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호] 사건으로서의 생성을 통해 본 생명 | 조연화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5 12:32
조회
2183
사건으로서의 생성을 통해 본 생명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 서평


조연화(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 이 글은 2014년 11월 26일 문화연대 소식지 『문화빵』 51호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culturalaction.org/xe/1124221


17세기 근대 이래로 자연 현상을 필연적 법칙과 원리를 통해 기술하려는 자연과학은 진리를 발견하는 거의 유일한 학문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생명현상의 가변성, 근본적 불안정성은 17세기 근대 자연과학의 ‘맹점’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생명현상의 고유성이 법칙을 일탈하는 예측불가능한 오류로 정의되기도 한다. 따라서 생명현상은 자연과학, 즉 이 진리의 검증체계가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 의문을 던지게 했다. 우리는 종종 시스템의 장애를 통해서 기존 시스템을 점검할 필요성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18세기 말 생기론자들은 생명을 연구하는 고유한 방법론과 학문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17세기 근대의 자연과학은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로 환원하여 분석적으로 이해하며, 부분들을 통해 전체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과학적 방법론은 물리학과 화학의 연구방법이다. 하지만 물 70%, 지방 25%, 단백질과 탄수화물, 미네랄 등의 함량을 정확하게 측정하여 똑같은 함량으로 구성된 새로운 ‘나’는 지금의 ‘나’와 결코 같지 않을 것이라는 직관이 생긴다. 양적 동일성이 결코 동일한 질적 차이까지 구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요소의 동일성보다 요소들 간의 유기적 관계들 속에서 생명체의 고유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질문을 통해 생명체 운동의 메커니즘을 밝혀내도 정작 그 구성을 유지시키는 내재적 힘에 대한 궁금증이 남는다.

“공통적으로 물리화학적 원리에서 독립된 ‘생명원리’라는 것을 가정하고 그에 따라서 생리적 현상과 다양한 질병을 설명”(108)하는 것이 생기론자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라면 베르그손을 기존 물리화학에서 통용되는 과학적 합리성에 문제를 제기한 생기론자로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손은 생명에 나타나는 예측불가능성, 우발성과 창조에 초점을 맞추어 진화론과 생명을 설명한다. 책에 등장하는 캉길렘, 시몽동, 들뢰즈 역시 이와 같은 의미에서 생기론자이다. 또한 이들의 공통점은 자연과학에서 독점적으로 연구되던 ‘생명’의 문제를 철학의 영역에서 전유한 (과학)철학자라는 것이다.

