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호] 『문두스』를 읽고ㅣ김진호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3-11-27 14:00
조회
184
 

『문두스』를 읽고


김진호 (안동대학교 공연예술음악과 교수)


이 책을 읽는 내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면 딱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술술 잘 읽혔고, 중간중간 박장대소하게 했다.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게 만드는 재미도 있었다. 무엇보다, 차원이 다른 상상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한국 소설계나 드라마계, 영화계 등에서 상상력 빈곤 내지는 실종 상황을 유감스럽게 생각해왔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상상력과 창의성 등에 대해 강의할 때 가지는 견해가 있다. 상상력과 창의성은 공부해야 얻어지고 조련되는 거라고. 공부 안 하는 이들은 상상력과 창의성도 없다고. 『문두스』는 나의 이런 견해를 지지해주는 아주 좋은 사례가 된다고 생각한다.

『문두스』 속 상상력은 소설이나 드라마 등의 전업 작가가 어떻게 하면 변태적 상황을 고안해낼 수 있을까, 하며 자신의 없는 상상력을 억지로 쥐어짠 막장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인문학과 역사 및 과학기술사회학의 전문가가 평소 알고 있던 지식에 기초한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여러 분야에 걸친 꽤 다양한 지식의 스펙트럼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분야에서 깊은 연구를 해왔던 우리 시대의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넓고 깊은 지식에 기초한 문제의식을 평소 늘 가지고 있던 학자가 소설을 써보겠다는 놀라운 의지까지 장착하면서 『문두스』가 나온 것이다.

예전에, 『다빈치 코드』가 인기를 끌면서 댄 브라운의 소설들이 모두 꽤 지적이라는 평을 어디선가 읽은 바 있다. 맞는 이야기다. 『다빈치 코드』가 아니더라도 외국 소설들은 공부를 바탕으로 쓴 소설들이 많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들처럼 깊이 있는 한국소설은 왜 안 나올까? 한국소설 중에는 바깥에서 데이터가 들어온다는 의미의 공부보다는 자폐적인 뇌 속 편집의 결과물이 많은 것 같다. 입력 없이 계속해서 편집해야만 하는 뇌를 가진 이들, 그 편집에도 일정한 제약이 늘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이들이 써낸 소설들은 깊이가 없고 지적인 재미가 없다.

『문두스』의 저자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 보인다. 복제기술, 별마로천문대와 같은 강원도 도시 영월의 여러 명소, 단종 이야기, 1970년대 탄광촌의 일상, 월남전 파병 용사 이야기, 예루살렘과 역사적 예수의 삶 및 관련 명소, 소설 『카라마조프』, 성삼문과 세조 이야기 등에서 저자는 본질만을 잘도 추출해 흥미로운 소재로 잘도 이용하고 있다. 그러려면 이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지식들은 소재로만 쓰이지 않았다. 이를테면, 복제기술과 관련해서는 독자들에게 문제의식도 전달해준다. 예를 들면, 인공 자궁을 복제해서 남자들에게 이식할 수 있다는 놀라운 상상력에 기초해 등장인물들이 흥미로운 대화를 가지는 장면이 있는데, 이 대화는 곧바로 다음과 같은 진지한 질문들로 꽃을 피운다.

“인공 자궁을 만들어 남자들에게 이식하면 성 불평등이 해결될까?”

“[인공 자궁을 이식받게 된 남자와 정상적 남자가] 잔다면 이건 동성애일까요? 이성애일까요?” “동성애도 아니고 이성애도 아닌 것 같은데요. 젠더의 구분이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아요. 만약에 상대방 남자도 인공 자궁이 있다면 문제는 정말 복잡해지죠.” “남자로 태어나서 길러졌는데 인공 자궁을 가졌다고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을 가질까요? 저는 아니라고 봐요.” “누구나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해요. [...] 만약 남자가 인공 자궁을 가진다면 여성성을 발달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봐요.”(273~274쪽)

지식이 소재로 잘 쓰이려면 디테일이 있어야 한다. 1970년대 탄광촌 이야기는 색굴이나 검은 냇물, 삭도 등과 같은 생생한 정보들과 함께 춤을 춘다. 관념적 소재주의 소설이 보이는 생경함은 이런 생생함으로 인해 추방되었다.

생생한 묘사는 묘사 대상이 실제로 있기를 바라게도 한다. 광부들의 폐를 전시한다는 ‘근대의 현상학 박물관’이 실제로 있었으면 좋겠다. 만약 그런 박물관이 있다면 그 박물관을 채우는 콘텐츠로는 소설이 그린 내용이 적합할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 박물관을 목도한 주인공이 박물관 안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순간 검은 폐가 외치기 시작했다. [...] 이토록 죽도록 일하고 개 같은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성장? 그래, 성장했어. 우리의 숨구멍을 틀어막고 성장했지. 검은 폐들은 스스로를 드러내었다. 검은 구멍에 그들의 삶을 처박은 근대의 은폐를 죽음이 비로소 드러내었다. 근대는 검은 가루다. 근대는 우리의 숨통을 조였다. 근대는 죽음이다. 근대는 막장이다!”(178쪽) 이런 박물관이 있다면 우리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근대에 대해 성찰할 것이다.

