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호] 가속주의 : 회고적 역사 / 『#가속하라』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강연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3-11-07 20:54
조회
482
 

가속주의 : 회고적 역사


『#가속하라』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강연자 : 로빈 맥케이, 에이미 아일랜드

번역 : 김효진 (『#가속하라』 옮긴이)

강연 일시 : 2023년 11월 4일 토요일 저녁 7시 ZOOM



0. 서론


『#가속하라』라는 책이 영어로 출판된 지 거의 10년이 지났습니다.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 게다가 이 책이 한국에서 어떤 종류의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산업혁명과 그 여파의 폭발적인 전개를 주도한 서양이 한동안 둔화되고 뒤처지게 된 상황을 고려하면 동아시아의 가속주의가 서양의 가속주의와 어떻게 다를 수 있을지 보는 것이 흥미진진하다고 느낍니다.


왜 애초에 우리는 ‘#가속하라’를 출판하고 가속주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기를 원했을까요?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통일된 입장이나 '운동'을 소개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상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요점은, 현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련의 문제와 탐구의 궤적을 상호작용과 긴장을 통해 개관하는 다양한 입장들의 성좌를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텍스트들은,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급격한 기술 및 사회 변화 과정과 맺은 우리의 관계에 대하여, 정치가 수행할 역할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지에 대하여, 지능, 기술, 그리고 인간 행위성에 대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일련의 물음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래에 대한 물음을 제기합니다.


이 책이 나오게 된 과정은 매우 특이했습니다. 우리는 이 텍스트들을 수집함으로써 가속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우리는 맑스와 사무엘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20세기 전체를 조사함으로써 이 역사를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우리는 이 역사를 하나의 사변적 실천으로서 '발명'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속주의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어떨까요?


이 책이 출간된 이후 가속주의라는 개념은 놀랍게도 예술, 문화,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주류가 되었고, 그리하여 그 자체로 그것은 많은 해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해석 중 일부는 매우 유익했고, 일부는 덜 유익했습니다. 일부는 오해로 분류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런 오해들은 매우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공개적으로 '가속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가속주의가 여전히 '위험한' 관념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을 되새기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결국, 저는 누구도 가속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거나, 혹은 무엇이 가속주의인지 아닌지를 규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이 낱말은 독자적인 운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속주의의 역사에 우리가 관여한 활동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가속주의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정합적인 방법에 대한 우리 나름의 결론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1. '가속주의'는 모욕적인 용어입니다.


'가속주의'를 본질적으로 한 사람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는 2010년에 출판된 『부정적인 것의 지속』이라는 책에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좌익 학자 벤저민 노이스일 것입니다. 노이스는 가속주의를 포스트맑스주의·포스트구조주의 철학의 한 경향으로 규정했습니다.


여기서 핵심 텍스트는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에 관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과타리의 저서들인데, 여기서 그들은 해방을 위해 자본주의의 파괴가 필요한지, 아니면 오히려 '경과를 가속'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에 자본주의는, 한편으로는 인간 사회를 정신분열증적으로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편집증적으로 재코드화하고 재영토화하는 역설적인 경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속주의'의 기본 착상은, 자본주의에는 사회적 얼개, 인간임이 뜻하는 것 등을 변환시킬 정도까지 가속될 수 있는 일단의 해방적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2. 가속주의는 결코 ‘가속주의’라고 불린 적이 없습니다.


노이스는 꽤 올바르게도 이것을 1990년대에 이런 사유 노선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어떤 영국 사상가들의 소규모 집단, 그중에서도 특히 닉 랜드와 새이디 플랜트와 연관시켰습니다.


'가속주의'라는 낱말은 사실상 이런 맥락에서 사용된 적이 전혀 없지만, 지금까지 그 용어와 가장 많이 동일시된 것은 이 집단입니다.