책의 구성은 기존 베르그손 연구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독창적 ‘베르그손적 계보’의 구성을 따른다. 이 책은 크게 1부에서 진화론을 바라보는 과학적 입장과 베르그손 철학의 대결을 살펴보고 2부에서 생명체 수준의 문제에 주목한 캉길렘과의 비교, 3부에서 생성에 초점을 맞추어, 물질 수준의 개체화에 주목한 시몽동과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을 차이의 철학으로 발전시킨 들뢰즈를 통해 베르그손적 계보를 구성해낸다. 이 계보가 내게 다소 의아한 이유는 캉길렘은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의 후예로 통상 간주되기 때문이다. 바슐라르는 과학사에서 연속성을 부정하고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인식론적 단절’ 개념을 과학사의 핵심적 개념으로 보았다.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장애에 맞서 새롭게 이론이 구성된다는 ‘역사적 인식론’을 연구방법의 토대로 삼아 과학사 연구의 영역을 물리학과 화학에 한정시켰지만. 캉길렘은 ‘역사적 인식론’을 참조하여 이론보다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생물학과 의학을 토대로 과학사를 연구한 과학사가이다. 이 프랑스 과학철학의 ‘역사적 인식론’ 계보에는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등을 저술한 철학자 미셸 푸코 역시 포함된다. 푸코는 이들의 인식론적 연구방법을 계승하여 새롭게 ‘고고학’적 방법을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저자의 새로운 계보 구성은 베르그손을 중심점으로 설정한 그림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멘드비랑-라베송-베르그손으로 구성된 프랑스 유심론 철학의 계보를 뒤이은 이 계보에는 ‘생명’과 ‘생성’ 개념을 탐구한 베르그손의 후예를 구성하려는 철학적 계획이 엿보인다. 저자는 ‘생명’과 ‘생성’을 순환적으로 서로를 규정할 수 있는 개념으로 설정한다. “생명철학은 생성철학을 전제로 하며 생성철학은 생명현상, 특히 생명현상의 일부를 이루는 의식현상에 모범을 두고 있다.”(14) 캉길렘과 베르그손을 대비할 수 있는 이유는 베르그손이 진화 및 생명의 창조 등 거시적 관점에서 주로 생명을 다룬 반면에 캉길렘은 생명체가 개체 수준에서 겪는 현상들을 미시적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이다. 또한 베르그손이 물질 수준의 생명 현상이나 개체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데 반하여, 시몽동은 “물리학이 보여주는 물질의 생성과정을 연구하면서 개체화와 생명현상의 관계”(14)를 연구한다. 캉길렘과 시몽동은 베르그손이 주목하지 않았던 개체 수준의 생명체와 물질 수준의 개체화 문제에 주목하기 때문에, 이 책에서 베르그손의 생명 연구의 미완점을 보완하는 후예들로서 제시된다. 마지막으로 들뢰즈는 단순히 ‘생성’과 ‘생명’의 키워드를 연구했다기보다는 베르그손의 독창적 개념인 ‘지속’을 “‘자기 자신과 달라지는 운동’”(359)로 재해석하여 ‘생성’의 문제에 주목한 차이의 철학을 구성한다.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는 먼저 진화론을 중심으로 생명현상의 연속적인 창조 현상을 검토한다. 진화론은 개체군 내의 우연한 변이들의 축적과 유전이 자연선택과 적응에 의해 이루어지며, 따라서 점진적으로 새로운 개체군을 형성(24,28)하며 이것이 진화의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다. 현재 신다윈주의자들은 “유전자는 분자 수준의 안정성을 토대로 동일 개체를 재생산하며, 변이는 분자 차원의 우연한 돌연변이들에 의해 설명할 수 있고, 진화는 이러한 변이들의 집적이 자연선택에 의해 보존되거나 제거됨으로써 이루어진다”(50)고 말한다.

현재 생명체들의 공동 조상이 시간을 거치면서 그 후손들이 다양한 종적 특질들을 가지게 된다는 진화론의 두 가지 전제 중 하나는“생물다양성이 개체들 간의 미소한 차이들이 아니라 종 이상의 차원의 근본적 차이”이며 다른 하나는 “생물의 시간 속의 변화 역시 거시적 차원, 즉 종적 차원에서의 근본적 변화”(24)이다. 베르그손이 신다윈주의에 비판을 제기하는 이유는 우연변이와 적응만 강조해서는 진화의 적극적 원인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며, 변이의 원인이나 진화의 커다란 계통들을 설명하는 데(29)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우연적인 방식과 기계론을 오가는 이러한 애매함에 대한 이론적 난점에 대해 베르그손은 “생명체의 진화나 발생이 이미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실현하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새로운 것이 출현할 가능성은 전무하다.”(40)고 말한다. 기계론과 목적론 둘 다 원인과 목적이라는 힘에 의해 움직이며 진화의 시간성을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에 반해 베르그손은 생명의 본질을 창조로 보았으며, 저자는 “생명체의 행위는 행위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예견이 불가능하다는 의미”(32)에서 우발적이라 말한다. “생명체의 진화는 본질적으로 시간적 현상이기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33)하다.

진화의 커다란 계통을 설명하는 베르그손의 진화론의 핵심적 개념은 ‘분기(divergence,bifurcation)’이다. 이는 생물계통수는 단선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복수적이고 다층적인 혹은 계층적인 내포를 갖는다”(26)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생명의 운동을 고정적 실체가 아닌 연속적 흐름으로 간주했으며, 생명의 운동은 이러한 방식으로 새로운 형태들을 창조한다. 이 창조적 생명운동의 원인으로 가정되는 것은 ‘생명의 약동’이며, 약동 자체는 역사적이며 사건적 성격을 띈다(33~39). 생명의 약동을 통해 베르그손은 폭발에 의한 힘의 분산(분기)으로 여러 종들의 출현을 설명해낸다. 비록 그것은 예측불가능한 방식으로 진행하지만 원초적 힘에서 유래하는 우발적 사건의 축적은 시간 속에서 일정한 방향을 낳기도 한다. 이 방향, ‘경향’이 우리가 바라보는 커다란 종적 변화인 것이다(45). 따라서 베르그손은 “종은 생명이 물질적 힘 속에 구현한 ‘경향’들이며,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되는 흐름”(180)이라 말한다.

