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호] 『예술과 공통장』 권범철 저자와의 인터뷰

인터뷰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4-02-05 14:26
조회
445
 

『예술과 공통장』 권범철 저자와의 인터뷰



Q. 공통장 개념이 생소한 독자들을 위해서 공통장이 무엇인지 알기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책의 제목이 ‘예술과 공통장’인데 예술과 공통장은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이 책에서 공통장은 무엇보다 삶을 대안적으로 재생산하는 양식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대안이란,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편으로 강제하는 임금노동과는 다른 방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서 생계수단을 박탈하는 과정(인클로저)에서 출발하여 우리에게 일하느냐/죽느냐의 선택을 강제하는 시스템입니다. 이러한 강제 속에서 우리가 수행하는 임금노동은 우리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가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일에 바치게 만들어 우리의 삶을 궁핍하거나 권태롭거나 무의미하게 만들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의 과정 자체를 재생산하여 이 세계를 파괴(생태 위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기 위해 하는 일이 우리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우리 삶의 터전까지 파괴하는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 삶의 의미를 되찾고 현재 진행 중인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다른 식으로 삶을 재생산하는 방식이 필요하고 그 방식이 바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공통장입니다. 요컨대 공통장의 공통(共通)이라는 말이 가리키듯이 공통장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새롭게 만들어 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임금노동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임금노동은 너무나도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 바깥의 삶을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임금노동을 강제하는 이 사회에도 그로부터 배제된 사람들(대표적으로 집 안의 여성, 거리의 노숙인, 일할 능력이 없다고 간주되는 장애인, 지역 자체가 저발전되어 일자리가 부족한 지역 주민들 등)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도 어쨌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임금노동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그 다른 무언가에서 공통장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통장에 기대어 사는 삶의 양식을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임금노동에서 배제되어 다른 기댈 것을 만들도록 강제되는 사람들, 즉 (조금 어색한 표현입니다만) 비임금자(the unwaged)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점에서 예술가들의 삶에 주목합니다. 예술가들은 다른 전문 직종 종사자들과는 다르게 많은 경우 공식적인 제도적 환경 외부에서 활동하는데, 이들을 위한 제도 자체가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 역시 비임금자입니다. 이 책은 예술가들의 활동 중에서도 스쾃(squat)에 주목합니다. 스쾃은 본래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점거한 공간 혹은 그 행위를 가리키는 말인데요. 이러한 스쾃은 사실 어디에나 어느 시대에나 발견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를 다른 어떤 수단으로도 충족하기 어려울 때 혹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어딘가를 점거하는 일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목하는 스쾃은 68혁명 이후 공장에서 사회로 확산된 새로운 흐름과 함께 한 점거운동과 유사한 성격을 공유합니다. 이 시기 점거운동은 유럽 각지에서 전개되면서 공장 점거에서 빈 공동주택을 점거하는 공동체 투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일보호센터, 공동취사, 인민건강센터 등 새로운 집합적 생활방식이 개발되었고, 이러한 점거 운동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주택에 한정되지 않고 정치문화적 센터(사회 센터)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의 점거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공간은 지역에서 대안 식당, 카페, 서점, 술집, 도서관, 공연장, 회의실, 극장, 주민 학교, 진료소 등의 기능을 하면서 자율적이고 집합적이며 대안적인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갔습니다. 이러한 스쾃은 점거를 통해 사적 소유권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저항적인 성격을 가지며 또한 새로운 집합적인 삶의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구성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이렇게 스쾃은 저항과 구성의 성격을 동시에 갖는 대안적인 삶의 양식, 즉 공통장이라 볼 수 있고, 이 책은 그러한 스쾃의 국내 사례를 주로 분석합니다.


Q. 이 책은 특히 오아시스와 문래예술공단을 주된 사례로 분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두 가지 고유명사가 무엇인지 간단한 설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안에서의 저자님이 함께한 활동은 어떤 것이었는지도 궁금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 책은 예술가들이 구성한 공통장의 구체적인 사례로 스쾃에 주목합니다. ‘오아시스 프로젝트’(이하 오아시스)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예술 스쾃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2004년 8월 15일 목동 예술인 회관(현: 대한민국예술인센터)을 점거한 예술가 집단의 이름이자 그들이 수행한 프로젝트를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목동 예술인회관은 본래 1992년 대선 당시 문화예술인 종합복지공간 조성이라는 공약으로 시작되었으나 여러 문제로 인해 점거 당시 53%의 건설공정이 진행된 상태로 수년간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예술인회관은 개인이 아닌 공공 기관이 추진하는 사업이라는 점, 한국 사회에서 일반화된 부동산 임대 사업을 향한 욕망이 노골적으로 노출된 장소라는 점(사업의 취지가 본래 예술가를 위한 “종합복지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맡은 예총은 지상 20층 건물의 15개 층[6~15층]을 오피스텔로 임대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한 공간의 사적 전유와 사회적 필요의 모순이 드러난 곳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본래 예술가를 위해 계획된 공간이라는 점이 예술가들에게 점거의 명분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아시스는 2004년 8월 15일 이곳을 점거하고 ‘예술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뒤 경찰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이들은 목동 예술인 회관 외에도 홍대 앞에서 거리를 점거하여 예술포장마차를 운영했고, 동숭동 문화예술위원회 소유의 빈 공간을 점거했으며, 이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예술의 문제를, 자본주의 도시에서 공간의 문제를 제기하며 스쾃 담론을 널리 확산시켰습니다.