그들의 입장은 인간과 인간 정치(닉 랜드가 '인간 보안 체계'라고 일컫는 것)에 대한 구상들이 전적으로 억압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구상들은 지능의 자기 발전 과정과 자본주의라는 행성적 변이 과정의 '장애물'입니다. 자본은 인공 지능이기에 사실상 그 두 과정은 동일한 것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말했듯이, 자본주의는 세습적인 사회적 형태와 제한을 해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사회적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회적 체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미지의 것들에 관한 탐구의 엔진으로 작동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는 인간의 억압적 유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바타유로부터 물려받은 랜드 사상의 핵심에는 사실상 폐지에 대한 무모하고 심지어 낭만주의적인 욕망, 즉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인간이라는 감옥'의 외부를 탐사하려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랜드에 따르면, '지능의 편에 서는 것'은 자본의 해체 과정들과 무엇이든 그것들이 수반할 수 있는 인간과 지구의 재가공에 대한 모든 경계심을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한편,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세이디 플랜트는 이런 해체와 용해의 메커니즘들에서 지금까지 주체의 가부장적-인본주의적 경제의 억압당한 외부를 구성한 여성과 기계 사이의 신흥 동맹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그것은 양식의 문제였습니다. 1990년대에 훗날 <사이버네틱스 문화 연구단>(CCRU)가 된 소규모 집단은 이론을 사이버펑크 픽션과 전자 음악, 특히 레이브, 다크사이드, 그리고 정글 음악의 후기 단계들의 미학에 녹여내려고 한 글쓰기 양식을 개발했습니다. 그들은 추상적이고 합성적이며 미래주의적인 음향 공간들 및 그것들과 뒤얽혀 있는 과학소설 서사들 – 흔히 SF 영화에서 샘플링된 트랙들 – 을 글쓰기와 결합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글쓰기는 인간 미래와 비인간 미래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위한 현장이기도 하는 그 문화적 복합체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가속에 관한 관념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가속의 느낌을 산출하는 일종의 가속된 리비도적 글쓰기에서 명확히 표명되었습니다.


여기서 가속주의는 인간을 해체하는 과정에 가능한 한 온전히 참여하라는 요구가 됩니다. 미래가 도래하기 전에, 그리고 그 도래를 가속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참여의 일종입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노이스의 격렬한 비판은,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영국의 대처와 미합중국의 레이건이 실행한 당시의 신자유주의 정치를 촉진하는 데 기여한 미학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종의 사상의 포기, 특히 맑스주의 사상의 포기입니다. 노이스에게 그것은 과학소설적 미학화를 통해 자본의 억압을 일종의 해방으로 착각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혼란스러운 옹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3. ‘#가속하라’는 농담입니다.


가속주의의 출현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CCRU와 닉 랜드의 이런 작업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장 저는 그것이 정반대로 작동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바노믹 출판사는 2011년에 닉의 글을 모은 선집 『독니가 있는 본체Fanged Noumena』를 출간했고, 이 텍스트들이 공개되면서 노이스의 공격에 맞서 '가속주의'가 긍정적인 용어로 부상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은 확실합니다. 『독니가 있는 본체』가 등장함으로써 닉 랜드의 저작은 철학의 짧은 에피소드에 대한 경멸적인 각주에서 현재의 문화적 힘으로 바뀌었고, 가속주의에 대한 노이스의 언급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것이 품지 못했을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었습니다.


랜드 저작의 이런 반시대적 귀환의 여파로, 이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사람 중 한 명은 (『#가속하라』에 수록된) 「터미네이터 대 아바타 : 가속에 관한 단상」라는 글을 저술한 CCRU의 전 멤버인 마크 피셔였습니다.


2011년과 2014년 사이에 소수의 트위터 이용자들이 '가속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했고, 뉴스나 문화 상품에서 '가속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항목들을 발견하곤 했으며, 그것들을 해시태그 '#accelerate(#가속하라)'와 더불어 게시했습니다. 이 밈은 온라인 환경에서 확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농담이 종종 그렇듯이, 그것은 더 이상의 것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많은 철학자와 정치사상가가 가속주의에 관한 다양한 사유 노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accelerate 해시태그는 실재적인 일관성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전환점은 2013년 닉 서르닉과 알렉스 윌리엄스가 「가속주의 정치 선언」을 발표한 시점인데, 그 선언은 '좌파 가속주의'에 관한 관념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 선언은 좌익 정치가 많은 고민을 하고 있던 시기에 일종의 횃불이었으며, 놀랍게도 널리 읽히는 유명한 글이 되었습니다.


