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호]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ㅣ배혜정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3-11-27 16:22
조회
195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배혜정 (단국대학교 연구교수, 문화살롱 5120 디렉터)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이 문구는 자동차의 사이드 미러 아래쪽에 적혀 있는 문구이다. 사이드 미러에는 운전자 시야의 사각지대를 최소화하고자 볼록 거울이 사용된다. 따라서 사물이 실제 거리보다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것이다. 생태학자이자 문학 이론가, 객체지향 철학자인 티머시 모턴은 인간이 다른 사물과 맺는 관계, 인간의 세계에 대한 다른 이해를 촉구하는 이 책 <실재론적 마술>의 서론 제목을 이 문구로 정했다.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세계 속에서 우리와 사물이 맺는 관계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매우 다양하고도 많은 사물에 둘러싸여 있다. 이 사물은 물건이거나 다른 생명체이기도 하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사물을 필요와 용도에 따라 규정한다. 시계는 나에게 시간을 알려주고 거실의 틸란드시아는 키우기 쉬운 공기 정화 식물로 지난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집에 들였다. 이렇듯 나를 중심으로 한 세계 규정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세계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 보인다.

근대 이후 인류는 세계에 대한 파악에서 진일보를 이루었다. 사물을 분석해 규정하고 그렇게 대상에 대한 이해는 완벽한 듯 보인다. 공기는 산소와 이산화탄소로 구성되고 생명체의 생명유지에 기여하며, 굴러오는 당구공에 맞선 당구공은 둔탁한 부딪침의 인과성을 만들어 내면서 운동한다. 분석해 낸 사물, 원심력이나 마찰력 등 인간이 이해한 운동과 같은 아주 인간적인 이해는 대상을 탈신비화하고 인과성으로 가득한 세계를 만든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며 이러한 이해를 벗어나는 일은 불합리한 마술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턴은 실재 자체가 기계적이거나 선형적인 인과성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과성은 하나의 비밀스러운 사태임에도 드러난 것"으로 "공공연한 비밀"이며 "신비로운 것"이다. 이는 사물의 실재성이라는 것이 말할 수 없음, 물러남, 비밀스러움 등 다양한 의미에서 어떤 신비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변적 실재론의 한 갈래에 속하는 객체지향 존재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로서 모턴은 사물이 인간에 의한 사물의 지각, 관계, 용도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레이엄 하먼 이후 객체지향 철학의 존재에 대한 이해, 사물이 우리로부터 "물러나 있음"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그 존재가 띠고 있는 본질적인 양상"이며, 이 객체는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객체는 그것에 관한 시나 그것의 원자 구조, 기능과 같은 인간적 이해, 다른 사물들과 맺는 관계 등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이해가 언제나 한정적이라는 점을 인식하면 대상에 대한 마법적 경험, 그에 대한 예술적 생산은 미신과 같이 열등한 것으로 취급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창조성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책의 제목인 '실재론적 마술'은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문학사조의 이름에서 그 구조를 뒤바꾼 것이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표작가로는 콜럼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꼽힌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백년의 고독>은 환상과 일상의 혼재를 특징으로 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콘도 마을의 탄생, 중심인물인 부엔디아 가문의 가계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듯한 신화와 사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마술과 현실이 결합된 서사 속에서 인과성이라는 인간적 세계 이해는 기계적인 기능에서 벗어난다. 그의 세계 서술은 모순적임에도 그래서 더 필연으로 여겨지는 인생사의 순리가 짙게 배어 있다. 모턴은 마르케스가 제국주의적 "실재"의 필연성으로 보이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이자, 부분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 혹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말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러한 방식을 사용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예술이라는 작업은 새롭게 이해될 수 있다. 인과성도 미적 현상일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을 만들거나 연구하는 것 또한 다른 인과관계를 만들거나 인과성을 연구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모턴은 미적 사건이 "톱이 새로운 합판 조각을 베어 물었을 때", "벌레가 축축한 흙에서 배어 나올 때" 그리고 "거대한 객체가 중력파를 방출할 때"에 일어난다고 말한다. 삶은, 그리고 삶 속에서 우리가 사물과 맺는 어떠한 관계도 다 미적 사건이다. 그저 사용에 따른 대상과의 관계 규정이 우리 일상의 사건을 설명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삶, 우리의 하루를 돌아 보자. 스마트폰 알람에 잠이 깨고 채 들지도 않은 정신으로 커피 머신을 누른다. 이렇게 일단 정신을 차리고 나면 칫솔을 꺼내 들고 출근 준비를 한다. 출근 준비가 마무리 되고 나면 차 키를 집어 들어 현관문을 열어 닫고 나온다. 우리의 삶은 실로 다양한 사물들과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커피 머신, 칫솔, 현관문과의 팀워크. 지금 나의 글은 지난 해 구입한 노트북의 키보드 버튼이 하나하나 나의 손가락과 협업해 쓰인다. 이 과정은 인과성의 미적 사건이자 각각의 협업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마술의 일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실재론적 마술> 서론의 제목이자 이 글의 서두를 연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이라는 문구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는 사이드 미러를 보고 뒤 차와의 간격을 확인한 후 차선을 변경한다. 요즘 차량의 센서는 매우 다양하게 구비되어서 사이드 미러 외에 감지 센서가 울려 추가적인 경고음을 운전자에게 제공해 주기도 한다. 이때 이 장면은 각각의 미적 사건이 작동하여 만들어 내는 놀라운 사건의 하모니라 할 수 있다. 모턴은 "객체들과 그들의 감각적인 효과들은 공간 없이, 환경 없이, 세계 없이 마치 가면무도회의 음흉한 인물들처럼 함께 모여든다"고 말한다. 세계는, 그리고 삶은 인과성, 설명할 수 있는 것들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존의 논리적 사고가 제한한 더 많은 역설의 과정과 그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동시대 팍팍한 삶의 새로운 가능성일 뿐만 아니라 약탈되고 고갈되는 이 세계에 다른 속도를 만들고 다른 가능성을 여는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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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론적 마술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3년 9월 2일 <프레시안>( https://shorturl.at/ko345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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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사변적 실재론 입문』(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3)