문래예술공단은 2000년대 후반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 철재상가 및 인근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물론 문래동에는 여전히 많은 예술가들이 있지만 이 용어는 이제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당시 반상회를 통해 조금씩 동네에서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문래동에 작업실이 출현한 것은 2000년대 초반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본래 이 지역은 철재상과 소규모 가공업체가 밀집하여 왕성한 생산 활동을 벌이던 곳이었으나 서울시 산업구조의 전환 과정에서 조금씩 쇠락해 가는 중이었습니다. 1990년을 전후로 문래동의 많은 철재상이 경기도의 각종 공단을 비롯한 수도권 외곽으로 이전하였으며, 그로 인해 문래동3가에 있는 철재종합상가 건물 2, 3층의 대부분이 비기 시작했습니다. 이 공간은 소음과 먼지, 냄새가 거리를 에워싸는 외부 환경 탓에 오랫동안 비어 있었고 찾는 사람이 없는 까닭에 임대료가 매우 낮게 유지되었는데요. 이런 까닭에 예술가들이 빈 공간을 찾아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들어온 예술가들이 다시 다른 예술가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오아시스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예술가들도 프로젝트가 끝난 뒤 문래동에 작업 공간을 구해서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곳은 스쾃의 일반적인 의미처럼 비합법 점거 공간은 아니지만 스쾃을 대안적인 삶의 실험으로 이해할 때 문래동의 많은 작업실 역시 스쾃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곳들 역시 대안적인 형태의 전시장, 극장, 부엌, 도서관, 카페, 레지던시 등을 운영하면서 기존의 여러 예술 스쾃과 유사한 활동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스쾃이 저항과 구성의 두 측면을 갖는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두 사례에서 오아시스가 저항에 집중한 스쾃이라면 문래예술공단은 구성에 집중한 스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그 두 사건을, 스쾃의 두 선을 각각 대변하며 연결되는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합니다.

저는 2006년 5월 오아시스 프로젝트가 거의 끝나갈 무렵 참여했습니다. 당시 오아시스는 점거 프로젝트를 거의 끝내고 연속 토론회를 진행 중이었는데, 토론회에 청중으로 갔다가 아주 우연한 계기로 이후 오아시스가 출간하게 되는 책, 『점거매뉴얼북 Art of Squat: 자율적 공동체를 위한 실천 지침서』(2007)의 편집회의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책을 함께 편집하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오아시스 주요 구성원들은 문래동에서 LAB39와 예술과 도시사회연구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했는데 저는 이 두 곳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시작과 끝을 함께 했습니다. 이 책은 그 시기 동안 있었던 많은 프로젝트와 프로그램, 연구, 토론회, 회의, 모임, 대화 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 책이 그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공동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Q. 페미니즘과 공통장의 관계가 이 책에서도 언급되고 현재 실비아 페데리치의 『세계를 재주술화하기 : 페미니즘과 공통장 정치』라는 도서를 공동 번역 중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자님이 생각하시는 페미니즘과 공통장의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언급하신 실비아 페데리치는 그 책에서 (뿐만 아니라 이미 국내에 출간된 저작들에서) 집 안에서 재생산 노동(페데리치는 가사노동이라는 말보다 재생산 노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을 하는 여성들이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이라 할 수 있는 노동력을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그러나 무상으로 그 일을 한다는 점에서 (공장의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착취 받는 생산적 노동자라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는 자신에게 꼭 필요하며 지구상의 노동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그 재생산 노동을 무상으로 전유함으로써 어마어마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이 과정을 통해서만 지탱되는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상 전유가 가능해지는 것은 여성이 집 안에서 수행하는 그 노동이 사랑의 이름으로 숭고화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돈을 주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가 주장했듯이 임금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 일(재생산 노동)이 착취 받는 일이라는 일을 효과적으로 감추기 때문입니다(우리는 돈을 주지 않는 일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페데리치가 주장하는 전략은, 현재 자본주의의 기둥으로 기능하는 재생산 노동(최근 주목받고 있는 돌봄도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집합적으로 재구성하여 다른 삶의 토대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페데리치가 이야기하는 재생산 공통장입니다. 페데리치는 여성들이 역사적으로 그 일을 담당해왔고 현재도 그러하기 때문에(페데리치는 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지에서 진행 중인 투쟁과 공동체 실험을 사례로 인용합니다) 여성들의 재생산 공통장과 이들의 잠재력에 주목합니다. 이것은 집안일을 여성의 일로 자연화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우리의 생명을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버릴 수 없는 그 일, 재생산 노동을 다르게 재구성하자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논의를 이어받아 도시의 예술가 역시 집 안의 여성과 마찬가지로 착취 받는 생산적 노동자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비임금 노동자라는 점에서 비슷한 성격을 공유합니다. 예술 역시 사랑과 마찬가지로 숭고화되면서 ‘예술이라는 선,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내적 욕구에 따라 활동한다’고 여겨지는 도시의 예술가는 ‘사랑이라는 숭고함,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위한다’고 여겨지는 집안의 여성과 유사한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예술가를 이해하는 방식은 페데리치가 여성을 이해하는 방식에 크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페미니즘과 공통장,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는) 예술가는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


예술과 공통장


※ 편집자 주 : 이 인터뷰는 <예술과 공통장> 보도자료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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