그 선언은, 한때 혁명 정치가 기술의 해방적 가능성, 인간의 변형, 그리고 생산력의 발휘에 열광했던 반면에 현재 국면에는 그런 종류의 사유를 신자유주의 우파에 내준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선언이 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한때 진보 정치가 가졌던 야망과 전망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르닉과 윌리엄스가 "통속정치"라고 일컫는 것에 대한 좌파의 집착에 맞서 싸우고자 합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추상적이고 전 지구적인 세계에서 좌파 정치는 단순히 지역적인 것, 유기적인 것, 인간적인 것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하는 것에 자리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진보적 좌파 정치는 탈성장을 옹호하기보다는 기술에 의한 인간 사회의 재편과 지구를 장악한 끊임없는 변화 및 복잡화 과정에 대하여 긍정적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공평과 진보적 사유를 추구하는 정치의 슬로건은 '감속하라'가 아니라 '가속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 선언에 따르면, 가속주의 정치는 정치 이론과 정치적 논쟁뿐만 아니라 설계, 계산, 로지스틱스, 정보 처리 등 다양한 실천에 걸쳐 동맹을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 미합중국의 ‘점령하라’와 같은 운동들의 희망적인 수평주의를 넘어 그것은 복잡한 조직 전략과 권력에의 접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통적인 민주주의 정당 체계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가속주의 정치에는 다소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는 시도, 즉 가속주의를 사회적 정의와 정치적 정의에 대한 더 전통적인 일단의 관심사와 결합시키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가속주의 정치는 현실주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생산물은 모든 가능한 해방적 정치에 적극적으로 편입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구화에 반대하는 지역주의적 의제를 추구할 수 없으며, 거래, 소통 등을 위한 새로운 플랫폼들의 구축과 기존 플랫폼들의 유산에 관한 구체적인 물음에 관여하지 않은 채로 '다른 가능한 세계'를 향해 상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우발사건들만 조직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종류의 행동주의는 실제 영향력이 전혀 없는 기분 좋은 정치일 뿐입니다. 이런 [비판적] 생각에는 사실상 되돌릴 수 없고 지금까지 실제로 유익했던 자본주의 발전의 측면들을 직시하는 좌파 정치와 관련된 일종의 현실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좌파 가속주의는 자본주의의 탈영토화 및 탈코드화, 즉 재구성 측면에의 무분별한 포기를 거부합니다. 자본주의의 기술적 진보를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전략적으로 재배치하고 재사용할 수 있다는 관념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좌파 가속주의는 때때로 좌익 비판을 특징짓는 절망감, 즉 인간의 삶 전체가 자본주의에 흡수되어 뒤돌아보거나 우리로 하여금 다시 시작하게 할 수 있을 기적적인 변화를 꿈꾸는 것 외에는 탈출구가 없다는 생각에 맞서 싸웁니다.


그리하여 이런 방식으로 가속주의의 유산을 활용함으로써 좌익 정치적 입장을 재고하고 재편할 방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좌파 가속주의의 대단히 어려운 과업은 소비자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가속의 어떤 동력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가속주의의 도구화는 '인간 안보 체계'와의 타협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문제는 좌파 가속주의가 궁극적으로 좌파의 또 다른 종류의 희망적 사고처럼 보이는 것은 아닌지 여부입니다.


4. 가속주의는 역사가 없습니다 ... 아직은 말입니다.


