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호] 아직도 신이 필요할까?ㅣ김봉근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4-02-23 11:37
조회
454
 

아직도 신이 필요할까?


김봉근 (<신학과 학문> 편집장, 삼육대학교 부교수)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던 19세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예감도 적절했지만,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21세기 지젝의 비판도 적절해보이는 이 시대에 여전히 신이 필요할까? 그리고 아직도 신이 필요하다면 여전히 인간에게 유효한 ‘신(神)-사용법(how to use God)’이 있을까? 미국의 저명한 유럽대륙철학의 대가 메롤드 웨스트폴은 하이데거로부터 시작하여 레비나스를 경유하여 재해석된 키에르케고어를 통해 이에 답하고자 한다.

‘신-사용법’이라니 그것은 너무 신성 모독적인 표현이 아닌가? 그러나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엔도 슈사쿠, <침묵>)라고 속삭였던 그 신이라면, 기꺼이 이렇게라도 자신을 내어줄 것이다. 그 신은 십계명의 가장 많은 분량과 위엄을 차지하고 있던 제4계명조차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마가복음 2:27)라고 말하며 내주었던 그 신이 아닌가! 하지만 이제 그 신의 마음을 아는 자들이라면, 그 말을 뒤집어 오히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하며 기꺼이 ‘자기 비움’을 통해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신과 이웃, 곧 우리들의 타자를 위한 내어줌이라 할 수 있는 ‘자기-초월’이 아닐까 싶다.

‘초월성(transcendence)’과 ‘내재성(immanence)’은 신학과 철학의 역사에서 신과 인간의 속성을 설명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속성이다.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이 세계로부터 초월적인 신인지, 아니면 세계 내적인 신인지, 그리고 그 각각의 경우의 신적 속성은 무엇인지는 늘 논쟁거리였다. 인간의 경우에 특히 인식론의 영역에서 주체의 초월적(혹은 메타적) 지위에 관한 문제는 그 자체로 근대철학과 현대철학을 가르는 분기점이었다. 왜냐하면 근대철학에서 주체가 가졌던 초월(론)적 지위를 박탈하는 여정이 곧 현대철학의 인식론적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철학은 인간 주체를 ‘원인’이 아니라 ‘효과’에 위치시키며, 근대철학에서 ‘구성하는 주체’가 가졌던 초월적 지위를 제거하고 ‘구성되는 주체’로 이해한다. 최근의 신유물론적 존재론 역시 문화의 초월론적이고 인간주의적 전통을 거부하고 존재의 선-구성된(pre-constituted) 구조와 목적론적 질서를 반대한 채 실천의 구성적 개념만을 기초로 하는 내재적인 담론을 펼친다.

<초월과 자기-초월>의 저자 메롤드 웨스트폴은 전근대적인 신의 형이상학적 ‘초월’ 개념과 탈근대적인 인간의 탈주체적 ‘자기-초월’ 개념을 동시에 활용해서 포스트모던 담론을 통과한 오늘날 시대에 적절한 새로운 유신론적 구축 작업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웨스트폴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논의를 전개하는데, 1부에서는 하이데거와 스피노자와 헤겔을 통하여 ‘존재-신학과 우주론적 초월을 넘어서려는 욕구’에 관하여 설명하고, 2부에서는 그리스 신학의 틀 안에서 고전적 유신론자로 이해되어 왔던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에 대한 시각을 위-디오니시오스의 부정신학을 활용하여 신에 관한 ‘인식론적 초월’을 말한 신학자로 탈바꿈 시킨다. 더불어서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명인 칼 바르트의 유비론적 신학을 함께 제시한다. 마지막 3부에서는 레비나스와 키에르케고어를 통하여 존재-신학을 넘어선 ‘윤리적 초월’(이웃 사랑)과 ‘종교적 초월’(신에 대한 사랑)을 서술한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새로운 유신론적 구축 작업을 위해 비판하고 있는 ‘존재-신학’이란 무엇일까? 웨스트폴은 이 작업을 1929년 초판된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을 통해서 수행한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취임 강연문이었던 이 초판본에서부터, 1943년 후기에서, 그리고 1949년 제5판에 첨가된 “형이상학의 근본 바탕으로 소급해 들어감”이라는 글에서 존재-신학 개념을 지속적으로 비판한다. 하이데거에게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das Seiende als solches)에 대해서 묻는 동시에 존재자 전체(das Seiende im GanZen)에 대해서 묻는 물음”(<동일성과 차이> “형이상학의 존재-신-론적 구성틀”)으로, 서양의 형이상학은 그 본질에 있어서 존재론인 동시에 신학이었다. 즉, “전체의 전체성이 존재자를 합일하는 통일성이며, 이 통일성이 [존재자 자체를] 산출하는 근거”이기에 “<형이상학은 존재-신-론이다(Die Metaphysik ist Onto-Theo-Logie)>”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신-학(Theo-logie)은 교회의 고착된 교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신에 대해서 표상하는 사유를 진술한 것”이다.

