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호] 『리듬 분석』 | 김진호(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2 14:22
조회
2042
『리듬 분석』

김진호(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


* 이 글은 2013년 6월 1일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진행된 『리듬분석』 출간기념 집단서평회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리듬은 음악가들에게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아주 익숙한 용어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리듬에는 사람들에 의해 과학적으로, 혹은 엄밀하게 학문적으로 생각되기보다 직관적으로 생각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리듬에 대한 직관적 사유가 반드시 문제를 만드는 것은 아닐 수 있겠지만, 이 용어에 대한 보다 바람직한 이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직관적 사유는 부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리듬을 학문적으로 생각할 이유는 충분히 있다. 르페르브는 이 일을 시작했다.

이제까지 리듬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사유하는 일의 출발점은 어느 부문에서의 리듬을 연구할지를 결정하는 일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연구자는 우선 언어학의 리듬, 시학의 리듬, 음악의 리듬, 의학과 생리학의 리듬 중 어느 것을 연구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최근에 와서 간혹 두 분야 이상의 리듬에 대한 학제적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학제적 연구는 통섭적 연구로 상승 혹은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통섭적 연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혹은 통섭이란 용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르페브르의 『리듬분석』은 리듬에 대한 통섭적 연구로 보인다. 여러 분야의 관점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지식을 새롭게 통합하는 시도로 보인다는 점에서 말이다.

학문의 통섭에는 여러 가능태들이 있을 것 같다. 뚱뚱한 통섭, 마른 통섭, 위계적 이고 중앙집권적인 통섭, 느슨한 통섭 등이 내가 생각하는 통섭의 가능태들이다. 뚱뚱한 통섭은 어느 한 주제를 중심으로 관련된 분야의 (가능한) 모든 것을 아우르려고 하여, 외형적으로는 풍요로운 결실을 맺고 있는 통섭을 말한다. 마른 통섭은 관련된 분야의 중요한 것들만을 서로 연계시켜 아우르는 통섭이다. 뚱뚱한 통섭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구체성을 가지는 통섭일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마른 통섭은 추상성에 주목하는 통섭일 수 있을 것 같다. 위계적/중앙집권적 통섭은 여러 분야의 연구결과들의 연계성의 매우 강한 정도가 상정되는 통섭이며, 반대로 느슨한 통섭은 그 정도가 낮은 통섭이다. 내가 보기에 르페브르의 리듬분석은 한편으로 마른 통섭이며 다른 한편으로 위계적/중앙집권적 통섭을 지향하는 것 같아 보인다. 뚱뚱한 사람이 마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도 아니고 더 좋지 않은 사람도 아닌 것처럼, 뚱뚱한 통섭과 마른 통섭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위계적/중앙집권적 통섭과 느슨한 통섭 역시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이라 말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필요에 의해 (우리가 통섭을 원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통섭을 행할 수 있을 것 같다.

르페브르의 『리듬분석』에서 연구된 음악적 차원은 이런 연구에 걸맞게 "알맞아" 보이기는 하다. 하지만 음악가의 관점에서 좀 아쉽다. 마치 맛깔스런 프랑스 음식을 먹는 경우처럼 포만감을 주지는 않는다. 저자는 중요한 이야기들만 건드린다. 마치 프랑스 음악처럼 잠시 언급하고 바로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간결하고 절제된 프랑스 음악처럼 리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할 말은 다한다. 그 할 말이란 바로 그가 생각하는 바의 변증법이다. 이런 느낌들을 주는 이유는 아마도 저자가 "추상에 대한 완전한 의식에서 출발하여 구체에 접근하는 방법"(58쪽)을 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그가 전문적 음악가가 아니며 이 책이 전문적 음악학 관련 책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무엇이 전문적 음악책일까? 음악학자들에 의해 쓰인, 순전히 음악에 대해 할애된 책만이 전문적 음악책일까? 아니 어떤 문장이 음악적인 문장일까? 다음의 문장이 음악적이지 않은 문장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우리는 걸을 때 몸을 돌리고 꼬고, 시선을 좌우로 움직이고, 입으로는 말을 한다. 이 모두는 유려한 리듬에 맞춰 조화롭게 제어된다. 이 움직임들은 수많은 반독립적인 충동을 지니는데, 이것은 여러 리듬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어떤 종보다 크다는 뜻이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콜린 트레바든(C. Trevarthen)이 말한 이 문장은 인간의 직립보행에 대한, 다시 말하면 르페브르가 자신의 저서에서 누누이 말한 "몸"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다. 여기서도 리듬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나는 여기서 사용된 리듬이란 용어가 즉각적으로 음악적인 용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문장 전체는 분명이 음악에 대한 문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음악의 한 용어, 음악가들이 오로지 음악적인 용어일 뿐이라고 생각한 용어에 대한 완벽히 들어맞는 설명을 구성한다. 그 용어는 "대위법(counterpoint)"이다. 다수의 반독립적인 음악적 선율들이 각자의 자율적인 움직임을 이어나가면서도 전체로서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음악양식 혹은 그 양식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서의 대위법이다.(대위법은 다른 말로 다성음악(polyphony)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어떤 문장과 담론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음악이 아닌 영역에 대한 것일 수 있다면, 다른 이들은 그 문장과 담론에서 음악적인 설명을 읽어낼 수 있다. 혹은 반대로, 순전히 음악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진 문장과 담론이 정치나 과학의 영역에 대한 설명일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르페브르의 책은 음악학 분야의 책 맞다. 그것은 음악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는 장과 음악에 대해 도움이 되는 간접적인 것들을 말하고 있는 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음악학자로서, 음악학자가 아닌 분들이 음악에 대해 귀중한 도움을 주는 책을 쓸 때 항상 고맙고 미안하며 부끄럽다.

