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호] 자본과 언어, 자본과 노동 | 배재훈(청년유니온 조합원)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3 10:25
조회
1347
크리스티안 마라찌, (2013) 『자본과 언어』, 갈무리 출판사 서평
<자본과 언어, 혹은 자본과 노동>

배재훈(청년유니온 조합원)


투자자와 노동자는 마치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적대관계의 생산관계에서의 대립만큼이나 전혀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주체로 여겨진다. 김대중 정부 이후로 가속화된 신자유주의화와 이명박 정부에서의 쌍용차,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이와 같은 투쟁의 과정에서 목숨을 스스로 끊는 죽음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자본과 국가, 그리고 노동자는 어떠한 합리적인 언어적 소통도 이루어지지 않는 적대적 관계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촛불집회, 미국의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등에서 등장한 다중의 대규모적 장기간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국가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고 세계는 예전과 다른 어떤 정치적 변화도 발생하지 않은 채, 99%를 대변한다고 했던 이들의 목소리는 완전히 무시한 채 1%로서 그들만의 세계를 지속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티안 마라찌의 <자본과 언어>는 (오큐파이 월스트리트의 언어를 빌리자면) 1%가 어떻게 99%의 신체를 없는 것처럼 만들 수 있는지, 1%의 금융적 언어와 관습이 오히려 강력한 헤게모니를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는지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1970년대 석유위기로 비롯된 달러위기와 포드주의적 모델의 정치경제적 위기에 대한 미국 자본주의의 통화주의적 선회(긴축적인 화폐정책, 경쟁적 디스플레이션)는 노동자의 임금소득과 가계의 저축을 주식 및 증권으로 전환시켰다. 1990년대 이후 온라인 상거래와 기금 조성과 증권시장의 전산화는 이러한 금융의 사회화, 혹은 대중화의 흐름을 가속화시켰다. 이로서 노동자들은 급여 관계에 묶어있으면서 동시에 주주로서 시장의 위험에 부침에 묶여 있게 되었다. 포드주의 급여 관계에서의 임금관계는 자본과 노동의 분리와 노동자들을 공통의 이해를 가진 집단적 주체로 스스로를 표상할 수 있게 했다면 스톡옵션을 비롯한 연봉제, 자본시장의 움직임과 연동된 급여소득, 혹은 연금소득자가 되어버린 노동자는 임금소득 그 자체보다는 자신이 가진 자산가치에 관심을 가지는 가산적 개인주의의 주체가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더 이상 어떤 특정한 정치적 순간에 100%로서의 보편적 가치를 대변한다고 여겨진 인민 혹은 민중이라는 주체로 불리울 존재들의 등장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어버린 상황과 맞물린다. 계급투쟁에서의 보편적 이해관계를 담지하던 ‘노동자’라는 정치적 주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네트워크화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작업형태, 즉 “생산적 벡터들의 다양성”은 이주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워킹푸어의 문제를 개별화된 착취의 문제, 혹은 차이를 담지한 ‘정체성’의 문제로 지각하게 한다.

마라찌는 여기서 더 나아가 노동의 본성, 노동과 노동자사이의 관계의 변화에 대해서 주목할 것을 강조한다. 베라르디의 지적을 인용하며 마라찌는 과거의 노동시간은 노동자에게 ‘죽은 시간’이었다면 현재 노동자에게 노동시간은 삶과 분리되지 않은 시간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국에서의 평균 노동시간은 2010년 기준 여전히 OECD 국가 중 최고수치인 2193시간을 자랑하고 있는 반면 네덜란드는 1377시간에 불과하다며 이러한 통계수치가 “임금 노동시간의 전반적인 축소”를 주장하게 하는 핵심적인 근거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네덜란드 노동자에게 1377시간 즉 임금노동시간 이외의 사회적 시간의 블록들 간의 관계, 자활노동시간, 자유시간 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지, 이러한 시간들이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자본의 시간과 어떻게 연동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언어를 둘러싼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환경, 혹은 정치경제적 상황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일반지성으로서의 언어적 역능을 활용한 소통이 생산양식에 포섭되게 함으로써 수확체증의 잉여가치 창출이 가능한 상황으로 만들었다. 비물질 노동의 생산적 가치는 더 이상 임금 노동시간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언어적 삶의 시간 전체에서 발생하는 것이 되었다. 사회는 네트워크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공장이 된 것이다.

일상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은 더 이상 노동과 자본사이의 보편적인 적대 관계를 인지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일중독의 문제와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문제를 소위 ‘사회적 문제’, 즉 병리화된 문제이며 집단적 투쟁이나 정치적인 결정을 통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 선한 자본의 작동을 통해 해결해야할 문제 혹은 국가가 사회적 약자의 삶을 생산적 복지라는 사회적 명령을 통해 ‘삶의 질’이 아닌 생존 그 자체만을 보장해주는 문제로 여기게 된다.

