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호]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 황수영 저자와의 인터뷰

인터뷰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3-12-29 17:55
조회
218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 황수영 저자와의 인터뷰



Q.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역사에 대한 지식은 지금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프랑스만이 아니라 어떤 문명의 어떤 철학사이건 그것을 박물관에 박제된 형태로 배운다면 누구에게든 동일한 의미가 되겠지요. 그런 것이 존재했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철학사의 생생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전달자와 전달받는 사람의 노력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그런 전제를 가지고 근현대 프랑스철학을 본다면 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철학사의 도식적 이해를 무력화할 겁니다. 근현대의 프랑스철학자들에게 철학이란 삶과의 투쟁에 가깝습니다. 그들에게 철학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지요. 그들이 토론과 논쟁을 하고 서신 교환하고 실험하는 학자적 활동만이 아니라 혁명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심지어 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가운데서도 사색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을 볼 때 철학은 곧 삶과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철학이 강단에 들어오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삶에 대한 치열한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가 철학의 본래 정신에 다가갈 수 있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습관’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철학사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습관은 철학적 개념이기보다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어이고 이 경우는 어떤 새로운 것도 없는 단순 반복을 의미합니다. 철학에서 습관을 사유하는 것은, 들뢰즈도 잘 지적한 바 있듯이 ‘반복’이라는 현상이 생성철학의 근본 동력이기 때문이지요. 한 마리의 종달새가 봄을 불러오지는 않듯이 현상은 반복될 때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현상은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동일한 반복이 각각의 사물에서, 생명체들에서, 개인들과 사회들에서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근현대의 프랑스철학이 습관에 주목한 것은 신체의 여러 운동들에서부터 정신의 고차적인 활동에 이르기까지 반복이 야기하는 독특한 효과가 생물학적, 심리학적 그리고 철학적 차원에서 인간성의 총체적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데 착안한 것입니다. 따라서 습관의 규칙과 그 작동기제, 그리고 그것이 인간 본성과 맺는 관계 등이 철학적 주제가 된 것입니다.


Q. 멘 드 비랑과 라베쏭은 프랑스철학사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는 사상가들인지요?

멘 드 비랑과 라베쏭은 디오게네스의 대범함이나 소크라테스적 현명함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평범하고 소심한 인물들이지요. 그들은 데까르뜨나 볼떼르처럼 시대를 적극적으로 선도하지도 못했고 칸트나 베르그손처럼 천재적인 이론이나 직관을 보여준 사람들도 아닙니다. 게다가 그들은 프랑스의 정치적 격변에 휘말려 유심론이 내포하는 보수주의자, 은둔자라는 이미지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한마디로 평하자면 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대혁명 이후 정치적 목적에 의해 유물론이 대세가 되었을 때, 즉 유물론이 초기의 혁명적인 성격을 잃고 이데올로기로 되었을 때 이에 저항하며 인간성의 심층을 관찰하고 나아가 물리 과정으로 환원되지 않는 생명의 독특함을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왕정복고 시기에 지배 이데올로기를 일신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독일의 관념론이 프랑스에 무분별하게 수입되고 국가철학으로 공고화되는 시점에서 현실적 이익을 희생당하면서 프랑스철학의 고유성과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일부 선구적 철학자들을 제외하고 상당수 철학자들은 의외로 현실에 잘 적응하며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그가 되기 십상입니다. 멘 드 비랑과 라베쏭이 대세에 양보하지 않고 용기 있게 유지 보존한 유심론 철학은 현대 프랑스철학에서 인간과 생명을 이해하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Q. 한국에서 철학과 대중의 관계는 어떻다고 보시는지요? 프랑스처럼 철학이 좀 더 대중적인 호응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과제들이 주어져 있다고 보시는지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철학은 아고라(광장)에서의 정치토론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개인적 관심에 의한 철학적 사색과 달리 대중의 철학적 관심은 네트웍의 힘으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의 구축이 중요합니다. 아테네의 경우 아고라가 그것이었다면 프랑스의 경우 18세기 계몽주의를 추동한 백과전서파는 카페를 그러한 공간으로 이용했습니다. 이 시기가 바로 프랑스에서 철학이 대중화된 시기와 맞물립니다. 자유와 평등을 향한 대중의 열망은 지적 욕구와 나란히 갑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터넷 공간의 활발한 이용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겠지요. 다만 아직도 치열한 진영투쟁으로 인해 이것이 지적 토론으로 승화되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인터넷공간 오피니언 리더들의 활약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프랑스에서 철학의 대중화는 대중의 지적 관심과 더불어 철학자들에 의한 철학의 대중화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


※ 편집자 주 : 이 인터뷰는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 보도자료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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