잠시 리듬이란 단어의 공인된 한국어 번역어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보자. 일부 음악교육학자들이 이 단어를 "흐름결"로 번역하여 초등학교 음악교과서 등에서 "흐름결"이란 용어를 사용하다가 음악학계에서 제지당한 적이 있다. 리듬에 대한 우리 음악계의 연구는 그만큼 일천하며, 용어 연구와 관련한 논란의 상태를 드러낸다. 이점은 우리 음악계만이 아니라 프랑스 음악계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리듬에 대한 "음악의 일반이론이 존재하는 가?"라는 저자의 질문(171쪽)은 프랑스 음악학계의 전반적 상태에 대한 적절한 문제제기일 수 있다.

음악의 시간에 관한 연구에서 르페브르 말마따나 "리듬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받고 있다."(171쪽)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 책이 집필된 1992년과 2013년 사이에 많은 연구의 진척이 있어왔다. 아니 르페브르는 스스로 슈만과 베토벤, 바흐 등에 대한 음악적 지식을 저서에서 자랑하고 있지만, 이 저서가 쓰이기 이전의 현대프랑스 작곡가 피에르 블레즈(Pierre Boulez, 1925-)의 『오늘의 음악을 생각하기』(Penser la musique aujourd'hui, Paris, Gonthier, 1963) 등이 이룩한 음악적 시간에 대한 연구 성과를 놓치고 있어 보인다. 잠시 블레즈의 음악적 시간에 대한 논의를 소개해보자. 블레즈에 의하면 음악적 시간에는 짧은 음가들이 표현하는 빠른 시간, 긴 음가들이 표현하는 느린 시간, 점묘주의적(ponctuelles) 사건들로 표현되는 홈이 패인(strié) 시간, 지속음들로 표현되는 매끄러운(lisse) 시간, 반복되는 음가들로 표현되는 정규적 박동들로 채워진 시간(un temps rempli de pulsations régulières), 불규칙한 박동들로 채워진 혼란스런 시간(un temps chaotique) 등이 있다. 블레즈는 이런 개념 쌍들을 통해 하나의 음악적 시간에서 다른 음악적 시간으로의 점진적이거나 급작스러운 이행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많이 작곡한 바 있다. 블레즈의 이런 시간론도 사실은 그 이전의 다른 현대작곡가들의 음악적 생각에 빚을 진 측면이 크다. 현대음악가 리게티(G. Ligeti, 1923-2006)와 같은 작곡가들은 멈추어버린 듯한 시간, 연속적이며 점진적인 이행을 보이는 시간(르페브르의 용어인 "선형적 과정"과 유사할 수 있는 시간)과 급작스러운 시간의 대조를 보이는 작품들을 이미 1960년대에 작곡한 바 있다. 다리듬성, 조화리듬성, 탈동기화 등 르페브르가 제시한 개념들이 사실 20세기 초기에 작곡된 현대음악에 이미 제시되어 있다.

그래서 르페브르의 『리듬분석』이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러한 20세기의 현대음악에 제시된 시간개념들과 이후 블레즈 등의 현대음악가들과 현대음악학자들이 그의 타계 이후 발전시킨 리듬에 대한 ("일반이론"까지는 되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중범위 이론의 성과를 잘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한편으로 그가 1991년 타계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 기간까지 이미 발전되어온 현대음악의 이론들에 대해 그가 여유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역시 아쉽다.

리듬연구는 저자에 의해 새롭게 등장하는 학문이다. 저자의 새로운 시도는 (근대적 인 환원주의적 의미로서 과학적이기 보다) 비판적이다. 그는 기존의 리듬분석의 여러 문제점들을 말한다. 먼저 그간 리듬에 기계적으로 주목해 왔다는 점을 말한다. 리듬을 존재 혹은 실존으로 고정시키는 담화가 그동안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리듬에 대한 연구 주체와 연구대상으로서의 리듬을 분리하는 합리주의적 전통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리듬분석가는 대상으로부터 초연한 연구주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몸 안에서 느껴지는 리듬을 듣고 분석하며 그 지식을 외부 세계의 리듬과 연계시키는 사람이다. 그것은 "체험의 지식"이며 "변형의 사유"이다.(86쪽) 이것은 확실히 하나의 분명한, 이익이 있는 사유방법론이다. 동시에 그것은 아마도 환원주의적 사유의 훈련을 많이 받고서 그것의 장점과 한계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교하고 신중하게 택해져야 할 방법론인 것 같다. 어쩌면 이 방법론은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변증법적 제 3항일 수 있어 보인다. 변형의 사유와 인식론/존재론의 기계적 이원성을 극복한 변증법적 사유의 분명하고 성과 있는 발전을 기대해본다.

