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발제문

작성자
bora
작성일
2023-04-04 22:37
조회
131
* 나는 해체를 끌어와 읽기에 봉사하도록 하려는 페미니스트 문학 비평가이다.

조사자의 자리를 의문시하는 것은 주권적 주체에 대한 최근의 수많은 비판들에서 무의미한 경건함으로 남아 있다. 나는 내 위치의 불안정성이 곳곳에 드러나도록 애쓰지만 이러한 제스처가 절대로 충분치 않음을 잘 알고 있다.​ *


1

오늘날 서구에서 나온 가장 급진적인 비판들 중 일부는 ‘서구 주체’ 혹은 ‘주체로서 서구를 보존하려는 이해관계’가 얽힌 욕망의 결과이다. 이때 주체는 자신이 “어떠한 지정학적 결정 요소”도 가지지 않는 척함으로써 지구적 자본주의와 국제 노동 분업이라는 현실을 무시하며, 그것이 순진한 만큼 해롭다.
이질성과 타자를 가장 훌륭하게 예언하는 지식인들이 이런 식의 주장을 펼치는 이유는 뭘까?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하는 주체와 주체-효과는 이론가라는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적 주체와 닮아있다. 이것은 노동이나 경영이 아니라 사회화된 자본의 법적 주체로서, ‘강력한’ 여권을 쥐고 있고 경화(hard currency. 구매력과 안정성이 뒷받침되는 현금, 화폐...)를 사용하며 아무 문제 없이 정당한 절차에 접근할 수 있는 주체이다.
푸코는 “권력은... 욕망의 수준에서 긍정적인 효과들을 생산한다. 지식의 수준에서도 그렇다”고 밝히며, 사회적 생산 관계들을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부인한다. 그럼으로써 피억압자들에게 주체의 가치를, “죄수들 스스로가 말할 수 있게 되는 조건들을 확립하기 위한” 대상 존재(object being)의 가치를 부여한다.

이러한 언명들에서 그들 비판의 함정을 알 수 있다. “현실이란 공장, 학교, 병영, 감옥, 경찰서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란 푸코의 말을 곱씹어보자. 지식인 눈에 인식되지 않는 그 외 피억압자들의 구체적 경험은 어떻게 처리될까? 지식인은 피억압자의 구체적 경험이 가치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에게 주어지는 구체적 경험의 가치와 책임은 돌아보지 않는 모순에 빠진다.
들뢰즈는 또 행동하고 투쟁하는 서발턴들이 항상 다양하고 이질적이라서 재현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이 입을 닫은 것도 아닌데, 말이 되나? 결국 좌파 지식인들은 자기를 알고 있는, 정치적으로 영리한 서발턴들만 안다. 그 서발턴들을 재현[대표]하면서 자신을 투명한 존재로 재현한다.

한 저서에서 맑스는 경제 영역과 정치 영역 모두에서, 서로 연속적이지도 일관되지도 않은 부분들을 지닌, 흩어져 있고 탈구된 ‘사회적’ 주체를 이야기한다. 예컨대 소자작농들. 이들의 계급의식은 가족보다 국민적, 정치적 의식에 기반한 공동체 감정으로서 인위적으로 형성된다. “그들의 생활양식을 분리시키는 경제적 실존의 조건”의 전유(대리보충)이자 논쟁의 여지가 많은 대체(replacement)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이 의식을, 이 이해관계를 직접 의회에서 타당하게 만들 능력이 없다. 가족 내 아버지처럼 그 작업을 대신해줄 권위자를 요청한다. 당시 나폴레옹이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법은 소자작농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 부패 등을 심문하지 못하게 한다. 이들은 믿었던 권위자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세계의 상연(re-present)으로서의 재현. 그것이 아버지의 대리자들, 권력의 행위자들, 즉 대표(speak for)로서의 재현을 선택하고 요구하는 과정은 왜 위장되는가? 푸코와 들뢰즈처럼 권력과 욕망 개념을 통해 개별 주체를 생각하는 대신 이 같은 재현의 이중 회합에 주목해야 한다.
지식인의 투명성에 꿰매어진 주체는 국제 노동 분업에서 착취자의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유럽의 ‘타자’라는 이름 없는 주체 속에 거주할 법한 권력과 욕망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지식인은,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경제와 그 속의 이데올로기적, 과학적 생산, 법이라는 제도가 ‘타자’를 ‘자아’의 그림자로 구성하는 데 공모할 수 있다.