CCRU와 닉 랜드 및 세이디 플랜트의 작업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며, 좌파 가속주의가 등장하고 그 선언이 온라인에 게시되어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무언가를 출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가속주의에 관한 담론이 전적으로 온라인에서 이루어졌기에 종이책을 출간하는 것이 중복되는 행위가 아닌지 고민하며 오랫동안 망설인 끝에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2013년에 이 책을 편찬하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현대 텍스트들의 모음집에 불과한 책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가속주의의 역사를 보다 일관성 있게 정리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벤자민 노이스의 간략한 언급을 제외하면, 이 역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거나, 혹은 지금까지는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속하라' 경향이 (이론과 정치 철학, 예술과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비롯된 입장들의 집합체로서 출현했을 때 그것은 종종 이전의 다양한 순간들을 다시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노이스가 언급한 사상가들(닉 랜드, 세이디 플랜트, CCRU, 들뢰즈와 과타리 등)뿐만 아니라 맑스, 베블렌, 파이어스톤, 러시아 우주론 등을 말입니다.


따라서 이 책의 첫 번째 목표는 이런 계보를 간략히 묘사하고, 광범위한 가속주의 입장 내에서 가능한 모든 다양한 뉘앙스와 불일치에 주목하며, 무엇보다도 각 단계에서 새로운 가속주의가 어떻게 선구자들의 일부 특징을 채택하고 그 밖의 특징들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목표는 가속주의가 현재 하나의 정합적인 이론적·정치적 입장인지, 혹은 그런 입장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6. 가속주의는 스캔들입니다.


『#가속하라』의 출판은 가속주의의 관념을 널리 알리는 데 도움이 되었고, 그리하여 그것은 논쟁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이후 가속주의는 좌파와 우파의 정치적 갈래로의 양극화가 심화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시기는 가속주의의 기본 신조들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생산적인 시기였습니다.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코뮤니즘' 같은 좌파 가속주의적 개념들은 현재 유행하는 밈이 되었고, 그 낱말 자체는 아닐지라도 가속주의적 관념들이 좌익 정당의 사상에 편입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닉 서르닉과 알렉스 윌리엄스가 본질적으로 좌파 가속주의 프로젝트를 계속 수행한 『미래를 발명하기』라는 책을 출간한 2015년에 그들은 '가속주의'라는 낱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미디어가 그 용어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또 다른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가속주의에 대한 흔한 오해를 채택한 논평과 언론 보도는 온라인 상에서 가속주의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요컨대 가속주의는 “'자본주의는 단지 그 체계가 붕괴될 때까지 그 최악의 경향들을 악화시킴으로써 패퇴시킬 수 있을 뿐이다” 혹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황이 악화되어야 한다”라는 신조에 해당한다는 생각을 퍼뜨렸습니다.


그 당시에 이 관념은 문화 전쟁의 열띤 분위기 속에서 번성하는 듯 보였지만, 결국 우리는 “온라인의 전투적 가속주의 하위문화”와 “가속주의라는 위험한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중매체 헤드라인과 싱크탱크 보고서에서 노이스가 고안한 '가속주의'라는 낱말을 제임스 메이슨이라는 사람이 1980년대에 주로 작성한 일련의 신나치 팸플릿에서 테러리스트 전술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그 낱말과 무관한 용법과 융합하는 사태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주체의 억압적 구속을 해체하는 데 즐겁게 관여하는 실험 철학, 혹은 대규모의 좌파주의적인 테크노-좌파 정치적 변혁에 관한 신조를 “인종 전쟁을 선동하기 위해 퇴폐적인 자유주의적 사회 형태의 붕괴를 '가속'하는 데 공적인 폭력 행위가 사용되어야 한다”라는 관념과 융합하는 행위는 “경과를 가속하는 것”이 “상황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을 뜻한다는 기존의 오해와 최근에 닉 랜드가 신반동(Neoreaction)을 통해 공개적으로 대안우파(Alt-Right)의 요소들과 연합했다는 사실에 의해 가능해졌습니다.


