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본을 찾아서 1』 9장 '개국' 부분 발제문

작성자
sook
작성일
2022-08-06 12:34
조회
290
<현대일본을 찾아서> 9장 개국_ 385p~ 발제자. 유현숙

19세기 무렵 일본은 도쿠가와시대 초기에 비해 섬나라 특유의 고립성이 더욱 심화되었다. 난학이 발전하고 서양서적이 수입되었지만, 외부인과의 개인적 접촉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고, 일본 경제가 국내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다각화 되자, 외부세계와의 상거래는 점차 감소했다. 일본 내에서 대도시 중심의 풍부한 문화발전은 검열제도의 영향을 받았다.
해안가에서는 낯선 선박들과 네덜란드인으로부터의 경고가 더 잦아지면서 일본의 사회적, 정치적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1. 러시아
도쿠가와 시대 일본의 최북단에 위치한 영지는 마쓰마에 번이었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군에 가담한 한 무사에게 이 땅을 하사했는데, 이곳은 북방지역의 기후 조건에서는 벼농사가 불가능 했기 때문에 가신들에게 토지 대신 토착민인 아이누와의 교역권을 주었다. 물물교환 과정은 아이누 전통에 뿌리를 둔 고도로 조직화되었고 거창한 의례를 동반한 대략 동일한 가치를 지는 상품간의 교환행위였다.
사케, 쌀, 연장, 옷 <-> 생선, 모피, 해초

당시에는 에조라고 알려진 홋카이도 자체에 관심을 갖는 일본인이 별로 없었으며,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지도 않았다. 18세기 후반 일본의 문필가들은 여전히 홋카이도를 별개의 땅으로 여겼다.
북부의 해양자원에 대한 상업적 개발은 더욱 활발해지고, 러시아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당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북방에서 장기적인 영토확장을 진행하던 중에 설치되었던 태평양 연안기지를 교두보로 삼아 남방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18세기 말엽 간세이 개혁기에 막부는 북방에 대한 좀더 과학적인 지식을 얻게 되었다.이러한 지식은 지리학자 이노 다다타카의 저작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1800년을 전후해서 쿠릴열도와 일본 쪽에 대한 러시아의 난방탐사의 목적이 한층 분명해졌다.

1799년 러시아는 새로운 회사인 러시아-미국 회사에 남방 탐사를 맡겼고 무역뿐 아니라 해당 영토를 관리하는 권한까지 공식적으로 부여 받았다. 이리하여 통상 허가를 요청하는 내용이 담긴 알렉산드르 1세의 친서를 전달할 니콜라이 레나노프의 탐사대가 탄생 했으며, 이들은 나가사키에서 6개월이라는 시간을 허비하며 기다렸지만, 막부관료의 대답은 한마디로 안된다는 것이었다. 레자노프는 일본정부가 무력행사에는 반응할 것으로 생각하여 1806년~1807년 쿠릴열도 남부와 사할린의 일본인 정착지를 기습하도록 명령했고, 일본인의 경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러시아는 유럽에서 발발한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렸으며, 이로인해 태평양 연한 진출 노력은 1840년까지 중단 되었다. 러시아의 팽창 시도가 일본 수도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네덜란드 해부학 책을 번역하기 위해 노력했던 의사 스기타 겐파쿠는 레자노프 사건을 통해 일본이 러시아 같은 강력한 신흥강국과 대면하게 되었다는 경각심을 가졌다.

간세이 개혁기간에 재건된 막부는 에조치 전 지역을 막부의 직할령으로 삼고, 마쓰마에번주는 혼슈 북부의 영지로 전봉되었다.

일본 북부의 번들은 북방지역의 방어를 위한 군사력을 제공해야 했다. 사할린이 만주대륙의 일부가 아니라 별개의 섬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가 행해졌는데, 이 또한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나가사키에도 영향을 미치자 북방경계의 문제는 중요성 면에서 뒤로 밀려났다. 교역은 다시 바쇼제도를 통해 상인들에게 위임되었고, 아이누에 대한 착취는 더욱 심해졌다.