사변적 실재론 운동의 최초 구성원 중 한 명이 집필한 일반 개론서. 하먼은 자신의 객체지향 존재론에 대한 요약을 제시하며 최초의 사변적 실재론 동료들인 레이 브라지에,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 그리고 퀑탱 메이야수에 대한 비판적이면서도 균형 잡힌 평가를 제시한다. 다음과 같은 철학적 물음들이 네 개의 장을 함께 엮는다. ‘상관주의’란 정확히 무엇인가? 무엇이 사변적 실재론의 주적인가? 철학적 실재론은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실재론에 더 이바지하는 것은 수학과 자연과학인가 아니면 미학을 포함하는 인지 활동에 대한 더 넓은 모형인가?


에일리언 현상학, 혹은 사물의 경험은 어떠한 것인가』(이언 보고스트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2)


이질적인 ‘사물들의 은밀한 삶’을 ‘경험’하고 ‘소통’하기 위한 실천으로서의 ‘실용주의적 사변적 실재론’을 모색하고 있는 책. 이 책에서 이언 보고스트는 사물을 존재의 중심에 두는 객체지향 존재론을 전개한다. 여기서 인간은 유일한 관심사도 아니고 심지어 근본적인 요소도 아니다. 철학적 주제는 인간과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물들에 더는 한정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철학적 주제는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의 세 흐름』(이동신 지음, 갈무리, 2022)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를 경계하면서 우리 시대에 비인간 존재들이 내리는 가장 절실한 지시를 따르는 것이다. 기후위기와 인류세 시대의 삶의 방식에 관한 실천적 고민은 그렇게 답을 찾기 시작한다. 포스트휴머니즘 사유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인 캐서린 헤일스, 캐리 울프, 그레이엄 하먼은 각각 테크놀로지, 동물, 사물의 영역에서 비인간 존재와의 관계를 급진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포스트휴머니즘의 세 흐름』은 이러한 생각들의 연결과 공조의 방법을 모색한다.


사물들의 우주』(스티븐 샤비로 지음,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1)


이 책은 비상관주의적 사고에 대한 사변적 실재론의 일반적인 주장, 즉 인간 정신이 관계하고 이해하는 방식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사물 및 객체에 대한 주장을 탐구한다. 스티븐 샤비로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현재에 지배적인 사변적 실재론 사상을 예상했고 그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한 세기 동안의 형식화와 정화를 향한 집요한 근대주의적 시도를 거쳐, 어쩌면 애초에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 시대에 화이트헤드는 마치 우리의 뇌리에 스며들듯이 돌아온 것이다.


존재의 지도 :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레비 브라이언트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자연주의와 유물론을 당당히 옹호하는 한편으로, 이들 친숙한 관점을 변화시키고 문화 자체가 어떻게 자연에 의해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브라이언트는 범생태적 존재론을 지지하는데, 요컨대 사회는 담론과 서사, 이데올로기 같은 기표적 행위주체들과 더불어 강과 산맥 같은 비인간의 물질적 행위주체들도 고려함으로써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생태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브라이언트는 새로운 기계지향 존재론의 토대를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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