이와 같이 네트워크를 통해서 삶권력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노동과 일상을 완벽히 통합시킨 개인에게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주식의 ‘가격’은 작금의 세계를 신체 없는 달러기호의 수행성으로 표상함으로써 실물경제의 경제적 가치를 매개하지 않는 자기지시적인 집단적 견해, 모방적 합리성을 세계시민적 다중으로 구성된 언어적 공동체가 공유하는 ‘유일한 해석모델’인 ‘관습’으로서 적법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마라찌는 언어의 ‘절대적 수행성’ 개념을 강조하면서 언어와 신체는 근본적으로 분리불가능한 것이며 금융이라는 랑그보다 더 보편적이고 강력하다면서 관습의 위기상황, 공황이라는 파국으로부터 다중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소통의 역량을 발휘하는 언어적 저항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이는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는 피억압계급의 저항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계급투쟁의 장소일 수도 있다고 하는 주장과 상응한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폭력을 통해서 작동하는 억압적 국가 장치(정부, 군대, 경찰, 병원, 감옥 등)와는 달리 예속의 과정이 사적인 영역에서 언어적 과정을 통해 체현되는 물질성으로 규정하였다. 마라찌가 신경제는 직접적인 상품생산 영역에서, 화폐 및 금융 영역에서 언어의 생산력에 의해, 소통으로 고취되는 생산양식이라고 규정했을 때 우리는 바로 그 언어의 물질성, 인간의 언어적 협력과 일반지성의 산 노동을 주목해야만 한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과학기술의 ‘혁신’이 디지털화된 방식으로 추상화시킨 신체 없는 달러기호는 자율적으로 가치를 창출할 수 없으며 ‘고용없는 성장’을 지속할 내적 동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과잉생산의 위기’를 방어할 능력도 없다. 따라서 금융자본주의가 야기한 지속적인 급여소득의 감소와 관심경제에서의 정보재 수요 공급의 구조적 불균형(미판매 재고의 축적)은 미국이라는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제국이 과학기술적-군사적 우위를 통해 전쟁을 통한 시장경제 공간의 폭력적인 확장을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하게 한다.

마라찌가 제국주의와 복지국가와의 비교를 통해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는 이러한 제국이 과잉생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벌이는 전쟁을 1차대전과, 2차대전을 통해 이미 목격한 바 있다. 신경제라는 첨단과학기술과 금융화라는 새로운 조합을 통해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패러다임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본주의 시스템을 마치 전혀 다른 새로운 체계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이게 하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환상은 단지 환상으로만 작동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제적 관계의 변화, 노동자의 임금소득과 저축을 금융화하는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통해서 시작한 것이다. 나는 마라찌의 <자본과 언어>를 통해서 신경제와 포스트포드주의라는 ‘현상’의 묘사에 주목하게 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했던 것(본질)은 과학기술이나 화폐가 아니라 언제나 (다중적인 측면의) 노동이었으며, 과학기술과 화폐의 금융화가 조합된 신경제는 이들을 끊임없이 미래의 노동인구로 호출하는 장치(컴퓨터를 비롯한 미디어 장치들)를 언어라는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을 매개로 하여 일상적인 영역에까지 침투시킴으로써 노동자들의 삶능력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왔다.

마르크스주의적 가치이론을 표방하는 마라찌의 <자본과 언어>에서 나는 미래의 자본주의 혁신, 혹은 다중의 신체가 새롭게 선택할 관습 혹은 이데올로기의 구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보다 ‘금융의 사회화’ 혹은 ‘고용없는 성장’이라 현상 아래의 변하지 않는 구조적 진실과 역사적으로 형성된 다중의 조건과 자본주의의 현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제조업 노동자들의 투쟁, 쌍용차, 현대차, 한진 중공업, 삼성 반도체, 콜트 콜텍 노동자들의 투쟁은 신경제와 금융자본주의의 구조적 현실에서 이길 수 없는 싸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자본주의적 모순으로 비롯된 계급투쟁이다. 그러나 1%에 저항하는 99%의 다중이 참여하고 관심을 끌었던 촛불집회와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이 다중의 언어적 소통과 정치적 변화의 가능성의 한계를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면 서동진이 주장한 것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87년 민주화 항쟁의 주체로서의 100%로서의 ‘민중’을 다시 소환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00%를 대변하는 보편적 정치적 주체로서의 단순하게, 인민, 민중이라는 것은 이미 ‘다중적 주체’들의 모인 공동체 안에서 언어적 소통역량이 대통령 직선제로 비롯된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인민 스스로의 보편적 가치를 위해 발휘된 역사적 순간으로 우리의 언어 공동체에서 기억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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