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3강 - '서양 문명의 진보란 무엇인가' 발제문

작성자
deepeye
작성일
2023-04-02 11:50
조회
320
진보사관에 대하여

마루야마는 <문명론 개략> 2장 ‘서양 문명을 목적으로 하는 일’에서 제목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목적’은 문명을 절대화하는 게 아니라, ‘문명화 과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화 과정은 곧 진보사관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며, 그것은 일본의 자유민권사상, 마르크스주의까지 포함할 정도로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후쿠자와는 콩도르세가 주창한 18세기 계몽적인 진보관을 잇고 있는데, 해당 사관에서 진보의 증대는 곧 지성의 축적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단순 ‘변화’로 구분된다. 후쿠자와가 <문명론 개략>에서 문명의 단계론을 설정한 이유 역시 여기서 찾아볼 수 있겠다.

한편 마루야마는 진보사관의 세 가지 특징을 요약하는데, 첫째, 역사에 목표가 있다는 생각, 둘째,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역사의 내재적 발전론, 셋째, 다윈의 학설이 속류화된 사회적 다위니즘이 그렇다. 특히 일본에서는 이 세 가지가 거의 한 덩어리로 들어와 섞이면서 진보사상을 구성했다고 본다. 그중 스펜서의 진보사상은 자유민권론의 무기가 되기도 했지만, 사회적 다위니즘의 적자생존 논리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되기도 했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가 <문명론 개략> 속에서 대립과 투쟁을 역사적 진보의 계기(중국과 대비되는)로 본다는 점에서, 스펜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야만과 반개

<문명론 개략>에 나타난 야만, 반개, 문명의 구분 자체는 18세기 유럽의 일반적인 문명 공식 같은 것이므로 특색이 없다. 하지만 마루야마는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이 대단히 후쿠자와적이라고 한다. 후쿠자와 사상의 핵심적인 용어 내지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첫째 ‘야만’에 대해서는 후쿠자와 “문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학이라는 것은 없었다”고 한 부분에 주목한다. 이때 ‘문학’은 오늘날 같은 좁은 의미의 문학이 아닌, 학문과 문예를 총칭하는 것이었다. 둘째 단계인 ‘반개’는 문명보다 못하지만, 야만에 비해 문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후쿠자와는 바쿠후 말기, 메이지 유신기 일본이 이 단계에 해당한다고 보았는데, 반개에서 그가 문제로 봤던 건 ‘원망’이다. 여기서는 무엇 하나 생산적인 가치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원망에 대해서는 제9장 ‘일본 문명의 유래’나 <학문의 권장> 제13편에서도 일본 사회 비판의 일환으로 언급하고 있다.

문명의 단계

문명 단계에서 후쿠자와가 경계했던 것은 ‘혹닉’이다. 구습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후쿠자와는 혹닉이라고 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때, 지동설을 발명했던 갈릴레오, 떨어지는 사과에서 중력의 이치를 발견했던 뉴턴과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다고 보았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의 ‘혹닉’ 비판이 버클의 ‘credulity’의 비판과 대응하며, 기조의 <유럽 문명사>에 나오는 자유 탐구의 정신에서 빚진 바 있다고 평가했다.

서양 문명의 상대화와 양의성

앞서 여러 번 나왔지만, 후쿠자와에게 문명은 완성된 고체가 아니라, ‘문명화’ 해나가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세상에 아직 지극히 문명한 나라‘는 없고,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정치“역시 있을 수 없다. 후쿠자와는 이처럼 아나키즘에 가까운 생각으로 당시 서양 문명을 상대화했다. 그렇기에 서양 문명을 절대화하는 시각과 부딪혔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 문명의 한계를 꼬집으며 개화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부딪혔다. 마루야마는 이것을 ’양면작전‘이라고 표현했다. 후쿠자와에게 서양 문명은 무작정 떠받들 것도, 배척할 것도 아닌, 일본이라는 나라와 인민의 존립을 위해 긴급하게 취해야 했던 것이었다.

문명의 정신과 외형

후쿠자와는 반개한 나라가 문명을 취하는 데 있어, 순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문제로 삼는다. 문명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사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정신이라는 두 가지 구별이 있다. 이 지점에서 그가 대결하는 것은 ’채장보단론‘과 ’개화 선생‘이다. 채장보단론은 동양의 도덕, 서양의 기술을 나누는 사고방식으로 사쿠마 쇼잔 이래 바쿠후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기에 걸쳐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개화 선생은 앞선 비판에서도 나왔지만, 서양의 의식주 등 외형적인 문화만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단지 옛것을 믿는 것과 같은 정신 태도로 새로운 것을 믿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문명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후쿠자와가 보기에 그것은 ’문명의 정신‘이었다.

인민의 기풍

마루야마가 보기에 문명의 ’정신‘은 바꾸어 말하면 ’인민의 기풍‘이기도 하고, <문명론 개략>에 등장하는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다. 후쿠자와는 아시아와 유럽의 차이는 한 사람의 차이가 아니라 전체의 차이라고 한다. 그 연유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아시아에도 뛰어난 사람이 있지만, ’전체의 기풍‘에 제어당하기 때문이다. 같은 취지가 <학문의 권유> 제4편에도 나오는데, 과거 전국의 인민은 수천백 년 동안 전제 정치에 시달려서 속마음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없었다. 유신 이후에는 정부의 외형이 크게 바뀌었지만, 인민이 유능한 정부를 떠받들기만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부족하다는 논지였다. 후쿠자와에게 있어 가장 중요했던 건 한 나라의 기풍을 바꾸어 인민 독립의 정신을 뿌리내리는 것이었다. 이에 비하면 학교, 공업, 육해군 등과 같은 문명의 외형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한편 마루야마는 후쿠자와가 ’문명의 정신‘을 말할 때 독립불기의 정신 같은 규범적 의미, 그리고 일본에 넘치고 있던 기풍이라는 경험적 의미와 구별해서 살펴봐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정신활동의 다양화

후쿠자와는 문명을 추구하는 순서를 논한 뒤, 완력과 지력의 관계로 문명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문명의 3단계설이 등장하는데, 먼저 초매草昧의 시대에는 물리적 폭력이 우위를 점해 인간의 교제를 지배했다. 여기서 ”교제의 권력이 한 쪽으로 치우“친 것 즉 ’권력의 편중‘이라는 후쿠자와의 유명한 명제가 등장하는데, 마루야마는 이때 ’권력의 편중‘이 정부 쪽에 힘이 쏠리고, 인민 쪽이 가벼워졌다는 일반적 해석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권력의 편중은 정치, 실업, 학문, 예술, 남녀관계 등 다양한 영역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후쿠자와를 ’다원적 권력론자‘라고 명명한다. 다음 2단계가 되면 야만에서 벗어나, 지력의 권력도 조금씩 생겨나게 된다. 여전히 완력에 종속되긴 했지만, 지력의 힘이 커졌기 때문에 인간 정신의 발달도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명의 단계에서는 권력이 인간 활동의 다양한 영역, 즉 정치, 군사, 문학, 학문, 실업과 같은 식으로 퍼져나가 어느 것도 권력을 독점할 수 없게 된다. 이때 비로소 지의 작용이 모든 영역에 발휘되어 진보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후쿠자와에게 있어 여러 가치가 경합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안정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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