베르그손은 생명의 사건적 우연성을 강조하며, 사건으로서의 생성이 진화에서 일어나는 창조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만 책을 읽은 후에 생긴 의문점은 ‘개체 수준의 안정성(자기동일성)과 종 수준의 변화가 과연 어떻게 양립가능한가’이다. 이 양극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문제인데 베르그손은 종 수준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진화를 우연적인 생명의 약동을 통해서 가정하는 데서 생성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낯설다.

베르그손 진화론 설명의 한계는 1953년 DNA의 이중나선구조 발견 이전에 발표된 학설이라는 점이다. 유전물질의 실체를 발견한 것은 생명의 규범성의 토대를 물질 수준으로 확고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이것이 어떻게 끊임없는 종적 변화와 개체적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유전 프로그램의 실패가 종 수준의 변화라면, 그 실패의 원인은 단순한 분자 수준의 우연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인가? 캉길렘이 설명하듯이 적극적으로 생명의 생존환경을 최적화시키려는 개체의 노력은 DNA에 기재된 유전 프로그램에 없기 때문에, 과연 종 수준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DNA에 반영되지 못하는 그저 우연적 요소일 뿐인가?

단순히 생명의 생성적 측면을 살펴보면 우연한 움직임, 창조적 운동이 나타난다는 베르그손과는 달리 캉길렘은 개체 수준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환경에 대해 내재적 규범을 새로이 설정해 자신의 생존을 최적화시키는 노력이 존재한다고 본다. 캉길렘은 이를 ‘규범성’이라 칭하며 생명의 본질적 특성으로 간주한다. 신다윈주의와 베르그손이 공통으로 말하는 진화의 우연성과는 달리 생명체의 변화는 생명체가 적극적인 규범설정을 통해 이뤄낸 것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려는 생명체 수준의 행동에 이미 가치평가가 개입된다는 것을 저자는 캉길렘의 독창적 발견이라 강조한다. 쾌락을 주는 것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고, 고통을 주는 것에 부정적 가치를 부여하는 활동을 통해 생명체는 선호와 배제의 기제를 작동한다. 유기체는 이러한 가치부여 활동에서 생겨난 규범을 설정하는 존재다.

규범은 정상과 병리를 가르는 문제인데, 정상을 향한 규범설정의 실패가 병리적인 것이 아니다. 규범성의 문제는 “개체의 체험에 기반하며 생명체의 일인칭적 주관성과 관련한 문제”(148)이다. 개체는 늘 규범을 세우지만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규범설정을 통해 병리적인 질적 체험을 하는 경우에만 병리적이라 말할 수 있다. 진화론에서 나타나는 생명의 고유성에 초점을 맞춘 1,2부의 내용은 단순히 철학적 담론에 관심 있는 이들 뿐만이 아니라 영미 생명윤리와 낯선 논의방식 때문에도 의학계, 과학계에서도 새롭게 논의 주제로 삼을 법하다.

저자가 말한 바대로 “서양어에서 삶과 생명은 같은 말(영어 ‘life’, 불어 ‘vie’, 독어 ‘Leben’)로 표현된다.”(127)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때, 서양의 사유방식으로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동시에 떠올릴 것이다. 우리가 삶에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위협, 질병 등의 부정적 요소에 의해 침탈당하는 삶의 불안정성 때문이다. 생명 역시 이런 부정적 요소에 의해 변질되거나 언제라도 죽을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지만 생명은 이러한 위기를 이겨낼 자기치유능력이 전제된 존재다. 이 자가치유능력은 기계와 생명체를 구분하는 고유한 특성이다. 기계는 고장난 자신의 몸을 스스로 고치지 못한다.

베르그손 철학을 중심으로 모인 여러 서양철학자들의 사유는 이런 생명체의 자기치유능력을 비롯한 창조, 생명의 능동적 역량, 그래서 위기를 이겨내는 역량인 ‘힐링’의 능력이 우리에게 내재함을 보여준다. 만약에 다시 이 자기치유능력의 근원 혹은 원인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이 책을 보다 우리 현실의 문제와 가깝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힐링’을 목적으로 책을 넘기기에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책이 다소 낯설고 전문적이다. 하지만 생명철학의 문제를 촘촘하게 엮어낸 저자의 ‘창조적’ 건축물로서 책의 면모를 꼼꼼하게 파악한다면, 어떠한 흥미로운 답변들이 나오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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