2

이러한 인식론적 폭력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식민 주체를 타자로 구성하고자 저 멀리서 편성되고 널리 퍼진 이질적 기획이다. 이 기획은 또한 타자의 불안정한 주체-성 속에 있는 타자의 흔적을 비대칭적으로 말소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도에서 듣기, 기억, 셈, 수행으로 이루어져 있던 힌두법이 합법화(=영국적으로 코드화)되는 과정에 인식론적 폭력이 있었다. 학문으로서의 산스크리트 연구 역시 이러한 법률적 기획의 인식론적 폭력과 합치하면서(=봉건화) 실제 전통으로부터 멀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프랑스 지식인들은 더더욱, 서양에 맞게 코드화되지 않은 인도의 일반적인 비전문가들, 학계와 상관없는 인구를 인식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인도의 서발턴 연구 집단은 인도 내 토착 엘리트와 구분되는 인민 혹은 서발턴 계급을 알아본다. 농촌 젠트리의 최하층, 빈곤한 지주, 부농, 상위 중간 계급 농민의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런데 대체 어떤 분류법이 서발턴의 공간을 획정할 수 있는가? 이 불가능한 질문 앞에서, 연구자들은 엘리트와의 ‘차이’를 통해서만 서발턴을 정의하게 되는 곤경에 빠진다. 그리고 이들을 비판하는 서벵골 맑스주의자 역시 서발턴 정체성에 어떤 순수한 의식 형태가 있으리란 전제를 지우지 못한다.

피에르 마슈레는 작품에서 중요한 건 작품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에 따라 제국주의의 사회적 텍스트가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 거기에 밴 집단의 이데올로기적 거부를 읽어야 한다. 또한 서발턴의 침묵을 측정하는 작업은 환원 불가능하게 차이를 지니는 그것을 기술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서발턴 연구 집단이 파악한바 ‘서발턴 봉기 텍스트’들이 함축하는 ‘주체’는 그저 지배 집단에 속한 식민 주체에게 부여된 서사적 인가에 대한 대항 가능성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포스트식민 지식인들 역시 그들의 특권이 상실임을 배울 뿐이다. 나아가 서발턴 주체가 지워지는 여정 내부에서 성차의 궤적은 이중으로 지워진다.

우리 시대의 국제 노동 분업은 19세기 영토 제국주의의 분할된 장이 전위된 것이다. 이제 제3세계의 '발전'은 입법, 교육 체계 확립 등이 아니라 소위 탈식민화, 다국적 자본의 성장, 행정 책임의 경감을 통해 이루어진다. 제3세계에 소비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리잡지 못하면서, 그곳 서발턴은 저항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마련하지 못한다.
이런 과정에서 국제 노동 분업을 통한 착취의 주체는 피착취 주체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데, 특히 가부장제 사회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제3세계 도시 하부프롤레타리아 여성 착취의 텍스트는 더더욱 알지 못하게 된다. 국제 노동 분업의 회로 '바깥'에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 의식을 지닌 인민들. 즉 생존에 연연하는 농부들, 미조직 농업 노동자들, 부족민들, 거리나 시골을 배회하는 밑바닥 노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푸코와 들뢰즈는 이런 것들을 무시하면서 제3세계 쟁점을 건드리고, 이것은 오늘날 미국 인문과학에 나타나는 많은 제3세계주의의 초석을 이룬다.
푸코는 "대지와 그 산물들보다 신체와 신체가 하는 일에 더욱더 의존하는" 새로운 권력 메커니즘을 제대로 통찰하지만, 이 권력이 일단 식민지 자원과 산물을 착취한 결과 생겨난 것임을 간과한다. 20세기 중반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경제들의 침투에 대해서도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쇠락과 연결해서만 사유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탈영토화' 논의도 이와 같은 '무지'의 맥락에서 비판할 수 있다.