웨스트폴은 하이데거의 존재-신학 비판이 단순히 기독교의 전통적인 고전적 유신론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전근대 세계에서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근대세계에서는 데카르트와 칸트의 초월적 인간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와 니체의 경험적 인간주의까지를 모두 겨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오늘날 유신론이 우주론적 초월을 넘어서 단순히 대안적인 존재-신학이 되는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 ‘자연의 존재-신학적 범신론’으로서의 스피노자와 ‘정신의 존재-신학적 범신론’으로서 헤겔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일반적인 서양철학사에서 칸트 철학이 인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세계의 ‘초월적 신’을 윤리적으로만 요청하고 스피노자나 셸링은 자연적인 ‘내재적 신’을 주장했지만 헤겔 철학은 초월과 내재를 종합하여 ‘범재신론적 신’을 주장했다고 이해하는 것과 달리, 웨스트폴은 헤겔조차도 존재-신학적 틀 속에서 갇혀 있다고 보는 것이 특이한 지점이다. 이것은 전통형이상학이 ‘존재(being)’와 ‘존재자(beings)’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배회하였을 뿐이라는 하이데거의 비판이 존재-신학자로서의 헤겔을 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이 또 하나 특별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틀의 반복으로서 고전적 유신론자로 이해하지 않고 위-디오니시오스와 더불어 인식론적 초월의 차원에서 신의 신비를 말한 것으로 새롭게 재해석한 점이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칸트만큼 반실재론자라는 저자의 혜안을 읽어내려가며 느꼈던 의아함은 유신론적 반실재론이 실재론보다 오히려 신의 초월에 대한 정의를 더 잘 내릴 수 있겠다는 수긍으로 변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를 탈근대 사유의 돌파구로 새롭게 읽어내는 이러한 작업은 이 신학자들의 사유가 가지는 방대함과 다양한 측면에 근거한 것이겠지만, 크게 보아 20세기 초반 가톨릭의 앙리 드 뤼박의 신신학의 전통 속에서 20세기 후반 급진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 신학이 보여주었던 방향성과 닮아 있다. (예를 들어, 급진 정통주의 신학자 존 밀뱅크는 들뢰즈의 탈근대 존재론에 내재된 ‘차이’의 폭력성의 문제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이 보여주는 존재론적 평화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존 밀뱅크 <신학과 사회이론> 참조)