르페브르는 음악의 영역 속에서 자신의 저서의 앞부분에서 제시한 개념적 방법론, 즉 대립쌍들의 목록을 작성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작성되고 소개된 용어들이 "저음-고음", "비바체-아다지오", "수직-수평", "연결음-스타카토", "로고제닉-파토제닉" 등이다. 이 와중에 그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몇몇 문장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현대음악의 주조와 음역은 고음 쪽으로 이동했다(172쪽)"고 하는데, 이해가 가지 않으며 동의하기 어렵다. 또 "현대인들은 지금의 알레그로가 거의 클래식의 비바체에 해당될 정도로 운동을 가속화했다(172쪽)"고 하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박자는 느려질 수도 있고 빨라질 수도 있다. 한편, 이 박자가 리듬을 구체화한다.(172쪽)"는 문장 역시 동의하기 어렵다. 박자는 느려지거나 빨라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3/4박자가 4/4박자로 단지 바뀔 수 있을 뿐이다. 4/4박자는 3/4박자보다 빠른 것도 느린 것도 아니다. 4/4박자라는 것은 그저 한 마디에, 한 호흡에 4분음표가 네 개가 있을 뿐이라는 지극히 중립적인 규정일 뿐이다. 그것은 미분절된 시간을 네 개 단위로 분절하겠다는 인간의 음악적 의지일 뿐이다. 그러니까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것은 박자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인간의 느낌이며 그 느낌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다른 차원의 사건들의 등장에 대한 인간의 지각/인식의 결과다.

또한 음악학자들의 실증적 연구에 의하면 리듬을 담아내고 표현하며 정식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박자다. 즉 역사적으로 봤을 때 선리듬-후박자인 것이다. 관련된 설명을 하자면, 칙칙폭폭과 유사한 기차소리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칙칙폭폭으로 듣고, 이후 누군가 그것을 음악적으로 특히 악보에 정식화하기 위해 칙칙폭폭을 4/4박자의 틀 내에 그것을 가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시간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법은 복합적인데, 르페브르 말마따나 박자라는 개념이 실제로서의 리듬을 구체화하는 지평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역의 과정, 즉 리듬이 구체화되면서 혹은 리듬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박자가 생성되는 지평도 존재한다.

가장 아쉬운 것은 이렇게 작성된 대립쌍들이 르페브르 말마따나 대상을 선명하게 파악하게는 해주지만 깊이 있는 통찰에 이르게 해주지는 못하는데(179쪽), 그렇다면 르페브르가 우리에게 제공해준 깊이 있는 통찰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아마도 르페브르는 음악학계에 문제를 제기하고 공을 던진 것일 것이다. 그 공을 받은 음악가들이 르페브르가 원하는 깊이 있는 통찰에 대한 결과물을 마련해야 할 때다.

르페브르는 조화리듬성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고 부정리듬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평가를 내리는 것 같다. 부정리듬성에서는 르페브르 말마따나 리듬들이 서로 분리되고, 변형되고 탈동기화한다. 그런데 이 탈동기화 상태를 르페브르는 "병적인 상태"라고 평하며, "이런 때는 상황에 맞춰, 갑작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리듬을 통해 개입하는 것이 좋다"(194쪽)고 말하고 있다. 탈동기화 상태가 병적인 상태라고 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라면 몰라도 예술의 영역에서는 지나쳐 보인다. 자연과학의 진실에 예술의 진실이 기대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자연과학의 진실이 곧바로 예술의 진실이 될 수는 없지 않을까. 대부분의 음악에서 음악의 중간부분이 이런 부정리듬성을 표상한다. 그리고 그런 상태는 그대로 끝나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의 음악에서 이런 상황은 긴장을 유발하는 상황이고 때론 병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따라서 이렇게 유발된 긴장과 대립의 느낌은 음악을 후반으로 이끄는 역동적 동력이다. 그 동력에 따라 중간부분의 긴장상태 혹은 절정상태가 조화리듬에 기반을 한 음악의 후반부로 이행하고 그렇게 긴장이 해소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도 음악의 고전주의적 관념일 뿐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낭만주의의 음악의 발전과 그 적자인 현대음악에서는 해결되지 않는 긴장상태에 의한 음향이 새로운 음악적 아름다움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요컨대 부정리듬성이 곧바로 병적이라고 한다면 지나칠 수 있다는 것이다. 조화리듬성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고 부정리듬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평가를 내리는 르페브르는 내가 보기에 훌륭한 윤리학자이다.

르페브르라는 노학자의 마지막 저서가 리듬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은 나에게 매우 인상적이다. 르페브르는 내가 하고자 했던 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먼저 했다. 많은 도움을 준 르페브르에게 경이를 표하며 이 위대한 저작을 잘 번역해준 번역자 정기헌 선생님과 출판사 갈무리에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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