3

한편 데리다의 논의는 다른 제1세계 지식들보다 덜 위험하고 꽤 유용하다. 그는 ‘자신의 주체 위치를 공고히 하는 타자를 생산하려는’ 유럽적 주체의 경향을 짚어내고, 그것이 유럽 로고스중심주의와 그라마톨로지의 결탁(ex. 글쓰기의 역사적 과정에 작용하는 신학적 편견, 한자적 편견, 상형문자적 편견) 속에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는 얼토당토않은 대표[재현]를 요구하지 않고, “우리 안에 존재하는 타자의 목소리인 저 내면의 목소리를 환각으로 만드는” ‘전적인-타자’에 대한 “호소”와 “부름”을 환기시킨다. 그의 ‘해체’가 어떤 실천이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탈신비화 작업이 아니다.
확실히 타자의 진정성을 고민하기보다 타자 구성의 역학(뒤집어 말하면 식민 주체의 제국주의적 구성의 역학)을 뜯어보는 편이 더 유익하다. 우리는 ‘주체’가 역사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역사적 순간 속에 있는 제1세계 지식 주체의 과제가 ‘동화’를 통한 제3세계의 ‘인정’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것임을 안다.


4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서발턴의 지속적인 구성을 위해 엘리트가 경계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여성’ 문제는 이 맥락에서 가장 문제적인 지점이다.
모든 페미니즘적 기획 혹은 성차별주의 반대 기획이 서발턴 여성 문제로 환원될 수는 없다. 그러나 서발턴 연구라는 반제국주의적 기획 내부에도 서발턴 여성의 말 없음을 간과하는 태도가 있다는 사실은 반드시 비판받아야 한다.

과부(사티, 수티) 희생: 힌두 과부는 죽은 남편을 화장한 장작더미에 올라가서 자신을 불태운다. 이 제의는 보편적으로 수행된 것도, 특정 카스트나 계급에 한정된 것도 아니었다. 인도 토착주의는 그 “여자들이 죽고 싶어 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것은 식민 지배 영국인들에 의해 폐지되었는데, 백인종 여자들은 “백인종 남자가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준” 상황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포스트식민 여성 지식인은 어떨까? 이들이 여자들의 목소리-의식에 대한 증언과 결코 마주치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일반적인 종교 교리에서 자살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힌두 경전은 과부의 이러한 (비)자살을 인가한다. 이들에게 인가되지 않은 자살에 부여되는 ‘추락’의 효과가 없어지고, 심지어 스스로 선택한 행위라는 찬양의 꼬리표가 붙는다. 그리하여 여성 주체는 과부 행실의 일반적 규칙을 초과하는, 자기 욕망의 예외적인 기표로 이해된다.
과거 벵골에서 사티 관습이 만연했던 것은 과부가 재산을 상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이 과부를 없애버리고 재산을 차지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자비롭고 계몽된 남성들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위와 같은 해석에 경도되어, 성차화된 서발턴 주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생산했다. “근대 인도는 사티 관습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다만 인도 여자들의 용기에 존경하는 마음을 품는다.” 또 민족주의적으로 낭만화했다. “자기를 버린 애국적인 벵골 할머니들.”
인도의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사티 폐지에 관한 법령을 완성하기 전까지, 때로 사티를 말리기도 했으나 대체로 힌두법에 따른 사티 실천에 협력했다. 그리고 법령이 완성되었을 때, 그들은 야만적인 악습을 행하는 나쁜 힌두인을 강하게 반대했다. 사티는 살인, 영아 살해, 노인의 죽음 방치 등과 함께 범주화되었다. 이것의 폐지는 긍정적이었지만, 여기서 ‘여성으로 구성된, 성차화된 주체의 자유의지’가 이상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조작되어왔다는 사실이 사라진 것은 유감이었다. 비판조차 받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자유의지가 사티라는 자기-화살에서 찾아졌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여성은 한 남편의 대상으로만 정의되고, 여성에게만 인가된 자살은 그것이 성공한 순간 초개인적인 것과 동일시됨으로써 이데올로기의 일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잠시 인도의 전쟁 과부들이 승리한 무슬림에게 강간당하지 않으려고 저지른 자기-화살을 참조해보자. 이것은 힌두 공동체주의에서 영웅적 행위이자 애국 스토리로 규정되었다. 결국 여성의 육체를 장악한 불행, 성차화된 주체의 구성 그 자체는 은폐되었고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기원을 따져도 문제다. 남자들의 유산 상속 욕심이 과부의 자기-화살을 엄격하게 강제한 15세기 말, 한 법학자는 가장 오래된 힌두 경전에 나오는 구절들을 인용하여 ‘이상하게’ 해석함으로써 이러한 강제에 커다란 권위와 서사를 부여했다. 예컨대 생식기/거주지에 들어가는 잘 차려입은 아내들을 찬양하는 구절로부터 과부의 자기-화살이라는 선택을 옹호하는 식이다.
한편 다시 인도의 영국인 문제로 돌아와서. 과부를 가리키는 단어 ‘사티’는 사전적으로 ‘좋은 아내’를 뜻한다. (그것의 남성형인 ‘사트’가 젠더를 초월하여 인간적이고 영적인 보편성 속에서 ‘지고한’ 따위를 뜻하는 걸 보면, 힌두의 여성 차별은 정말 뿌리 깊다) 따라서 인도의 영국인들이 과부의 자기-화살을 강제하는 인도 힌두 남성들의 악행을 비난하면서, 그것을 여전히 사티, 수티라고 부를 때. 그들은 담론적 실천 속에서 좋은 아내 됨과 남편을 화장한 장작더미 위에서의 자기-화살을 완전히 겹쳐놓고 있다. 황인종 남자들에게서 황인종 여자들을 구하겠다면서 더 큰 이데올로기를 덮어씌우는 것이다.
오늘날 사티는 인도에서 여성의 고유명사로 상당히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런 ‘이름들’을 보통명사로 전환하고 번역하여 사회학적 증거로 이용하는 것보다 위험한 오락은 없다.

