의의 상황을 정교하게 설명하고 있기에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 눈이 가는 책입니다. 무엇보다도 역할에 너무나도 충실한(?) 오늘날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정치와 철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바탕으로 우리 삶의 타자가 아닌 하나의 주거 차원으로서 경제상황을 분석하는 저자의 능력에 감탄할 뿐입니다. 조만간 책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또 하나의 서평을 남기고 싶은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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