웨스트폴은 창조자로서의 신을 전통형이상학에서처럼 제일 원인(causa prima), 최종 근거(ultima ratio), 자기 원인(causa sui)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것을 단순히 형이상학적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도덕적 속성에 종속되는 맥락 속에 재위치시켜야 한다 말한다. 이것이 비인격적인 범신론의 신과 다른 웨스트폴이 원하는 새로운 유신론의 인격적인 신의 모습인 듯 하다. 또한 존재-신학적 기획의 일종으로서 모든 “자기 원인 프로젝트”가 우리 자신을 자율적이고 자기-충족적으로 만들려는 것과 반대로 새로운 유신론에서 형이상학적 신의 초월은 실천적 영성으로서 인간의 자기 초월과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그리스도가 신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그가 인간도 아니며 신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키에르케고어가 우리에게 지적하려고 한 것은 바로 그러한 타자이다.”(<탐구 1>)라고 말한 바 있다. 신과 인간의 타자성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가장 잘 드러났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웨스트폴은 인간의 신의 타자성에 누구보다 올곧이 천착한 레비나스와 키에르케고어를 통해 ‘이중적 자기-초월’에 대한 요구를 말한다. 이 요구의 첫 번째는 내가 나 아닌 것, 즉 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변화이고, 두 번째는 나 자신의 자기보존 노력보다 더 큰 것의 일부가 되는 재배치, 곧 섬김을 받기보다 섬김으로써 나 자신이 되는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교회는 히틀러에 협력하고 순응함으로 힘을 잃었다. 그 무신론적 혼돈의 역사 속에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저항과 복종>) 살아갈 것을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고 다를까?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앞에 선 러시아 정교회,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의 보수 기독교, 좌우로 갈라서 서로를 비난하는 한국 기독교의 모습까지... 정말 신이 있는가? 정말 있다면 누가 믿는 신이 참으로 존재하는 신인가?

마태복음 25장의 종말론적 담화의 마지막 비유에서 예수는 최후 신의 심판의 장면을 그려낸다. 그리고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서 그 어떤 교리가 아닌 타자를 향한 태도를 말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마 25:40, 45).” 여기에서 신과 이웃은 모두 우리들의 타자로 다가오며, 심판의 기준은 오직 이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놓여있다. 웨스트폴이 말하고자 했던 신의 ‘초월’과 인간의 ‘자기-초월’이 이 말씀 안에 다 담겨져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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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과 자기-초월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4년 2월 22일 <대자보>( https://bit.ly/3Iuc34x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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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재신론』(리처드 카니 지음, 김동규 옮김, 2021)


교조적 유신론과 전투적 무신론을 넘어서는 제3의 길을 제안한 책이다. 신의 죽음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가 신성하다고 부르는 것들을 추구하는 좀 더 책임감 있는 방식과 새로운 종류의 종교적 기획을 모색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는가? 저명한 철학자 리처드 카니에 따르면 우리는 가장 오래된 지혜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창조적 ‘무-지’(not knowing)의 순간에 와있다.


예술로서의 삶 : 니체에서 푸코까지』(재커리 심슨 지음, 김동규, 윤동민 옮김, 갈무리, 2016)


우리가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말하고, 즐기고, 고통을 받으며 숨을 쉬고 있는 한 자기의 삶에 대한 관심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예술로서의 삶>은 바로 이러한 철학의 물음에 충실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재커리 심슨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좋은 삶인지에 대한 물음에 예술로서의 삶이라는 철학자들의 통찰을 나름의 해법으로 제시한다. 니체,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마리옹, 카뮈, 푸코에 이르기까지 19~20세기를 수놓은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제시한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저자는 ‘예술’을 매개로 정돈한다. 삼육대학교 스미스학부대학에서 추천하는 삼육도서 100선 선정.


신정-정치 : 축적의 법과 국법의 이위일체 너머』(윤인로 지음, 갈무리, 2017)


화폐의 힘을 ‘현실적인 신’이라고 표현한 맑스, 자본주의를 기독교의 형질을 띤 것으로 포착한 벤야민, 현대 국가의 주요 개념들이 환속화된 신학의 개념이라고 했던 슈미트, 국법의 진정한 실험실이 교회법이었다고 한 아감벤. 이 책은 그런 성찰들을 따르면서, 신, 신성, 신적인 힘이 경제적 이윤과 정치적 권력 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중심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비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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