하야시 시헤이는 막부 하급 관리의 차남으로 태어나, 시골 의사였던 삼촌에게 입양 되었다. 하야시는 센다이번을 두루 여행할수 있었고, 서양세계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들과도 교제할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막부에 러시아를 경계하라는 상소를 올린바 있는 난학자들, 그리고 하야시에게 세계지도를 구해준 나가사키 통역자 등이 있었다.
일본이 위기에 직면했다고 확신한 하야시는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와 지배구조의 개혁을 촉구하는 상소를 세번 올리고, <삼국통람도설>이라는 조선, 류큐, 에조 3국의 지리와 풍물에 관한책과, 러시아와 중국으로 부터 일본이 직면할지 모르는 위험들에 대한 경고를 담은 <해국병담>을 집필했다.
불행히도 간세이 개혁 때 출판 통제에 나선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하야시가 출판단속령을 위반하고 주제넘게 이설을 퍼뜨렸다는 이유에서 표적의 대상이 되어 센다이의 집에 가택연금을 당해 이듬해 사망하였다.
유능한 개인이 장소와 신분의 제약을 극복하고 당국의 정책에 도전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다노부는 난학을 후원하고 홋카이도를 직할령으로 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공개적인 논의는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혼다 도시아키 역시 일본의 문제에 대해 배우고 심사숙고하기 위해 애쓴 인물중 하나였지만, 하야시와 같은 운명을 겪지 않기 위해 자신의 글을 출판하지 않았다.

2. 서유럽
프랑스 혁명의 불꽃이 네덜란드로 번졌고, 그결과 1794년에 보수적인 정치 지배구조가 타도되고, 신생 바타비아 공화국이 들어섰다. 그 여파는 즉시 자바는 물론이고 나가사키 무역체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된 막부는 서양의 지식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삼았고, 서양의 지식을 연구하던 전문가들을 기용했다. 이를 위한 최초의 관직이 덴몬카타였다. 천문학과 개력(역법을 새로 고치는 것)을 위해서는 외국의 지식이 중요했고, 이 때문에 18세기에 요시무네는 서적 수입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던 것이다.
1811년에 막부는 덴몬카타 밑에 반쇼와게고요를 설치하여 프랑스 학자 노엘 쇼멜의 백과사전(네덜란드어 번역판)을 번역하도록 했다. 쇼멜의 백과사전에는 개인의 건강과 가사에서 제조와 상거래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항목의 정보가 담겨있다. (일본식 번역본이 164권) 그러나 이 책은 출판되지 않았다. 이것은 정부의 업무용으로 활용되는 기밀사항에 속하는 지식이었다. 하지만 많은 다이묘들의 필사본 요청과 유럽국가들의 복장등 일본의 고유성을 잃어가는 위험한 상황이라 생각하여 1825년에 막부는 서양인을 내쫒으라는 ‘외국선박 격퇴령’을 2세기전 이에야스가 공포한 칙령 보다 훨씬 단호하게 공포했다.

3. 중국으로부터의 소식
유럽은 광저우에서 청나라가 아편을 몰수하여 폐기한 조치를 묵과할 수 없다는 입장 때문에 1838년에 전쟁이 발발했고 1842년에는 난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나가사키에는 관련소식을 전하는 두경로가 있었다. 첫째로 네덜란드인, 둘째로 중국책의 경우이다.
중국이 처한 군사문제에 대해 기술한 웨이위안이라는 책은 일본 시오노야 도인 이라는 학자에 의해 일본 편집판이 만들어졌고, 주요관료들뿐 아니라 사무라이 지식인들 사이에도 널리 읽히게 되었다. 그들은 이 책을 통해 서양의 팽창을 알게 되었고, 일본판을 편집했던 시오노야는 중국의 통치자가 보여준 안이한 대비를 한탄하는 자기 나름의 이야기도 덧붙였다.
미즈노 다다쿠니는 소식을 접하자, 1825년의 ‘외국선박 격퇴령’이 폐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네덜란드 상관장이 대독한 친서에서 외국선박 추방조치를 완화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시했다. 영국도 무역 증대를 위해 중국과 전쟁을 벌였고, 중국은 영국에 수백만 은 달러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아울러 일본도 이와 유사한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했다.
궁극적으로 일본의 통상개방을 위한 노력은 영국이 아니라 미국이 주도하게 되었다.
서양인이 운반해 온 아편을 받아들이도록 중국에 강요하면서 겪었던 전쟁을 의식해서인지 영국은 일본에서 2등 자리에 머무르는데 만족했다.

