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1부 6장 - '현실주의의 함정' 발제문

작성자
deepeye
작성일
2023-09-30 09:45
조회
240
마루야마는 일본의 재군비 문제에 대해 반대 의견을 밝힌 뒤, 해당 논의에 대한 사람들의 사유방식과 태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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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講和) 논의와 재군비 문제를 다룰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비난이 바로 ‘현실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마루야마는 이런 일본인의 ‘현실’ 구조에 세 가지 특정이 있다고 한다. 우선 현실의 소여성. 현실이란 주어진 것임과 동시에 하루하루 만들어져가는 것인데, 보통 ‘현실’이라고 할 때는 오로지 ‘주어진’ 것만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과거에는 국체, 만주국, 국제연맹 탈퇴, 중일전쟁, 삼국동맹 등이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여졌다. 두 번째 현실의 일차원성. 실제 현실은 모순된 것들이 매우 복잡하게 구성돼 있는데, 일본에서는 파쇼화를 따르는 방향을 제외하고, ‘현실을 직시하라’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무시된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때그때 지배권력이 선택하는 방향이 훌륭하고 ‘현실적’이라 여겨지는 현상이다. 마루야마는 이 세 가지 ‘현실’의 구조가 무비판적으로 유지되면, 과거와 마찬가지로 장래에도 일본 국민의 자발적인 사고와 행동을 막아서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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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문제 앞에서 처신하는 것은 항상 어려움을 수반한다. 어제의 치열한 문제가 오늘날 하나의 자명한 사실로 대체되고, 어느새 이슈가 강화론에서 중국 선택문제를 거쳐 재군비론에 이르듯 순식간에 옮겨가 있기 때문이다. 마루야마는 이럴 때일수록 이전의 쟁점을 잊어버리거나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국면 속에서 끊임없이 구체화해야 한다고 한다. 새로운 문제의 해답에만 정신을 빼앗길 경우 어느새 코가 꿰어 끌려다닐 수밖에 없어서다. 실제 만주사변 이후 수많은 선의의 지식인들이 결과적으로 파시즘에 일조하게 된 비극 역시 그런 요인에서였다. 이어서 마루야마는 어설픈 이론으로 ‘현실’을 합리화하고 자기기만에 빠지는 지식인 특유의 약점을 비판한다.

그런 경향은 재군비 문제에 있어서도 드러나고 있는데, 어떻게 구 제국군대의 재현을 방지할 것인지, 혹은 문관우위제의 원칙을 확립할 것인가 같은 주장들이 이미 앞서서 여기저기 주장되고 있는 것이 그렇다. 사태의 급진전에 현혹되어 사상적인 ‘선매’(필요를 예상하여 미리 사두는 것)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어서 마루야마가 비판하는 것은 재군비 시비에 있어 “국민자신이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자신의 태도표명을 얼버무리는 세태다. 국민이 재군비 문제에 공평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선 통신·보도의 정보(source)가 치우치지 않아야 하고, 서로 다른 의견이 공정하게 소개되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이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법령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애초 일본의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그런 조건이 성립돼 있지 않기 때문에, 지식인, 정치인들은 ‘국민’의 판단을 연막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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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가 다음으로 지적하는 것은 정치인, 지식인들이 어제의 말과 행동을 오늘 손쉽게 바꾸는 풍경이다. 예컨대 전후 새 헌법의 정신을 찬양했다가 이제는 ‘냉전’ 문제 때문에 어쩔 수없이 재군비로 나아가야 한다는 동조 경향이 그렇다. 마루야마가 보기에 냉전은 1952년에 새로 등장한 현상도 아니었고, 1945년 2차 대전의 종료와 거의 동시에 불길이 타오른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마루야마는 위태로운 냉전 속에서 성립된 비무장국가와 새 헌법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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