가속주의라는 개념이 일종의 모욕에서 해시태그로, 다시 사유와 연구의 한 분야로 전환되고 그것에 대한 역사가 구축된 다음에는 가속주의라는 낱말과 그 낱말을 둘러싸고 모인 개념들을 유지하기를 바란 모든 사람에게 투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싸워야 할까요? 우리는 그것의 복잡성과 그것이 사유에 대하여 지닌 잠재력을 계속 옹호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것은 포기되었어야 했을까요?


7. 가속주의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은 가속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가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일반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그중 일부는 우리가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책의 서론에서 이미 다루었지만, 온라인에서 계속해서 존속되고 가속주의에 대한 피상적인 기각과 찬사를 낳은 그 밖의 오해들도 있습니다.


가속주의는 모순을 가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특이점'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강도와 무관하게 파악되는) 속력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8. 우리는 모두 가속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세계는 계속해서 가속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마크 피셔는 사실상 우리가 모두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가속주의자라고 진술했습니다. 우리는 현대 생활의 속도에 대해 불평할지 모르지만, 어떤 종류의 감속된 대안을 만드는 데 실제로 관여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 단순한 존재 방식으로 돌아가자는 요구가 있지만, 사실상 인류 전체는 우리 자신과의 관계와 인간임에 대한 감각을 파괴하고 기계 네트워크들에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개인적으로, 심지어 감정적으로, 성적으로도 의존하게 만드는 기술적 매개의 그물망 속으로 더 뛰어들기로 선택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더는 이런 기계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제어할 수도 없으며, 그리하여 그 궁극적인 결과는 가장 극단적인 SF를 뛰어넘습니다.


『#가속하라』가 출판되었을 당시에는 ChatGPT, CRISPR 등이 없었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 - 신비주의, 중독, 전자 바이러스 전염병 등을 갖춘 1990년대의 '가속주의'는 이제 꽤 선견지명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가속주의는 우리의 현행 조건을 이해하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실제적 관여를 성찰하기 위한 정직한 방법일 따름입니다.


9. 가속주의는 하나의 역설이면서 역설이 아닙니다(시간과 지능).


가속주의가 하나의 '주의'라고 간주하는 생각에는 분명히 역설적인 것이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당신이 행하기로 결심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말입니다…


CCRU와 닉 랜드의 '고전적인' 가속주의의 경우에 그것은 미래에 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인간적 과정들이 불가피하게 진행되고 있고 한낱 인간에 불과한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경과를 가속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여기에는 일종의 시간적 역설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의 조각들(“미래는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에 접근하여 그것들을 현재의 우리 자신에 작용하게 함으로써 미래가 현재를 감염시켜 자신을 이끌어낼 수 있게 되는일종의 ‘시간 루프’가 존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CCRU가 '하이퍼스티션'이라고 일컫는 것과 픽션이 수행하는 정치적 역할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과학소설은 언제나 가속주의에서 중요했습니다. 특히 랜드와 CCRU의 경우에, '터미네이터' 연작이 그러했습니다. 그 연작에서는 미래에서 온 한 요원이 자신들을 미래로 프로그래밍하기 위해 현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어쩌면 가속주의는 그것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궁극적으로 정치도 아니고 미학도 아니라 오히려 시간, 행위성, 그리고 운명의 철학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지능에 관한 물음이 있습니다 : 우리가 '지능의 편'에 서고 싶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이 미래의 지능을 활용하여 인식적·기술적·사회적 변화의 길을 열어 현재에 적용하는 것이라면, 지능은 어디에 존재할까요? 그리고 우리는 지능이 반드시 '우리의' 친구는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까요?


지능은 오직 강화만을 추구하고 인간을 도외시하는 자본의 맹목적인 사이버포지티브 되먹임 고리에 자리하고 있을까요(랜드)? 아니면 지능은 집단적 합리성의 실천을 통해 도출될 수 있을까요(네가레스타니, 좌파 가속주의)? 미래는 우리의 사유에 대한 독단적 제약을 벗어던짐으로써 자발적으로 관여할 수 있지만 정치 프로그램의 목적을 위해 결코 통제할 수 없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능성의 심연인가요(U/가속주의)?


