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세이사』 1장 - 붕괴라는 시작 1989.1~1990

작성자
deepeye
작성일
2023-12-09 13:41
조회
299
두 아버지의 ‘붕어(崩御)’

세계사에서 ‘냉전 종언의 해’로 새겨진 1989년 쇼와 천황이 세상을 떠났다. 저자 요나하 준은 쇼와 천황과 사회주의의 ‘죽음’을 두고, 당시 ‘일본인의 관점’에서 봤을 때 ‘좌우’라는 두 가지 기둥이 함께 부러졌다고 말한다. 츠바이크의 회상록 ‘어제의 세계’처럼 어느새 ‘동시대’가 결정적으로 과거의 것, 즉 ‘어제’로 변해버린 것이다. 1989년을 원년으로 삼는 “헤이세이사라는 것은 거기서 시작된 재건의 이야기이고, 또 그것이 좌절된 희비극이기도”(26)하다.

사라진 좌우의 억압

쇼와 시대 일본에서 맹위를 떨쳤던 마르크스주의와 천황주의는 어떤 식으로 사회에 작용했을까? 저자의 구분에 의하면, 전자(좌파)는 『자본론』 등 텍스트의 해석을 ‘언어를 통한 독해’로 익히는 것이었지만, 후자(우파)는 천황이라는 한 인격체의 ‘신체를 모방하는 습득’으로 배우는 점이 특징이었다. 좌파의 경우 순수하게 언어만으로 사람들을 조직하기 어렵기에 스탈린 같은 ‘절대적인 지도자의 신체’를 가진 인물이 출현하기도 했다. 신체적 억압의 경향은 쇼와시대 ‘강압적인 좌파 교사’들에게도 나타났는데, 신체적 억압을 가했다는 점에서 우파보다 모순적이고 추악한 인상을 후세대에 남겼다. 역설적이게도 일본 사회는 좌우의 거대한 억압이 사라진 이후, “오히려 억압을 바라기라도 하듯이 더 과격한 말이나 행동으로 기울어”(37)가는 역설적인 사회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버지 없는 사회로의 도약

한편 저자는 1989년 헤이세이/포스트 냉전이 일본에서 일으킨 변화를 극적인 드라마로 보지 않는다. ‘줄곧 위독했던 아버지’(천황)의 죽음은 지연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아버지다운 모델이 없는 시대’라는 실체는 이미 1970년대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예컨대 ‘70년 안보 반대 투쟁’을 이끌었던 전후 ‘단카이 세대’(1947~1949)는 1970년대 대학생으로서 쓰나미처럼 일본 사회 전반을 휩쓸었다. 앞 세대와 달리 사회를 우리에게 맞춰서 변화시키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그 기반에는 ‘신체감각’이 운동의 원천으로 자리해 있었다. 하지만 안보 반대 투쟁은 불발로 그쳤고, 이들은 기성 질서 속에서 가정을 꾸리고, ‘부모’가 되어갔다.

이들의 자식 세대는 제2차 베이비붐(1971~1974)에 태어난 단카이 주니어 세대인데, 부모 세대처럼 반항할 나이에 도달했을 때쯤, 냉전이 끝나고 헤이세이가 시작돼버렸다. 저자는 이를 두고 “처음으로 아버지를 부정한 세대의 사람들이 이번에는 규탄당하는 쪽인 아버지 자리에 앉아서, 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시험 당하는 시대.”(42)라고 규정한다. 또한 1970년 ‘근대 고릴라’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은 ‘해봐서 할 수 없는 것/안 되는 것은 없다’라고 하는 공격적인 근대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44~45 참조) 1970년대 전반의 베스트셀러를 둘러봐도 지구환경이 인류 문명에 보복하거나, 반근대과학적인 오컬티즘 종말론을 소재로 삼은 책들이 인기를 얻었는데, 이는 헤이세이 일본의 정치나 사회를 음양으로 뒤흔드는 큰 주제나 상상력이 이미 이 시기에 제기된 것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춤추기 시작하다

천황과 마르크스주의라는 ‘두 아버지의 죽음’에 비해서 사상적으로 경미하지만, 헤이세이 시대에도 현실에 영향이 큰 ‘두 가지 붕괴’가 일어났다. 바로 1989년 7월 자민당 일당 지배의 균열과 1990년 초 주가 급락으로 시작된 거품 붕괴(경제성장의 종말)가 그렇다.(49~51 참조) 또한 쇼와 시대와 달리 대중적인 분열이 커지기도 했는데, 그러한 요인에는 전 국민 규모로 의사소통기초를 제공하는 ‘역사’의 부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예컨대 쇼와 시대 말기는 ‘역사’를 매개로 ‘교양 층’과 ‘대중 층’이 폭넓게 일치했던 안정된 시대기도 했다. 쇼와 50년대, 즉 1975~1984년에는 『별책 역사 독본』(1976), 『역사와 인물』(1984)등 역사 잡지 창간이 러시를 이루었고, 쇼와 60년대에는 NHK의 헤이안 시대 역사 드라마들이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반면 헤이세이 최후의 대하드라마 『이다텐~도쿄올림픽 이야기』는 전대미문의 평균 시청률 한 자릿수(8.2%)를 기록하는 데 머물고 말았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어떤 이유로 일본 사회가 ‘공통의 시대 감각’을 잃어버렸는지 되묻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분열을 봉합할 ‘역사 서술’을 보여줄 수 없을지, 그것이야말로 이 책이 지향하는 것이라고 저술 의도를 밝힌다.

‘여자아이들’의 감성으로

쇼와 천황이 죽은 1989년 뒤 여러 영역의 대부라고 추앙받는 사람들(데즈카 오사무, 마쓰시타 고노스케, 미소라 히바리)이 세상을 떠났다.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종래와는 다른 감성으로 받아들이는 세대가 착실히 자라났는데, 1988년 만화 원작자/편집자인 오쓰카 에이지의 글 「소녀들의 ‘귀여운’ 천황」을 보면 천황을 귀엽게 여기는 소녀들의 인식이 등장한다. 이것은 일본 근대사회가 만들어낸 어떤 천황관으로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시선이었다. 좌우가 ‘논쟁’을 벌인 냉전=전후라는 구조가 빠져나간 뒤, 새로운 감성이 쇼와 말기부터 이미 생겨나고 있었다는 것이기도 했다. 이어서 저자는 1989년에는 오타쿠 청년 미야자키 쓰토무가 연속 아동 살인을 저지른 사건을 언급한 뒤, “‘성숙’의 모델을 잃어버린 아이들의 시대인 ‘헤이세이’가 시작된”(58) 셈이라고 장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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