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호] 극작가와 꼬마시인ㅣ김명환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3-03-09 10:13
조회
512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극작가와 꼬마시인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커다란 식당을 했다. 가난한 예술가였던 삼촌과 삼촌 친구들이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왔다.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삼촌의 후배 진호아재가 내 가정교사가 됐다. 진호아재는 어린 제자에게 시와 노래와 그림과 춤을 가르쳤다.
“너도 이제 의젓한 초등학생이 됐으니, 오늘부터 일기를 쓰는 거야. 그런데 넌, 남들처럼 쓰면 안 돼. 하루는 시를 쓰고, 하루는 노래를 만들고, 하루는 그림을 그리는 거야. 본 걸 쓰는 게 아냐. 느낀 걸 쓰는 거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가 느낀 걸!”
진호아재가 말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그 긴 대사를 지금도 내가 잊지 못하는 건, 그날 시작된 일기가 20년 넘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진호아재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의 노랫말을 쓰게 하고, 그 노래의 2절 3절을 만들라고 숙제를 냈다. 처음에는 동요의 2절 3절을, 다음에는 대중가요의 2절 3절을, 다음에는 시의 2연 3연을 만들었다.
“이거, 어디서 베낀 거니?”
사람들은 내 시를 보고 놀라곤 했지만, 나는 그 말이 듣기 싫었다. 내 시에 숨어있는 남의 운율을 들킨 거 같아 부끄러웠다. 내 운율을 갖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때, 남의 글을 내 말과 내 느낌으로 바꿔 쓰는 숙제는, 내가 선전활동가로 살아가는데 커다란 자산이 됐다. 항상 긴박한 상황에서 뚝딱뚝딱 선전물을 만들어야 했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에 맞는 글만 떠오르면, 나는 글을 쓸 수 있었다. 20년 넘게 그 숙제를 했으니…….


삼촌은 소설을 썼지만, 소설을 쓰는 것보다 사진 찍는 걸 좋아했다. 진호아재와 나는 삼촌의 사진모델을 하기 위해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삼촌이 시키는 대로 자세를 잡고 표정을 지어야 했다.


진호아재는 연극을 했다. 말하는 게 꼭 연극 대사 같았다. 행동하는 게 꼭 연극배우 같았다. 다음 해 초봄으로 기억된다. 사람들이 긴 버버리코트 같은 걸 입고 있었다. 삼촌과 나는 진호아재의 연극을 보러갔다. 진호아재가 쓴 희곡으로 만든 연극이었다. 진호아재는 머리가 긴 누나들에게 꽃다발을 받았는데, 그 꽃다발들을 내게 주었다. 나는 연극을 쓰는 작가가 내 스승인 게 자랑스러웠다.


그 다음 해쯤, 삼촌과 나는 진호아재가 일하고 있는 드라마센터에 갔다. 배우들이 연극을 하고 있었다. 검정 물들인 군복을 입고 굵은 뿔테안경을 쓴 진호아재가 돌돌 만 대본을 들고 무언가 소리치고 있었다. 삼촌과 나를 본 진호아재가 무대에서 뛰어내려 객석 사이 통로로 달려왔다.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죽은 줄 알았던 혈육을 만나는 것처럼 진호아재는 달려왔다.
“여긴, 어떻게 왔어!”
진호아재가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날 이후, 진호아재를 보지 못했다. 진호아재 이야기를 하면 삼촌은 눈물부터 글썽였다. 군대에 간 진호아재의 사촌동생이 월북을 했다. 정보기관에 끌려간 진호아재는 몸과 마음이 망가져서 돌아왔다. 진호아재에게 시를 배운 제자가 시인이 되기 전에 이국땅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0년쯤 전에, 진호아재 추모문집이 나오고 나서야 나는 삼촌에게, 진호아재와 내가 삼촌의 사진모델이던 시절 사진이 몇 장 내게 남아있다고 말했다. 추모문집을 만들며 사진이 얼마 없어 애를 먹었다고, 삼촌은 아쉬워했다.


- 『철노웹진』 2017.11.6.


* 김명환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사화집 『시여 무기여』에 시 「봄」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첫사랑』, 산문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가 있다.
조세희는 1942년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났다.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돛대 없는 장선』이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있다.
전진호는 194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들개」, 국립극장 장막극 공모에 「밤과 같이 높은 벽」이 각각 당선되며 연극계의 기린아로 촉망받았다. 희곡집 『인종자의 손』, 추모문집 『숨겨진 전설, 전진호 이야기』가 있다.


** 이글은 산문집 『볼셰비키의 친구』(갈무리, 2019)에 실렸다.


극작가 전진호와 꼬마시인 김명환. 1966년 소설가 조세희가 찍었다.

극작가 전진호와 꼬마시인 김명환. 1966년 소설가 조세희가 찍었다.


극작가 전진호와 꼬마시인 김명환. 1966년 소설가 조세희가 찍었다.

극작가 전진호와 꼬마시인 김명환. 1966년 소설가 조세희가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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