이것이 바로 미래성, 지능, 그리고 정치에 관한 철학적 질문인 가속주의입니다.


10. 복수의 가속주의


가속주의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의 통일된 입장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분명해졌습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제가 강조했듯이, 이 책이 출간된 이후 가장 흥미로운 점은 새로운 가속주의가 많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복수의 가속주의가 확산되는 것은 ‘말단 온라인’이 지닌 집단적 사고의 표현이며, 어쩌면 수동적 둠스크롤링에 대한 해독제일 수도 있습니다. 가속주의라는 용어의 대중적 의미를 둘러싼 위기 이후 몇 년 동안 나타난 것은 가속주의가 이론적 또는 학문적 개입이나 우려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자체 담론의 역사를 계속 생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속주의는 얼마든지 생성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전례 없는 미래를 예고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재의 특징을 파악하고, 그 분위기에 굴복하고, 그 과정을 가속화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할 수 있습니다: 라보리아 큐보닉스의 '제노페미니스트 선언', n1x의 '젠더 가속 : 하나의 흑서'(g/acc), 아리아 딘의 '흑인 가속주의에 관한 단상'(bl/acc), 빈센트 가튼과 에드먼드 버거의 '무조건부 가속주의'(u/acc) 논의, 최근 '효과적 가속주의'(e/acc), 심지어 카와이와 애교를 인간의 미래 변이의 지표로 삼는 '귀여움 가속주의'(cute/acc)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속주의라는 질문을 통해 미래의 대안적 판본들을 심사할 수 있고, 흥분과 공포, 열광과 불안을 지속적으로 유발하는 사고와 문화 생산의 변화하는 영역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확산 현상은 가속주의가 마치 그것이 비판 이론인 것처럼 논의될 때 잃어버릴 수 있는 가속주의의 근본적인 리비도적 성격을 가리킵니다. 각각의 가속주의는 미래에 관여할 수 있는 진입점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각각의 진입점은 감성의 지표 또는 욕망의 왜곡, 가장 강렬한 미래에 대한 특정 입장을 나타내며, 그후 궁극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가속화됩니다.


가속주의는 인간이나 자연에 대한 모든 주어진 이미지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런 강박적인 리비도적 강화를 옹호하기 때문에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 문제 관리를 초과하게 될 것입니다.


좌파 가속주의는 그것을 신중하고 책임감 있는 구성적인 정치로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옹호자들조차도 '가속주의'라는 낱말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정당 정치와 개혁으로 돌아섰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단순히 가속주의를 실천하는 온라인 미시문화의 자생적인 출현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임'에 관한 서사에서 배제되어 왔고 이것을 받아들이고 가속화하기로 결정한 공동체들에서 종종 발생한다는 점을 언급할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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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Accelerationism: A Retrospective History / 『#가속하라』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자율평론 | 2023.11.08 | 추천 0 | 조회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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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가속주의 : 회고적 역사 / 『#가속하라』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자율평론 | 2023.11.07 | 추천 0 | 조회 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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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 On Architecture and Objects / 그레이엄 하먼 『건축과 객체』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자율평론 | 2023.08.22 | 추천 0 | 조회 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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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 『건축과 객체』에 대하여 / 그레이엄 하먼 『건축과 객체』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ludante | 2023.08.19 | 추천 0 | 조회 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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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 그레이엄 하먼 『사변적 실재론 입문』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 이동신 선생님 대담 질문지
자율평론 | 2023.03.08 | 추천 0 | 조회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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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 사변적 실재론의 오늘 / 그레이엄 하먼 『사변적 실재론 입문』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자율평론 | 2023.03.06 | 추천 0 | 조회 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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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 Speculative Realism Today / 그레이엄 하먼 『사변적 실재론 입문』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자율평론 | 2023.03.06 | 추천 0 | 조회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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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가능해진 있을 법하지 않은 것 / 스티븐 샤비로 『탈인지』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자율평론 | 2022.12.20 | 추천 0 | 조회 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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