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호] 아방가르도 삶 주체ㅣ심우기(시인, 경원대 출강)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2 12:19
조회
1289
아방가르도 삶 주체
- 이성혁의 미래의 시를 향하여

심우기(시인, 경원대 출강)


시란 무엇일까?

이성혁의 평론집 『미래의 시를 향하여』 부제 노동시와 아방가르도는 많은 것을 던지고 제시한다.

라울 바네겜의 『일상 생활의 혁명』에서 시란 " 새로운 현실을 낳는행위" 이자 "관점 전복의 행위"라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소위 노동자의 파업도 새로운 현실을 낳는 것으로서 역시 시적인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시적인 것과 노동 이라는 것을 결부시키며 시적인 것과 살아 있는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이 소위 리얼리즘의 시들이 쓰고 발표하는 것이 시단에서 이것이 시냐는 논란에 대한 일정 부분의 답으로 제시되겠다.

작금의 문단에서 일부 시도하고 있는 아방가르도나 전위 , 디지털시 탈관념시, 하이퍼시,해체시 등의 문제점은 새롭다는 것에 천착하여 표현과 기표의 낯선 것, 새로운 것의 추구라는 것에 몰입하여 그것이 전부다 라고 할 정도로 인식이 들어 있다. 기존의 서정시나 관념시를 극복하고 대안으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이 형식과 틀의 새로움, 기표나 기의의 새롭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그것은 무엇을 위한 새로움인가. 현 자본주의하에서의 가치란 새로운 것의 창출을 통한 가치를 화폐화 하고 그 잉여를 가지고 부를 축적하거나 재분배 하며 빈부격차나 계급과 계층이 분화된다. 아방가르도의 새롭다는 것이 일상의 제도나 틀을 벗어나 도전과 해방의 범주에서 신자유주의 경제하에서는 새로운 이윤 창출과 가치 창조로 왜곡되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단지 새롭다는 것만으로 새로운 유파를 형성하거나 시장을 만든다는 것으로는 별 신선함이 없는 것이다. 또한 그것도 불통이나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과 시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는 정서의 고양이나 시를 창작하는자나 읽는 독자에게 어떤 잠재성의 발로를 주기에는 단절과 벽을 주게 된다. 또한 공연시나 의미의 전복을 통한 사물시 등등 다양한 시도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삶과 시, 문학과 삶 , 문학과 정치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이를 이성혁은 시와 정치, 삶 권력과 노동시, 노동시의 미래등을 통하여 이야기하고 있다.사실 기존의 아방가르도의 실험이 소통과 이해의 벽에 부딪쳐 저항을 불러오거나 거부나 문단에서 소외의 길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아방가르도의 문학 예술적 고찰을 살펴 봤을 때 유럽이나 프랑스의 아방가르도 운동이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전기 아방기르도 운동이 삶과 현실과 일체화되어 당대의 예술의 방향에 경종을 울리고 새로운 관점을 준것은 시사하는바가 크다고 본다. 따라서 아방가르도는 삶권력과 실제적 현실의 현장성, 현재의 예술의 기제를 넘어선 전이와 탈주의 한 형태로 삶의 주체로 서고 다양한 다중의 잠재성의 발로가 특이성의 형태로 내재화된 것이 발현되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흐름의 힘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즉, 삶에서 활발한 정동과 활력을 갖게 하는 요소로서의 아방가르도를 말하는 것이다 . 잠재성의 실현으로서 특이성을 갖는 시와 아방가르도를 말한다.

이는 기존의 단순히 일탈과 탈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전이를 통한 의미의 확장, 실제적 삶속에서 충동, 격돌을 야기할 때 아방가르도의 올바른 위치가 아닐까 싶다. 네그리의 '제헌적인 힘'이라는 개념은 행동주의 예술과 문학, 시를 이야기하고 있다.장르의 틀을 넘어 삶 예술 문학의 분리가 아방가르도적으로 철폐되면서 예술 아닌 예술이 고유한 힘을 통해 실제적 삶에서 실천되고 권력을 전복해 나가는 것이 미래릐 시의 한 방향이 아닌가 제시한다.

노동시와 아방가르드, 미래의 시를 향하여의 이성혁의 평론집은 이에 대한 분석의 틀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모쪼록 시단에 더 넓은 논의와 긍정적인 화두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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