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8강 - '문명사의 방법론' 발제문

작성자
deepeye
작성일
2023-05-12 21:39
조회
489
제8강. 문명사의 방법론: 제4장 ‘일국 인민의 지덕(智德)을 논함’2


가까운 원인과 먼 원인

후쿠자와는 버클의 『영국 문명사』를 저본 삼아 사물의 작용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중 가까운 원인은 수가 많고 혼잡하지만, 먼 원인은 거슬러 갈수록 하나의 원인으로 여러 작용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마루야마는 “하나의 원인”이 흔히 역사에서 말하는 다원인설이나 일인설과 다르다고 말한다. 오히려 자연과학적 법칙처럼 하나의 명제로 다양한 현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케이스를 염두에 뒀다는 것이다.(ex 후쿠자와가 1장에서 언급한 뉴턴의 인력 법칙)

버클과 후쿠자와는 역사 서술을 과학으로 높이고 ‘법칙 발견’의 방법을 모델로 삼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버클에게 역사학과 다른 학문 영역들 사이의 격차를 메우는 게 주된 문제였다면, 후쿠자와에게는 자연, 사회, 역사적 계기 등 아시아의 뒤떨어진 학문 자체가 총체적 문제였다. 바쿠후 말기, 메이지의 열악한 지적 상황에서 개인이나 지도자 중심 서술을 벗어나, ‘여러 사람의 마음’이 나아가는 경향과 작용을 읽어내는 사회 구조적 인식은 놀라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영웅과 시대의 기풍

일본과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때를 만나지 못한 비운의 인물에 대한 탄식이 그치질 않았다. 반면 요행히 공업을 남긴 사람이 있다면 천재일우라 불러왔다. 후쿠자와는 바로 이런 역사관에 반대하며, “대량 관찰에 의한 어떤 경향성의 인식”(290)을 보려고 하는 사고방식을 갖고자 했다. 예컨대 공자와 맹자가 등용되지 못한 것은 주나라 제후의 잘못이 아니라 근본 원인이 따로 있다. 바로 ‘시세’다. 문명의 정신이란 이것을 가리키며, ‘인민의 기풍’ 또는 ‘문명의 정신’을 시간에 적용하면 ‘시세’가 된다. 마루야마는 이때의 시세가 “그러니 도리가 없다거나 시세를 잘 탄다고 할 때의”(291) 의미와 완전히 다르다고 구분한다. 또한 후쿠자와의 역사관에서는 영웅호걸이 인민의 지덕을 나아가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지덕의 진보를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명이 나아갈 수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케이스

후쿠자와는 앞의 명제에 대한 구체적인 실증으로 춘추전국시대를 거론해나간다. 그가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공맹과 유교 이데올로기다. 첫 번째로 유교적인 정교일치 사상은 군주정 이외 정치형태를 알지 못하는 고전 중국의 사태를 전제로 삼고 있으며, 두 번째로 학문과 교육이 정치 권력에 흡수되는 유교적 덕치주의의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적 성인의 도를 전제로 하는 한, 진리를 말하는 자는 치자 또는 정부의 고문일 수밖에 없으며, 거꾸로 위정자는 ‘성인의 도’를 궁구한 군주가 아니면 안 된다는 논리 필연성에 갇힐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공자와 맹자는 관직을 위해 노력하는 방식으로밖에 철학이나 이론의 양상을 생각하지 못하는 인물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유교에 대한 후쿠자와 유키치와 오규 소라이의 관점 대비다. 마루야마가 보기에 유교 이데올로기에서 순수하게 비정치적인 피치자가 없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일치한다. 하지만 유교의 본질을 주자나 양명과 분리해내려는 소라이와 달리 후쿠자와는 일부 논리를 계승하면서도 유교가 안 된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치자가 피치자를 일방적으로 지배하게 만드는 개인 도덕과 정치의 혼동이 유교 자체로부터 나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하나 유교의 근본 오류는 가정에서나 이루어질법한 관계를 타인에게 그대로 적용하려는 데 있었다.

겐무 중흥의 사례

후쿠자와가 다음 타겟으로 삼은 것은 ‘겐무 중흥’의 예다. 유학에서 주나라 왕조에 대한 제후의 충성 문제가 명분론으로 주창되었듯, 일본에서 겐무 중흥은 대표적인 영웅사관, 개인의 자질로 역사를 설명해가는 예로 인용되어왔다. 그런 점에서 후쿠자와의 겐무 중흥론은 동시대 존왕론자들에게 대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탐욕스러운 아시카가 다카우치가 정권을 잡고,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죽은 것에 대해서 누가 논공해도 그런 결과가 됐을 것이라 한다. 이것은 고다이고 천황 개인의 불민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무가에 손을 벌린 역대 천황들의 말과 행동에 비추어 봤을 때 시세의 흐름에 의한 것이었다. 마루야마는 쇼와 시대 『문명론 개략』에서 이 부분이 삭제된 것을 두고 1930년대 일본의 반동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라고 봤다.

영웅과 시대의 기풍―총괄

지금까지 후쿠자와는 영웅호걸이 때를 만나지 못한 걸 두고, 시대의 기풍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서술해왔다. 이제는 영웅호걸이 큰일을 이루어서 인민을 지덕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주장에 본격적으로 반박한다. 그가 보기에 미국의 독립은 워싱턴이나 독립선언에 서명한 48인의 서명자들이 없었어도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인민의 기풍이 있다면, 제2, 제3의 워싱턴이나 제2의 48인이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워싱턴이나 웰링턴이 아편전쟁 당시 중국 군대를 이끌고 영국과 싸웠다면 어떻게 됐을 것인지 되묻는다. “지도자의 우수성 수준level은 인민 일반의 기력에 의해 제약당하는 것이며,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316)이다.

지도자와 중론

후쿠자와는 이 관점에서 지도자를 인민 ‘중론’의 종속 변수라고 봤다. 이어서 중론에 대한 두 가지 명제를 언급하는데, 첫째는 ‘중론이 향하는 바는 천하에 적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현실의 중론이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변혁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때 세론에 끌려가는 세론추수주의에 빠지지 않고, ‘이단의 망령된 주장’을 용기 내어 주장하는 것이 후쿠자와가 생각하는 학자의 본분이었다.

학자의 직분

자칫 앞에서 언급한 영웅호걸과 시세의 문제는 ‘숙명론’에 빠질 염려도 있다. 후쿠자와는 이점을 의식했는지 문명은 인간의 약속이라 언급하며, 각각의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역할과 사명에 대한 고민을 드러낸다. 그중 정치와 학문의 분업에 의한 협업을 강조하는데, 독립 영역들이 협력해가면서 문명의 진전이 이루어진다고 봤기 때문이다. 예컨대 즉시 어떤 일에 가부를 결정하는 것이 정부의 소임이라면, 장기적인 안목으로 형세를 살피고 준비하는 것이 학자의 직분이다. 그러나 후쿠자와 시대의 학자들은 이런 본분을 잊고 세간으로 달려가며, 마치 정부밖에 길이 없는 것처럼 이해를 다투기도 했다. 이것은 후쿠자와가 앞서 비판했던 유교 이데올로기적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 후쿠자와는 이런 경향에 저항하며, 재야에서 ‘중론’을 변혁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관에 들어가지 않았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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