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4장 - '어느 자유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 발제문

작성자
812pna
작성일
2023-09-22 12:14
조회
261
제 4장 어느 자유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


1.
어느 자유주의자 K로부터 온 편지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과 학문적 입장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이 담겨 있었다. 당시 마루야마 마사오는 모종의 이유로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지 않는 것을스스로 원칙 삼았지만, 일본 내외정세의 추이나 각종 매체의 논조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K에게 보내는 답신은 당면한 일본 정치에 대한 견해와 그간의 소회를 털어놓는 계기가 되었다.


2.
K는 마루야마 마사오처럼 학문적 입장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며, 오히려 ‘개인주의자’에 가까운 자유주의자들이 ‘전체주의인 공산주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음’을 비판했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파악한 K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점점 격화되는 정치적·사상적 대립 속에서, 자유주의자 지식인은 추상적으로 사상이나 학문의 자유를 외쳐봐야 무용하며, (좌우를 막론하고)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폭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
2) 자유주의자는 파쇼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좌의 전체주의인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분명한 선을 긋고 자신의 주체적인 입장을 견지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이러한 논지는 당시 언론이 마루야마 마사오와 비슷한 입장의 지식인들에게 가해진 상황과 일면 비슷한 맥락이 있다.

“조금 전까지 자유주의나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의 온상이며 다같은 한통속이라고 외쳐대고 있던 그 당사자들이 검찰관과 같은 태도로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을 꾸짖고는, 그들에 대해 공산주의라는 ‘후미에’(踏絵)를 한 번 밟아보라고 하고 있어. 반공의 기치를 높이 들지 않는 자유주의자는 모두 정체불명의 기회주의자이거나 아니면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는 악질 공산주의자처럼 취급당하고 있지. 마치 기성 정치인이나 저널리즘은 일찍이 한 번도 기회주의적이지 않았던 것처럼 말야! 마치 반공의 기치를 내걸기만 하면 그것이 곧 민주주의자라는 증거인 것처럼 말야! (만약 그렇다면 히틀러, 무솔리니, 프랑코, 토오죠오 내지 아류들은 최대의 민주주의자겠지.)” p.178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자유의 신장과 평화의 확보를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 가능한 광범하고견고한 연대의식을 다지려는 전제 속에서, 지식인은 좋건 싫건 간에 각각 근본적인 사상적 입장을 분명하게 하기를 강요받는 상황이었다.

마루야마는 무당파적 지식인도 주체성을 잃지않기 위해서는 근본태도의 결정과 그에 기초한 전략·전술이 필요하며, 그래야 지식인으로서 자유로운 비판적 정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3.
마루야마 마사오는 추상적인 이데올로기가 일본인들의 ‘삶의 양식’이 되지 못하고 무매개적으로 병존하는데 머물러 있음에도, 인텔리 내지 의사인텔리들은 그러한 도식에만 집중한 나머지 배선구조를 보려고 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현실분석의 어려움과 개념적인 이데올로기 도식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했다. 예컨대 ‘자유토론’와 ‘폭력·권력적 강제에 의한 결정’은 서로 완전히 대비되는 개념 같지만, 일본 내 현실의 복잡성(권력, 위협, 뇌물 등)이 더해지면 ’순수한 설득에 의한 결정’이라는 자유토론의 본질을 잃어버려 그 경계가 모호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마루야마 마사오는 니부어(R.Nibeyhr)를 인용하여 ‘도덕주의자 은폐된 강제력이 노골적인 강제력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결국 사회 현상유지에 이바지하게 되는’ 현상을 설명하는데, 앞서 기술했듯 일본사회는 의식과 무의식의 갭이 크다는 점과 전근대적 인간관계 속에서 ‘니리미’의 실질적 폭력성이 은폐되고 공포로부터의 복종이 ‘근대적인 동의’인 것처럼 꾸며질 수 있다는 점에서 니부어의 논지는 일본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했다.

말하자면 현저한 독재형 지도자(노골적인 강제력)보다 보스형 지도자(은폐된 강제력)를 더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스는 공공연하게 파괴하지 않지만 안에서부터 조용히 부식시키며, 이렇게 시간적으로 연장되는 억압은 직접적인 억압과 달리 하위자의 급격한 반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일본의 보스적인 지배는 인민의 자유로운 비판력의 성장을 강인하게 저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부식성이 간과되기 쉬우며, 또 권력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통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여관 여종업원들(피지배층)이 일상적으로 공공연하게 자기 주장을 억압당하다 폭발하려고 하면, 여관주인이나 마담(지배층)은 갑자기 태도를 부드럽게 바꾸어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돌리는 식이다. 그러면 기묘하게도 모두 가슴 속에 차오른 울분이 가라앉아 혹독한 일상이 반복된다.


4.
마루야마는 일본은 공산당선언에 나오는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와는 다소 거리가 있음을 지적하며, 민주화를 억누르고 전통적인 배선구조를 고정화시키고 있는 힘이 아주 강력한 이유를 설명했다.
예컨대 일본의 가족주의에 기초한 ‘화’와 ‘은의 정신은 크게는 국가로부터 작게는 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집단에 아로 새겨져 있으며 그 성격상 태생적으로 지배층은 분쟁의 원인이 될 수 없고, 분쟁은 언제나 복종자가 사악한 분자에 선동당한 결과로 존재하게 되며 ‘노숙한 어버이의 마음으로 대중을 서서히 길러서, 그 성장을 기다려서 점차로 권리를 부여해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귀결되는 것이다.
마루야마는 일본의 민주주의는 아직 도래한 현실이 아니며 ‘서구 시민적 민주주의’로 발전·신장 시켜’야 할 단계로 보았다. 이를 통해 ‘영국·미국식 민주주의 vs. 소련식 공산주의’라는 도식으로 일본을 이해하려는 시도의 무용성을 지적하며 도식화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해결방안을 찾기를 촉구했다. 역사적, 구체적인 상황에서 근대화를 추진해나가는 힘을 모든 계급, 모든 세력, 모든 사회집단 속의 어디서 상대적으로 가장 많이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현실감각으로 인식하고, 그 힘을 약화시키려는 힘에 반대하며, 강화시키려는 힘에 찬성해야한다는 것이 마루야마가 앞서 말한 ‘전략전술’이며 근본적 사고방식이다.

5.

마루야마는 스스로 ‘적어도 정치적 판단의 세계에서는 고도의 실용주의자’, 즉 정치적 실용주의자가 되기를 원했다. 이는 ‘내재적, 선천적 절대진리를 용인할 수 없으며, 그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에의 구체적인 역할에 의해 시비를 판단’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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