4. 페리 내항
미국의 일본에 대한 관심은 영국의 갑절이었다. 페리는 자신의 공식 뽀고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한 문명국이 또다른 문명국으로부터 받아 마땅한 대우를 호의가 아닌 권리로서 요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선원과 재산의 보호, 물자를 얻을 수 있는 허가, 석탄보급소의 제공, 판매나 물물교환에 의한 화물 처리를 위해 1개나 그 이상의 일본 내 항구에 대한 입항 승인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지시사항을 만들었다. 만약 자신의 요구를 듣지 않을 경우 일본이 패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 발발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침내 일본이 에도 만의 입구 격인 시모다와 홋카이도의 하코다테 두 항구를 여는 데 합의했다. 두 항구에서 미국 선박은 물자와 석탄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고, 조난당한 선원들은 도움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무역개방의 첫단계이며, 교역상의 특권을 부정하는 일본정부의 입장을 유지하게 해주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 대표로 시모다에 온 타운센드 해리스는 중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전쟁소식을 알려주고, 일본인은 저항을 해도 피할 수 없으므로 국제정세에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경고를 전했다.

5. 내부에서의 전쟁
일본의 군사적 낙후성과 전쟁에서 패한 중국의 사례는 쇄국 정책을 포기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했을 수 도 있지만, 실제로 도쿠가와 권력구조 내에서 책임 있는 관료들은 광범위한 조언과 비판을 접하고 있었다.
막번 체제는 고도로 권력의 균형과 견제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유례없이 강력하고 유능한 쇼군이 등장하지 않을 때는 결단력 있는 통치행위가 어려웠으며, 1857년 아베의 죽음 이후 몇년동안 정책이 오락가락하면서 관료들은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었다. 페리에 의해 야기된 위기의 여파로 에도 정부는 자문을 구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었다가 이것이 실패하자 일방적인 결정 쪽으로 돌아섰다. 이 과정에서 막부는 비판, 논쟁, 폭력에 휩싸였다.
정치탄압사건이 만행 했는데, 100명 이상이 처벌을 받았고, 8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일본은 17세기 이래 막부가 이토록 엄하게 자신의 지배력과 권력을 행사한 경우를 본적이 없었다고 한다.

6. 지사
다이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 반면에 그 밖의 사람들은 제안을 할 수 있었으며, 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무라이 학자들이 당시에 벌어진 내부 논쟁의 방향을 설정했다.
그들은 다가올 격동의 시기에는 열정적인 믿음과 행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나리아키는 일본의 국가 위신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서양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 겠지만, 일본이 외래 학문을 이용하여 방비태세를 갖추는 동안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서양인이 일본에 발을 들여놓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2) 다카시마 슈한은 나가시키의 환경이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독서를 통해 다카시마는 나가사키의 방어능력이 매우 취약하며, 1825년 막부의 ‘외국선박 격퇴령’은 현실적으로 실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소신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3)사쿠마 쇼잔.
적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오랫동안 확신하고 있던 사쿠마는 서양의 힘의 원천을 직접 찾아가 연구해 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제자중에 4)요시다 쇼인 이라는 죠수번의 젊은 사무라이가 있었다.
요시다는 국가 위기시에 드러난 상급 사무라이의 천박한 생활모습을 개탄했고, 번은 인재등용에 있어 서열과 심지어 신분까지 무시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요시다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의로운 테러를 감행했지만 실패했다. 죽음과 함께 요시다는 순교자이자 영웅이 되었으며,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그대로 증명해 보였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자신의 모든 정체성이 서양문물에 위협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급변하는 세계에 적응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논쟁이 이루어 졌고, 현실적인 대응이 어려웠던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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