가부장제와 제국주의 사이에서, 주체-구성과 대상-형성 사이에서 여성의 형상은 폭력적인 왕복 운동 속으로, 전통과 근대화 사이에 사로잡힌 제3세계 여성의 전위된 형상화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위와 같은 고찰을 바탕으로 제국주의-속의-여성의 범례로서 수티의 사례는 (푸코가 말하는) 억압에 의한 침묵과 비실존과는 다른 무엇으로써, 주체와 대상 지위 사이의 폭력적인 아포리아로써 ‘사라짐’의 자리를 가리킬 것이다.

열일곱 살의 젊은 처녀 부바네스와리 바두리는 1926년 북캘커타에 있는 자기 아버지의 평범한 아파트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인도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에 개입한 한 단체의 구성원이었고, 정치적 요인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받았으며, 이 과업을 감당할 수 없었는데, 단체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 싶었기에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그런데 힌두 사회에서 좋은 아내가 되기를 고대하며 금욕 중이었던 그는, 불륜과 임신으로 인한 자살이 아님을 표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리할 때를 기다려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죽음을 여성 서발턴의 입장에서 읽어보면. 그는 여성 자살에 유일하게 인가된 동기를 넘어섰다. 그것을 일반화했다. 그리고 자신을 불태우려는 과부가 생리 중이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뒤집었다. 이런 독해는, 이런 청취는 (들어보니 말이 된다는 점에서) 가능함에도 (동화를 통한 타자의 전유가 만연한 현실 세계에서) 가능하지 않다.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

포스트식민 여성 지식인은 따라서 제한된 과제를 가지고 있다.


* 내가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고 단언했던 것은 이 시도의 정념이 여전히 여성들에게조차 공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새로운 주류라고 할, 더 많이 해방된 여성 세대가 이를 침묵시키는 경위를 꼬집고 반성해야 한다.

여기에 더 새로운 집단을 더한다면.
- 자유주의적인 다문화주의적 메트로폴리스 학계
- 포스트식민 이주민 연구자들
- 포스트식민 이주민으로서 지구적 금융화에 기여하는 사람들​

유의할 점.
- 누군가 숙고할 만한 서발턴 독해를 내놓았을 때, 그 해독이 성급하게 서발턴의 '말하기'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서발턴'이라는 단어는 탈식민화된 공간의 순전한 이질성을 위해 계속 남겨진다.
- 서발턴과 시민권, 제도 같은 것들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질 때 그 서발턴은 헤게모니로 편입되는 여정에 투입된다.
- 이 흔적-구조(드러냄 속의 지움)는 정치 활동가들의 도덕적 사랑과 비애를 통해 지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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