아이들의 일기장을 모아놓은 장소도 이 박물관처럼 있었으면 좋겠다. 이름을 적지 않되 소소한 일상을 솔직하게 적은 일기장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어른이 된 아이들이 고향을 방문하여 과거의 일기장을 읽는다는 설정은 예쁘다. 그 자체만 따로 떼어내 로맨스 소설로 발전시켜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이 일기장들을 보관하고 있는 장소에 닥친 비극적 사건을 읽을 때 가장 슬펐다.

『문두스』는 진보와 관련한 현 상황을 잘 진단하고 있다. “자본가가 왜 지배계급인지 아세요? [...] 첫째 자본가보다 부지런한 노동자는 없어요. 노동자는 8시간만 일하고 자본가는 24시간 일해요. 노동자는 자기 업무만 하고 자본가는 모든 업무를 하죠. [...] 자본가는 창조적이고 개방적이고 열정적이지만 노동자는 따분하고 폐쇄적이고 기계적이죠. [...] 자본가는 미래에 살고 노동자는 과거에 살아요.”(133쪽) 노동운동이 성과를 보이려면 노동자들이 미래에 살고 창조적이며 개방적이고 열정적이어야만 할까?

“왜 당신은 정의라는 외골수로 돈이라는 사통팔달에 맞서지 않았나요.”(137쪽)의 문장은 이 소설에서 내게 가장 많은 여운을 남겼다. 왜 우리는 정의로운 이들을 외골수인 사람들로 볼까. 정의는 왜 외골수로 비칠까. 돈이 아니라 정의가 그 자체로 사통팔달이 되어야 이 사회가 업그레이드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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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두스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3년 8월 2일 <뉴스프리존>( https://shorturl.at/dzPRW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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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예술인간의 탄생』(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5)


예술성이 협의의 예술사회는 물론이고 생산사회와 소비사회 모두를 횡단하면서, 예술의 일반화, ‘누구나’의 예술가화, 모든 것의 예술 작품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예술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센세이셔널한 예술종말론들이 유행하고 있다. 예술종말론의 하위흐름으로 나타나거나 예술종말론에 대한 거부를 통해 나타나는 예술진화론들은 경제와 예술, 예술과 삶, 삶과 정치 사이의 전통적 경계소멸을 가져오는 다중의 출현을 직시하면서 그것으로 인해 도래할 예술의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예상을 표현한다.


예술과 객체』(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2)


미학을 제일철학으로 주장하면서 예술의 자율성과 아름다움에의 귀환을 선언하는 책! 하먼은 실재적 객체와 감각적 성질 사이의 균열로 규정되는 ‘아름다움’의 규준 아래에서 ‘아름다운 것’으로서 ‘예술적 객체=객체+감상자’의 혼성 객체라는 테제를 제시한다. 이 테제를 기반으로 그는 비근대주의적이고 비관계주의적인 객체지향 미학으로서 ‘기이한 형식주의’를 도발적으로 제시한다.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김곡 지음, 갈무리, 2019)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영화는 문학, 사진, 미술과 어떻게 다르기에, 관객은 책상 앞이나 갤러리 안에서 비명을 지르진 않아도, 스크린 앞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일까? 이에 대답하기 위해 이 책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추상적인 질문을 보다 구체적이고 촉각적인 문제로 전환하는 전략을 선택한다. ‘영화의 몸무게는 몇 kg인가?’ ‘영화의 나이는 몇 살인가?’ ‘영화의 살은 몇 겹인가?’ 같은 엉뚱하지만, 실질적인 질문들 말이다. 작가의 전작 『투명기계』를 위한 보론 같은 책이다.


영화와 공간』(이승민 지음, 갈무리, 2017)


시공간의 예술인 영화에서 공간이 해방되고 있다. 공간을 다루는 이미지는 왜 지금 우리에게 자율적으로 드러나는 것일까? 이 책은 ‘왜 공간이 부상하기 시작했을까?’에 대한 거시적 물음에서부터 ‘재개발 투쟁과 은폐된 역사를 파헤치는 비판 정신에서 출발한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공간은 지금 어떤 기능을 하고 있을까?’라는 로컬적 질문까지 아우르면서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역사를 공간으로 재편성하는 동시에 2010년 이후 부상한 영화의 공간(들)을 정리해서 공간의 의미를 펼치며 다양한 함의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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